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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전염병의 세계사 (Plagues and Peoples)


전염병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인간에게 기생하는 두 가지 기생체, 감염성 질병을 유발하는 미시기생체(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와 거시기생체들(군대, 국가권력 등) 각각의 동학과 서로의 관계라는, 생소하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인 윌리엄 맥닐은 <전쟁의 세계사>라는 책을 통해서, 군대체계, 무기 등으로 구성되는 군사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소개는 '월간 사회운동'에 류주형이 이미 쓴 글을보면 될 것같다. 한편, 백승욱 선생은 <역사적 자본주의 강의>에서 아리기가 군사력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측면에서 맥닐을 참고한다고 말한다. 이래저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연관되어 있는 셈인데, 과천연구실 세미나26권인 <보건의료: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에서도 맥닐의 이 책을 인용한다. 이러한 역사적 질병 분석이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 지는 궁금한 주제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감염성 질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는 점과, 미시 기생체, 거시 기생체라는 개념을 통해서 감염성 질병과 정치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거시 기생체'라는 개념은 정치-군사권력이 인류에게 또 하나의 '기생체'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지주, 국가 등의 거시기생도 인간들에게는 미시기생체와 마찬가지로 물질 순환에 개입하여 에너지를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대사할 수 있는 물질이 제한되어 있다면, 따라서 거시기생과 미시기생이 '착취''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다면 이 둘의 관계는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하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시 기생체는 자연환경에 따라 훨씬 빨리 적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에서 미시기생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고온 다습한 환경으로 전염성 질병이 발생하기 쉬운 아프리카 중부에서는 대규모 거시기생의 발달이 제한되었다. 거시기생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전염성 질병이 적은 냉대, 온대 지방과 아열대 지방에서는 문명의 양상에 차이가 발생한다. (적어도 중국인들이 양쯔강 유역으로 진출하는데 500~600년의 시간이 걸린 것과 같이 시간적 지연이 발생한다. 춤고 건조한 북부에서 이주한 농민들이 얕은 물에서 감염되는 기생충과 질병 때문에 너무 빨리 죽었던 것이다.)
 


저자는 다소 대담하게(스스로도 대담하고, 혹은 거의 근거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명의 특성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미시기생이 더 우세한 인도에서 대중에게 끊임없는 질병과 갑작스런 죽음은 불교와 같은 허무주의적 종교를 낳았으며, 거시기생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수준이었던 중국에서는 권력에 대한 통제가 중심이 되는 유교가 발전했다는 것이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 일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의 발전과 같은 설명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고온다습한 환경은 북쪽에서 침략한 아리안족 지배자가 이 지역 토착민인 피지배자에게 접근할 경우 질병을 옮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 것이 엄격한 분리('불가촉')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북쪽에서온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토착민은 그 지역의 풍토병에 이미 적응하여 항체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고온다습한 환경에 있는 토착민이라면 더 많은 질병을 통해 다른 지역에서온 거시 기생체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질병은 다른 지역에서온 침략자들에게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경우가 극적으로 존재하는데, 아메리카가 이러한 경우다. '고립된 거대한 섬'과 같던 아메리카는 유라시아 대륙의 질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수천년 동안의 질병의 교환을 통해서 많은 전염병 사망을 겪으면서 많은 질병과 안정적인 미시기생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스페인 군대가 침략했을 때, 정작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숨지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겨우 10%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의 유지란 불가능하고, 자신들을 더 이상 지켜죽길 포기한 것같은 자신들의 종교와 신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급격하게 몰락한 이유이자 기독교를 그렇게 빨리 받아들인 이유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메리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유라시아에서도 이런 일은 부분적으로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로마제국의 몰락, 동로마제국이 몰락에는 페스트의 창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량의 사망으로 인해 제국의 행정적 기반이 붕괴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몽골 지배 하에 인구가 1/2수준까지 격감하는 대량 사망이 발생하는 데, 페스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은 역시 몽골의 지배가 유지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된다. 근대에도 동유럽에서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라시아는 많은 감염성 질병을 교환해가고 항체를 보유할 수 있었다.

감염성 질병의 교환은 몽골의 침략과 같은 군사적 행동에 의해서나 실크로드, 근대무역의 발전과 같은 상업행위 등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몽골제국은 원난-버마원정을 통해 오지에 갇혔던 페스트를 스텝지역으로 확산시켰으며, 페스트가 확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교역의 확대는 페스트를 전지역으로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질병과 관계된 몽골의 몰락은 또한 이 질병과 관계된 유럽 중세의 몰락과 근대세계체계의 형성을 촉진하는 등 역사적 효과를 창출했다.) 많은 경우 전혀 새로운 질병의 출현은 해당 문명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는데, 중세말기 페스트의 창궐은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있다.

책은 우리의 상식을 허무는 사실들을 많이 제시한다. 대표적인 질문. 세계 인류는 점전적으로라도 증가해왔는가? 천만에, 앞서 중국의 인구가 1/2까지 줄어든 경우가 있다고 한 것처럼, 1/3~1/2의 인구가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하고 문명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밖에도 AIDS가 원숭이로부터 전이된 것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같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매독이 아메리카에서 유입되었다는 것도 부적절한 상식인데, 이전부터 유라시아에 존재하고 피부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 점막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전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

이러한 감염성 질병의 확대는 근대 보건의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많은 부분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크림 전쟁 당시에, 전투에서 죽은 영국군보다 이질로 사망한 영국군이 10배는 될 정도였다. 군대에서 시작된 집단적 방역은 체계적인 의료행정이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감염성 질병이 전적으로 소멸될 수는 없다.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사라질 수 없을 뿐 아니라, 기생체와 숙주는 공진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적합한 형태로 함께 진화하는 이상 감염성 질병의 완전한 박멸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은 동물과, 특히 가축과 미시기생체를 공유하고, 새로운 질병이 끊임없이 유입된다. 최근 조류독감AI, 구제역 파동과 같은 것은 이러한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새로운 질병들은 유전공학의 위험한 실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여기서 감염성 질병의 새로운 양상도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계된다. (<나쁜과학>에 대한 독서일기 참고)

따라서 이들 감염성 질병을 완전박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진화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마치 홍역과 같은 질병이 치명적인 사망 원인에서 소아병으로 전환되고, 인간도 홍역균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많은 질병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적응하거나 아니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게되었다. 숙주인 사람에게도 덜 치명적이고 기생생물에게도 더 안전한 관계가 형성되어온 것이다.

과거의 현재의 질병은 그만큼 다르며 인류가 문명을 건설한 후 문명화된 질병들은 불과 수천년 동안에도 진화를 거듭해왔다. (숙주가 너무 빨리 사망하면 기생체도 존재할 수 없다. 페스트와 같은 질병이 한번의 큰 유행 후에 오랜 동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이러한 이유인데, 이는 기생체에게도 별로 유익하지 못한 방식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비감염성 질병이 확산된다는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노동강도 증가, 유해물질의 증가는 다양한 산업적 질병과 암과 같은 비감염성 질병을 확산시킨다. 이러한 질병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필수적이다.(다양한 정신질환도 포함될 것이다.) 게다가 저자가 책을 쓴 이후에 우리는 프리온 단백질로 인한 질병을 만나게 되었다.(광우병) 프리온 단백질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은 생명체가 아니며, 파괴되지 않는 유해한 단백질로서, 일종의 오염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생명활동 속에서 배태되었고 훨씬 치명적이다. 이러한 질병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특히 이러한 질병이 출현하는 새로운 조건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미시 기생체의 활동이 주요문명의 운명을 좌우할만큼 중요한 정세적 계기들이었다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가들은 '질병의 세계사'에는 관심을 많이 갖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이 거의 통제-인식불가능했으며, 따라서 역사 속에서 순수한 우연적인 요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가 부실한 부분이 많고 추론이 과도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질병의 동학은 역사적 요인들과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이는 인과관계이기는 하지만, 단지 기계적 인과관계일지 구조적 인과관계일지에 대해서는 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각각의 층위에 어느 정도씩 편재할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더 명확한 관계로 인식하고, 역사적 질병학(?)을 구성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미시기생체의 역사는 자본주의 하에서 보건의료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현재의 문제로 다시 인식할 수 있다. 아래의 책이 도움이 된다.


보건의료 :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비센트 나바로 외 지음 /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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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대중의 지혜


대중의 지혜
제임스 서로위키 지음, 홍대운 외 옮김 / 랜덤하우스중앙
 
 
흥미롭게도 대중에 관한 실용적 연구. 대중운동의 입장에서 대중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대한 논의가 많이 있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연역적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책도 부제가 '시장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데서 보이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대중이 어떻게 움직이는가하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다.(물론 금융세계화 시대인만큼 '시장'이란 주식시장이다.) 게다가 저자가 예시하는 사례들은 마치 완전경쟁 시장이라는 이념에 가까운 자본주의가 대중들에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브로델의 지적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본질은 독점일 뿐 아니라 저자 스스로도 비추고 있듯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교통이다. 이 책은 미국인들 특유의 실용적인 접근 때문에, 굳이 자유'시장'에 적용하지 않더라고 충분히 적용 가능한 몇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는 대중이 무지한 집단이라는 통념에 반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중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들보다 훨씬 그렇다고 주장한다. 주장을 위한 예들은 간단하지만 흥미롭다. 단지 안에 들어있는 구슬의 수를 가장 정확히 알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평균을 내면 된다는 것. 실제로 가장 가까운 근사치에 접근한다. 이런 식으로 (훨씬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아마도 사회적 쟁점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은 알 수 없지만 집단은 답을 알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대중이 이러한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전제를 제시한다. 개방성과 독립성, 다양성을 유지할 수있다면 집단은 그만큼 실수를 피할 수 있다는 것. 반대로 (집단의 크기를 떠나서) 다양성을 억압하고 통일을 강요한다면 대중들도 잘 못된 판단에 이른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독립적이지 못하고 타인에 의존적일 수록 잘 못된 판단이 많아진다. 과학기술과 같은 분야에서는 정보가 서로 공유될 수록 집단적 사고, 토론(교통)을 통해서 올바른 해답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중은 현명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흥미롭다. 여기서 저자가 제안하는 조건의 목록들은 대중정치가 활성화되기 위한 조건과도 거의 일치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개인들이 충분히 독립적인 상황에서는 상호 교통을 통해서 가장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 교통과 토론을 통해서 얻는 결론은, 무작위 투표의 평균값을 내서 어떤 값을 맞추는 방식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해결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선전은 많은 경우 압도적이어서 성공적으로 작동하며 개인들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침식한다. 민주적인 토론은 방해되며 정보는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중의 움직임에는 항상 지배-이데올로기이든 피지배-이데올로기이든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없이 대중은 행동하지 않는데, 우리가 미식축구 결과 예측과 같이 대중의 행동이 필요없는 어떤 것을 예측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행동을 조직하려 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 항에 대한 사고는 필수적이다. 사고와 행동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이데올로기는 이 책의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을 잘 못된 판단에 이르게하는 '타인의존적 사고'의 요인이 될 수 있다.(이데올로기는 동일시/정체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없이는 주체가 불가능한 이상, 원하든 원치않든 이데올로기는 객관적 현실이며 대중은 이에 근거해서 움직인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중이 충분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가 된다.
 
여기서는 아마 스피노자를 인용해야할 것이다. (발리바르에 의해 해석된 스피노자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만.)
 
..정서적 교통은 대중이라는 개념자체이다. 하지만 노력[코나투스]이 각자의 욕망에서부터 도시 안에서 모든 사람의 욕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교통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교통관계가 항상 양극성에 따라 분석되어야함을 의미한다. ▲ 미신에 상응하는 양극 중 교통은 전적으로 동일시/정체화 메커니즘, 곧 실재적 독특성들에 대한 몰인식의 매커니즘의 지배를 받는다. 반대로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작용인 "공통의 통념들"의 긍정에 상응하는 다른 극에서 교통은 적합한 인식과, 개인들의 역량을 배가하는 기쁜 변용들의 통일체이다.  -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진태원 역 中) 194쪽 [밑줄/기호는 인용자]
 
그러나 곧 하나의 아포리아에 봉착한다. 그 두가지가 어떻게 구분-분리될 수 있는가? 동일시/정체화 매커니즘과 "공통의 통념들"의 형성은 분리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오히려 모순적인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하나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다면, 이는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심원한 새로움을 지닌 한 관념의 맞짝일 뿐이다. 이는 모순적인 관계인 한에서 공통적인 일치라는 관념(기계론적이거나 유기체론적인 변형들을 포함하여)과 무관한 어떤 교통이라는 관념의 새로움이다.  -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진태원 역 中) 195쪽
 
결 국, 교통의 양가적인 성격은 대중의 양가성까지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손쉽게 대중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의 목록을 작성하지만, 죄송하게도 현실에서 저자가 배제할 것을 요구한 요소들은 제거가능한 개개의 '요소들'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본질 자체이다. 대중은 이데올로기없이 행동하거나 심지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용적인' 수준에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항들이 있다. 대중이 독립성과 지성을 증진하고 상호 교통을 활성화하는 것을 통해서, 대중의 판단이 수동성('슬픈 정념')에서 능동성('기쁜 정념')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능동성은 대중이 새로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또 한편, 대중 전체라기 보다는 집단 내부에서 교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집단적 판단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가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다. '실패하는 소집단은 소수의견을 무시한다'는 지적이나,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지적. 최악의 경우는 만장일치를 강요하는 것이다. 입장이 대립할 경우 '집단극화현상'이라고 불리는 집단 내 의견들의 양쪽(극단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한다. 노동조합 내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비일비재한데, 집단 내 의견의 다양성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집단적 판단이 오히려 우둔한 판단이 되는 상황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반대 의견과 토론을 억압하고, 반대의견의 존재 자체를 '지도력의 위기'로, 나아가 '노동운동의 위기'로 인식한 지난 민주노총 집행부가 떠오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스스로가 '노동운동의 위기'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대중은 가장 현명하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에서. 그 '특정한 조건'--이것이 바로, '정세'이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대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주어진 숙제라는 점을 이 책과 저자가 봉착한 난점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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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느린 희망


느린 희망 -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유재현 지음 / 그린비

 

 

소설가 유재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말>지에 실린 몇개의 글을 통해서였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바라보게 해 준 글들이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어쩌면 알튀세르가 소련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쓴 소설가 방현석은, 죄송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미달한다.) 

 

유재현은 그런 방식으로 쿠바를 보고, 보여준다. 많은 사진과 알맞은 분량의 많지 않은 글을 담은 이 책은 우리의 이상인 사회주의와, 쿠바를 사고하게 한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쿠바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이루어지던 교역의 중단, 미국의 야만적인 경제봉쇄로 크게 고통받는 과정에서 사회 자체를 재조직했다.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에 쓴 이 책에 대한 독서일기.)

 

유재현은 묻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위기를 '관리'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는 관념, 오히려 생태위기의 '관리'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한다. 쿠바가 보여주는 것은(물론 모순들로 가득찬 속에서 털털거리면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낸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가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박하고 느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주로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유재현의 이 책은 그것과 함께 얽힌 쿠바 사회 전반을 보여준다. 도시농업이든 생태-사회주의이든 사회 전체의 역사와 현실, 하나하나의 사람살이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유재현의 눈은 또 다른 사회주의의 로망으로만 쿠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생태-사회주의적인 농업생산만이 아니라 미국의 관광객들이고, 그들이 사용한 달러('컨버터블 페소'로 환전되어 국영 달러상점에서 사용되는)이다. 이들의 달러를 쿠바 국영 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구한 쿠바 사람들은 국영 달러상점에서 자본주의 상품을 찾는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쿠바가 만난 정세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쿠바는 그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만 최근에는 볼리바르-베네수엘라와 맺은 무역협정을 통해 석유와 의료인력을 교환하고 있고 FTAA(미주자유무역지대, 스페인어로는 ALCA라는군)에 대항해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을 주창하고 있으니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생일케이크를 배급받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달라는 모양으로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 하지만 누구도 굳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생일을 알지 않는다. 밭을 갈던 늙은 농부와 아낙은 저녁 도시의 음악 회관 앞에서 열린 춤판에 나타나 멋진 살사춤을 춘다. 시골 마을에 눈망울 맑은 총각이 꽃을 파는 꽃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 날에는 사랑을,

         짝수 날에는 우정을."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 더 잘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부디! 그래서 나도 유재현처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사진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쿠바의 한 벽화.

 

교살된 모든 혁명에게,

박물관에 모셔진 모든 혁명들에게,

 

혁명이란 영구한 것임을

적의 이름으로, 발전의 이름으로,

탐욕의 이름으로 부정해버린 자들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진리 한점,

 

'모든 거리에 혁명을! En Cada Barrio Revolucion! '

 

 


 

덧붙여 ;

한편, 쿠바의 농업은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대단위 국영농장을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국영대농장의 상당수는 기초단위생산자조합UBPC으로 전환되었다. 국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은 이들 조합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국영기업의 수매분 외에는 농민시장을 통해서 처분하기도 한다. 중국의 인민공사와 유사한 형태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진행중인 실험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상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앞당기는 것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유재현은 이후에 쿠바에 더 다녀오고, 최근에 한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지은이) | | 2006년 11월

 

주문만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쿠바의 희망과 모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세계의 희망과 모순, 무엇보다 우리들의 그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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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폴 호크 지음, 김희수.박경애 옮김 / 사람과사람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글쓴이는 '인지-정서-행동-치료요법(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REBT;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명한 이론인 듯)'이라는 정신의학의 한 이론을 토대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제시하고자한다. 갖가지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길게 설명하기는 그렇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우울증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1) 자기비난 (2) 자기연민 (3)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세가지에 대해서 각각의 대책이 수립되어야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전반적으로 '뻔뻔스러워지라'고 주문하는 것같다. 내용을 보자면 이렇다. 실수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걸로 죄의식을 가지거나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능력이 안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실수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습관의 희생물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라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나의 권리라는 것이다.
 
또 자기연민은 우울증의 요인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사실 많은 슬픔의 원인들이 생각해보면 별 것아닐 수도 있는데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는만큼 신경끄라는 말씀.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자기연민을 통해서 타인들의 연민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만큼 주의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타인동정.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서 타인동정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타인동정은 비합리적인 신념이며, 자신의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정도'만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타인동정은 타인의 '정서적 협박'에 이용당하는 경로가 될 수 있는 만큼 주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동정은 자기동정까지 불러올 수 있어서 특히 좋지 않다.
 
이 정도가 대략의 내용이다. (잘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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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W. 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 교양인
 
 
예전 어느 신문에 " 미리 예측해 본 한국과학 2030년"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기사의 부제가 '우주관광 인기―무병장수 활짝'이라고 붙었다. 대부분의 미래 예측이라는 것이 이렇듯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예상하기는 하지만 예측 자체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얘기들이다. 더구나 이 예상을 발표한 기관은 정부 산하기관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기술예측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그 이름 찬란한 황우석 교주님이 얼마전까지 활동하신 곳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예측이 왜 과학과는 동떨어졌는고하니, 이런 예측에는 '사회'가 전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사회적 필요에 따라 구성되고 그러한 사회적 필요라는 것이 사회구조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결국 사회구조의 변화를 예상하지 않고서는 모든 예측은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 사회구조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추동하는 사회적 모순을 밝혀내는 것이 관건일 텐데, 결국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 사고하지 않는 미래 예상이란 대부분 헛소리에 불과하게 되기 쉽상이다.
 
이 책, <인류의 미래사>는 사회적 변화와 과학의 발전까지 포괄하는 전반적인 미래를 예상하고자 한다. 저자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쓰는 것들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상당한 공을 들여 가능한 미래상을 찾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그리는 미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 2010년대, '세계무역컨소시엄'이라는 자본가들의 초국적 연합기구가 세계를 실질적으로 장악
- 2040년대, 세계무억컨소시엄과 빈곤국들의 핵전쟁으로 인류의 상당수 사망
- 2060년대 , '세계당' 주도의 '세계화'로 사회주의적인 국제정부인 '세계연방' 출범
- 2110년대, '세계연방'을 통해 세계적인 사회주의적 이상이 완숙하게 현실화
- 2130~40년대, 지역적인 수준의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작은당'에 의한 '세계연방' 해체
 
말하자면 자본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세계적인 자본독재가 성립되고, 이어서 자본동맹과 빈곤국들의 연합의 세계대전,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과 보다 공산주의적(?)인 사회로의 이행과 같은 것이 시나리오다.
 


저자가 그리는 각각의 사회의 상은 흥미롭다. 사회주의의 이상이(이어 공산주의적 이상) 세계당의 '세계화'라는 식으로, 현재의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현실화된다는 예상은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미래의 사회주의 이상은 과거의 것을 어떤 식으로든 계승하겠지만 전혀 다른 형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재로 차베스는 아직 모호하지만(또한 이념에는 아직 한참 미달하는 것이지만) '신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발리바르_「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사회주의』 수록_에 의하면 네번째) 공산주의 이념은 첫번째 공산주의의 형태라고 할만한 중세말  프란체스코회-청빈형제회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마르크스적(다섯번째?) 공산주의는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것을 국제주의와 페미니즘을 예상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점에서는 저자와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세계당'의 이념이란 오히려 볼세비키에 가까워보이고 이것은 공산주의의 변화가 오히려 과거로 역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적 이상의 가치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공산주의 이념과 보다 친화성을 가지는 작은 생산 공동체들로 분할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예측이다.(작은당의 집권과 세계연합의 해소) 물론 작은당이 허용한다는 자치 공동체에 따른 자유로운 정체체제의 선택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적인 '생산자 연합'과는 상이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것은 공산주의-코뮤니즘communism 보다는 공동체주의-코뮤날리즘communalism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상이한 역사적-이념적 맥락을 가진다.
 
하지만 저자의 탁월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몇몇 부분에는 선뜻 그 예측에 동의하지 못할 내용들이 있다.
 
우선 자본주의 세계체제 동학. 저자는 민족국가의 약화가 자본가들의 국제적 연합인 '세계무역컨소시엄'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발리바르와 브뤼노프의 지적대로 모든 부르조아지들은 국가 부르조아지이다. 국가는 약화되기는 커녕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자신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약화시킨다. 물론 주변-반주변에서 민족국가가 실패하기는 하지만 금융자본이 집중된 중심부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세계무역 컨소시엄'의 지배를 예상하는 것은 섣부르다. 이러한 예상은 미국이 빈국의 대열에 합류하여 연합하고 급기여 '세계무역 컨소시엄'과 전쟁을 벌이게 될것이라고 예상하는 데 이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세계 헤게모니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 게다가 헤게모니를 넘겨준 국가가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불과 일이십년만에 빈국으로 몰락한 경우는 없다는 점(마찬가지로 더 긴 기간을 본다고 해도 각각의 민족국가가 주변에서 반주변으로, 반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한 사례도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비록 헤게모니를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빈국연합에 포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미국 헤게모니의 소멸 이후에 '순수한' 자본의 지배를 상정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가능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다. 자본주의는 민족국가와 그 세계체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묘사하고자한 '세계무역 컨소시엄'의 지배가 미국 헤게모니 이후의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또 다른 세계체계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닐 수 있겠지만.) 미국헤게모니 이후는 자본의 '순수한' 지배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몰락이든 새로운 헤게모니의 구성이든 양자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계연합을 해체하고 지역공동체로 분할하는 운동을 펼치는 운동조직은 '작은당'이라는, '당'형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자. 왜냐하면 모든 운동조직의 이데올로기는 조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즉, '작은당'이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해소하고 분권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중앙집권화된 당형태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가능하려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이념을 가지는 지역운동-사회운동들의 네트워크가 출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사회주의가 '세계당'이라는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 등 현재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중앙집권화된 당형태 보다는  '운동들의 연합'이라는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념은 모든 정치운동은 당형태를 취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저자의 정치관념이 20세기말 미국의 것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고 저자의 미래예측이 일정한 스펙트럼 안에 갇히게 만든다. 사회주의 이후에 공산주의communism보다는 공동체주의communalism을 예상하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빈국들의 연합에 속할 수 있다는 예상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먼 미래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국가가 자본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만큼 자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놀랍다.
 
http://member.jinbo.net/maybbs/pds/rudnf/pds/realth_15_m.jpg또한 저자는 미국 헤게모니 시대의 유산인 발전주의,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이라는관념을 전 역사에 관통하는 것으로 적용시킨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파멸적인 전쟁과 이후 급격한 사회-정치 체제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킨다고 예상한다. 그 결과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고 소행성을 개발하며,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이식하는 기술로,  항성간 탐사까지 나간다고 예상한다. 마치 '문명'(Cid Meier's CIVIZATION)이라는 게임에서 알파-센타우리星에 우주선을 발사하는 것으로 엔딩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결말이다. (나도 이 게임에서 여러번 우주선을 발사해본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항성간 우주선이라는 것은 미국인의 민족적 로망인 것같다. 우주공간에서 실현되는 새로운 변경frontier.)

그러나 20세기 과학기술-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에 의존하였고, 이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사회적 필요가 달라진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혹은 인간지성의 발전이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완전히 분권화된 지역 공동체들의 세계에서 성간탐사로켓은 왜 어렵게 자신들이 거부한 세계적인 연합형태를 구성하여 발사하는지 알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저자가 미국식 과학기술관을 미래에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미래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예측하려하지만, 그것이 과학기술에 대해 가지는 연관을 사고하지 않음으로서, 결국 대한민국 국과위 황우석 교주님 것을 연상하게 하는 예측이 전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 역사의 구도를 한눈에 바라보자. 그러면 이 구도가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 미래 역사의 반복이라는 것을 곧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그 전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붕괴, 군사적 규율을 가진 국제적 당에 의한 (필요하다면 무력을 이용한) 세계혁명의 완수,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이러한 20세기 초(혹은 후반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미래상은 이 책에서 변주되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역사는 전개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최대한 과학적으로 사고했고 부르조아보다 수천배는 탁월하게 역사의 전개방향을 인식했더라도 예측할 수 없었던 역사적 변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독일이 아닌 제3의 자본주의 대안으로서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은 전쟁 이후 자본주의의 몰락이 아니라 냉전체제를 낳았고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은 무산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지 못했으며 끝내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몰락했다.

20세기의 역사가 예상되는 달리 진행된 상황에서 우리가 21세기를 예상할 때는 어떤 입장이 필요할까? 그것은 20세기의 실패한 예상을 그대로 21세기에 대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미래는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더욱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한 미래상보다는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방향을 미래적 규모로 확장할 뿐인 것으로 보인다. 불확정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인 입장일 것이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의 위치와 궤적이 불확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예측불가능하며 확률로만 존재한다는 것자체가 과학적 인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저자가 단지 소설가였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하면 되고 그것은 무한히 열려있기 때문에. 그러나 미래학자가 쓴 이 책에는 월러스틴의 추천사까지 붙어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곧 다가올 미국 헤게모니 이후, 장기20세기의 종결 이후에 대해서 현실에 근거한 예상이 필요하다.(문학적 상상력이라면 SF소설에 맡겨두면 될 것을!) 이 책은 탁월하게 역사적 요소들을 분석에 활용하여 먼 미래를 예상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단기적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에 입각한 보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다. 
 

 
최근에 발간된 아래의 책은 그런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에 입각해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미래,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사회운동의 미래)에 관해서 더 유용한 사고를 개방시켜준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은이) | 그린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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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노동대학원 석사논문

김창우 씀


 



△ 사진은 전노협 해산대회, 전노협 깃발을 안은 양규헌 위원장.(노동자뉴스제작단)

 


우리가 발견한 것은 전노협이라는 노동자계급의 강렬한 빛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인간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사회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 전노협 백서 중

 

왜 '전노협 청산'이 문제인가?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우리 노동운동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놓아버린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전노협의 역사적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 청산하고 갔다"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전노협이 해산되는 과정--이것은 곧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이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자한다.

 

이를 통해서 전노협 백서에서 비어있는 공백, 어쩌면 차마 말하지 못한 역사의 고리들을 채워넣는다. 이 공백은, 왜 '전노협 정신 계승'을 말하는 민주노총이 전노협 정신을 '청산'하였는지, 전노협이라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표상은 급작스럽게 사라졌는지 알기 위해서 찾아야할 진실들이다.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95년초에 군대에 입대했던 나는 제대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전노협이 아니라 민주노총 시대를 맞았던 것인데, 그 변화된 이미지란 당혹스러울 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이러한 탐색을 진행하는 것은 사라진 고리를 찾아서 메우려는 지적 흥미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의 운동 전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이라는 전노협의 정신이 여전히 운동의 쟁점이고 문제라면, 그것을 청산하는 과정은 하나의 노선투쟁이고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 지도 모른다. 간단한 예를 인용해보자.

 

..강령이나 운동노선 등의 면에서도 전노협 정신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노동해방'과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으로 표현되는 전노협 정신은 민주노총 강령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는 '노동해방'이라는 표현이 한 구절도 없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운동노선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한 전체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내적 개혁으로서의 사회개혁투쟁노선으로 대체되었다. - 본문171쪽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이미 중간노조까지 포괄하여 규모를 키워야 힘을 가질 수 있다는면서 전노협처럼 투쟁적인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전노협 정신이란 청산대상일 수밖에.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었다는 것도 전노협 운동의 의미가 계승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건설되고 공동투쟁의 성과를 받아안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을 보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노협 안에서도 지노협 혹은 대의원대회까지 대중적 논의는 배제되고 중앙위와 전노대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시급한 건설을 주장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97년 대선대응이었다고 하니, 할말 다한 셈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전노협 자신의 대응도 매우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전노협 내에 전노협 한계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전노협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짜고자했다. 이들은 전노협 외--업종회의나 대공장연대회의--의 같은 흐름과 함께 민주노총을 주도한다. 이들이 바로 지금은 열우당에 가있는 김영대를 비롯해 이목희, 배석범 같은 자들이다. 문제는 전노협 강화론자같은 경우에도 94년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금속산업 재편 문제에 몰두하고 전노협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전노협은 결국 이렇게 좌우합작으로 청산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노협과 함께 지노협도 완전히 청산되고 민주노총의 말단 행정기구 혹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임의기구(지구협)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대의기구에 대표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영대가 지역본부에 대의원을 배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연대 투쟁의 의미는 완전히 주변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한편, 당시 이를 주도했던 한노사연 등 우파와 금속산업 재편에만 몰두하던 좌파/중앙파가 최근에는 지역운동의 중요성 주목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특히 한노사연이 말하는 지역운동은 결국 사회적 합의제도를 지역적 수준으로까지 보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문의 첫 페이지를 펴고 끝까지 놓지 못한 이유는 이런 역사 자체가 흥미로왔기 보다는, 이 역사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페이지씩 읽어가면서 마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것같은 기시감.

 

민주노총은 조합원은 물론 간부들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진행하지 않은 가운데 상층에서 정한 일정대로 추진되었다. 민주노총 준비위는 조직체계도 인선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선포부터 하고 출발했던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공공)산별노조 건설이나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어떤가? 두 경우 모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출범 일정만 잡혀있는 상태이다. 그것도 상층의 주요 정파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을 결정하고 대의원대회에서 추인하는 식이었다.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미 더 이상 토론이 불가능하도록 논의는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하는 대의원에 대해서 다른 대의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은 더 문제이다. 조직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결의를 통해 이를 하급 조직에 강제하는 방식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지역에서부터 연대투쟁을 통해 지노협을 건설하고 이를 모은 전국적 연대투쟁(89년)을 통해서 전노협을 건설한 것과는 완전히 전도된 방식이다.  상층의 결의보다 현장 조합원의 참여와 결의가 중요하다고 하면 다른 경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과 같은 방식을 통해 지역으로부터 그것을 만들어보려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정된 활동가의 헌신만으로 가지는 한계, 그것을 하나의 운동을 확산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 보다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던 한계에 대해서는 이제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니, 반성할 수밖에.)

 

이러한 점은 산별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입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쟁점이 된다. 예를 들어 '산별노조의 강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중앙 조직의 통제력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혹은 지역과 현장의 활성화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의 강화를 의미하는가? 이러한 쟁점은 산별노조를 어떠한 경로로 건설할 것인가, 산별노조의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지금 현실에서 이러한 쟁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조차 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미 건설의 첫단추가 잘 못 꿰어졌다는 점에서 현장과 지역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점점 더 비관적이다. 다만 얼마나 그 '여지-틈'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을 뿐인 것같다.)

  

물론 전노협의 청산-- 그리고 민주노총의 건설을 다루는 이 논문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해줄 수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민주노총 조직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는 자기파괴적인 내부 투쟁과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막힌-절망적인 무관심에까지 직면하고 있다. 점점 더 회의적으로 되어 가는 2006년 하반기 총파업은 사회적 대화(합의)노선이나 총파업 노선이나 모두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그렇다면 민주노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노협이 스스로 역사로 증명한 투쟁과 청산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야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과제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을 아직 사고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운동조건을 넘어서야하는 과제까지.

 

그러나 그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일의 첫순서라고 할만하다.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어떤 답도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빛나던 상징이자 조직인 전노협의 역사를 배제-청산한 가운데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역사 속에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문'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뛰고 코끗이 찡해지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괴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과연, 그것이 빛나게 푸르른 현실-역사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푸르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논문의 마지막 절,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설명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 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한편, 전노협에 대한 연구로서 또 읽어볼만한 글은 무엇보다도 김진균 선생께서 쓰신 글입니다. 김창우씨도 다시 추천하고 있군요.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구조와 특징 -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글이죠. 여기를 클릭하면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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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핑퐁


핑퐁
박민규 지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깔깔 웃으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박민규의 이번 책은 읽는 내내 깔깔 웃게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좀 더 대담하고, 황당무개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짜임새있게 느껴진다.

 

왕따에 얻어맞고 다니는 중학생 두 주인공인 모아이와 못(이건 둘다 '별명'이지만, 사실 '본명'이라는 것이 더 의미없는 상황에서 그런 구별은 이상하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럼 점에서 박민규는 대담하다.

 

둘이 던지는 질문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폭력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서,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없는지, 왕따가 될까봐 남을 '선제공격'한 적은 없는지, 그러면서도 그 남들이 무서워진 적은 없는지, 그리고(혹은 게다가) 그런 고통을 박민규처럼 '가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확실히 박민규는 모든 문제의 가상적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소설에서 현실화시킨다.(어차피 소설이 가상인 바에야 자기 소설에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세계를 그냥 간단하게 <언인스톨>시키는 것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서 엔딩이 참 황당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문제를 전개시켜나가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감독은 두 명의 주인공을 절벽 위로 날려버린다. 이번 경우에는 두 명의 주인공 대신 세계를 날려버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더 대담하긴 하지.

(나중에 찾아본 신문의 한 작품평에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한겨레]'인류운명'걸고 탁구 한판?)

 

그렇지만 소설 전체에는 상상력이 넘친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가 만들어낸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더 흥미롭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한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들은 60~70년대 미국의 SF 작가의 단편을 닮았다. 세상이 주인공을 <깜빡>한다는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라는 이야기는 마치 필립.k.딕의 단편 <작은 도시>을 연상하게 한다. 하긴 존 메이슨이라는 이름도 리처드 매드슨을 또 올리게 하지 않는가. (리처드 매드슨은 좀비 영화들의 원형이라고 할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작품을 써낸 작가.)

 

여튼, 결론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 메이슨을 통해 들려주는 세상이 우리는 <깜빡>한다는 아이디어가 더 맘에 들기는 하지만, 과로사로 마감하는 핑퐁 게임 끝에 세상을 <언인스톨>한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다. 이따위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깨끗하게 <언인스톨>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안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려운 사람들이 '전쟁이라도 나서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인도적이잖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이런 해결방법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적 해결책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가상적 해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인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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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대중과 과학기술 - 무엇을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


대중과 과학기술
김명진 엮고지음 / 잉걸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황우석 교수 사태에 대한 논란 속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이미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기하고 있다. 대중의 과학기술 수용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 쟁점을 중심으로 과학기술논쟁의 전개, 대중매체와 과학기술, 생명공학의 문제점 등을 살펴보고 있다. 이번 황우석 논란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 현상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질문한다면 이 책의 여러 문제의식이 유용할 것이다.



우선 과학기술이 대중과 맺는 관계가 문제다. 과학기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급격하게 생산력과 결합했다. 물론 이전에도 기술과 결합하기도 했고, 사회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면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함께 대중의 삶에 과학기술이 미치는 영향도 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소외는 구조화되어 갔는데 지식의 독점이 심화되어갔기 때문이다. 생산현장에는 테일러주의의 도입과 함께 노동자들의 암묵적 지식도 박탈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그 정책이 대중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당연히 대중들 사이에 토론되고 이를 통해 결정되어야한다. 이런 지점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철회되기 시작한 60~70년대부터 제기되어왔다.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성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무한한 확장, 영원한 번영이라는 관념이 70년대의 불황으로 인해서 약화된 데도 원인이 있다.

 

그래서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가 쟁점이다. 대중이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 알아야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논지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사회적 쟁점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논지까지 여러 입장에서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된다. 문제는 이러한 논지에 따르면 대중은 필연적으로 과학자들에 비해서는 과학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과학자들에게 주도권이 주어져야한다는 입장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과학자들의 지적위계에 따른 권력을 강화할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과학기술 논쟁에서 비전문가인 대중들도 논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논쟁의 쟁점과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며 이에 기반해서 입장을 정리한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특히 대중적 쟁점이 되는 과학기술의 쟁점에서 이러한 대중의 입장과 자기 이해는 매우 중요할수밖에 없다. 핵폐기장 문제와 관련해서 첨예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대중적인 투쟁을 불러왔던 부안 핵폐기장 논쟁이 비근한 사례가 될 것이다. 대중들은 과학자들이 간과하는 사회적, 정치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때문에 순전히 '과학적' 판단을 하는 것보다 올바른 정책적 판단이 가능하다. (저자는 국내 사례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진행한 98, 99년의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에 대한 '합의회의'를 들고 있다. [유전자조작식품합의회의 자료/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예를 들어, 선천적 질환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유전자 검사는 어떨까? 과학자들이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선호할 수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기업에 의해서 노동자 채용에 적용될 때 드러나지 않고 발현될 지 확실치도 않은 유전적 특성 때문에 부당한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을 둘러싼 논쟁이 단지 과학적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제기된 논쟁만 해도 학교에서 지문인식기 사용, 전자주민카드, NEIS 등이 있고, 근골격계질환, 노동탄압으로 인한 정신질환 등 산업재해를 둘러싼 투쟁도 이러한 논쟁이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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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쟁점들에 노출된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해서 양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영화 등 대중문화를 통해서 유포되는 '미친 과학자' 이미지에 친숙하면서도 과학기술이 가져다줄 '장미빛 미래'를 지지한다. 나는 올해 개봉된 영화 '아일랜드'를 보면서 그 영화의 악역인 탐욕스런 경영자-과학자가 당시 열광을 불러오던 황우석과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숀빈이 연기한 '메릭 박사'는 인간복제로 돈을 버는 기업의 경영자이자 스스로 과학자인 인물이다. 생명과학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데 몰두할 뿐 아니라 --최근의 상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과학자이면서 비즈니스맨이고 거짓말장이라는 데 동일하다. 대중들은 영화 '아일랜드'에 호응하면서도 동시에 황우석에도 열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입장의 정합성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 과학기술에 대해서 가지는 양면적인 무의식을 드러내는 사례다.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 과학자의 지식 권력에 대한 공포와 함께 그것의 장미빛 진보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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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논쟁은 대중에게 개방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민주적 통제가 증진되어야한다. 과학기술이라는 것인 사회적인 맥락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과학 외적 개입은 필수적이다.(이러한 과학 외적 개입에는 저널리즘의 개입도 포함되는데, 저자는 한개의 장을 할해하여 논의를 소개한다. PD수첩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이 첨예한만큼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결국 과학 저널리즘의 목적이란 과학연구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갖춘 시민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판적 과학저널리즘은 과학활동이 내포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함의들, 의사결정을 뒷바침하는 증거의 성격 그리고 인간사에 적용되었을 때 과학이 보여주는 힘뿐만 아니라 그 한계까지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할 것이다.(166쪽)" PD수첩, 프레시안, 한겨레 등을 제외한 언론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보수적인 과학자들의 주장처럼 특수한 연구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도 사실은 과학 스스로의 내적 발전경로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미 자본이 이윤 추구에 직접적으로 종속된 과학 연구방향에 대해서 다른 대안을 제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생명공학 연구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료분야들이 있다. 황우석 지원 예산이면 당장 혈액질환자 고통 던다 /박주영 (민중의료연합))

 

그러나 이 과정이 제대로 된 대중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처럼 대중이 맹목적인 애국주의적 열광은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제대로된 토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과학기술 통제만을 이야기할 경우, 여기에는 대중의 합리적 토론을 만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한 문제가 간과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대중의 과학기술에 대한 권리는 자칫하면 이데올로기적 동원에 무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쟁점을 넘어서는 대중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더 사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중요한 문제 몇개를 제기한다.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에는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쟁점이 포함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지식이 과학지식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으며, 특히 환경, 보건과 같은 분야에서 그렇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고도로 생산력에 통합된 과학기술 생산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생산하고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지적 차이를 감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과학자 사회의 민주화'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요즘같은 상황에서 이 중요성은 더 부각된다. 저자가 두드러진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 여성과학자에 대한 진입장벽과 처우상의 차별 철폐 △ 불리한 조건에 처한 집단(장애인, 저소득층 등)이 과학기술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보장 △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 등 청년,소장과학자들의 발언권 보장 △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 등이다. 이 중 몇가지는 특히 이번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중요성이 더 부각된 쟁점들이다. 과학자 사회도 '과학'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당연하게도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과학적 진실이 억압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서 드러났다. (하긴 과학자 사회라고 다른 집단들과 다를 이유도 딱히 없는 것이다. 단지 '과학적'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환상이 있을 뿐이다. 하긴,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가지는 '객관성, 가치중립성, 엄정함,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실험' 등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말 뉴튼 과학의 성공으로부터 형성된 과학 이미지일 뿐이다. 이는 미신과 무지, 독단에 빠진 당시 사회를 과학적 성공의 모델에 따라 개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혹은 '오해'하였던)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이 오늘날에 남긴 하나의 규범적 허구에 불과"하다.(본문17쪽))

 

이번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많은 쟁점들이 평가되고 토론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지식에 대한 대중의 권리, 그리고 그것이 보장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대중이 '과학'을 '종교'로 수용하는 현실은 지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권리를 박탈되어온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둘러싼 쟁점이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쟁점이라는 것,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확인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쟁점들은 더 극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꾸준히, 그리고 중요하게 출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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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2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중국 현대사를 진지하게 다룬 이 책을 보면서 이제야 10여년 전에 보았던 사회주의 이행논쟁에서 중국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서사연에서 냈던 [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1991)에서는 특히 이행이론과 관련하여 스탈린주의와 함께 마오주의 입장을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단지 '대과도기론'이라는 결론으로만 인식했던 마오주의의 입장이 어떠한 역사적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현실에서 의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수 있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알튀세르가 당대에 마오주의로 이해되었고 마오의 영향을 실제로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투쟁 등,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강조한 정치적 명제들이 마오에게서 기원하거나 실마리를 얻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를 중국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중국 현대사를 사실들과 함께 역사적 쟁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덕분에 중국혁명과 마오주의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보다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오주의와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들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함으로써 역사목적론을 지양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 중국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로만 치닫는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중국에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쟁점이 있었는지, 따라서 현재와 앞으로 제기될 쟁점은 무엇인지 알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의의에 대한 소개는 월간 [사회운동] 5월호에 백승욱 선생이 쓴 아래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모리스 마이스너,『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백승욱]/ 2005.5

 

나는 다만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된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서만 아래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마오의 주의주의와 주체사상, 알튀세르

 

마오주의는 주의주의적 경향을 가진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전반부는 마오주의의 주의주의가 역사적 경혐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혹한 대장정의 시련에서 살아남았으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토대가 거의 부재한 거대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는 주의주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마오주의의 주관주의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경험에 영향을 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마오주의의 주의주의를 더 극단화시킨 하나의 변종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도 '사람'을 강조하고 '사람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북한에서는 다소 경직된 방식으로 변용되어 수용되었다. 마오주의에 함께 포함된 사회주의 하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이라든가,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과 같은 관념은 제거되고 다만 사람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관념론적 강조,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강화로 변용되었다. 마오주의의 대중노선과 대중에 대한 신뢰는, 몇번의 간접적 영향을 거쳐 남한의 NL까지 와서는 대중추수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변화되기도 한다.(역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후 한편에서는 60년대말 프랑스에서 알튀세르 등의 이데올로기론에 영향을 준다. 구조주의적으로 수용된 마오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대신 과학의 대상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사회주의 하의 계급투쟁

 

마오(와 그 동료들)는 1949년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혁명이 하나의 일회적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혁명이 장기적 과정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로부터 중요한 정치적 결론들이 도출된다.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 이후에도 계급적 모순은 소멸되지 않는다. 중국은 50년대를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지주와 자본가라는 구 지배계급을 인적으로 소멸시켰지만 계급투쟁은 소멸하지 않는다. 마오는 그것을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잔재 때문인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된다. 계급투쟁은 사상투쟁의 형태를 띈다고 규정되었는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다. 이로부터 50년대 후반의 백화운동, 6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의 사회주의 하에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 제기된다.

 

마오는 이러한 쟁점을 단지 '논쟁'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동원함을 통해서 제기하고 물질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할 뿐 아니라, 그것이 대중운동에 의해 제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진정한 혁명적 잠재력이 당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는 자발적 농민운동에 있다는 점, 오히려 대중운동에 대해 당이 지체될 수 있다는 관점은 무오류-일괴암성이라는 레닌주의적인 당 관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실재로도 그런 차이가 제대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정통'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은 물론 실용적인 이유에서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은 반복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당의 통치성을 회복하려 할 때마다 이 점이 강조되었다.)

 

다만 마오는 대중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의 과제를 제기해야한다는 점은 충분히 강조했지만, 바로 그 계급투쟁의 모순이 대중운동 자체도 관통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따라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인민' 내부에조차 이미 차이와 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오는 '인민'의 규정을 제한함을 통해서 문제를 편의적으로 해결했을 뿐이다.) 마오는 매 계기마다 최종적으로는 기존의 국가기구를 방어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대중운동을 억압했다.

 

사상의 자유를 확대하고 논쟁을 촉발한 백화운동의 예를 보자. 백화운동은 결국 인민의 단결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는데, 이는 '인민'은 기본적으로 단결된 통일체라는 운동의 전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 결과, 백화운동이 '통제 가능선'을 넘어서자  이단색출로 전환되어 탄압이 시작된다. 인민이 그 목표와 이해관계에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관점을 보인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분열을 낳는다면 운동을 끝낸다는 것이다. 인민-대중 자체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마오는 백화운동에 뛰어든 지식인들-사회주의 비평가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이를 추동하여 당내의 우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촉발시킨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선다. 마이스너는 마오가 지적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마오는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마오는 '만약 우리가 사회체제를 공고히 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이 체제를 반영하는 사상이 융통성을 잃을 것이고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자기의 사상을 맞추어 나가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그 한도에 대해서는 당-조직과 국가기구의 유지라는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운동과 인민주의, 개인숭배

 

문화대혁명도 마찬가지로, 당과 국가의 관료화의 우경화에 대항하여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통해 당과 국가를 개조하려고한 시도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혁명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방식에 의해야한다는 점을 마오는 정확하게 지적했다. 훗발 '대재앙'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사건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결정적으로 제기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중운동의 폭발은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를 경유해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개인숭배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 현상으로, 한편으로 이것은 인민이 사회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개인숭배는 단순히 대중이 자기 위에 선 국가의 권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지의 체현이자 모든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는 한 인간의 최고권위에 자기(그리고 자기의 권력)를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오숭배는 사회권력의 소외가 정치적 귄위에 대한 맹복적 숭배로 나타났던 역사적 현상들 중 가장 극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에 개인숭배는 시민이 그들 위에 군립하는 관료기구를 공격하고 권위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 마오가 당을 경유하지 않고 대중과 직접 관계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중의 진출을 위한 정치적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이 대중의 진정한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대중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실재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던 홍위병, 활동가, 대중들은 마오와 당에게 모두 배신당하고 상하이 등에서 그들이 형성한 각 지역 코뮌은 모두 분쇄되거나 화석화된다.

 

중국혁명이 진행과정에서, 혁명 이후 체제에서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동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좀 더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농민이 압도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농촌이 급진화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중국의 인민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20세기초의 인민주의 보다는 19세기의 (미국이나 러시아의) 농민적 인민주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주의 비판](공감/2005)을 참고)

 

계급투쟁의 물질적 토대

 

문화혁명의 과정이 마오주의의 주의주의적 경향과 맞물려, 물질적 토대의 변화와 결합되지 않은 주관주의적인 계급투쟁의 일면적 강조로 나가는 측면이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의 평가가 그렇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강하지만, 반드시 물질적 근거가 간과된 것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이러한 다양하게 제기된 '계급투쟁' 과정에서 생산력 증대라는 과제에서도 자본주의를 모방한 소련식의 산업화가 아니라 농촌에 기반한 대안적인 전략을 채택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초기에 실시되었던 소련식의 경제개발 계획은 대약진운동 등이 정리된 이후에도 소련식의 중공업 일방 우선과 다른 방식의 경제계획이 입안되었다. 또한 농업 집단화와 농촌의 공업화 등에서도 소련의 경험과는 다른 실험이 이루어졌다.

 

생산력의 성격이라는 것이 계급투쟁과 분리되어 순전히 양으로 환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계급투쟁의 성과를 생산관계에서 물질적으로 남기는 과정은 인민공사의 설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민공사에 도입된 '공산주의' 요소

 

대약진 운동 기간 설립이 촉발된 인민공사에는 여러가지 '공산주의' 요소가 도입되었다. (공사=코뮌) 이는 매우 의식적인 작업이기도 했는데, 중국공산당이 단순히 협동농장을 생산력증대의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생활 단위를 만드려고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농촌의 소공업을 통해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교육과 산업활동을 결합하는 등 도시-농촌의 구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 지적차이 감축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적차이의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가는 문제가 있는데 이후 마오가 보여준 반지성주의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이후 당시의 제도 교육에 대한 불신 속에서, 청년들이 너무 책을 많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노동현장의 실천적 지식'을 일면적으로 강조할 경우 경험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지 않는 과학들을 경시할 수 있다. 이는 지적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마오 이후, 중국에서의 계급투쟁

 

마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최고실력자가 된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에는 민주적 내용이나 사회주의적 내용도 없었다.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생산품과 노동조건을 통제하는 수단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제도적 조건도 전혀 고민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반적 이해(하지만 스탈린주의적 이해)처럼, 사회주의는 생산에 대한 국가통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심지어 주요모순이 적대적 사회세력간의 모순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적 사회주의 제도'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생산력을 사회주의 제도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모근 것을 무시하고 생산력 발전만 추구하는 정책이 이후 지속된다. 심지어 농업집단화를 해체-후퇴하면서 사회발전 수준과 경제발전 수준사이의 모순이 어느정도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궤변도 등장한다. 사회주의 몰락과 포기로 인한 이데올로기 공백을 공산당 정권은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로 매꾸었다. 대중매체를 통해 애국주의 열풍이 추동된다. 마오 이후에 이데올로기가 다시 강조된 셈이다.

 

그나마 혁명의 지향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던 5.4운동 세대의 원로 공산주의자들이 사망하면서, 새로 등장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당관료 출신의 인사들이다. 덩사오핑 이후의 실권자로 등장한 장쩌민은 사회주의가 21세기 말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주의는 현재의 희망이나 행동과는 사실상 단절된 먼 미래의 일로 연기되고 사회주의는 결국 무의미한 수사가 되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들어, 공산당 간부가 앞장서서 자본가로 변신하고,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며, 새롭고 거대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거대한 노동자층은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불안정노동자들이다.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이 갈등을 몰고 다니고, 자본의 이동에 따라 새로 형성되는 노동자 대중이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등장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전망은 지배정당이 공산당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운동에서 시작될 것이다.

 

중국에서 새롭게 형성된 부르조아지도 정치적 변화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현 자체가 당 관료로서 특권에서 가능했을 뿐더러 이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것도 중국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이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그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는데 있어 혁명적 세력이 될 수는 없다. 계급들이 혁명적일 수 있는 상황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정세와 계급역관계에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중국 사회주의의 진짜 근원은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루어질 공산주의 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성숙 속에서가 아니라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공산당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투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 그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파괴에 반대하는 투쟁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행위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독립적인 노조설립의 자유는 가장 치열한 정치적 쟁점이다.

 

평가를 위한 질문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마오주의는 근대적 경제발전의 수단과 사회주의의 목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딜레마와 정면대결한 이론이기는 했지만 대중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점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는 국가권력을 생산자들의 자치정부로 바꾸어가는 시기라는 점과 사회주의는 국가소유가 아니라 '연합된 생산자 소유'라는 점을 간과한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똑같은 한계를 마오도 보여주었다. 마오의 비-스탈린주의적 전략이 결국 스탈린주의와 같은 한계를 보여주고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책을 보면서 마지막 의문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50~60년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 하에서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새로운 지배국가로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혁명을 계속 진전시켜나가려고했으며 이행기 사회 자체에 공산주의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스탈린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결과를, 곧 이어 실용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도 넘어서지 못한 물질적 한계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사상이론적, 실천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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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고길섶 지음 / 앨피

 

 

부안 이후, 방폐장 선정을 위한 주민 투표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주, 군산, 영덕, 포항 등 4곳에서 주민투표가 진행된다. 금권과 탈법이 난무하고, 주민들에 대한 기만이 판치고 있다. 핵폐기장 유치가 거대한 지역이권 사업이 되어 한수원과 지자체의 돈놀음에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다. 사회단체들은 투표의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다.([프레시안]"방폐장투표 강행시 '원천무효'행동에 나설것") 이런 상황에서 부안투쟁을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내내 진짜 민주주의가 투쟁 속에서 살아나는 모습에, 책장 곳곳 글과 사진에서 눈시울이 불어지고 코끝이 찡하다. 파업배낭같은 '핵폐기장보따리'를 메고 추운 아스팔트 반핵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주민들의 투쟁은 하나하나가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며칠후 방폐장 주민투표가 걱정되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이 감동들은 어쩔 수가 없다.



문화평론가로 잘 알려져있는 고길섶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인 부안에서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었다. 대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에 직접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혁명을 경험했던 것이다. 고길섶이 부안에서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안을 밖에서 지켜보았던 우리같은 독자들에게도 행운인데, 덕분에 부안투쟁을 보다 잘 정리된 형태로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안투쟁을 해석하는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든, 일부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간에 말이다. (사실 나는 고길섶의 자율주의, 들뢰즈주의의 입장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한다.)

 

저자는 부안항쟁을 통해서 부안은 반핵과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적 장소로 출현하였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의 고부, 20세기 말의 광주에 이어서 21세기 초의 부안. 대중이 봉기하였고, 절대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민주주의가 전면화된 저항의 공간.

 

정세적으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의 엘리트가 대중을 미혹하는 지역화된 발전주의의 미망, 에너지 체계의 모순, 지역과 중앙에서의 인민주의적 정치, 이들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로서 민주주의의 파괴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모순들은 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 '반주변의 주변'지역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모순을 망라한 것이다.

 

소외된 주변지역으로서 전북 발전주의의 산물인 새만금간척사업과 영광원전 사업으로 인해 어장이 파괴되고 피폐해진 위도에, 핵쓰레기장 유치가 현금 보장을 쥐어줄 것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이래저래 생존권을 파괴하고 다시 그런 상황을 이용해 핵폐기장을 강요하는 황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부안항쟁은 특히 김종규 부안군수의 반민주적인 폭거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단순히 반핵만으로는 이렇게 떨쳐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들의 손에 선출되었으면서도 주민들과 정반대의 의사 결정을 폭력적으로 내리는 군수는 주민들의 투쟁이 민주주의 투쟁이 되도록 했다. 대의제의 모순이 폭발하였고, 대중들은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로 나섰다. 그 일환으로 2.14 주민투표가 진행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적인 행위들은 대중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된 각종 투쟁이었다. 삭발, 촛불집회, 해상시위, 고속도로 점거, 삼보일배, 수업거부 등 주민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놀라운 장면들. 주민들은 어디서 심오하게 배운적없는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현해갔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급속하게! 대중의 민주주의적 역능을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할 때 보이는 모습과도 같지만 대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전면적이고 더 자율적이었다.

 

김종규 군수는 꼬마 노무현이라고 할만하다. 주민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당선된 것도 그렇고, 직접적으로는 노무현이 총애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스타일은 인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 정치이념의 위기를 반영하는 퇴행적인 정치스타일. 부안은 그것이 얼마나 반민주적인지, 그리고 대중들의 민주주의 투쟁이 그것의 허구성을 얼마나 신속하게 폭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투쟁의 시기는 지났다는 헛소리를 부안에 대한 탄압으로 몸소 실천했다. 경철계엄이라고 불린 부안의 2003년말 상황은, 단지 수사적인 비유가 아니라 그 폭력의 강도에서 볼 때 직접적인 살인만 피했다 뿐이지 군대의 계엄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창집)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최원)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안항쟁은 '민주주의의 이후의 민주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에서조차 대중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길섶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도식을 활용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고길섭은 또한 부안의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가 아닌 '자치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정치이념으로서의 대의민주주의 보완물, 보충에 불과한 '참여'가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점에서 '자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길섶이 부안을 일컬어 '코뮌'이라고 했던 것처럼, 대중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행위다. '참여민주주의'를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NGO를 동원, '참여'시키면서 통치를 정당화하려 할 때, 사회운동이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화 세력' 운운하면서 대중을 동원하는 인민주의적 정치스타일은 이러한 대중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고길섶은 부안항쟁이 여성들의 정치적 진출이 특징적이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구조에서 해방되는 계기를 포착했다는 점, 어느 주체들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지키는 운동에 강렬하게 나섰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들이 저항 정치의 과정에서도 오히려 수동화되는 장면들을 자주 목격했던 상황에서 이례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투쟁이라는 점,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대중들 안에서도 민주적 관계를 촉발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여성들만이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들도 수업거부, 대안수업, 촛불집회, 문화행사, 삼보일배 등을 통해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발언했다. 수업거부의 결정과정에서 자기 의사를 말하고, 각종 투쟁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으로 누가 결정해준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입장을 발언하며, '모의투표' 형식이기는 하기만 스스로 투표를 조직하기도 했다. 근대의 인구관리에서 무능력자로 관리의 대상이었던 어린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정치적 성숙은 그들을 과소인간을 보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부안주민들은 투쟁과정에서 부안에만 핵이 없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핵이 사라져야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성찰한 결과다. 그것은 투쟁이 과정에서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 사회운동들과 대화하고 서로를 교육한 결과이기도 하다. 매일 집회에서 사회운동가, 지식인들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고길섶은 그것은 강사가 대중을 교육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상호교통을 통해서 강사가 교육받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우리가 만들어가야한 대안적 대중교육은 부안의 집회에서 보여진 장면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고길섶은 마지막으로 부안항쟁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주민들의 민주적 의지를 결집하는 성과를 남기지 못한 이유로 대책위의 패권주의와 독단을 들고 있다. 익히 노동운동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운동권력'들이 거기에도 있었나보다. 전북 지역동지들에게 직접 들어보아도, 부안군농민회 주류 등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노무현 정권의 반민주적 폭거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우선시하고 일부는 선거 때도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등, 부안항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에 동원되는 NGO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대중의 투쟁 성과를 물질적 성과로 남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제 내일이면 각 지역에서 방폐장 주민투표가 부안 못지않게 기만과 협잡, 폭력 속에서 치루어진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보통투표행위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대중을 속이고 동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배제한 이 지역들에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있다. 사회운동들의 실펀이, 비록 협잡과 사기의 주민투표 결과가 어떻든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안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생태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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