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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터에서 하던 작업들- 결혼 이야기

 

유물․유적과 사람-오래된 물건을 통해 본 백운의 옛 생활사


상백암에서 마을 내 혼례식 때 사용하였던 혼례복 및 물품


상백암 마을에서는 마을 내에서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혼례복을 궤짝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마을에서 혼례를 치를 때 이 옷을 입고 결혼을 하였으며 약 30여년 전까지 사용되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천이 구겨지고 해지고, 구멍이 나 지금은 입을 수 없다. 혼례복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궤짝은 적어도 100여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주로 큰 마을들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혼례복을 장만하여 사용하였으며 이웃마을인 중백암과 백운동에서도 상백암의 혼례복을 빌려 이용하였다고 한다. 궤짝 안에는 신부 혼례복인 신부가 입던 원삼과 족두리, 신랑이 입는 혼례복이었던 사모관대와 신발, 나무로 만든 기러기가 보관되어 있다. 관리는 이장이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지만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매쟁이(중신애비)를 통해 양쪽 집안의 부모가 선을 보고,궁합을 본 후 혼사를 결정하고, 신랑과 신부는 혼례를 올리는 날 처음 얼굴을 보았다. 중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마을에 있거나, 주변의 아는 이, 친척이 중매를 서서 결혼이 성사되었었다. ‘중신 셋만 하면 죽어서 천당을 가지만 잘못하면 뺨이 석대’라고 한다.  중신애비에게는 사례로 ‘중채’를 주었는데 주로 음식이나 옷 한 벌을 주었다고 한다.


혼담이 결정되면 중신애비 편에 신랑 측에서 신부 될 사람의 집에 ‘사성보따리’를 전해 보낸다. 사성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그 안에 사성(생년월일시)을 적은 사주단자와 옷 한 벌이 담겨 있었다.


신부는 사성보따리를 받아서 고이 모셨다고 한다. 치마폭으로 받아안아서 방에 쌀을 떠놓고 고이 모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주단자를 일종의 결혼서약과 같은 것으로 사주단자가 오고가면 결혼을 물릴 수가 없었다

신부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은 후 답장을 보냈는데 신랑 집과 신부 집이 거리가 멀거나 하는 이유 등으로 신부집에서 사주단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처가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처가가 가난한 경우에는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여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치루기도 하였다.


한 동네 혼사는 옛 사람들의 말로는 “3대 적선을 해야 한동네에서 결혼헌다”는 말이 있을만큼 덕을 쌓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삼주씨

신삼주씨

 

상백암 태생인 신삼주씨는 18세가 되던 1939년 한 동네에 살던 故 박동곤씨와 결혼하였다. 당시 신랑은 19세였고 마을에서 길을 오고가며 얼굴은 보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은 없었다. 결혼식은 처가인 신삼주씨의 집에서 올렸다. 중매는 당시 마을에 살던 양씨 성을 가진 이가 섰으며, 혼담이 오고 간 후 신랑 집에서 ‘사성보따리’가 신부 집으로 왔다. 그 안에는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와 초록저고리와 빨간 치마 한 벌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사성 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빨간 보자기에 남색으로 수실이 달렸었다’고 신삼주씨는 기억했다. 그리고 신랑 집에서 택일을 하여 결혼식 날짜를 9월 어느 날로 정했다. 결혼식 하루 전날 함잽이가 함을 메고 왔다. 함잽이는 자식들이 잘 장성하는 등 팔자가 좋고 복이 있는 사람이 메도록 했었다고 한다. 함잽이가 메고 온 함에는 비녀와 반지 등 신랑이 보낸 혼수가 들어 있었고 함이 들어오는 날은 함잽이를 위해 신삼주씨의 집에서는 음식을 준비해 대접했다.

 


주천 태생으로 신삼주씨의 동생인 상백암 태생 신영진씨와 결혼하여 함께 살고 있는 박오목씨는 자신의 결혼식 하루 전 함이 들어오던 날의 풍경을 설명해주었다.


“결혼식 전날 (함잽이가) 함을 짊어지고 들어와. (함 안에는) 옷감 들었지. 명주베도 나서 보내고 비단도 보내고. 세 벌 보낸 사람도 있고 일곱벌 보낸 사람도 있고. 나는 세 필 받았어. 명주비단 물들여갖고 곱게 뚜드려서. 물들여갖고 뚜드리믄 비단이나 같으지. 글고 치마 저고리 떠서 두벌허고 가락지허고 비녀허고 (받았어)‘함 사시오, 함 사시오.’얼굴에다 뭐 발라. (그리고) 마른 오징어 썼지.  싸무락(싸립문) 앞에서부터 막 들어오라그믄 못 들어오고 돈을 줘야 들어와. 속에다 돈을 넣어서 그 놈 밟고 들어와. 쬐깨 넣고 안 넣으믄 안 들어와. 새기고 저 밑에가 있어. 있으면 자꾸 시달리믄, 돈을 놔 주믄 들어와. 들어와갖고 함 벗어놓고 먹고 가. 함 받는 날 밥이랑 반찬이랑 잘 히 놔. 그 사람들 먹고 가라고.  ”(박오목)


결혼식 날, 신랑은 가마를 타고,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든 사람과 가족 등을 동행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처갓집으로 온다. 이 때 신랑과 함께 오는 행렬을 ‘상객’, 신부에 딸린 행렬은 ‘요객’이라 불렀다 한다. 결혼식을 다른 말로 ‘행례’를 치른다고도 하며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신부 집 마당이었다. 그곳을 ‘초례청’이라 불렀고 초례청에는 ‘행례상’을 차렸다. 결혼식 시간은 신랑과 신부의 궁합에 따라서 정했다고 한다. 볕을 가리기 위해 ‘채알’(일종의 천막)을 치고 상 뒤에는 꽃그림이 그려진 열두폭 병풍을 쳤었다. 상 양쪽으로 청사초롱을 불밝혀두었는데 불이 꺼지지 않아야 신랑신부에게 좋은 징조였다고 한다.


행례상에는 양쪽에 화병을 두고 화병 안에 꺾은 대나무 가지를 꽂아 둔다. 그리고 입에 대추를 물린 명태와 잉어모양으로 장식한 무의 입에 대추를 물린다. 대추를 물리는 것은 대추가 ‘씨’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쌀 한 대접을 퍼서 초 두 자루를 꽂아 불을 밝히고 청실홍실로 술병을 둘렀다고 한다. 술은 청주를 마셨으며 술병과 술잔, 퇴주잔을 두었다. 대추,곶감,밤 등의 과일도 상에 올렸다. 그리고 신랑 측에서 전달받은 기러기 한 쌍을 서로 마주보게 상에 올린다. 상 아래에는 장탈과 암탉을 한 마리씩 두었는데 장탉이 울면 신랑신부에게 좋고, 모든 살을 물리친다는 ‘뱅이’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신부는 방 안에서 대기하고 신랑은 문 밖에서 대기한다. 신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이들을 ‘우수각시’라고 하는데 우수각시가 양쪽에서 신부를 부축한다. 각시는 신랑을 못 보도록 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랑도 얼굴을 가리는 도구를 들어 서로 얼굴을 못 보게 한다.


결혼식 순서를 적은 종이를 홀기라고 하는데 홀기는 학식 있는 사람이 쓰고, 결혼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가 “신랑 출!” 하면 신랑이 문 안으로 걸어 들어와 서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절을 한다. 이후 “신부 출!” 하면 신부가 방에서 나와 선다. 먼저 기러기를 전달받아 상에 올리고 신랑과 신부는 대야에 떠놓은 물에 손을 씼었다. 그 다음 신랑이 먼저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하고 다시 신랑이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한다. 이후 잔에 술을 따라 서로 나누어 마신다. 신부가 술을 따라 입에 대고 조금 마시다가 상 위로 신랑에게 잔을 주면 신랑이 받아서 마시다가 상 밑으로 신부한테 잔을 준다. 이렇게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신다.


손님 중에 아이를 밴 여자가 있을 때는 아이를 잘 낳기를 바라며 좋을 호(好)자를 의미하는 뜻으로 호박을 어깨 너머로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위해 신부집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였고 결혼식에 온 손님들은 축하선물로 ‘국수 한 뭉텡이’, ‘달걀 한 줄’을 가지고 오거나 천원, 이천원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치르는데 도와준 마을사람들에 대한 답례로 신부 집에서는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마을사람들에게 별도로 음식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혼례 전에 신랑 될 사람 집에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내면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이에 대한 답례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낸다. 이바지 음식은 셋 혹은 다섯 동고리, 이처럼 홀수로 맞추어서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삼주씨는 인절미, 백설기, 돼지다리, 유과, 흰 떡을 해서 교환했다고 한다. 이렇게 음식을 주거니받거니 해서 먹는 것을 ‘퇴상’이라 한다고 한다. 신부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는 날 입떡치기, 입막이떡 이라 부르는 것을 행하는데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키지 말아달라는 의미이다.


“장가드는 날 큰애기 편에서 입막이떡을 인절미를 해서, 시어머니입에다 틀어막어. 각시 숭도 보지 말고 총각 숭도 보지 말아라는 뜻이여.”(신영진) 



행례가 끝나면 각시방, 즉 신방으로 신랑과 신부가 들어와 주안상을 차려놓고 마주앉는다. 이 때 친척들이 신랑신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첫날밤 치를 준비를 하는데 이때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엿보았다. 신부가 신랑의 사모관대를 먼저 벗겨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는데 신삼주씨는 부끄러움을 타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결혼 첫날 밤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큰애기가 몰래 샛서방(결혼전에 몰래 만나던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찾아와서 까닥허믄 사고를 낼까봐 못들어오게끔 보고 내우(내외) 간에 비밀로 얘기한 것도 좀 듣고자’하는 이유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1년이 지나 설을 쇠고, 그 해 가을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즉 설을 쇠어야 근친(친정부모를 뵈러 찾아뵙는 일)을 가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지만 신삼주씨는 친정이 한 동네였기 때문에 근친을 가기 전에도 가끔 친정식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3일만에 재양을 가지 못하면 3년이 지나야 근친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하룻밤을 처가에서 지내고 다음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서 폐백을 드리고 3일 후에 신부 집으로 ‘재양’을 간다. ‘재양’을 갈 때는 신부 집에서 신랑․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랑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 때에도 음식을 해서 가지고 간다. 도착하면 친척,동네 사람들이 신랑을 다루는 ‘동상리’를 하였다고 한다.


“처갓집에서 신랑을 달아 먹어. 돈 내라고, 친척들이. 서로 똑같이 너도 어른이 되었다 해서 한 가지 동이라 해서 동상린가...? 우리 동네로 장가왔응게 술 한잔 내라 하고 사랑방으로 데리고 가서 요구를 혀. 돼아지 한 마리하고 뭣을 내라. 신랑이 좋게 낸다고 허믄 좋지만 신랑이 ‘없다, 내가 그렇게 못허고 술이나 한 말 내 마’ 그러믄 안 된다 더 내그라, 그러고 발을 쨈매.(묶어). 그래서 거꾸로 매달리쟎아. 말하자믄 장난이지. 글고 (발바닥을) 때려, 얼마 낼래, 얼마 낼래 함서. (신랑이)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낸다) 하면 이제 풀어놔. 만족허니 대답을 들으면 같이 먹고 놀고.”(신영진)


행례를 치른 후 신랑 집과 신부 집에 인사를 드리고 동네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친목을 도모함으로서 결혼식과 관련된 행사가 끝나면 시댁으로 다시 돌아와 부부는 백년해로를 하게 된다.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남자 혼례복인 사모관대를 착용한 모습.

 

예전에 사용하던 나무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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