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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고길섶 지음 / 앨피

 

 

부안 이후, 방폐장 선정을 위한 주민 투표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주, 군산, 영덕, 포항 등 4곳에서 주민투표가 진행된다. 금권과 탈법이 난무하고, 주민들에 대한 기만이 판치고 있다. 핵폐기장 유치가 거대한 지역이권 사업이 되어 한수원과 지자체의 돈놀음에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다. 사회단체들은 투표의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다.([프레시안]"방폐장투표 강행시 '원천무효'행동에 나설것") 이런 상황에서 부안투쟁을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내내 진짜 민주주의가 투쟁 속에서 살아나는 모습에, 책장 곳곳 글과 사진에서 눈시울이 불어지고 코끝이 찡하다. 파업배낭같은 '핵폐기장보따리'를 메고 추운 아스팔트 반핵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주민들의 투쟁은 하나하나가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며칠후 방폐장 주민투표가 걱정되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이 감동들은 어쩔 수가 없다.



문화평론가로 잘 알려져있는 고길섶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인 부안에서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었다. 대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에 직접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혁명을 경험했던 것이다. 고길섶이 부안에서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안을 밖에서 지켜보았던 우리같은 독자들에게도 행운인데, 덕분에 부안투쟁을 보다 잘 정리된 형태로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안투쟁을 해석하는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든, 일부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간에 말이다. (사실 나는 고길섶의 자율주의, 들뢰즈주의의 입장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한다.)

 

저자는 부안항쟁을 통해서 부안은 반핵과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적 장소로 출현하였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의 고부, 20세기 말의 광주에 이어서 21세기 초의 부안. 대중이 봉기하였고, 절대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민주주의가 전면화된 저항의 공간.

 

정세적으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의 엘리트가 대중을 미혹하는 지역화된 발전주의의 미망, 에너지 체계의 모순, 지역과 중앙에서의 인민주의적 정치, 이들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로서 민주주의의 파괴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모순들은 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 '반주변의 주변'지역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모순을 망라한 것이다.

 

소외된 주변지역으로서 전북 발전주의의 산물인 새만금간척사업과 영광원전 사업으로 인해 어장이 파괴되고 피폐해진 위도에, 핵쓰레기장 유치가 현금 보장을 쥐어줄 것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이래저래 생존권을 파괴하고 다시 그런 상황을 이용해 핵폐기장을 강요하는 황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부안항쟁은 특히 김종규 부안군수의 반민주적인 폭거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단순히 반핵만으로는 이렇게 떨쳐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들의 손에 선출되었으면서도 주민들과 정반대의 의사 결정을 폭력적으로 내리는 군수는 주민들의 투쟁이 민주주의 투쟁이 되도록 했다. 대의제의 모순이 폭발하였고, 대중들은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로 나섰다. 그 일환으로 2.14 주민투표가 진행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적인 행위들은 대중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된 각종 투쟁이었다. 삭발, 촛불집회, 해상시위, 고속도로 점거, 삼보일배, 수업거부 등 주민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놀라운 장면들. 주민들은 어디서 심오하게 배운적없는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현해갔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급속하게! 대중의 민주주의적 역능을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할 때 보이는 모습과도 같지만 대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전면적이고 더 자율적이었다.

 

김종규 군수는 꼬마 노무현이라고 할만하다. 주민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당선된 것도 그렇고, 직접적으로는 노무현이 총애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스타일은 인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 정치이념의 위기를 반영하는 퇴행적인 정치스타일. 부안은 그것이 얼마나 반민주적인지, 그리고 대중들의 민주주의 투쟁이 그것의 허구성을 얼마나 신속하게 폭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투쟁의 시기는 지났다는 헛소리를 부안에 대한 탄압으로 몸소 실천했다. 경철계엄이라고 불린 부안의 2003년말 상황은, 단지 수사적인 비유가 아니라 그 폭력의 강도에서 볼 때 직접적인 살인만 피했다 뿐이지 군대의 계엄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창집)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최원)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안항쟁은 '민주주의의 이후의 민주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제된 지역에서조차 대중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길섶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도식을 활용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고길섭은 또한 부안의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가 아닌 '자치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정치이념으로서의 대의민주주의 보완물, 보충에 불과한 '참여'가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점에서 '자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길섶이 부안을 일컬어 '코뮌'이라고 했던 것처럼, 대중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행위다. '참여민주주의'를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NGO를 동원, '참여'시키면서 통치를 정당화하려 할 때, 사회운동이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안항쟁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화 세력' 운운하면서 대중을 동원하는 인민주의적 정치스타일은 이러한 대중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고길섶은 부안항쟁이 여성들의 정치적 진출이 특징적이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구조에서 해방되는 계기를 포착했다는 점, 어느 주체들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지키는 운동에 강렬하게 나섰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들이 저항 정치의 과정에서도 오히려 수동화되는 장면들을 자주 목격했던 상황에서 이례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투쟁이라는 점,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대중들 안에서도 민주적 관계를 촉발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여성들만이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들도 수업거부, 대안수업, 촛불집회, 문화행사, 삼보일배 등을 통해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발언했다. 수업거부의 결정과정에서 자기 의사를 말하고, 각종 투쟁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으로 누가 결정해준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입장을 발언하며, '모의투표' 형식이기는 하기만 스스로 투표를 조직하기도 했다. 근대의 인구관리에서 무능력자로 관리의 대상이었던 어린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정치적 성숙은 그들을 과소인간을 보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부안주민들은 투쟁과정에서 부안에만 핵이 없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핵이 사라져야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성찰한 결과다. 그것은 투쟁이 과정에서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 사회운동들과 대화하고 서로를 교육한 결과이기도 하다. 매일 집회에서 사회운동가, 지식인들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고길섶은 그것은 강사가 대중을 교육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상호교통을 통해서 강사가 교육받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우리가 만들어가야한 대안적 대중교육은 부안의 집회에서 보여진 장면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고길섶은 마지막으로 부안항쟁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주민들의 민주적 의지를 결집하는 성과를 남기지 못한 이유로 대책위의 패권주의와 독단을 들고 있다. 익히 노동운동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운동권력'들이 거기에도 있었나보다. 전북 지역동지들에게 직접 들어보아도, 부안군농민회 주류 등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노무현 정권의 반민주적 폭거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우선시하고 일부는 선거 때도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등, 부안항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에 동원되는 NGO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대중의 투쟁 성과를 물질적 성과로 남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제 내일이면 각 지역에서 방폐장 주민투표가 부안 못지않게 기만과 협잡, 폭력 속에서 치루어진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보통투표행위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대중을 속이고 동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배제한 이 지역들에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있다. 사회운동들의 실펀이, 비록 협잡과 사기의 주민투표 결과가 어떻든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안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생태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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