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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지혜 제임스 서로위키 지음, 홍대운 외 옮김 / 랜덤하우스중앙 흥미롭게도 대중에 관한 실용적 연구. 대중운동의 입장에서 대중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대한 논의가 많이 있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연역적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책도 부제가 '시장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데서 보이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대중이 어떻게 움직이는가하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다.(물론 금융세계화 시대인만큼 '시장'이란 주식시장이다.) 게다가 저자가 예시하는 사례들은 마치 완전경쟁 시장이라는 이념에 가까운 자본주의가 대중들에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브로델의 지적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본질은 독점일 뿐 아니라 저자 스스로도 비추고 있듯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교통이다. 이 책은 미국인들 특유의 실용적인 접근 때문에, 굳이 자유'시장'에 적용하지 않더라고 충분히 적용 가능한 몇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는 대중이 무지한 집단이라는 통념에 반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중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들보다 훨씬 그렇다고 주장한다. 주장을 위한 예들은 간단하지만 흥미롭다. 단지 안에 들어있는 구슬의 수를 가장 정확히 알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평균을 내면 된다는 것. 실제로 가장 가까운 근사치에 접근한다. 이런 식으로 (훨씬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아마도 사회적 쟁점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은 알 수 없지만 집단은 답을 알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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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중이 이러한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전제를 제시한다. 개방성과 독립성, 다양성을 유지할 수있다면 집단은 그만큼 실수를 피할 수 있다는 것. 반대로 (집단의 크기를 떠나서) 다양성을 억압하고 통일을 강요한다면 대중들도 잘 못된 판단에 이른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독립적이지 못하고 타인에 의존적일 수록 잘 못된 판단이 많아진다. 과학기술과 같은 분야에서는 정보가 서로 공유될 수록 집단적 사고, 토론(교통)을 통해서 올바른 해답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중은 현명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흥미롭다. 여기서 저자가 제안하는 조건의 목록들은 대중정치가 활성화되기 위한 조건과도 거의 일치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개인들이 충분히 독립적인 상황에서는 상호 교통을 통해서 가장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 교통과 토론을 통해서 얻는 결론은, 무작위 투표의 평균값을 내서 어떤 값을 맞추는 방식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해결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선전은 많은 경우 압도적이어서 성공적으로 작동하며 개인들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침식한다. 민주적인 토론은 방해되며 정보는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중의 움직임에는 항상 지배-이데올로기이든 피지배-이데올로기이든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없이 대중은 행동하지 않는데, 우리가 미식축구 결과 예측과 같이 대중의 행동이 필요없는 어떤 것을 예측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행동을 조직하려 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 항에 대한 사고는 필수적이다. 사고와 행동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이데올로기는 이 책의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을 잘 못된 판단에 이르게하는 '타인의존적 사고'의 요인이 될 수 있다.(이데올로기는 동일시/정체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없이는 주체가 불가능한 이상, 원하든 원치않든 이데올로기는 객관적 현실이며 대중은 이에 근거해서 움직인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중이 충분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가 된다.
여기서는 아마 스피노자를 인용해야할 것이다. (발리바르에 의해 해석된 스피노자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만.)
..정서적 교통은 대중이라는 개념자체이다. 하지만 노력[코나투스]이 각자의 욕망에서부터 도시 안에서 모든 사람의 욕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교통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교통관계가 항상 양극성에 따라 분석되어야함을 의미한다. ▲ 미신에 상응하는 양극 중 교통은 전적으로 동일시/정체화 메커니즘, 곧 실재적 독특성들에 대한 몰인식의 매커니즘의 지배를 받는다. ▲ 반대로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작용인 "공통의 통념들"의 긍정에 상응하는 다른 극에서 교통은 적합한 인식과, 개인들의 역량을 배가하는 기쁜 변용들의 통일체이다. -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진태원 역 中) 194쪽 [밑줄/기호는 인용자]
그러나 곧 하나의 아포리아에 봉착한다. 그 두가지가 어떻게 구분-분리될 수 있는가? 동일시/정체화 매커니즘과 "공통의 통념들"의 형성은 분리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오히려 모순적인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하나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다면, 이는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심원한 새로움을 지닌 한 관념의 맞짝일 뿐이다. 이는 모순적인 관계인 한에서 공통적인 일치라는 관념(기계론적이거나 유기체론적인 변형들을 포함하여)과 무관한 어떤 교통이라는 관념의 새로움이다. -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진태원 역 中) 195쪽
결 국, 교통의 양가적인 성격은 대중의 양가성까지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손쉽게 대중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의 목록을 작성하지만, 죄송하게도 현실에서 저자가 배제할 것을 요구한 요소들은 제거가능한 개개의 '요소들'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본질 자체이다. 대중은 이데올로기없이 행동하거나 심지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용적인' 수준에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항들이 있다. 대중이 독립성과 지성을 증진하고 상호 교통을 활성화하는 것을 통해서, 대중의 판단이 수동성('슬픈 정념')에서 능동성('기쁜 정념')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능동성은 대중이 새로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또 한편, 대중 전체라기 보다는 집단 내부에서 교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집단적 판단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가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다. '실패하는 소집단은 소수의견을 무시한다'는 지적이나,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지적. 최악의 경우는 만장일치를 강요하는 것이다. 입장이 대립할 경우 '집단극화현상'이라고 불리는 집단 내 의견들의 양쪽(극단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한다. 노동조합 내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비일비재한데, 집단 내 의견의 다양성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집단적 판단이 오히려 우둔한 판단이 되는 상황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반대 의견과 토론을 억압하고, 반대의견의 존재 자체를 '지도력의 위기'로, 나아가 '노동운동의 위기'로 인식한 지난 민주노총 집행부가 떠오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스스로가 '노동운동의 위기'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대중은 가장 현명하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에서. 그 '특정한 조건'--이것이 바로, '정세'이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대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주어진 숙제라는 점을 이 책과 저자가 봉착한 난점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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