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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애초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사람잡는 정체성>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책의 저자인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 사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 어떤 폭력이 되는 지 흥미롭게 보여주었다.(이 책 역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그가 쓴 또 다른 책인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저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아랍인의 눈"이라고는 하지만 아랍인의 입장을 '종파적으로' 대변한다기 보다는, 침략당한 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쓴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단된 '성전'으로서의 십자군 전쟁이 아닌 다른 시각을 접하기 위해서 의미있는 이 책은, 여기에 더해서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100여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의 전쟁에서 명멸해갔던 것이다. 마치 팔레스타인의 삼국지라고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역사는 하나의 서사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의 포인트는 왜 아랍인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침략당하고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아랍세계는 단일한 정치체제가 무너진 후에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려왔으며, 정치적 통일은 요원하였다. 심지어 수만명이 사는 도시의 인구가 깡그리 학살당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랍이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결을 우선 회복해야 했으며 여기에는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점에서 아랍세계를 통일하고 프랑크족을 몰아낸 살라딘이 현대의 아랍 지도자들에게 이상적인 인물로 비치고 모방하기 위한 상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이라는 기독교국가가 창설한 "라틴왕국"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있지만, 아랍세계는 만성적인 정치적 분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살라딘의 땅인 시리아에서부터 칼리프의 땅인 이라크까지 (민족주의자이자 발전주의자들인) 바트당의 독재자들이 살라딘과 자신을 동격화하려는 것은 절실한 정치적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소설과 같이 생생하다. 김태권의 뛰어난 만화작품인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다. (도대체 <십자군 이야기> 3권은 언제 나온담!) 무지막지한 보에몽, 정신나간 사기꾼에 가까운 '은자 피에르'를 떠올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얻으려면 시공디스커버리총서로 나온 <십자군 전쟁-성전탈환의 시나리오>를 함게 보는 것이 좋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풍부한 도판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에 프랑크족(유럽인들 말이다)과 아랍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적 이해 속에서 특이한 점을 곧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그린 전투장면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수많은 판타지 작품들의 기원 말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후의 판타지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아래는 영화에 정의의 편으로 나오는 중세기사들, 이런 녀석들이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프랑크족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영화에서 우르크하이 같은 녀석들은 유럽이 그린 아랍인과 유사한 이미지. 검은피부에 갑옷도 못갖추고 있다. 당시 전투에서 프랑크족의 주력은 갑옷을 입은 기병이었으며, 이에 비해서 아랍인들은 갑옷은 없는 경기병 혹은 기마궁수였다.

 

<반지의 제왕>만이 아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는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의 전설에 대해서 다룬다. <다빈치 코드>가 신성한 존재로, 핍박받는 순교자로 그리는 "성전기사단"은 죄송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호전적인 학살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장한 수도사들과 같은 조직으로, 기사와는 달리 상비군을 구성하고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었다.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유럽의 왕조들과의 대립은 아시아에서 프랑크국가들의 몰락 이후 성전기사단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탄압받았다고 해서 '선량'한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갖가지 방식으로 침략 전쟁의 침략자들을 미화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이들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은 여러 판타지에, 심지어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도 반복된다. "하이템플러" 혹은 "다크템플러"로 등장하는 포로토스 유닛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최근의 영화에도 다시 반복되고 있다.

말도많은 <300>이라는 영화다. 크게 히트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래의 이미지가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인들이 처음 보고 놀란 동방의 괴물, 바로 코끼리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코끼리를 보고 놀라서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 (왼쪽은 <반지의 제왕>, 오른쪽은 <300>의 한 장면.)

 

 

 코끼리뿐 아니라 야만족의 모습도 비슷한데, <300>에서는 이 야만족은 직접적으로 페르시아인, 현재의 이란을 지칭한다. 결국 이 모든 이미지가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된 아랍인에 대한 이미지를 인종적, 문화적 편견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비해서는 한참 앞선 문명국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300>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정치적 프로파겐다로서의 성격을 지적한 아래 기사도 참고할만하다. 프레시안의 기사 "괴벨스의 나치선전물 같은 영화 <300>" 나도 TV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영상만 보고도 역겨웠는데 역시 그렇고 그런 정치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보면, 아랍인이 훨씬 문명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적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학살을 일삼는 프랑크족을 이해하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훨씬 성숙되어 있었는데, 이후 유럽은 이 전쟁 이후 많은 것을 아랍으로부터 배워갔고, 특히 이들이 다시 접하게된 그리스-로마의 유산은 르네상스를 촉발한다.

 

그에 비해서 아랍의 피해의식은 아랍세계를 점진적으로 후퇴시키는 요인이 되는데, 이 결과는 십자군 전쟁 후 6~700여년이 지난 19세기, 20세기 유럽에 의한 아랍의 정복과 분열까지 이어진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굳이 '현재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침략자가 아니라 피침략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먼저 바라보아야한다면 십자군 전쟁에도 마땅히 그래야한다.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진실을 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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