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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가브리엘 로스

나는 어떤 거짓된 감정으로 나를 위장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_^

 

 

연민

 

 

연민의 감정은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과실로서 온다.

그대가 일상에서 이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감정들을

알아차릴 때, 그대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 시작한다. 연민은 무조건 상대를 껴안아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연민은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줄 만큼

충분히 초연해졌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그대를 그들과 연결시켜준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대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봐 저어할 때에도

그대는 그것을 느끼고 그들의 두려움을 자기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1970년대초에 배우들과 작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5가지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했다. 그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은 전문적인 배우들이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표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5가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의 진부한 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보았다.

우리 모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자기 감정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이 가장 표현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연민이었다.

그들 모두 다른 이들의 불행에 눈물이 메마른 듯이 보였고,

동작도 틀에 박힌 행동이었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연민은 카멜레온과 같다.

연민은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두려움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분노, 슬픔, 기쁨, 심지어 낙담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카멜레온 같다고 하는 것이다.

연민을 느낀 부처는 한눈에는 미소를,

한눈에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부처의 임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연민은 상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엇이든.

 

 

연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이런 것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는 거라는.

하지만 그런 감정은 단순한 센티멘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정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참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이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뭔가를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잘 될 거라는 장밋빛 위로일 수도 있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대신 떠맡아서 챙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을 다섯 가지 감정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한가지 감정의 그룹에 들어가도록

나누어본 적이 있다. 그들 중 절반이 연민의 그룹 쪽을 선택했다.

분노의 그룹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연민 그룹에 든 사람들은 이제부터 모두

분노의 그룹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바래요.”

그러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 화나지 않았어요! 전 분노의 그룹에 속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뾰루퉁한 표정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내가 가르치는 맛사지 과정에서였다.

한 여인이 맛사지 테이블 위에 누운 채 히스테릭하게 느껴질

정도로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파트너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고통의 감정이 스쳐갔다.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의 어떤 톤과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의 진동이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으며, 그녀의 울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왜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냐고.

그리고 왜 그녀에게 다가갈 때 선생님한테서

한기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그녀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마침내 내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해요. 그녀가 슬피

우는 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시험해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하다는 거예요.”

 

 

살다보면 종종 이런 일과 마주하게 된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누군가 정말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내가 아직 젊고 겁이 많았을 때, 에살른에서 있었던

또 다른 경험이 생각난다. 그때는 우연히 어떤 그룹과 만나

처음으로 그룹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목욕탕

욕조 안에 앉아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큰소리로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7년전에 죽은 남편이

생각나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두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아래쪽에 있는

탕 속으로 들어갔다.

 

 

리더가 그녀에게 욕조 안을 빙 돌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녀가 자기 앞에 오면 그녀를 위로해주라고 했다.

우리는 한사람씩 그녀가 자기 앞에 올 때마다 탕 속에 들어가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녀는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내가 맨 마지막 차례였다. 그녀가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왠지 그녀가 자기연민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게 오길 바래요.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왠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오직 당신이 내게

오실 때만 나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거칠고 차갑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알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핏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쪽으로 움직여왔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연민의 마음은 그들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연극에 동조할 마음이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비로소 또 다른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상황이라면 정확히 껴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옆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는 값싼 동정보다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변화에 맞설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미망인이 아무런 희망없는 슬픔의 심연 속에 빠져

있다면,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보다는 그녀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녀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연민은 누군가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 그것이 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 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슬픔에 빠져있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슬퍼했으면 됐다고 말하는 것은 연민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됐다면 그는 그대의 말이 아니라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에게 자신의 슬픔의 핵심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가 그 슬픔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그 슬픔을 온전히 겪어야 한다는 깨닫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결코 우회하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대가 그와 함께 울어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거짓된 연민 - 윤리적 의무감이 없는

감상적 센티멘탈리즘이 - 이 만연해 있으며

또한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심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지나치게

무감각한가 하면,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반응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어느 날 나는 뉴욕에서 워크숍을 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길을 건너 던바의 카페테리아에 갔다. 그곳은 매달 정부에서

주는 고정수입으로 사는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장소였다. 나는 친절하게 생긴

한 노인의 뒤에 줄을 섰다. 그는 주의깊게 으깬 감자와

배, 시골치즈, 그리고 제너럴 푸드사에서 나온 젤로를

고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매일 먹는 주메뉴 같았다.

그는 계산대에 가더니 점원에게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느 날 새 메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지. 그런데 도대체 변화가 없어. 똑같애.

물론 나는 원치 않아도 그걸 좋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들고 온 게 값이 맞지?”

점원은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그건 5불 49전인데요. 다음 손님요!”

 

 

그 노인은 몹시 당황하듯, 비틀거리며 내내 혼자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작은 미소와

다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점원은 그걸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를

소모할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매일 만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보다

그처럼 돌처럼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은 연료와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소모하거나 사용하거나 남에게 주어버리면 곧 고갈될

것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 에너지는 사용하고 나면 고갈되어 버리는

일용품이 아니다. 우리의 몸 속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의 감정 또한 흐르고, 사용될 필요가 있다. 그때

그것은 스스로 재충전되고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감정적 에너지를 사장해두는 것은, 댐에 가두어두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계산대의 점원은 외로운 노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온정을 주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을 감정의 시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는 보여준다. 친절하게 굴면 생리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에 활력이 넘치게 되고, 가슴의 어두운 에너지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물론 모든 사람의 주의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개중에는

좋지 않은 감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한 여성이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끼어들어 사사건건 반대를 했다. 그녀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상황이 명확해지자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원을 만들게 한

다음 그녀를 가운데에 세웠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성난 아이에게 최상의 것은 그의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내려놓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분노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몹시 당황하거나 아이보다 더 성이 나서

펄쩍펄쩍 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동료나 애인, 아이들,

또는 친구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을 숨쉬게 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 속에 들어가

그들의 닫혀져 있던 감정의 문을 활짝 열고는

위장된 감정의 베일을 걷어내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많은 가족에서

어떤 감정은 허용되고 어떤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 것을 본다.

내 남편의 경우에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표현은 신성한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가족에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대신

슬픔은 표현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남편의

분노에 놀라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낯선 감정을 서로에게 가르쳐야 했고 인정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나는 분노를 인내할 수 있도록.

 

 

정말로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다양한 관계가 지속되게 하려면 이런 종류의 교환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관계들이

너무도 쉽게 지루해지고, 실패로 끝나게 되는 이유이다.

관계의 생명의 핏줄은 억제와 부정의 덩어리들에 의해서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창조적이고 건전한 삶의 에너지는

바로 이런 회피의 끊없는 소모적인 전략들에 의해서

사그라드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대가 상대방의 감정의 진실에 마음의 문을 열 때

그대 역시 그대의 과거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민은 텅빈 그릇과 같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두려움으로 채운다면,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된다. 오직 그대가 세련되게 조율된

감정의 도구일 때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의 서정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대는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과

분노, 슬픔의 왜곡된 필터를 통해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반응할 것이다.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다.

바로 그 텅 비워진 감정으로부터 온갖 감정이 흐를 때

그대의 역동적인 고요함이 모든 삶의 에너지의 근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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