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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유재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말>지에 실린 몇개의 글을 통해서였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바라보게 해 준 글들이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어쩌면 알튀세르가 소련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쓴 소설가 방현석은, 죄송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미달한다.)
유재현은 그런 방식으로 쿠바를 보고, 보여준다. 많은 사진과 알맞은 분량의 많지 않은 글을 담은 이 책은 우리의 이상인 사회주의와, 쿠바를 사고하게 한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쿠바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이루어지던 교역의 중단, 미국의 야만적인 경제봉쇄로 크게 고통받는 과정에서 사회 자체를 재조직했다.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에 쓴 이 책에 대한 독서일기.)
유재현은 묻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위기를 '관리'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는 관념, 오히려 생태위기의 '관리'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한다. 쿠바가 보여주는 것은(물론 모순들로 가득찬 속에서 털털거리면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낸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가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박하고 느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주로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유재현의 이 책은 그것과 함께 얽힌 쿠바 사회 전반을 보여준다. 도시농업이든 생태-사회주의이든 사회 전체의 역사와 현실, 하나하나의 사람살이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유재현의 눈은 또 다른 사회주의의 로망으로만 쿠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생태-사회주의적인 농업생산만이 아니라 미국의 관광객들이고, 그들이 사용한 달러('컨버터블 페소'로 환전되어 국영 달러상점에서 사용되는)이다. 이들의 달러를 쿠바 국영 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구한 쿠바 사람들은 국영 달러상점에서 자본주의 상품을 찾는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쿠바가 만난 정세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쿠바는 그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만 최근에는 볼리바르-베네수엘라와 맺은 무역협정을 통해 석유와 의료인력을 교환하고 있고 FTAA(미주자유무역지대, 스페인어로는 ALCA라는군)에 대항해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을 주창하고 있으니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생일케이크를 배급받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달라는 모양으로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 하지만 누구도 굳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생일을 알지 않는다. 밭을 갈던 늙은 농부와 아낙은 저녁 도시의 음악 회관 앞에서 열린 춤판에 나타나 멋진 살사춤을 춘다. 시골 마을에 눈망울 맑은 총각이 꽃을 파는 꽃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 날에는 사랑을,
짝수 날에는 우정을."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 더 잘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부디! 그래서 나도 유재현처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사진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쿠바의 한 벽화.
교살된 모든 혁명에게,
박물관에 모셔진 모든 혁명들에게,
혁명이란 영구한 것임을
적의 이름으로, 발전의 이름으로,
탐욕의 이름으로 부정해버린 자들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진리 한점,
'모든 거리에 혁명을! En Cada Barrio Revolucion! '
덧붙여 ;
한편, 쿠바의 농업은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대단위 국영농장을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국영대농장의 상당수는 기초단위생산자조합UBPC으로 전환되었다. 국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은 이들 조합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국영기업의 수매분 외에는 농민시장을 통해서 처분하기도 한다. 중국의 인민공사와 유사한 형태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진행중인 실험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상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앞당기는 것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유재현은 이후에 쿠바에 더 다녀오고, 최근에 한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지은이) | 강 | 2006년 11월
주문만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쿠바의 희망과 모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세계의 희망과 모순, 무엇보다 우리들의 그것일테니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노동대학원 석사논문
김창우 씀
△ 사진은 전노협 해산대회, 전노협 깃발을 안은 양규헌 위원장.(노동자뉴스제작단)
우리가 발견한 것은 전노협이라는 노동자계급의 강렬한 빛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인간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사회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 전노협 백서 중
왜 '전노협 청산'이 문제인가?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우리 노동운동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놓아버린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전노협의 역사적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 청산하고 갔다"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전노협이 해산되는 과정--이것은 곧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이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자한다.
이를 통해서 전노협 백서에서 비어있는 공백, 어쩌면 차마 말하지 못한 역사의 고리들을 채워넣는다. 이 공백은, 왜 '전노협 정신 계승'을 말하는 민주노총이 전노협 정신을 '청산'하였는지, 전노협이라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표상은 급작스럽게 사라졌는지 알기 위해서 찾아야할 진실들이다.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95년초에 군대에 입대했던 나는 제대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전노협이 아니라 민주노총 시대를 맞았던 것인데, 그 변화된 이미지란 당혹스러울 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이러한 탐색을 진행하는 것은 사라진 고리를 찾아서 메우려는 지적 흥미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의 운동 전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이라는 전노협의 정신이 여전히 운동의 쟁점이고 문제라면, 그것을 청산하는 과정은 하나의 노선투쟁이고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 지도 모른다. 간단한 예를 인용해보자.
..강령이나 운동노선 등의 면에서도 전노협 정신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노동해방'과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으로 표현되는 전노협 정신은 민주노총 강령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는 '노동해방'이라는 표현이 한 구절도 없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운동노선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한 전체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내적 개혁으로서의 사회개혁투쟁노선으로 대체되었다. - 본문171쪽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이미 중간노조까지 포괄하여 규모를 키워야 힘을 가질 수 있다는면서 전노협처럼 투쟁적인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전노협 정신이란 청산대상일 수밖에.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었다는 것도 전노협 운동의 의미가 계승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건설되고 공동투쟁의 성과를 받아안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을 보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노협 안에서도 지노협 혹은 대의원대회까지 대중적 논의는 배제되고 중앙위와 전노대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시급한 건설을 주장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97년 대선대응이었다고 하니, 할말 다한 셈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전노협 자신의 대응도 매우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전노협 내에 전노협 한계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전노협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짜고자했다. 이들은 전노협 외--업종회의나 대공장연대회의--의 같은 흐름과 함께 민주노총을 주도한다. 이들이 바로 지금은 열우당에 가있는 김영대를 비롯해 이목희, 배석범 같은 자들이다. 문제는 전노협 강화론자같은 경우에도 94년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금속산업 재편 문제에 몰두하고 전노협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전노협은 결국 이렇게 좌우합작으로 청산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노협과 함께 지노협도 완전히 청산되고 민주노총의 말단 행정기구 혹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임의기구(지구협)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대의기구에 대표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영대가 지역본부에 대의원을 배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연대 투쟁의 의미는 완전히 주변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한편, 당시 이를 주도했던 한노사연 등 우파와 금속산업 재편에만 몰두하던 좌파/중앙파가 최근에는 지역운동의 중요성 주목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특히 한노사연이 말하는 지역운동은 결국 사회적 합의제도를 지역적 수준으로까지 보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문의 첫 페이지를 펴고 끝까지 놓지 못한 이유는 이런 역사 자체가 흥미로왔기 보다는, 이 역사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페이지씩 읽어가면서 마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것같은 기시감.
민주노총은 조합원은 물론 간부들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진행하지 않은 가운데 상층에서 정한 일정대로 추진되었다. 민주노총 준비위는 조직체계도 인선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선포부터 하고 출발했던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공공)산별노조 건설이나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어떤가? 두 경우 모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출범 일정만 잡혀있는 상태이다. 그것도 상층의 주요 정파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을 결정하고 대의원대회에서 추인하는 식이었다.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미 더 이상 토론이 불가능하도록 논의는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하는 대의원에 대해서 다른 대의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은 더 문제이다. 조직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결의를 통해 이를 하급 조직에 강제하는 방식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지역에서부터 연대투쟁을 통해 지노협을 건설하고 이를 모은 전국적 연대투쟁(89년)을 통해서 전노협을 건설한 것과는 완전히 전도된 방식이다. 상층의 결의보다 현장 조합원의 참여와 결의가 중요하다고 하면 다른 경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과 같은 방식을 통해 지역으로부터 그것을 만들어보려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정된 활동가의 헌신만으로 가지는 한계, 그것을 하나의 운동을 확산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 보다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던 한계에 대해서는 이제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니, 반성할 수밖에.)
이러한 점은 산별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입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쟁점이 된다. 예를 들어 '산별노조의 강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중앙 조직의 통제력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혹은 지역과 현장의 활성화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의 강화를 의미하는가? 이러한 쟁점은 산별노조를 어떠한 경로로 건설할 것인가, 산별노조의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지금 현실에서 이러한 쟁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조차 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미 건설의 첫단추가 잘 못 꿰어졌다는 점에서 현장과 지역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점점 더 비관적이다. 다만 얼마나 그 '여지-틈'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을 뿐인 것같다.)
물론 전노협의 청산-- 그리고 민주노총의 건설을 다루는 이 논문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해줄 수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민주노총 조직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는 자기파괴적인 내부 투쟁과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막힌-절망적인 무관심에까지 직면하고 있다. 점점 더 회의적으로 되어 가는 2006년 하반기 총파업은 사회적 대화(합의)노선이나 총파업 노선이나 모두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그렇다면 민주노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노협이 스스로 역사로 증명한 투쟁과 청산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야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과제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을 아직 사고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운동조건을 넘어서야하는 과제까지.
그러나 그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일의 첫순서라고 할만하다.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어떤 답도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빛나던 상징이자 조직인 전노협의 역사를 배제-청산한 가운데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역사 속에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문'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뛰고 코끗이 찡해지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괴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과연, 그것이 빛나게 푸르른 현실-역사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푸르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논문의 마지막 절,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설명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 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핑퐁
박민규 지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깔깔 웃으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박민규의 이번 책은 읽는 내내 깔깔 웃게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좀 더 대담하고, 황당무개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짜임새있게 느껴진다.
왕따에 얻어맞고 다니는 중학생 두 주인공인 모아이와 못(이건 둘다 '별명'이지만, 사실 '본명'이라는 것이 더 의미없는 상황에서 그런 구별은 이상하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럼 점에서 박민규는 대담하다.
둘이 던지는 질문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폭력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서,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없는지, 왕따가 될까봐 남을 '선제공격'한 적은 없는지, 그러면서도 그 남들이 무서워진 적은 없는지, 그리고(혹은 게다가) 그런 고통을 박민규처럼 '가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확실히 박민규는 모든 문제의 가상적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소설에서 현실화시킨다.(어차피 소설이 가상인 바에야 자기 소설에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세계를 그냥 간단하게 <언인스톨>시키는 것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서 엔딩이 참 황당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문제를 전개시켜나가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감독은 두 명의 주인공을 절벽 위로 날려버린다. 이번 경우에는 두 명의 주인공 대신 세계를 날려버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더 대담하긴 하지.
(나중에 찾아본 신문의 한 작품평에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한겨레]'인류운명'걸고 탁구 한판?)
그렇지만 소설 전체에는 상상력이 넘친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가 만들어낸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더 흥미롭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한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들은 60~70년대 미국의 SF 작가의 단편을 닮았다. 세상이 주인공을 <깜빡>한다는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라는 이야기는 마치 필립.k.딕의 단편 <작은 도시>을 연상하게 한다. 하긴 존 메이슨이라는 이름도 리처드 매드슨을 또 올리게 하지 않는가. (리처드 매드슨은 좀비 영화들의 원형이라고 할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작품을 써낸 작가.)
여튼, 결론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 메이슨을 통해 들려주는 세상이 우리는 <깜빡>한다는 아이디어가 더 맘에 들기는 하지만, 과로사로 마감하는 핑퐁 게임 끝에 세상을 <언인스톨>한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다. 이따위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깨끗하게 <언인스톨>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안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려운 사람들이 '전쟁이라도 나서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인도적이잖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이런 해결방법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적 해결책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가상적 해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인스톨>.
대중과 과학기술
김명진 엮고지음 / 잉걸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황우석 교수 사태에 대한 논란 속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이미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기하고 있다. 대중의 과학기술 수용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 쟁점을 중심으로 과학기술논쟁의 전개, 대중매체와 과학기술, 생명공학의 문제점 등을 살펴보고 있다. 이번 황우석 논란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 현상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질문한다면 이 책의 여러 문제의식이 유용할 것이다.
우선 과학기술이 대중과 맺는 관계가 문제다. 과학기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급격하게 생산력과 결합했다. 물론 이전에도 기술과 결합하기도 했고, 사회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면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함께 대중의 삶에 과학기술이 미치는 영향도 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소외는 구조화되어 갔는데 지식의 독점이 심화되어갔기 때문이다. 생산현장에는 테일러주의의 도입과 함께 노동자들의 암묵적 지식도 박탈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그 정책이 대중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당연히 대중들 사이에 토론되고 이를 통해 결정되어야한다. 이런 지점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철회되기 시작한 60~70년대부터 제기되어왔다.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성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무한한 확장, 영원한 번영이라는 관념이 70년대의 불황으로 인해서 약화된 데도 원인이 있다.
그래서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가 쟁점이다. 대중이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 알아야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논지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사회적 쟁점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논지까지 여러 입장에서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된다. 문제는 이러한 논지에 따르면 대중은 필연적으로 과학자들에 비해서는 과학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과학자들에게 주도권이 주어져야한다는 입장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과학자들의 지적위계에 따른 권력을 강화할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과학기술 논쟁에서 비전문가인 대중들도 논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논쟁의 쟁점과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며 이에 기반해서 입장을 정리한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특히 대중적 쟁점이 되는 과학기술의 쟁점에서 이러한 대중의 입장과 자기 이해는 매우 중요할수밖에 없다. 핵폐기장 문제와 관련해서 첨예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대중적인 투쟁을 불러왔던 부안 핵폐기장 논쟁이 비근한 사례가 될 것이다. 대중들은 과학자들이 간과하는 사회적, 정치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때문에 순전히 '과학적' 판단을 하는 것보다 올바른 정책적 판단이 가능하다. (저자는 국내 사례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진행한 98, 99년의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에 대한 '합의회의'를 들고 있다. [유전자조작식품합의회의 자료/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예를 들어, 선천적 질환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유전자 검사는 어떨까? 과학자들이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선호할 수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기업에 의해서 노동자 채용에 적용될 때 드러나지 않고 발현될 지 확실치도 않은 유전적 특성 때문에 부당한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을 둘러싼 논쟁이 단지 과학적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제기된 논쟁만 해도 학교에서 지문인식기 사용, 전자주민카드, NEIS 등이 있고, 근골격계질환, 노동탄압으로 인한 정신질환 등 산업재해를 둘러싼 투쟁도 이러한 논쟁이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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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쟁점들에 노출된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해서 양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영화 등 대중문화를 통해서 유포되는 '미친 과학자' 이미지에 친숙하면서도 과학기술이 가져다줄 '장미빛 미래'를 지지한다. 나는 올해 개봉된 영화 '아일랜드'를 보면서 그 영화의 악역인 탐욕스런 경영자-과학자가 당시 열광을 불러오던 황우석과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숀빈이 연기한 '메릭 박사'는 인간복제로 돈을 버는 기업의 경영자이자 스스로 과학자인 인물이다. 생명과학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데 몰두할 뿐 아니라 --최근의 상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과학자이면서 비즈니스맨이고 거짓말장이라는 데 동일하다. 대중들은 영화 '아일랜드'에 호응하면서도 동시에 황우석에도 열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입장의 정합성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 과학기술에 대해서 가지는 양면적인 무의식을 드러내는 사례다.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 과학자의 지식 권력에 대한 공포와 함께 그것의 장미빛 진보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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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논쟁은 대중에게 개방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민주적 통제가 증진되어야한다. 과학기술이라는 것인 사회적인 맥락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과학 외적 개입은 필수적이다.(이러한 과학 외적 개입에는 저널리즘의 개입도 포함되는데, 저자는 한개의 장을 할해하여 논의를 소개한다. PD수첩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이 첨예한만큼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결국 과학 저널리즘의 목적이란 과학연구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갖춘 시민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판적 과학저널리즘은 과학활동이 내포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함의들, 의사결정을 뒷바침하는 증거의 성격 그리고 인간사에 적용되었을 때 과학이 보여주는 힘뿐만 아니라 그 한계까지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할 것이다.(166쪽)" PD수첩, 프레시안, 한겨레 등을 제외한 언론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보수적인 과학자들의 주장처럼 특수한 연구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도 사실은 과학 스스로의 내적 발전경로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미 자본이 이윤 추구에 직접적으로 종속된 과학 연구방향에 대해서 다른 대안을 제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생명공학 연구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료분야들이 있다. 황우석 지원 예산이면 당장 혈액질환자 고통 던다 /박주영 (민중의료연합))
그러나 이 과정이 제대로 된 대중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처럼 대중이 맹목적인 애국주의적 열광은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제대로된 토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과학기술 통제만을 이야기할 경우, 여기에는 대중의 합리적 토론을 만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한 문제가 간과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대중의 과학기술에 대한 권리는 자칫하면 이데올로기적 동원에 무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쟁점을 넘어서는 대중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더 사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중요한 문제 몇개를 제기한다.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에는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쟁점이 포함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지식이 과학지식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으며, 특히 환경, 보건과 같은 분야에서 그렇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고도로 생산력에 통합된 과학기술 생산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생산하고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지적 차이를 감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과학자 사회의 민주화'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요즘같은 상황에서 이 중요성은 더 부각된다. 저자가 두드러진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 여성과학자에 대한 진입장벽과 처우상의 차별 철폐 △ 불리한 조건에 처한 집단(장애인, 저소득층 등)이 과학기술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보장 △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 등 청년,소장과학자들의 발언권 보장 △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 등이다. 이 중 몇가지는 특히 이번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중요성이 더 부각된 쟁점들이다. 과학자 사회도 '과학'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당연하게도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과학적 진실이 억압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서 드러났다. (하긴 과학자 사회라고 다른 집단들과 다를 이유도 딱히 없는 것이다. 단지 '과학적'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환상이 있을 뿐이다. 하긴,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가지는 '객관성, 가치중립성, 엄정함,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실험' 등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말 뉴튼 과학의 성공으로부터 형성된 과학 이미지일 뿐이다. 이는 미신과 무지, 독단에 빠진 당시 사회를 과학적 성공의 모델에 따라 개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혹은 '오해'하였던)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이 오늘날에 남긴 하나의 규범적 허구에 불과"하다.(본문17쪽))
이번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많은 쟁점들이 평가되고 토론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지식에 대한 대중의 권리, 그리고 그것이 보장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대중이 '과학'을 '종교'로 수용하는 현실은 지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권리를 박탈되어온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둘러싼 쟁점이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쟁점이라는 것,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확인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쟁점들은 더 극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꾸준히, 그리고 중요하게 출현할 것이다.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중국 현대사를 진지하게 다룬 이 책을 보면서 이제야 10여년 전에 보았던 사회주의 이행논쟁에서 중국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서사연에서 냈던 [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1991)에서는 특히 이행이론과 관련하여 스탈린주의와 함께 마오주의 입장을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단지 '대과도기론'이라는 결론으로만 인식했던 마오주의의 입장이 어떠한 역사적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현실에서 의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수 있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알튀세르가 당대에 마오주의로 이해되었고 마오의 영향을 실제로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투쟁 등,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강조한 정치적 명제들이 마오에게서 기원하거나 실마리를 얻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를 중국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중국 현대사를 사실들과 함께 역사적 쟁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덕분에 중국혁명과 마오주의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보다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오주의와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들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함으로써 역사목적론을 지양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 중국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로만 치닫는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중국에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쟁점이 있었는지, 따라서 현재와 앞으로 제기될 쟁점은 무엇인지 알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의의에 대한 소개는 월간 [사회운동] 5월호에 백승욱 선생이 쓴 아래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모리스 마이스너,『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백승욱]/ 2005.5
나는 다만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된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서만 아래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마오의 주의주의와 주체사상, 알튀세르
마오주의는 주의주의적 경향을 가진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전반부는 마오주의의 주의주의가 역사적 경혐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혹한 대장정의 시련에서 살아남았으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토대가 거의 부재한 거대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는 주의주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마오주의의 주관주의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경험에 영향을 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마오주의의 주의주의를 더 극단화시킨 하나의 변종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도 '사람'을 강조하고 '사람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북한에서는 다소 경직된 방식으로 변용되어 수용되었다. 마오주의에 함께 포함된 사회주의 하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이라든가,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과 같은 관념은 제거되고 다만 사람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관념론적 강조,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강화로 변용되었다. 마오주의의 대중노선과 대중에 대한 신뢰는, 몇번의 간접적 영향을 거쳐 남한의 NL까지 와서는 대중추수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변화되기도 한다.(역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후 한편에서는 60년대말 프랑스에서 알튀세르 등의 이데올로기론에 영향을 준다. 구조주의적으로 수용된 마오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대신 과학의 대상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사회주의 하의 계급투쟁
마오(와 그 동료들)는 1949년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혁명이 하나의 일회적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혁명이 장기적 과정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로부터 중요한 정치적 결론들이 도출된다.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 이후에도 계급적 모순은 소멸되지 않는다. 중국은 50년대를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지주와 자본가라는 구 지배계급을 인적으로 소멸시켰지만 계급투쟁은 소멸하지 않는다. 마오는 그것을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잔재 때문인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된다. 계급투쟁은 사상투쟁의 형태를 띈다고 규정되었는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다. 이로부터 50년대 후반의 백화운동, 6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의 사회주의 하에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 제기된다.
마오는 이러한 쟁점을 단지 '논쟁'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동원함을 통해서 제기하고 물질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할 뿐 아니라, 그것이 대중운동에 의해 제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진정한 혁명적 잠재력이 당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는 자발적 농민운동에 있다는 점, 오히려 대중운동에 대해 당이 지체될 수 있다는 관점은 무오류-일괴암성이라는 레닌주의적인 당 관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실재로도 그런 차이가 제대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정통'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은 물론 실용적인 이유에서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은 반복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당의 통치성을 회복하려 할 때마다 이 점이 강조되었다.)
다만 마오는 대중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의 과제를 제기해야한다는 점은 충분히 강조했지만, 바로 그 계급투쟁의 모순이 대중운동 자체도 관통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따라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인민' 내부에조차 이미 차이와 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오는 '인민'의 규정을 제한함을 통해서 문제를 편의적으로 해결했을 뿐이다.) 마오는 매 계기마다 최종적으로는 기존의 국가기구를 방어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대중운동을 억압했다.
사상의 자유를 확대하고 논쟁을 촉발한 백화운동의 예를 보자. 백화운동은 결국 인민의 단결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는데, 이는 '인민'은 기본적으로 단결된 통일체라는 운동의 전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 결과, 백화운동이 '통제 가능선'을 넘어서자 이단색출로 전환되어 탄압이 시작된다. 인민이 그 목표와 이해관계에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관점을 보인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분열을 낳는다면 운동을 끝낸다는 것이다. 인민-대중 자체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마오는 백화운동에 뛰어든 지식인들-사회주의 비평가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이를 추동하여 당내의 우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촉발시킨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선다. 마이스너는 마오가 지적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마오는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마오는 '만약 우리가 사회체제를 공고히 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이 체제를 반영하는 사상이 융통성을 잃을 것이고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자기의 사상을 맞추어 나가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그 한도에 대해서는 당-조직과 국가기구의 유지라는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운동과 인민주의, 개인숭배
문화대혁명도 마찬가지로, 당과 국가의 관료화의 우경화에 대항하여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통해 당과 국가를 개조하려고한 시도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혁명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방식에 의해야한다는 점을 마오는 정확하게 지적했다. 훗발 '대재앙'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사건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결정적으로 제기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중운동의 폭발은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를 경유해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개인숭배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 현상으로, 한편으로 이것은 인민이 사회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개인숭배는 단순히 대중이 자기 위에 선 국가의 권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지의 체현이자 모든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는 한 인간의 최고권위에 자기(그리고 자기의 권력)를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오숭배는 사회권력의 소외가 정치적 귄위에 대한 맹복적 숭배로 나타났던 역사적 현상들 중 가장 극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에 개인숭배는 시민이 그들 위에 군립하는 관료기구를 공격하고 권위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 마오가 당을 경유하지 않고 대중과 직접 관계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중의 진출을 위한 정치적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이 대중의 진정한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대중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실재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던 홍위병, 활동가, 대중들은 마오와 당에게 모두 배신당하고 상하이 등에서 그들이 형성한 각 지역 코뮌은 모두 분쇄되거나 화석화된다.
중국혁명이 진행과정에서, 혁명 이후 체제에서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동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좀 더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농민이 압도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농촌이 급진화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중국의 인민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20세기초의 인민주의 보다는 19세기의 (미국이나 러시아의) 농민적 인민주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주의 비판](공감/2005)을 참고)
계급투쟁의 물질적 토대
문화혁명의 과정이 마오주의의 주의주의적 경향과 맞물려, 물질적 토대의 변화와 결합되지 않은 주관주의적인 계급투쟁의 일면적 강조로 나가는 측면이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의 평가가 그렇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강하지만, 반드시 물질적 근거가 간과된 것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이러한 다양하게 제기된 '계급투쟁' 과정에서 생산력 증대라는 과제에서도 자본주의를 모방한 소련식의 산업화가 아니라 농촌에 기반한 대안적인 전략을 채택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초기에 실시되었던 소련식의 경제개발 계획은 대약진운동 등이 정리된 이후에도 소련식의 중공업 일방 우선과 다른 방식의 경제계획이 입안되었다. 또한 농업 집단화와 농촌의 공업화 등에서도 소련의 경험과는 다른 실험이 이루어졌다.
생산력의 성격이라는 것이 계급투쟁과 분리되어 순전히 양으로 환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계급투쟁의 성과를 생산관계에서 물질적으로 남기는 과정은 인민공사의 설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민공사에 도입된 '공산주의' 요소
대약진 운동 기간 설립이 촉발된 인민공사에는 여러가지 '공산주의' 요소가 도입되었다. (공사=코뮌) 이는 매우 의식적인 작업이기도 했는데, 중국공산당이 단순히 협동농장을 생산력증대의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생활 단위를 만드려고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농촌의 소공업을 통해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교육과 산업활동을 결합하는 등 도시-농촌의 구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 지적차이 감축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적차이의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가는 문제가 있는데 이후 마오가 보여준 반지성주의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이후 당시의 제도 교육에 대한 불신 속에서, 청년들이 너무 책을 많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노동현장의 실천적 지식'을 일면적으로 강조할 경우 경험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지 않는 과학들을 경시할 수 있다. 이는 지적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마오 이후, 중국에서의 계급투쟁
마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최고실력자가 된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에는 민주적 내용이나 사회주의적 내용도 없었다.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생산품과 노동조건을 통제하는 수단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제도적 조건도 전혀 고민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반적 이해(하지만 스탈린주의적 이해)처럼, 사회주의는 생산에 대한 국가통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심지어 주요모순이 적대적 사회세력간의 모순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적 사회주의 제도'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생산력을 사회주의 제도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모근 것을 무시하고 생산력 발전만 추구하는 정책이 이후 지속된다. 심지어 농업집단화를 해체-후퇴하면서 사회발전 수준과 경제발전 수준사이의 모순이 어느정도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궤변도 등장한다. 사회주의 몰락과 포기로 인한 이데올로기 공백을 공산당 정권은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로 매꾸었다. 대중매체를 통해 애국주의 열풍이 추동된다. 마오 이후에 이데올로기가 다시 강조된 셈이다.
그나마 혁명의 지향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던 5.4운동 세대의 원로 공산주의자들이 사망하면서, 새로 등장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당관료 출신의 인사들이다. 덩사오핑 이후의 실권자로 등장한 장쩌민은 사회주의가 21세기 말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주의는 현재의 희망이나 행동과는 사실상 단절된 먼 미래의 일로 연기되고 사회주의는 결국 무의미한 수사가 되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들어, 공산당 간부가 앞장서서 자본가로 변신하고,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며, 새롭고 거대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거대한 노동자층은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불안정노동자들이다.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이 갈등을 몰고 다니고, 자본의 이동에 따라 새로 형성되는 노동자 대중이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등장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전망은 지배정당이 공산당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운동에서 시작될 것이다.
중국에서 새롭게 형성된 부르조아지도 정치적 변화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현 자체가 당 관료로서 특권에서 가능했을 뿐더러 이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것도 중국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이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그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는데 있어 혁명적 세력이 될 수는 없다. 계급들이 혁명적일 수 있는 상황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정세와 계급역관계에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중국 사회주의의 진짜 근원은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루어질 공산주의 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성숙 속에서가 아니라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공산당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투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 그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파괴에 반대하는 투쟁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행위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독립적인 노조설립의 자유는 가장 치열한 정치적 쟁점이다.
평가를 위한 질문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마오주의는 근대적 경제발전의 수단과 사회주의의 목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딜레마와 정면대결한 이론이기는 했지만 대중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점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는 국가권력을 생산자들의 자치정부로 바꾸어가는 시기라는 점과 사회주의는 국가소유가 아니라 '연합된 생산자 소유'라는 점을 간과한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똑같은 한계를 마오도 보여주었다. 마오의 비-스탈린주의적 전략이 결국 스탈린주의와 같은 한계를 보여주고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책을 보면서 마지막 의문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50~60년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 하에서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새로운 지배국가로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혁명을 계속 진전시켜나가려고했으며 이행기 사회 자체에 공산주의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스탈린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결과를, 곧 이어 실용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도 넘어서지 못한 물질적 한계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사상이론적, 실천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부안 이후, 방폐장 선정을 위한 주민 투표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주, 군산, 영덕, 포항 등 4곳에서 주민투표가 진행된다. 금권과 탈법이 난무하고, 주민들에 대한 기만이 판치고 있다. 핵폐기장 유치가 거대한 지역이권 사업이 되어 한수원과 지자체의 돈놀음에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다. 사회단체들은 투표의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다.([프레시안]"방폐장투표 강행시 '원천무효'행동에 나설것") 이런 상황에서 부안투쟁을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내내 진짜 민주주의가 투쟁 속에서 살아나는 모습에, 책장 곳곳 글과 사진에서 눈시울이 불어지고 코끝이 찡하다. 파업배낭같은 '핵폐기장보따리'를 메고 추운 아스팔트 반핵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주민들의 투쟁은 하나하나가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며칠후 방폐장 주민투표가 걱정되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이 감동들은 어쩔 수가 없다.
문화평론가로 잘 알려져있는 고길섶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인 부안에서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었다. 대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에 직접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혁명을 경험했던 것이다. 고길섶이 부안에서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안을 밖에서 지켜보았던 우리같은 독자들에게도 행운인데, 덕분에 부안투쟁을 보다 잘 정리된 형태로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안투쟁을 해석하는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든, 일부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간에 말이다. (사실 나는 고길섶의 자율주의, 들뢰즈주의의 입장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한다.)
저자는 부안항쟁을 통해서 부안은 반핵과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적 장소로 출현하였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의 고부, 20세기 말의 광주에 이어서 21세기 초의 부안. 대중이 봉기하였고, 절대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민주주의가 전면화된 저항의 공간.
정세적으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의 엘리트가 대중을 미혹하는 지역화된 발전주의의 미망, 에너지 체계의 모순, 지역과 중앙에서의 인민주의적 정치, 이들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로서 민주주의의 파괴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모순들은 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 '반주변의 주변'지역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모순을 망라한 것이다.
소외된 주변지역으로서 전북 발전주의의 산물인 새만금간척사업과 영광원전 사업으로 인해 어장이 파괴되고 피폐해진 위도에, 핵쓰레기장 유치가 현금 보장을 쥐어줄 것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이래저래 생존권을 파괴하고 다시 그런 상황을 이용해 핵폐기장을 강요하는 황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부안항쟁은 특히 김종규 부안군수의 반민주적인 폭거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단순히 반핵만으로는 이렇게 떨쳐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들의 손에 선출되었으면서도 주민들과 정반대의 의사 결정을 폭력적으로 내리는 군수는 주민들의 투쟁이 민주주의 투쟁이 되도록 했다. 대의제의 모순이 폭발하였고, 대중들은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로 나섰다. 그 일환으로 2.14 주민투표가 진행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적인 행위들은 대중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된 각종 투쟁이었다. 삭발, 촛불집회, 해상시위, 고속도로 점거, 삼보일배, 수업거부 등 주민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놀라운 장면들. 주민들은 어디서 심오하게 배운적없는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현해갔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급속하게! 대중의 민주주의적 역능을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할 때 보이는 모습과도 같지만 대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전면적이고 더 자율적이었다.
김종규 군수는 꼬마 노무현이라고 할만하다. 주민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당선된 것도 그렇고, 직접적으로는 노무현이 총애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스타일은 인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 정치이념의 위기를 반영하는 퇴행적인 정치스타일. 부안은 그것이 얼마나 반민주적인지, 그리고 대중들의 민주주의 투쟁이 그것의 허구성을 얼마나 신속하게 폭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투쟁의 시기는 지났다는 헛소리를 부안에 대한 탄압으로 몸소 실천했다. 경철계엄이라고 불린 부안의 2003년말 상황은, 단지 수사적인 비유가 아니라 그 폭력의 강도에서 볼 때 직접적인 살인만 피했다 뿐이지 군대의 계엄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창집)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최원)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안항쟁은 '민주주의의 이후의 민주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에서조차 대중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길섶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도식을 활용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고길섭은 또한 부안의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가 아닌 '자치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정치이념으로서의 대의민주주의 보완물, 보충에 불과한 '참여'가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점에서 '자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길섶이 부안을 일컬어 '코뮌'이라고 했던 것처럼, 대중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행위다. '참여민주주의'를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NGO를 동원, '참여'시키면서 통치를 정당화하려 할 때, 사회운동이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화 세력' 운운하면서 대중을 동원하는 인민주의적 정치스타일은 이러한 대중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고길섶은 부안항쟁이 여성들의 정치적 진출이 특징적이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구조에서 해방되는 계기를 포착했다는 점, 어느 주체들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지키는 운동에 강렬하게 나섰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들이 저항 정치의 과정에서도 오히려 수동화되는 장면들을 자주 목격했던 상황에서 이례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투쟁이라는 점,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대중들 안에서도 민주적 관계를 촉발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여성들만이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들도 수업거부, 대안수업, 촛불집회, 문화행사, 삼보일배 등을 통해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발언했다. 수업거부의 결정과정에서 자기 의사를 말하고, 각종 투쟁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으로 누가 결정해준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입장을 발언하며, '모의투표' 형식이기는 하기만 스스로 투표를 조직하기도 했다. 근대의 인구관리에서 무능력자로 관리의 대상이었던 어린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정치적 성숙은 그들을 과소인간을 보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부안주민들은 투쟁과정에서 부안에만 핵이 없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핵이 사라져야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성찰한 결과다. 그것은 투쟁이 과정에서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 사회운동들과 대화하고 서로를 교육한 결과이기도 하다. 매일 집회에서 사회운동가, 지식인들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고길섶은 그것은 강사가 대중을 교육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상호교통을 통해서 강사가 교육받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우리가 만들어가야한 대안적 대중교육은 부안의 집회에서 보여진 장면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고길섶은 마지막으로 부안항쟁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주민들의 민주적 의지를 결집하는 성과를 남기지 못한 이유로 대책위의 패권주의와 독단을 들고 있다. 익히 노동운동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운동권력'들이 거기에도 있었나보다. 전북 지역동지들에게 직접 들어보아도, 부안군농민회 주류 등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노무현 정권의 반민주적 폭거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우선시하고 일부는 선거 때도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등, 부안항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에 동원되는 NGO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대중의 투쟁 성과를 물질적 성과로 남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제 내일이면 각 지역에서 방폐장 주민투표가 부안 못지않게 기만과 협잡, 폭력 속에서 치루어진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보통투표행위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대중을 속이고 동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배제한 이 지역들에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있다. 사회운동들의 실펀이, 비록 협잡과 사기의 주민투표 결과가 어떻든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안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생태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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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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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논문이 없으시면 제가 드릴 수도 있는데. 글을 보니, 논문을 제본상태로 갖고 계신 건가요?부가 정보
rud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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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고맙습니다. 근데 제본된 것으로도 갖고 있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감사.부가 정보
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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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저도 가지고 있는데, 반갑네요. 전북포럼에서 나눠주는 걸 가져왔는데... 다른 책을 읽고 있었던터라 조금 들춰보다 말았는데, 한번 제대로 읽어보고 싶군요. 이 글 좀 퍼갈게요. 참, 반갑습니다. 흐흐. 긁적적.부가 정보
rud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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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반갑습니다.몇몇부분은 좀더 보완되었음하는 아쉬운 점도 있지만 훌륭한 논문이죠. 요즘 금속과 공공의 산별논의를 보면, 역사는 똑같이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전북에 계신가요? 지역에서도 고민이 많으실 듯.부가 정보
쇠와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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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파일은 김창우선생께 확인결과 완성본이 아닌 초고입니다. 선생께서 이 파일이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아 파일을 삭제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부가 정보
rud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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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전화를 받고 삭제했습니다. 인터넷에 있어서 공개된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에게 죄송합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