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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이후, 우리가 내부 혁신을 위해 투쟁했던 것들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모든 것은 아니겟지만, 조금씩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고 함께 싸웠던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나?

 

아래는 우선, 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함께한 입장들이다.

[공공연맹사무처활동가]민주노조 정신의 회복을 위해, 총연맹 지도부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281] 미봉책의 결과는 민주노조운동의 몰락뿐이다 

[성명] 지도부 총사퇴를 시작으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혁신에 나서자

[284] 현장에서부터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그러나, 지난 포스트(민주노총 혁신, 절망이...)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투쟁은 그 구조적 한계 때문에 운동주체들이 목적한 성과는 얻을 수 없는 한계에 갇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은 '비극'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투쟁을 촉발시켰던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들을, 최소한 이수호 위원장의 신중함 같은 것조차 없이 단칼에 잘라버린 비대위(중집)을 보면서 드는 생각만은 아니다.



강승규 사건 이후 이수호 위원장의 사퇴, 비대위 구성과 그 이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모든 논쟁은 정파적 구도 속에서 이해되고 규정되었으며, 정작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모든 주장들은 정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따라서 운동의 위기를 촉진한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대위 구성은, 지도부의 사퇴가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적 힘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 아닌 이상, 위기의 당사자들이 위기를 미봉하기 위한 수습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이전에 민주노총 조직혁신안에 대해서 비판했던 것처럼(민주노총, 혁신의 대상이 혁신을 이야기하다 ) 노동자운동 위기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재확립하는 방식으로 위기의 해결을 자처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이번 강승규 사건의 직접적이거나 잠재적인 공범들이 다음 민주노총 선거에 다시 출마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들과 연관되지 않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비리를 양산하고 운동의 위기를 증폭시켰던 운동구조를 온존해왔던 점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선거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이 투쟁의 과정에서 지도부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했던 것은 조합원들은 수수방관, 혹은 냉소했다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비리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러한 운동구조를 바꾸어내야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대중들은 노동자운동의 위기가 강승규를 잘라내고,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극은, 위기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위기와 투쟁하려했다는 점에 있었다. 지도부의 비리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점을 인식했어야하지 않을까? 90년대 중반 이후 십여년간 고착되어온 노조운동의 제도화는, 노조가 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대중을 통제하는 기구로 변화하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노조에 대해서 아마도 유일하게 인정하는 효용일 이 대중통제는, 사업장 단위의 노사협조주의와 대정부 차원의 사회적 합의주의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단지 간부, 활동가들의 주관적 노선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 대중 스스로의 후퇴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가 말한 것처럼("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들이 활동가들의 노선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조차도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대중의 물질적 조건을 비판함을 통해서 단순히 과거의 구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의 새로운 운동을 개시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노조의 조합원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후퇴가 있다.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 속에서, 조합원들은 실리적 이해에 침윤되어갔다. 비정규직에 대한 배제는 사측과 안정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비정규직 투쟁과 정규직 노조가 어떻게 관계를 가질 것인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정규직 노조 운동이 자신의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통제하는 입장에 설 것인지, 따라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대립물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용자와 유착하고 타협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노조관료들만은 아니다.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이러한 타협구조 속에서 창출되는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주었던 것이다.

 

이번 강승규 사태와 같은 명백한 도덕적 사안에 대해서 철저한 처리는 필수적이다. 그것조차 없이는 노조운동이 다시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길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정세 속에서 강승규 비리 사건의 엄정한 처리라는 자명한 목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구도였다. 정파간 논쟁 구도에 의해 지도부 비판이 과잉결정된 것처럼 지도부의 퇴진이 상징하는 논쟁의 자명함 속에서 우리들의 입장도 과잉결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극은, 그 때 그 곳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목적을 다가갈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우리들의 무능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제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지도부 사퇴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조운동의 구조를 바꾸어내는 대중적 운동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아마 모두들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도부 사퇴'만'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해야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긴, 더 이상 우리가 어떤 발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강승규 사건과 지도부 사퇴 이후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의 상층부를 '혁신'하는 것이 사실상 별로 가능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조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김승호 대표의 지적처럼 민주노총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한계는 그 물질적 구조 속에 온전히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리사건으로 극적으로 드러난 노조운동의 위기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반영이라는 점, 그것은 단위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존재하는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투쟁이 단지 노조운동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이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따라서 어떻게 노동자운동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훨씬더 지난한 과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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