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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중국 현대사를 진지하게 다룬 이 책을 보면서 이제야 10여년 전에 보았던 사회주의 이행논쟁에서 중국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서사연에서 냈던 [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1991)에서는 특히 이행이론과 관련하여 스탈린주의와 함께 마오주의 입장을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단지 '대과도기론'이라는 결론으로만 인식했던 마오주의의 입장이 어떠한 역사적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현실에서 의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수 있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알튀세르가 당대에 마오주의로 이해되었고 마오의 영향을 실제로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투쟁 등,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강조한 정치적 명제들이 마오에게서 기원하거나 실마리를 얻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를 중국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중국 현대사를 사실들과 함께 역사적 쟁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덕분에 중국혁명과 마오주의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보다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오주의와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들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함으로써 역사목적론을 지양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 중국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로만 치닫는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중국에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쟁점이 있었는지, 따라서 현재와 앞으로 제기될 쟁점은 무엇인지 알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의의에 대한 소개는 월간 [사회운동] 5월호에 백승욱 선생이 쓴 아래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모리스 마이스너,『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백승욱]/ 2005.5
나는 다만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된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서만 아래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마오의 주의주의와 주체사상, 알튀세르
마오주의는 주의주의적 경향을 가진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전반부는 마오주의의 주의주의가 역사적 경혐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혹한 대장정의 시련에서 살아남았으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토대가 거의 부재한 거대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는 주의주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마오주의의 주관주의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경험에 영향을 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마오주의의 주의주의를 더 극단화시킨 하나의 변종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도 '사람'을 강조하고 '사람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북한에서는 다소 경직된 방식으로 변용되어 수용되었다. 마오주의에 함께 포함된 사회주의 하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이라든가, 당을 관통하는 계급투쟁과 같은 관념은 제거되고 다만 사람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관념론적 강조,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강화로 변용되었다. 마오주의의 대중노선과 대중에 대한 신뢰는, 몇번의 간접적 영향을 거쳐 남한의 NL까지 와서는 대중추수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변화되기도 한다.(역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후 한편에서는 60년대말 프랑스에서 알튀세르 등의 이데올로기론에 영향을 준다. 구조주의적으로 수용된 마오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대신 과학의 대상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사회주의 하의 계급투쟁
마오(와 그 동료들)는 1949년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혁명이 하나의 일회적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혁명이 장기적 과정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로부터 중요한 정치적 결론들이 도출된다.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 이후에도 계급적 모순은 소멸되지 않는다. 중국은 50년대를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지주와 자본가라는 구 지배계급을 인적으로 소멸시켰지만 계급투쟁은 소멸하지 않는다. 마오는 그것을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잔재 때문인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된다. 계급투쟁은 사상투쟁의 형태를 띈다고 규정되었는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다. 이로부터 50년대 후반의 백화운동, 6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의 사회주의 하에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 제기된다.
마오는 이러한 쟁점을 단지 '논쟁'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동원함을 통해서 제기하고 물질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할 뿐 아니라, 그것이 대중운동에 의해 제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진정한 혁명적 잠재력이 당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는 자발적 농민운동에 있다는 점, 오히려 대중운동에 대해 당이 지체될 수 있다는 관점은 무오류-일괴암성이라는 레닌주의적인 당 관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실재로도 그런 차이가 제대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정통'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은 물론 실용적인 이유에서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은 반복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당의 통치성을 회복하려 할 때마다 이 점이 강조되었다.)
다만 마오는 대중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의 과제를 제기해야한다는 점은 충분히 강조했지만, 바로 그 계급투쟁의 모순이 대중운동 자체도 관통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따라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인민' 내부에조차 이미 차이와 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오는 '인민'의 규정을 제한함을 통해서 문제를 편의적으로 해결했을 뿐이다.) 마오는 매 계기마다 최종적으로는 기존의 국가기구를 방어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대중운동을 억압했다.
사상의 자유를 확대하고 논쟁을 촉발한 백화운동의 예를 보자. 백화운동은 결국 인민의 단결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는데, 이는 '인민'은 기본적으로 단결된 통일체라는 운동의 전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 결과, 백화운동이 '통제 가능선'을 넘어서자 이단색출로 전환되어 탄압이 시작된다. 인민이 그 목표와 이해관계에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관점을 보인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분열을 낳는다면 운동을 끝낸다는 것이다. 인민-대중 자체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마오는 백화운동에 뛰어든 지식인들-사회주의 비평가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이를 추동하여 당내의 우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촉발시킨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선다. 마이스너는 마오가 지적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제도가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마오는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마오는 '만약 우리가 사회체제를 공고히 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이 체제를 반영하는 사상이 융통성을 잃을 것이고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자기의 사상을 맞추어 나가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그 한도에 대해서는 당-조직과 국가기구의 유지라는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운동과 인민주의, 개인숭배
문화대혁명도 마찬가지로, 당과 국가의 관료화의 우경화에 대항하여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통해 당과 국가를 개조하려고한 시도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혁명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방식에 의해야한다는 점을 마오는 정확하게 지적했다. 훗발 '대재앙'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사건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결정적으로 제기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중운동의 폭발은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를 경유해서 이루어졌다. 저자는 개인숭배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 현상으로, 한편으로 이것은 인민이 사회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개인숭배는 단순히 대중이 자기 위에 선 국가의 권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지의 체현이자 모든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는 한 인간의 최고권위에 자기(그리고 자기의 권력)를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오숭배는 사회권력의 소외가 정치적 귄위에 대한 맹복적 숭배로 나타났던 역사적 현상들 중 가장 극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에 개인숭배는 시민이 그들 위에 군립하는 관료기구를 공격하고 권위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 마오가 당을 경유하지 않고 대중과 직접 관계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중의 진출을 위한 정치적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이 대중의 진정한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대중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실재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던 홍위병, 활동가, 대중들은 마오와 당에게 모두 배신당하고 상하이 등에서 그들이 형성한 각 지역 코뮌은 모두 분쇄되거나 화석화된다.
중국혁명이 진행과정에서, 혁명 이후 체제에서 이러한 인민주의적인 정치동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좀 더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농민이 압도적이었고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농촌이 급진화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중국의 인민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20세기초의 인민주의 보다는 19세기의 (미국이나 러시아의) 농민적 인민주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주의 비판](공감/2005)을 참고)
계급투쟁의 물질적 토대
문화혁명의 과정이 마오주의의 주의주의적 경향과 맞물려, 물질적 토대의 변화와 결합되지 않은 주관주의적인 계급투쟁의 일면적 강조로 나가는 측면이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사회주의의 이론.역사.현실]의 평가가 그렇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강하지만, 반드시 물질적 근거가 간과된 것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이러한 다양하게 제기된 '계급투쟁' 과정에서 생산력 증대라는 과제에서도 자본주의를 모방한 소련식의 산업화가 아니라 농촌에 기반한 대안적인 전략을 채택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초기에 실시되었던 소련식의 경제개발 계획은 대약진운동 등이 정리된 이후에도 소련식의 중공업 일방 우선과 다른 방식의 경제계획이 입안되었다. 또한 농업 집단화와 농촌의 공업화 등에서도 소련의 경험과는 다른 실험이 이루어졌다.
생산력의 성격이라는 것이 계급투쟁과 분리되어 순전히 양으로 환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계급투쟁의 성과를 생산관계에서 물질적으로 남기는 과정은 인민공사의 설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민공사에 도입된 '공산주의' 요소
대약진 운동 기간 설립이 촉발된 인민공사에는 여러가지 '공산주의' 요소가 도입되었다. (공사=코뮌) 이는 매우 의식적인 작업이기도 했는데, 중국공산당이 단순히 협동농장을 생산력증대의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생활 단위를 만드려고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농촌의 소공업을 통해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교육과 산업활동을 결합하는 등 도시-농촌의 구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 지적차이 감축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적차이의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가는 문제가 있는데 이후 마오가 보여준 반지성주의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이후 당시의 제도 교육에 대한 불신 속에서, 청년들이 너무 책을 많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노동현장의 실천적 지식'을 일면적으로 강조할 경우 경험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지 않는 과학들을 경시할 수 있다. 이는 지적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마오 이후, 중국에서의 계급투쟁
마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최고실력자가 된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에는 민주적 내용이나 사회주의적 내용도 없었다.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생산품과 노동조건을 통제하는 수단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제도적 조건도 전혀 고민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반적 이해(하지만 스탈린주의적 이해)처럼, 사회주의는 생산에 대한 국가통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심지어 주요모순이 적대적 사회세력간의 모순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적 사회주의 제도'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생산력을 사회주의 제도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모근 것을 무시하고 생산력 발전만 추구하는 정책이 이후 지속된다. 심지어 농업집단화를 해체-후퇴하면서 사회발전 수준과 경제발전 수준사이의 모순이 어느정도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궤변도 등장한다. 사회주의 몰락과 포기로 인한 이데올로기 공백을 공산당 정권은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로 매꾸었다. 대중매체를 통해 애국주의 열풍이 추동된다. 마오 이후에 이데올로기가 다시 강조된 셈이다.
그나마 혁명의 지향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던 5.4운동 세대의 원로 공산주의자들이 사망하면서, 새로 등장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당관료 출신의 인사들이다. 덩사오핑 이후의 실권자로 등장한 장쩌민은 사회주의가 21세기 말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주의는 현재의 희망이나 행동과는 사실상 단절된 먼 미래의 일로 연기되고 사회주의는 결국 무의미한 수사가 되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들어, 공산당 간부가 앞장서서 자본가로 변신하고,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며, 새롭고 거대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거대한 노동자층은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불안정노동자들이다.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이 갈등을 몰고 다니고, 자본의 이동에 따라 새로 형성되는 노동자 대중이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등장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전망은 지배정당이 공산당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운동에서 시작될 것이다.
중국에서 새롭게 형성된 부르조아지도 정치적 변화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현 자체가 당 관료로서 특권에서 가능했을 뿐더러 이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것도 중국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이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그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는데 있어 혁명적 세력이 될 수는 없다. 계급들이 혁명적일 수 있는 상황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정세와 계급역관계에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중국 사회주의의 진짜 근원은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루어질 공산주의 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성숙 속에서가 아니라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공산당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투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 그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파괴에 반대하는 투쟁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행위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독립적인 노조설립의 자유는 가장 치열한 정치적 쟁점이다.
평가를 위한 질문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마오주의는 근대적 경제발전의 수단과 사회주의의 목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딜레마와 정면대결한 이론이기는 했지만 대중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점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는 국가권력을 생산자들의 자치정부로 바꾸어가는 시기라는 점과 사회주의는 국가소유가 아니라 '연합된 생산자 소유'라는 점을 간과한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똑같은 한계를 마오도 보여주었다. 마오의 비-스탈린주의적 전략이 결국 스탈린주의와 같은 한계를 보여주고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책을 보면서 마지막 의문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50~60년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 하에서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새로운 지배국가로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혁명을 계속 진전시켜나가려고했으며 이행기 사회 자체에 공산주의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스탈린주의와 구별되지 않는 결과를, 곧 이어 실용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도 넘어서지 못한 물질적 한계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사상이론적, 실천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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