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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블로그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볼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었는지, 이런 글을 썼는지 낯설고 놀라울 때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며칠전에 동생이 보고 있는 책을 재밌겠다고 빌린 나는, 예전 홈페이지에 이 책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다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다니, 이런.

그런 한편으로는, 책을 사놓고도 절반 정도밖에 읽지 못하는 나로서는, 항상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들과 서점 사이트의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 그리고 펼쳐놓고 보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갈등하고 있다.(그러다가 기껏하는 일이라곤 장바구니에 한권을 더 담아서 주문하는 일 따위다.) 게다가, 그러다가는 이책 저책 손대다가 결국 읽기를 중단한 책을 볼 때 마다 몰려오는 부채감에 부들부들 떨고는,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일들로 해서 책읽기에 자괴감을 가진 나 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유쾌한 해독제와 같다. 모든 독서는, 그 순간부터 지속적으로 시간 속에 흩어지는 비독서로 바뀌어가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조차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이렇게 구분한다.
  • UB ; Unknown Book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 SB ; 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책
  • HB ; 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 FB ; Forgotten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보면 알겠지만, 그냥 "읽어본 책"(Red Book;RB, 그런데 써놓고 보니 Red라니 ^^;;)란 아예 범주에조차 없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읽었지만 잊어버린 책들이라 할만하다. 모든 읽어본 책은 이미 FB가 되어가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이런 말은 얼마나 위안과 공감이 되는지 모른다.

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저작인 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해, 얼마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한번만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같기 때문이다. - 몽테뉴, '수상록'

그러니까, 이 블로그도 몽테뉴식의 메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책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라기 보다는 유동적인 대상이다. 책은 만나는 순간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읽힌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인 종이 묶음 형태를 한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책이라기 보다는, 형성된 관념으로서 (저자의 용어를 따르면서 다소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화면 책", "내면의 책", "유령 책"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각각 "집단 도서관", "내적 도서관", "잠재적 도서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책을 읽은 순간부터 그것은 독자의 내면에서는 주관적인 "내면의 책"으로 남고, 그것은 담론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도서목록 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취하기 시작한다. "화면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단 도서관의 관계들 속에서 형성된 위치를 차지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급기야 무의식 속에서 재구성된 "유령 책"이 되는 데 이 것이 원래의 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령책들은 실재하는 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진짜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책이 된다.

"화면 책"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 조사관 바스커빌이 찾아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든다. 바스커빌은 책을 들고는 중요한 부분을 읽기도 전에 <시학>2권의 내용을 추측해서 말한다. 이런저런 책들을 통해서,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심지어 이미 실체적인 책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책으로 존재한다. 독서가 시작되는 즉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말하는 즉시 진짜 책 대신 화면 책과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남게 된다. 예컨데, 책에 대한 이 블로그에는 진짜 책이란 없으며 책에 대한 이미지들만 존재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여튼, 호르헤 수도사가 이 책에 접근한 자들을 죽이는 방법은 책갈피에 묻은 독인데, 그러니 진짜 책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것같다.

사실, 서점에 꽂혀있는 대부분의 책이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읽을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을 실제로 읽어보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돌이켜보면 "원전"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그리고 숭상했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원저작들은 (나는 물론이지만 내 주변에도)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HB, 혹은 UB였는데, 그러니 그 책들의 이미는 실재하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의미라기 보다는 우리의 "집단 도서관" 안에 있는 "화면 책"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이 용돈을 모아서 다섯권짜리 자본론 전집과 여섯권짜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을 사놓곤 했는데 기껏해야 그 책은 SB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폄하하는 순간, 우리는 그 "원전" 자체를 폄하하게 되는 셈이니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나에게나 읽지 않은 책을 인용해서 세미나를 지도하던 선배들이나, 그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런 주장은 급기야, 비평을 위해서는 책을 대충 훑어보아야한다거나, 영혼이 침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과 거리를 두어야하고, 학생들의 창조성을 위해서라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까지 연결된다. 이쯤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헛갈리기 시작하지만, 뭐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 마저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오스카 와일드에 대해서라면 그가 쓴 책은 모두 나에게는 UB 혹은 HB에 속한다.)

 "나는 내가 논해야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Thank you, Mr. 오스카 와일드!

물론, 이 책에는 독서의 본질 같은 것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실용서라 할만하다. 예컨데 이런 실용적인 충고들도 담고 있는 것이다. ; 저자를 만나면 책의 내용이 아니라 모호하게 좋았다는 이야기를 할 것,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할 때는 책을 꾸며내고 돌려댈 것 등, 누가 지적할 경우 착각했다고 둘러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등.

사실, 이 책의 교훈대로 서문부터 역자후기까지 모두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만 아니라도 훨씬 재미있는 독서가 될 것같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은 나와 같은 증세를 가진 게으른 책 "중독"자(독묻은 책갈피를 조심했어야했는데..)에게나 혹은 정말 실용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독자들 모두에게 "독서"(혹은 이를 둘러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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