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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쓰던 글,하던작업

쉽게 말하면 농촌생활사, 여성생활사.. 이다.

예전에 있었다가 폐간된 디새집이라는 잡지를 아시는가?그 잡지에 실리는 글 정도의 수준으로 쓰고 싶었지만 ^^ 물론 텍도 없었지 ^^그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쓴 것들을 한 번 모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떡도 하고 술도 담그고 양잿물도 내리고

- 옹기시루 쓰던 이야기


한 때 왕성하게 쓰였을 옹기시루는 시대가 변하면서 양은시루를 쓰게 되다보니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집을 개축하고 이사하면서, 혹은 골동품 수집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옹기시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라졌으나 몇몇 집에는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중백암 김분순 씨(1934년생), 정송 최종애씨(1931년생), 동신 전영자 씨(1941년생)의 옹기시루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분순씨는 17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는 4대째 물려내려오고 있는 시루가 있었다. 시루는 남원에서 사 온 것이었다고 한다. 전영자씨 집의 시루 또한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최종애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정송마을은 옛부터 옹기점이 융성하던 동네여서 시어머니는 동네 옹기점에서 시루 등 그릇을 장만했다.


시루는 큰 시루와 한 되 정도의 용량인 작은 시루를 사용했었는데 현재 김분순씨와 최종애씨 집에는 큰 시루만 남아있다. 보통 큰 시루는 고두밥을 찌거나, 찰밥을 찔 때 썼고, 작은 시루는 제사 때나 생일 때, 고사 때 올릴 떡을 찔 때 썼다고 한다. 김분순씨 댁 큰 시루는 일명 ‘동네시루’로 쓰여서 동네 행사, 이웃행사에 두루 사용하다보니 군데 군데 조금씩 깨어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찰밥 해 먹고 제사 때나 명절 때 고두밥 쪄서 술 담아먹고, 아들 여울 때, 환갑 치룰 때’ 등 중요한 행사를 치룰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쌀도 부족하던 때라 떡을 쉽게 해 먹기 어려웠기에 생일, 회갑, 제사 등 집안에 큰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제사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떡이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레가 지나면 떡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면 떡을 해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낳고 첫 이레 때 떡을 하고, 삼칠일 때 시루떡해서 먹고, 마지막 이레 때 떡을 하는 등 일곱 이레를 챙겨 떡을 해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생일에는 백설기, 시루떡 등을 장만했다. 돌때는 붉은 팥을 얹은 시루떡, 백일에는 백설기를 만들었다. 백일이나 돌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면 떡 접시는 빈 그릇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돈 10원도 주고 실 한 타래 째깐한 것도 째깐씩 주고, 쌀도 적어 못 묵고 살아. 우리 딸네들 돌 때 그랬어. 돈도 없으믄 그 때는 닭을 키우쟎아 계란도 서너개씩 갖고 온 사람도 있고. 비누도 맨들어서 하나썩 갖고오고.” (김분순)


결혼을 하고 회갑잔치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상에 떡은 빠지지 않았다.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찹쌀을 도정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방앗간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로 일일이 빻아서 체에 쳐서 쌀가루를 내서 썼다. 떡을 하려면 시루 밑바닥에 있는 구멍을 먼저 막아야 했다. 구멍 위에 삼베나 무명천을 깔거나 무를 잘라서 막기도 했고, 짚을 엮어서 만든 ‘시루밑’으로 막았다. 그리고 시루를 물이 끓는 솥 위에 올려서 김이 올라와 떡이 쪄지는 것이다. 솥과 시루 사이가 틈이 있으면 김이 새기 때문에 ‘시루뻔’이라는 것을 붙여 틈새를 막아줬는데 시루뻔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거나 몽근겨(註: 곡식의 겉겨가 벗겨진 다음에 나온 고운 겨로 속겨라고도 부름)를 이겨서 만들어서 붙였다. 그 다음 쌀가루를 시루에 얹고 팥고물을 얹고 또 쌀가루를 얹고 이렇게 켜켜이 얹고 고르게 한 다음 찐다.


가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할 때에도 떡을 올렸다. 최종애씨 말에 따르면 장광을 주관하는 가신을 ‘철륭’이라고 하는데 정월이면 떡과 제물을 차려 장광에 놓고 ‘시루떡 고사’를 지냈고 농사수확철에도 떡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내고 동네사람들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는 ‘도신’이라는 것을 지내 철륭신을 모셨다고 한다. 김분순씨는 딸이 홍역에 걸렸을 때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날마다 떡을 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지금은 홍역이어도 주사 한 번 맞으면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진안에 있는 병원을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만 했다. 버스편도 자주 있지 않아서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순덕씨 말씀에 따르면 홍역과 비슷하게 몸에 이상한 것이 나는 ‘손님’이라는 병이 오면 손님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찰밥을 하거나, 술을 담기 위해서 고두밥을 찔 때도 시루를 썼다. 제사에 올릴 술을 담기도 하고, 잔치 때 쓸 술, 술멕이를 할 때 동네에 낼 술을 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많은 집에서는 사흘들이로 술을 담그었었다 한다. 먹을 쌀도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단속했다.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고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몰래 숨겨도 샅샅이 뒤지면 들켰지만 그렇다해서 술을 담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루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비누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양잿물로 빨래를 했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떡시루와는 별도의 시루에 콩대나 깻대를 태워 그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 받아서 썼다. 간혹 비누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양잿물을 끓여서 등겨를 섞어 굳혀서 칼로 썰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시루를 쓰지 않게 된지는 대략 20~3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옹기시루 대신 양은시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60~70년대 들어서면서 평가에 평장떡방앗간, 원촌에 행운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집에서보다 방앗간에서 떡을 주로 하게 되었다. 현재 백운면에는 원촌떡방앗간과 행운떡방앗간 2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빨래비누가 널리 보급되면서 양잿물로 빨래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술을 집에서 담그어먹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들 여울라믄 술 하고, 환갑 돌아오믄 술하고, 시방은 안혀. 그전에는 했어, 뭣만 돌아오믄. 지금은 안혀.” (전영자)


어머니들과 고생을 함께 해 온 옹기시루는 이렇게 쓰임새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고물장수가 와서 팔 것을 권유하지만 팔지 않고 몇 몇 집에서는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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