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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동향] 독일: 노동계급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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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동향] 독일: 노동계급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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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계급이여 안녕?

「인터내셔널 뷰포인트」 11월호

보도 초이너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130년이 지난 후 노동운동을 포기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 선거들에서의 사민당의 완전한 몰락은 당의 성격 및 당이 노동계급과 가지는 관계에 관한 논쟁을 새롭게 하였다. 급진좌파 신문인 「조체트(SoZ)」의 하이너 할버슈타트는 미국식 모델에 기반한 양당제로의 퇴보를 예견하고 있다. 사민당이 미국의 민주당같은 부르주아 정당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정치학자인 보도 초이너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독일 최대의 노동조합인 금속노조(IG Metall)의 6월 4일 정치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항상 정치적이었다. 최초의 노동자 보호('옹호') 조직들은 정당과의 관련하에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사회민주주의 운동이었지만 중도파와 자유주의 정당들과도 연계를 가졌다.
노동조합들은 정치적 실체로서 자신의 실제 조합원들 이상을 대표하고자 하였다. 노동조합은 원칙적으로는 전체로서의 노동계급, 즉 자신의 노동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였다. 한편 사민주의, 기독교, 공산주의 노동조합들 사이에 분업 또한 존재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정치적 '가족' 내에서는, 모든 이들이 노동조합은 일상적인 경제적 문제를 돌봐야 하는 반면 정당은 정치라는 커다란 문제, 무엇보다도 국가의 문제를 책임진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1933년까지 사민주의 노동조합들은 이러한 분업을 받아들였다. 비록 공산주의 계열인 RGO 노조들처럼 정당의 지도적 역할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예외들은 있었다. 1933년에 사민주의 계열의 독일노동조합총연맹(ADGB;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의 전신)은 사민당과는 달리 히틀러에게 손을 내밀어보고자 하였다.
1945년 이후 서독의 노동조합들은 공식적으로는 비당파적인, 새로운 독일노동조합연맹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은 사민당의 노동 분견대가 존재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조합들은 점차 독자적인 정치적 개입에 익숙해졌으며 심지어 보수적인 기독민주당(CDU)과도 거래하였다. 광산업에서의 '공동결정'은 노동조합 지도자인 뵈클러와 보수파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트 고데스베르크

이러한 분업 체제는 사민당이 역사적인 고데스베르크 회의에서 사민주의의 원칙들을 대부분 포기한 1959년에 깨어졌다. 2년 후 독일노조연맹 또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강령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노동계급의 당이 아니라 국민의 당이라고 선언한 사민당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사민당은 이제 -고용주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회적 이해를 대변하고 고려하며 조화롭게 하기를 열망하지만 노동조합들은 그렇지 않다.
노동조합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이해를 동등하게 대변하는, 단순한 '국민의 노동조합'일 수 없었다. '사회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노동조합과 고용주 사이의 모든 협정들과, 임노동과 자본의 이해 사이에 공통의 지반을 찾으려 하면서 매개 조직으로서 기능하고자 한 노동조합의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피고용인들의 이해의 대변자로 남아야 했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단일한 사회 세력으로 유지되었다. 이들은 이러한 지위로부터의 후퇴는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희석시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노조 지도자들 또한 자신의 사회적 동반자와 정부로부터 진지한 대우를 받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차별적인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이 요구되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 직후 얼마간, 노동조합들 내에서 사민당의 방침에 반대하거나 적어도 사민당 지도부의 그것과는 다른 부분에 방점을 찍은 독자적 경향과 제안들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오토 브렌너 지도 하의 금속노조는 특히 중요했다. 사민당 지도자 헤르베르트 베너는 독일사회주의학생연합(SGSU)을 금지시켰지만, 브렌너의 지원 아래 사회주의학생연맹(SDS) 안에 좌익이 형성되었고 이는 이후에 68운동의 싹이 되었다.
이후 금속노조와 인쇄제지노조(IGPP)는 사민당이 독일의 '긴급조치법'을 정당화하는 것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였다. 독일노조연맹의 산하노조 가운데 적어도 한 곳은 노동조합과 사민당 사이의 전통적인 분업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노동조합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블레어에 관하여

1999년 사민당은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에 비견되는 또다른 질적 도약을 하였다. 그 결과 노동조합들은 자신의 역할을 재규정하는 문제에 또다시 직면하였다.
40년 전, 사민당은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적 전통 속에서 좌파적 국민의 당이 되고자 하였다. 오늘날 내부 권력투쟁에서 라퐁텐에 승리를 거둔 경향은 사민당을 현대적인 경제 정당으로 변형시키고자 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당이 사회적, 구조적으로 막연한 중간층 기반을 차지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전통을 공공연히, 명시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슈뢰더에게 부담이 되어왔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선거에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영국 노동당 지도자 토니 블레어에 영감받았으니 말이다. 블레어는 자신이 노동조합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강령적으로 볼 때 1959년은 계급투쟁과 맑스주의 전통, 자본주의의 붕괴에 대한 기대,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능한 최대한의 사회적 소유라는 궁극적 목표 등을 거부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케인즈주의적 총수요 관리와 분배상의 평등을 추구하는 강력한 국가개입 등으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문명화하고 조절하기 위해 시장(자본, 이윤, 축적) 기제들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강령 이론은 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의 정부의 실천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의 설계자 중 한 명인 칼 쉴러는 1966년 이후 경제장관으로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당시에는 사민주의의 경제적-정치적 개념화가 현대적이고 창발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보수적인 기민당과 자유주의적인 자유민주당(FDP)의 낡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확연히 구별되었다. 이것은 경제 관리에 있어서 노동조합과 고용주, 중앙은행을 한데 묶는 하나의 제도로서의 조화된 행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당 서기이자 재무장관인 라퐁텐으로 대표되는 1999년 현재의 사민당 내 케인즈주의 세력은 강령과 정책을 둘러싼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이들이 패배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사민당이 오랜 야당 시절 이후 이제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 서기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제 연방 총리이다.
지속적인 대규모 실업으로 고통받는 유권자들은 사민당이 기민당/자민당보다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명료하게 틀잡힌 개념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슈뢰더 세력으로부터 이러한 것이 나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케인즈와 쉴러, 라퐁텐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는 것과 이데올로기적, 물질적으로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탈규제와 최소국가라는 신자유주의, 통화주의 사상으로의 전환이다.
국가는 일국적 경쟁 기구로 간주된다. 민간기업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대자본의 이익을 도모하고 완성해야 한다. 슈뢰더 그룹은 실업에 관한 신고전파적 설명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다. 노동 비용이 너무 높다는 이론 말이다.
이러한 정책으로 특정한 사회민주주의를 구별하는 경계는 현재로서는 분간하기 쉽지 않다. '새로운 중도'로 방향지워진 정책이 경제적 변화과정에서 박탈당하고 실패한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1959년의 질적 도약은 사민당이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하였다. 1999년의 질적 도약은 노동자운동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중도

블레어와 슈뢰더는 국가에 대해 불신하면서 자신들의 선배인 새처와 콜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가끔 "앞장서서 이끄는 적극적인" 국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공익을 위한 국가개입의 축소를 의미할 뿐이다. "고된 노동과 기업가 정신에 가해지는 조세 부담"은 "너무 높다"고 규정된다. 이들은 감축되어야 할 "규제의 짐"을 발견해냈다.
공공서비스 문제에 관해서는 "현대적 사민주의자들"은 한갓 비인격적인 어휘로 전락시켜버렸다. 이들은 "공공서비스의 질과 비효율성을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에 관심을 쏟고 있다.
노사관계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블레어와 슈뢰더는 "전통적인 작업장 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은 용인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장될 것이다. "평등"과 "사회적 평등" 사이에는 이해불가능한 새로운 구분이 그어진다. "창의성과 뛰어난 성과"는 보다 높은 보상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 현대화 과정의 패배자들은 "현대적 사민주의자들은 권리부여의 안전망을 자조(自助)를 위한 도약대로 바꾸고 있다"고 제시(협박)받는다. 실업을 줄이기 위해 저임금 부문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적 사민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이 "자본"의 소유자로서 서로서로 경쟁에 처하는 사회를 도모한다. 패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잃는 반면 승자는 보다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이미 명백하고 훨씬 심화되는 사회의 분할은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새로운 중도"를 목표로 삼고 있다. 자민당의 전 사무총장이 자신의 당을 "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당"이라고 치켜세우며 말한 바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방의회의 자민당 블록이 블레어-슈뢰더 선언을 의회에 발의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전히 일관성있는 것이다.

정치 부문 없는 노동조합

슈뢰더 지도 하의 사민당이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전통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했다면, 사민당과 노동조합들 사이의 전통적 분업은 이제 어떠한 근거도 없다. 사민당은 노동조합을 경제 부문으로 하고 있는 운동의 정치 부문이 될 수 없으며 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노동조합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특정 정당에 연결되지 않은 채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노동운동 스스로가 자신에게 의존하고 다른 사회 그룹들과의 동맹을 형성함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정치정당과 동등한 거리를 두어야 함을 함축하기도 한다.
한가지 대안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앵글로아메리카화(Anglo-Americanization)라 부를 수 있다. 미국이나 -점차 그렇게 되어가는- 영국같이 더 이상 어떠한 사회민주당도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노동조합들이 특수하고 상호경쟁적인 이익집단으로 발전되어 어떠한 정치적 차원의 계급 연대도 없이 각각의 조합원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노동조합들은 한때 사회주의적이거나 사회민주주의적이었던 노동자운동의 전통이 정치적 생명을 다했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선거 연구 전문가들이 주장하듯이, 정치적 갈등의 노선에 사회, 경제적으로 기반한 전통적인 좌파, 우파의 입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 노동조합들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의 종언이라는 이러한 명제를 우리는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이러한 논의는 드레스덴에서 채택된 독일노조연맹 기본강령의 공식적 타협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운동 내부의 전통적 분업의 일부분으로서 사민당과 연계되어있었다. 그러나 1999년 사민당은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전통에 작별을 고하였다. 노동조합이 직면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특정 정당과의 어떠한 연계도 없이 우리는 이러한 전통의 유일한 담지자가 될 의지가 있는가, 우리는 그만큼 강한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러한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미국식 모델같은 이익집단 배타주의로 우리의 요구를 축소시키는 다른 길보다는 분명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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