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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2
    로마, 시간과 대면하는 곳(3)
    겨울철쭉
  2. 2007/10/08
    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3)
    겨울철쭉

로마, 시간과 대면하는 곳

로마, 시간과 대면하기

로마는 시간이, 마치 퇴적암처럼 쌓인 몇 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고대 로마 유적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간대가 남긴 물질적 증거들은 도시를 독특하게 만든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처음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은 바로 이런 시간대가 구별되지 않고 시야에, 머리 속에 섞여들면서 생기는 혼란 때문이다. 시간의 지층에 따라 여행일정을 짜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 박물관 등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혼란은 어쩔 수 없다. 잠시 전에는 미켈란젤로가 15세기에 조각한 기원전 12세기 인물인 모세의 상을 보고 나서, 20분 후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건설된 로마 신전과 공회당 유적을 보게 되는 식이다. 수천년의 시간 대가 눈앞에서 질주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로마의 복잡다난한 역사가 한 공간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로 수백년간 융성했던 로마는, 제국의 붕괴와 함께 황폐화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으로 다시 건설되어가고, 15-16세기에 막대한 힘을 갖게 된다. 르네상스 시기, 그리고 종교개혁을 불러오는 그 시기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 위대한 건축과 조각, 회화 작품이 탄생한다.

이런 한편에, 고대 로마 유적에서 보이는 요소들이 기독교 교회에서 다시 발견되는 것도 흥미롭다. 기독교도들은 신탁의 공간 정도였던 로마의 신전과는 달리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는데, 이것은 로마의 공회당(바실리카)과 같은 건축물을 활용하거나 모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한 건축의 요소들은 뚜렷히 계승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성당 내부에는 그리스-로마 신전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성당이 로마의 판테온(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의 돔을 모방한 두오모를 갖고 있다.

(기독교가 교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도 역사적으로 특수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지적--이데올로기는 실천 속에서 형성된다는--에 영향을 준다. 신도들이 공동체의 공간, 교회에 모여서 집단적인 물질적 실천, 무릎꿇고 기도하고, 예식을 집단적으로 매주 수행하는 것은 기독교에 고유한 요소. 그리스, 로마의 종교적 행위는 다른 방식이었던 것이다.)

산재한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도 엄청나지만, 기독교(현재는 그 한 분파인 카톨릭)의 중심인 로마에는, 이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저 성당에는 카라바조의 그림, 옆 성당은 베르베니가 설계한 식으로, 도시가 르네상스 시기 예술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생각하다

이곳에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들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같다. 그래서 그런 것은 일단 (그런 게 있다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전체적인 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생각한 기독교에 대한 단상만.

이곳에는 기독교의 각종 유물이 ‘현존’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는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유골과 (여기부터는 좀 미심쩍기는 하지만)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 조각,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 등의 성물이 안치되어 있다.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에는 베드로 성인을 묶었다는 쇠사슬이 보관되어 있고(옆 사진), 성스러운 계단 성당에는,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갈 때 올랐다는 계단이 옮겨져 있다.

(대부분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라나가 수집한 것이다. 아마도 제국의 변방에 300년도 지난 이런 유물을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지역 총독이 어떤 식으로 황제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들을 “찾아”냈을지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기독교가 어떤 초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추상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종교라는 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유한해’ 보인다. ‘역사적 기독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나할까.

또 한편, 이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세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과정이 있다. 이미 제국 곳곳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더 이상 탄압으로는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조성되기 때문이다.(황제는 자신도 사실은 기독교도라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알려져있다) 기독교는 신분의 차별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평등주의 사상으로 대중에게 확산되었는데, 지배계급은 그것을 변용하여 수용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용하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지배이데올로기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런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피지배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로 영유하는 과정이었다. 이후에 기독교는 계급지배를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순치’되지만, 그것은 지배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전에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권력은 로마에 집중되었는데, 도시 전체가 위대한 종교적 건축물들로 넘치게 만들었다. 이런 성당에 들어가면, 종교를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숙연해지는 성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경우에, 특히 바티칸의 상징인 성 베드로 성당의 경우에는 그것을 건설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고, 결국 종교개혁과 전쟁을 불러오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교황청은 이 점을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성 베드로 성당보다 큰 성당은 지을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카톨릭은 그나마 이런 자기 제어라도 있지만, 개신교는 날로 거대한 교회를 짓고 있다. 사실상 면죄부를 교회 안에서 판매하면서 말이다.

거대한 시간

고대 로마의 유적은 주로 ‘포노 로마노’라고 불리는 유적군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곳은 주로 언덕에 살던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언덕 사이의 저지대에 공회당, 원로원, 신전 등을 건축하면서 형성된다. 지금도 많은 유적이, 비록 무너졌지만 당시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모나리자’도 그런 경우)을 보면 배경에 거대한 폐허를 그려넣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곳의 풍경, 특히 로마 제국 황제의 궁전이 있던 카피돌리노 언덕 폐허의 장면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것들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구나.

원로원 유적 앞에는 시저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된 장소가 있고, 그 옆에는 안토니우스가 시저에 대한 추모연설을 통해서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 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황제가 세운 개선문도 남아 있는데, 그 문의 부조에는 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왕의 7개의 대가 있는 금촛대, 예리코 성벽을 무너트릴 때 사용된 은나팔을 노예와 보물과 함께 가져오는 장면도 있다. 유명한 콜로세움도 인접해있어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역사의 현장이, 돌덩이 유적으로 남아 이 곳에 있다.

유적 한켠, 무너진 대리석 기둥에 앉아서, 숙소에서 싸온 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그곳들을 바라본다. 거대한 유적들만큼 거대한 시간을 실감하게 되는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은 마치 곳곳에서 급류를 만드는 거대한 강물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제지당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밀고 나간다.

내가 있는 시간도 그렇게 밀려간다. 이곳에 살았던 로마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욕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했을까. 그것들이 모두 돌덩이로만 남아서 수천년 후에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된 곳. 우리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는 어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만 자기 자신과 현재에 충실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에 겸손해야한다는 것도, 그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야한다는 것도.

로마에서의 경험은, 너무나 거대한 것들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한 인간의 외소함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시간과 규모에 있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시스틴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런 천장화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작품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간이 창조한 위대한 예술에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숙연함이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나는 있는 힘껏 내 존재의 최대치를 살아야할텐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이다.


* 바티칸에 있는 몇 개의 작품은 다음에 언급하자, 무엇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피에타. 카라바조의 같은 작품들. 그리고 고대의 유물인 라오콘 군상에 대해서.

* 이제 내일이면 마지막 여행지, 그리스로 간다.

* 너무 인상적이라 숙소 근처에서 담은 노을빛, 본 것만큼 환상적인 색감은 값싼 디지털 카메라에 잘 담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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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여행 중반을 넘어서 스위스 일정부터 여행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날씨는 내내 흐리고 진눈깨비가 내렸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는 기차역에서 오르막으로도 한참을 가야했다.(약도에는 바로 지척으로 그려져있다;;) 아를에 가기 위해 경유해야하는 아비뇽에 가는 열차는 일찍 매진되어서 예정보다 늦게나 움직일 수 있었고, 아비뇽에 도착해서는 알아본 숙소는 문을 늦게 열고, 새로 알아본 숙소는 너무 멀어서 남프랑스의 햇빛 아래서 탈진할 정도였다.(가방은 왜 이리 무거운지..!)

아를에서 묵고, 다음날 유스호스텔을 check out하고 짐을 맡기러 간 역 앞에 짐 보관소는 문을 닫아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짐을 맡기러 아비뇽에 다시 다녀와야했다. 최악의 상황은 그 다음이었는데, 아비뇽에서 니스를 거쳐서 피렌체까지 오기 위한 기차표가 문제였다. 아비뇽 역에 역무원 아줌마는 황당하게도 아비뇽에서 니스는 당일날짜로, 니스에서 피렌체까지의 야간열차(침대)는 엉뚱한 날짜의 표를 준 것이다. 연결되는 두 번째 티켓을 다시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서 자리에서 쫒겨나서 이등석 의자에서 쪼그려서 선잠을 자야했다.

이렇게 찾아간 피렌체에서는 첫날 점식 식사하면서 엉뚱한 청구서를 받아서 항의해야했고, 일정이 늦어지면서 숙소 예약이 어긋나서 이틀째 숙소를 다시 옮겨야했다.(다행히 옮긴 곳이 조선족 분이 하는 아래 이야기한 그 민박집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착한 피렌체에서 출발은 기진맥진하고 신경은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두오모

하지만, 피렌체 두오모(돔dome 형 성당, 원래는 주교가 있는 곳을 뜻한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쥰세이와 아오이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잘 알려진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는 463개의 가파른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오전에 올라간 이곳에서 한참동안 피렌체 시내를 바라보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권의 책이 있고, 영화로도 나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배역부터 시작해서 줄거리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혹은 사실성까지도 영화는 매우 실망스럽다.)

피렌체는 그곳에서 빛과 색깔로 가득하다. 왜 아오이가 그곳을 “연인들의 성지”라고 말하는지 알 것같은 곳. 정오가 되어서 성당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마치 화음을 이루고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퍼져나올 때, 그곳은 마치 천상에 있는 느낌이 든다. 종소리들이 마치 중력을 사라지게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르네상스, 도시의 전경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로 잘 알려져있다. 1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이 도시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이 지중해 무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을 때 메디치가의 지배 하에서 화려한 유산을 남긴다. 이곳은 단테,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도시다.

여기서 역사적 설명을 할 것은 아니니까, 몇가지 인상만.
우선, 피렌체에는 화려한 궁전은 없다.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도시국가였던 이 곳은, 메디치가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 때문에 지배 귀족의 권력은 항상 제한되었는데, 메디치가조차도 막강한 부에도 불구하고 절대군주 국가의 궁전과 같은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도시 전체의 전경에 배여난다. 메디치가의 궁전조차도 도시의 다른 건물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가질 뿐이지 튀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이전에 가본 도시 중에서는 암스테르담과 비슷하다. 그곳에서도, 시민들의 힘이 강력했던 곳 답게, 평범한 건물들이 도시의 전경을 지배했던 것이다. 절대군주들이 화려한 건물을 과시적으로 건설한 런던이나 빠리와는 다른 느낌.

르네상스, 우피치 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2시간 정도는 줄을 서야한다. (예약을 할 수는 있지만 예약비를 따로 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에서는 거의 ‘의무적으로’ 가는 곳. (물론 들어가서 관람객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작품들을 감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미술관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그림에 어떤 변화들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원근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Paolo Uccello 의 “산로마노의 전투”같은 그림도 그런 것 중에 하나. (이 그림은 피카소가 자주 스케치 해갔다고 하는데, 가이드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그림이 생동감있어서라기 보다는, “입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태초의 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체를 평면에 나타내는 것이 주된 관심을 보였던 피카소가 흥미로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러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두 개의 성모자상이다.
Filippo Lippi 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성모에 그려넣는다. 이제 성모의 모습은 여전히 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현실의 사랑을 담아낸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연인이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금욕적인 봉사보다 현세의 사랑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Madonna with the Child and two Angels, 1465, 왼쪽위

이 작품과 함께 인상적인 것은 Parmigianino 의 “목이 긴 성모 Madonna dal Collo Lungo”(1534~40). 보면서, “아, 이게 르네상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는 오히려 매혹적인 여인으로 나타나는 데, 봉긋하게 드러난 가슴은 불경하게도 성적인 매력을 보여줄 정도다.  왼쪽아래

이런저런 역사적 설명들보다도 여러 작품들, 특히 두 작품을 보면서,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내 이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을 발견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의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발견이다.

유디트, 그녀들의 분노와 그의 당혹

이 두 작품 외에 더 깊이 인상적인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은 Artemisia Gentileschi 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로도 알려진 그녀의 이 작품은 두 여인의 결연한 의지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녀와 작품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흥미로운 정보들도 얻을 수 있다. 구약 성서 내용 중 유디트라는 여성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서 그를 암살하는 내용이다. 젠틸리스키는 독보적인 여성화가로, 성폭력을 당하고도 오히려 고문을 받으면서까지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해야헸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두 여성(유디트와 하녀)의 표정도 그렇지만 목이 베이는 홀로페르네스의 표정도 흥미롭다. 여러 화가들이 이 테마로 그림을 그리는 데, 이 미술관의 보디첼리도 마찬가지고 대부분 근심하는 철학자의 표정을 한 베어진 목으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남성은 당혹해 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손을 하늘로 뻗지만 이미 힘은 빠져있다.

이 그림은 남성인 나에게(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른 그림들에서 홀로페르네스는 마치 ‘여성의 복수’에 대해서 “다 알아, 그건 너희편 남성들의 국가를 위한 것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 이 그림은 “도대체 왜 이 여자들이 분노하는 거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진실에 근접해있다. (오히려 남성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여성인 젠틸리스키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해서 그림 속에 넣었다.)

(복제품으로 우피치에 전시되어 있는 “라오콘 군상”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진품이 있는 바티칸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피렌체의 석양

이제까지 다닌 어떤 도시보다, 피렌체는 석양이 아름다운 도시다.
노을이 질 때, 피렌체 건물들의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빛나고 하얀 벽들도 밝은 붉은 색으로 물든다. 무엇보다 말로 표현하기도, 카메라에 담기도 힘든 것은 두오모와 종탑의 하얀 대리석 벽이 노을 빛에 물들어가는 모습이다. 천천히, 불그스레한 노을빛이 그 속에 배여든다. 

그것을 보면, 피렌체 사람들은 어떤 예술 작품들 이전에 자신의 도시 자체를 르네상스 식으로 창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전체가 중세적인 딱딱함을 넘어서, 사람의 온기가 있는 곳, 그러나 빛나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번잡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지만, 피렌체는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 황제와 왕들의 화려한 궁전은 없지만, 그것들보다 도시 전체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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