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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10/03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칼럼 > 칼럼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케테 콜비츠: 독일 여류화가(1867-1945년)
참세상뉴스 chamnews@jinbo.net
*<봉기/동판/1899>

지난 글에서는 예술이 노동의 산물임과 함께 예술의 계급성을 다루면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노동자계급의식과 노동자계급예술이 최초로 발생한 독일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계급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작가의 사상은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는지, 시대와 정치적 상황들이 어떻게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케테 콜비츠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사상,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의 공헌과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노동자문화운동에 큰 자산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왼쪽. <1930년대 초의 케테 콜비츠> / *오른쪽. <팔을 고인 자화상/1920>

이 글이 그것을 위한 단초라도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내용과 형식 두 측면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완벽하게 현실화한 케테 콜비츠의 위대한 예술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에게 글을 짧고 쉽게 쓰라고 권유받았다. 그러나, 워낙 위대한 예술가를 알려내는 작업이기에 단지 개인의 소감을 간단히 밝히고 말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케테 콜비츠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들을 알릴 필요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다. 글이 조금 길더라도 이해를 바라며, 진지한 검토를 부탁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서문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미술사적 배경을 다루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사회주의자 케테 콜비츠>, 콜비츠의 청년시절에서 노년 시절에 이르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피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해설을 시작하여 판화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조가작품,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1 <궁핍/석판/1897>

케테 콜비츠란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히 진보적인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예술가다. 자본가계급에게는 해로운 사람으로 당연히 제도 교육에서는,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그만큼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되면 그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계급의식을 일깨워주고 예술적 체험을 주는 감동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그를 만났다. 과거 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미술운동도 역시 민중운동의 한 세력으로 명실공히 자리하고 있었다. 민예총(민족민주예술인총연합), 민미협(미술), 민음협(음악) 등등 문화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벽화, 걸개, 판화 등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온 거리와 학교, 공장, 농촌에 그려지고 집회의 필수품이었던 때였다. 지금은 무용담이 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지금의 문화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때를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문화운동이라고는 노래와 비디오 운동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때, 케테콜비츠를 대하는 나는 상당히 진지하였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격동하는 시대에 진지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나를 너무 부끄럽게도 했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10여년 전의 그에 대한 미천한 이해를 조금은 더 깊이 있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다 올곧게, 보다 충분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2 <죽음/석판/1897>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을 접하면서 역시 예술은 계급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삶과 사상을 표현하며,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를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예술이란 인간 개인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의식을 발전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산고의 작업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겸허하고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케테 콜비츠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케테 콜비츠는 젊은시절과 중년까지 사회주의자로 <게르미날>(1893), <직조공들의 봉기>(1893-1898) 연작, <농민전쟁>(1903-1908) 연작,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1907-1909)에 사회비판적인 판화를 기고 하는 등의 왕성한 판화작품 활동을 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자신의 나약한 사상적 한계에 고뇌하며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주의자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50대, 60대이던 1920, 30년대에도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 <러시아를 도우라!>(1921), <선동가>(1926), <프롤레타리아> 연작(1925)처럼 간단히 평화주의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귀중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케테 콜비츠는 그림으로써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설사 케테 콜비츠 자신이 사상적 동요를 부끄러워하며 노동자계급 예술가라는 영예를 거부한다 해도 역사는 기꺼이 그에게 그런 영예를 부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3 <음모/석판/1898>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독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운동이 비스마르크와 어린 황제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고 있던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는 복음주의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를 강조하는 자유 신앙운동을 하였고, 아버지 칼 슈미트 또한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생활을 그만두고 미장이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는 예술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콜비츠는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스주의자인 오빠 콘라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영향을 받는다.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는 정치,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1923년의 독일혁명, 1933년의 히틀러 집권과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과 세계에서 중요한 나라였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집권하여 야만으로 가느냐 변혁으로 가느냐는 그 시대의 관건이었다.

미술사조에서는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에 이어 혁명과정에서 생겨난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이 등장하였고, 세잔느를 이어 브라크와 피카소가 큐비즘을 구축하였다. 또한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 20세기 전반기에 다양한 미술사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당시 고흐, 고갱, 뭉크, 클레, 마네, 모네, 샤갈, 꾸르베, 마티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에 영향받은 유럽과 세계 노동자투쟁의 분출은 미술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요구했고,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런 속에서 케테 콜비츠는 1885-86년에 베를린의 여자예술학교에서 슈타우퍼 베른의 가르침을 받고, 맑스 클링거의 판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받는다. 1888-89년에는 뮌헨의 여자 예술학교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에게 회화를 배우게 된다.

1891년에는 칼 콜비츠와 결혼한 다음 북부 베를린으로 옮겨와서 의사인 칼 콜비츠가 일하는 의료보험조합의 무료진료소에서 하층민의 고통과 불행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던 낭만적이고 연민에 어린 시선에서 "노동자들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할 때라야 유지될 수 있다.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척도가 지배한다"고 여기게 된다.
남편 칼은 케테 콜비츠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과 케테는 사상과 현실의 동반자로서 서로간에 사랑과 존경, 신뢰로 살아간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4 <직조공들의 행진/ 동판/1897>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콜비츠는 당파를 취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한때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드를 꿈꾸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는 원하지만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1920년 10월의 일기에서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예술가로 간주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페테르스부르크 거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서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가 확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진지하였으며, 당당하였다.

케테 콜비츠의 사상적 흐름을 변증법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항상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며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편하게 살기를 갈구하였지만 현실의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감당하기 힘든 현실들이 케테 콜비츠를 체념하게 했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쳤다. 콜비츠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조건과 인생역경 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혁명 예술가로 굳세게 진군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적인 이론을 체득하여 노동자계급의 힘과 노동해방을 이해하지 못한 케테 콜비츠의 한계라고 본다. 투쟁을 하면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은 인간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에 따른 고통을 이겨내고 계속 투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투쟁을 해도 패배만 하고 승리가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에도 과학적인 이론으로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고 노동해방을 추구하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케테 콜비츠에겐 희생과 패배에 따른 고통을 능히 이겨낼 만한 이론과 전망, 당파가 없었다. 또한 당시 케테 콜비츠의 한계는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번번이 패배했던 독일 노동계급 운동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주는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시대는 달라도 여전히 케테콜비츠의 고뇌를 함께하는 노동자, 예술가들이 많이 있음을 전하면서 위로를 대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5 <폭동/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

케테 콜비츠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독일 실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의 봉기다. 1840년대에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직조 기계들은 집에서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생활조건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직조 기계는 손으로 작업하던 직조공들보다 훨씬 싼 값에 제품을 내놓았고, 이윤을 많이 챙기려던 중개인들은 손으로 만든 제품을 보다 싼 값에 사들여 직조공들의 수입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1844년에 최초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였다. 이 내용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희곡으로 만들었다. 1893년 2월 28일 이 [직조공들]이라는 희곡을 보고 난 후 그 감동으로 제작한 것이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이다. 그리고 이 봉기를 다룬 노래로 '실레지엔의 직조공'이 있으며, 이 노래는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예술'이란 평가도 받는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이하 생략)

1844년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은 단지 무대 위의 희극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혁명적 투쟁을 예고하는 살아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져 황제 빌헬름 2세는 극장의 궁정특별석을 해약하고, 드디어는 1890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란 하나같이 제국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인사들이다"고 담화문까지 내렸다. 케테 콜비츠가 [직조공 봉기] 연작을 끝낼 무렵인 1897년에는 파업주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896년 하우프트만에게 쉴러상이 추천되었을 때 빌헬름 2세는 승인도 거부하였다.

콜비츠의 이 판화가 1898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심사위원회는 콜비츠에게 금상을 추천했으나 빌헬름 2세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 때 빌헬름 2세는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을 모두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콜비츠의 판화는 1899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되었을 때 금상을 수상했으며, 1900년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이 [직조공들의 봉기]로 케테 콜비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6 <결말/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는 <궁핍>, <죽음>, <음모>,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의 6부작으로 석판과 동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먼저 시작한 [게르미날] 연작을 버려두고 [직조공들의 봉기]에 몰두했다.

이 연작은 1893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성됐다. 하우프트만의 희곡과 달리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에서는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실존과 삶, 투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고, 당시의 자본가의 악랄함과 직조공들의 분노를 처절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당시의 저급한 봉건적 사고와 편견에 맞서 여성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다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콜비츠의 사회주의적 여성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케테 콜비츠가 상당히 아끼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21년의 한 일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나의 [직조공들]"이란 표현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가장 민중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게르미날>의 한 장면/동판/1893>

다음은 이 글을 이어 케테콜비츠의 작품해설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의 그림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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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여성 배려 기업에 '평등 인증' 마크&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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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배려 기업에 '평등 인증' 마크"
벨트라우트 다스 독일 성평등사업국장
한국보육교사회 kdta@chollian.net
"여성이 가정과 직장생활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독일 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입니다."

지난 3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평등한 일.출산.양육을 위한 국제포럼'에 참가한 벨트라우트 다스(사진). 독일연방 정부의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의 국제 성평등사업국장인 그는 독일의 후진적 여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육시설을 늘리는 게 필수"라고 말문을 열었다.

독일에서 3세 미만의 아이들과 초등학생을 맡아줄 보육시설은 4%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 같은 문제가 취업을 갈망하는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판단한 독일 정부는 2005년부터 3세 이하의 어린이 보육시설을 위해 연간 15억유로(약 1조9천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또 취학아동의 방과후 교실을 위해서도 연간 40억유로(5조원가량)를 쏟아붓기로 했다고.

기업이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 긴급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독일 정부는 지난 2001년 7월 정부와 주요 기업 간의 협약을 통해 고위직에 사내 보육을 제공하고 노동 시간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또한 독일 정부가 지원하는 '평등마크제'와 '가정과 직장 감사제'는 기업에 이익이 되면서 여성들의 취업을 돕는 주요 정책이다.

다스는 평등마크제가 "임금과 재교육.특별 상여금 등을 남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하고 여성을 적절하게 배치해 업무능력을 키우는 기업에 평등마크를 주는 제도"라고 소개했다.

루프트한자.독일은행.바이에른 등 독일의 주요기업들이 평등 마크를 획득했다.

'가족과 직장 감사제'는 근로자가 노동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지, 재택 근무 등 노동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지 등을 독립된 감사기구가 모니터하는 제도다. 또 가족이 있는 사원에 대한 회사의 재정적 지원, 보육시설 등도 점검한다.

이 같은 감사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개월. 감사를 통과한 기업은 '기초감사인증서'를 받는다. 인증서를 받는다 해도 직접적으로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 전체에서 인쇄물 등에 이 마크를 광고함으로써 좋은 기업이란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 이익을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2003.09.08 09: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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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좌파정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
- 독일과 영국의 최근 사례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힘/이명재 
오늘날 서구의 사민당이나 노동당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당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정치적 심판은 대안부재 속에서 지연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기반이 되고 있다. 이는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바 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종식과 사민주의의 우경화 또는 신자유주의로의 포섭으로 창출된 정치적 공백은 새로운 노동자계급정치에 의해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록 사민주의가 사실상 정치적 소멸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그들의 강고한 제도적·조직적 기반은 아직 붕괴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민주의 제도정치의 해체과정은 긴 역사적 과정이겠지만, 이 균열과 해체현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주체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속화될 수도 있다. 특히 최근 4∼5년간 반세계화운동과 국제반전운동, 노동운동의 전투성 회복 움직임 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계급적 역학의 역동성과는 대조적으로 제도정치 또는 선거정치에서의 새로운 세력재편은 주체형성의 지연으로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과 독일에서 사민주의의 조직적 기반인 노동조합운동에서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최근의 노동자투쟁에 힘입은 바 크며, 사민주의의 지도부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커다란 변화를 알리는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 신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최근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간의 전통적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논란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지지했던 노동조합들이 노동당에 맞서고 있다. 특히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제3의 길'이란 포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대처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이미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지난 6월 17일에 열린 특별대의원 대회에서 소방관노조(FBU, Firefighter Brigade Union)는 35,205표 대 14,611표의 압도적 비율로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도부의 타협안, 즉 노동당에 대한 정치 지원금을 5만 파운드에서 2만 파운드로 삭감하자는 수정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한 결정이었다.

지난 2002∼03년에 걸친 소방관 파업에서 블레어 정부의 반노동자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좌파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 조합원들은 지난 파업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인식 하에서, 재파업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올해 2월 7일에는 전통적 노조 중의 하나인 철도항만운수노조(RMT, Railway, Maritaime, and Transportation Union)가 노동당에서 축출당했다. 이는 작년 RMT의 스코틀랜드 지부가 스코틀랜드 노동당(SLP)을 탈당하고, 새로운 통합좌파 정당인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 지지를 선언하였고, 지도부가 이를 승인하자 철도노조 자체를 당에서 축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위원장 봅 크로우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노동당은 필요 없다"며 반박했다.

또한 최근 통신노조(CWU)는 국영우체국인 로열 메일의 민영화에 대한 정부의 태도 여하에 따라 30만 파운드의 정치자금의 지불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2002년부터 본격화되고 있는 영국의 노동자투쟁은 신노동당 블레어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는 낮은 수준에서 노동당에 대한 정치헌금 문제에서 FBU, RMT의 경우와 같이 노동당과의 관계 청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영국노총(TUC) 내에서 좌파블록의 등장과 전투적 좌파지도부의 확산,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파업 등 영국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화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1980∼90년대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이은,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계급적 저항이 이와 같은 내적 변화와 맞물려, 과연 노동당을 포함한 영국 노동자계급운동 자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신노동당과 노조의 분열은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 사민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이 필요하다!

사민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슈뢰더식 제3의 길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과 분노는 상대적으로 운동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작년 11월과 올해 4월 각각 10만명과 50만명이 나선 전국적 반슈뢰더 투쟁은 새로운 변화의 길잡이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 대중투쟁은 사회운동과 좌파를 중심으로 '선거대안 2006'(WA2006)이라는 연대체를 출범시켰다.

슈뢰더의 '아겐다 2010'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해체전략에 다름 아니며, 이에 대한 대중적 반란 속에서 사민당의 정치적 위기는 시작되었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는 사민당에게 사상 최악의 패배를 가져다 주었고, 이 위기의식은 지도부에 저항하는 노조 지도자 4인의 숙청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사민당에서 탈당한 노조지도자 2명 등 사민당 탈당파 6인은 '노동과 사회정의'(ASG)라는 캠페인 그룹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양 그룹이 지난 6월 20일 베를린에서 전국모임을 갖고, 새로운 연대체인 '선거대안 노동과 사회정의'(Wahlalternativ Arbiet und sozial Gerechtigkeit)를 출범시켰다. 이날 모임에는 아니 하이케, 토마스 헨델, 클라우스 에른스트 등 반슈뢰더 노조그룹(ASG), 사민당, 녹색당, 민사당 탈당그룹, 다양한 좌파정당, 금융과세연합(ATTAC)을 포함한 사회운동단체, 반제·반파쇼 청년단체 등에서 온 7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석하였다.

이 날 모임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반슈뢰더 정서의 공유가 이루어졌으며, 선거참여를 둘러싸고는 시기 상조론의 신중론과 2006년 총선 참여론이 맞섰다. 아직은 초동단계여서 많은 부분에서 모호한 점이 존재하지만, 당 건설의 문제는 10월 또는 11월의 전국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현재 가동할 수 있는 70여 개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정강문서 작성팀을 구성하여 토론용 문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최근 좌파성향의 TV잡지인 <파노라마>의 여론조사 결과이다. 전체적으로, 사민당 22%, 기민련 45%, 녹색당 12%, 자민당 8%, 민사당 6% 등의 결과가 가온 가운데, 응답자의 6%가 새로운 좌파정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응답했고, 32%의 응답자는 지지를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최근의 이런 좌파적 흐름은 사민당에 대한 노동자계급 대안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넘어 조직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민당, 민사당, 녹색당 등 제도좌파의 집권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좌파운동은 한국의 노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사민주의의 사실상 해체의 시작과 새로운 계급정치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에 대한 노골적인 반란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아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반란은 이미 드러난 사민주의의 정치적 사망에서 조직적인 사망으로의 이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며,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추세이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노동조합운동이다. 현재의 반란은 노동조합 또는 그 내부의 좌파지도부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위로부터의 반란이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과 충분히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이 제도좌파의 역사적 오류를 다시 반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현시기 일국적 계급투쟁, 반세계화투쟁과 반전투쟁 등 대중투쟁의 정치적 성과가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거나 실종된 채,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 끝나는 한계를 넘기 위해, 이 대중운동은 전술적으로 제도정치로 진입해야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제도정치의 해체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은 사민주의의 조직적 해체를 뛰어넘어, 21세기의 새로운 계급정치를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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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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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1)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노무현 대통령이 과감한 승부수로 상찬한 ‘아젠다 2010’, ‘우정산업민영화’

최근 거듭해 대연정론을 주장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과 독일의 예를 대연정론의 주요한 논거로 삼아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인즉슨 독일의 경우 슈뢰더 총리가 ‘아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에 대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의회를 해산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고, 일본의 경우 고이즈미 총리가 ‘우정산업 민영화’ 라는 개혁안을 내걸고 역시 의회를 해산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도 그런 ‘개혁안’을 내걸고 승부수를 띄워 국민들로부터 직접 심판을 받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며 ‘대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제는 내각제 개헌론까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과감한 개혁 승부수’로 상찬한 독일의 ‘아젠다 2010’과 일본의 ‘우정산업 민영화’는 ‘낡은 국가운영 시스템의 개조’에서 ‘극단적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얼마 안 남은 양국 총선(일본: 9월 11일, 독일: 9월 18일)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에 참세상은 과연 ‘아젠다 2010’과 ‘우정산업민영화’가 무엇인지 또한 각기 자국에서 신세대 정치인으로 불리는 슈뢰더 총리와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노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젠다 2010’과 ‘우정산업민영화’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향후 행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젠다 2010’ 으로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창출한 슈뢰더 정권

1998년 집권당시의 슈뢰더
 독일 총리실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003년 3월 해고규제완화, 실업급여 삭감, 세금 감면, 소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방대한 분량의 노동·복지 개혁안인 ‘아젠다 2010’을 내놓았다.

독일의 우파 야당인 기민·기사 연합은 같은해 가을 ‘아젠다 2010’에 대한 전폭적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이에 따라 ‘하르츠’라는 이름의 ‘노동개혁안’이 순차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2004년 7월에는 실업수당 기간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사회보장금과 실업수당을 통합하는 직업소개소가 제시하는 저임 일자리에 반드시 취업해야 하는 하르츠 IV가 여야 합의로 상원을 통과했다.

2005년 1월부터 시행된 ‘하르츠 IV’ 이전에 독일 실업자들은 24~32개월 동안 직전 급여의 4분의 3 정도를 실업수당으로 받고, 정해진 실업수당 기한까지 취업을 못할 경우 그보다 약간 줄어든 실업지원금을 받아 생활했다. 그러나 '하르츠 IV' 시행 이후 부터는 실업수당은 12~18개월 동안만 지급되고 , 그 기간 이후에는 개인 자산이나 배우자 소득이 없는 실업자에게만 한 달에 331~345유로(한화 약 45만원)의 정액 실업수당이 지급된다.

슈뢰더 정부는 ‘노동복지 축소’라는 채찍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슈뢰더 정부는 2003년 4월부터 ‘1인 기업 창업시 3년간 지원금 제공(1년차: 600유로, 2년차 330유로, 3년차 200유로), 월급여 400유로 이하 작은 일자리 창출시 소득세 감면’이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슈뢰더 정부는 이를 통해 2004년까지 11만개의 1인 기업과 170만개의 작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1유로의 환율이 대략 1300원 정도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를 정부 지원 하에 만든 셈이다.

'혁신과 성장‘구호 아래 성매매 알선하기도 한 독일 정부

아젠다 2010- 혁신과 성장
 독일 연방정부 홈페이지

독일연방정부 공식 홈페이지(www.bundesregierung.de)는 ‘아젠다 2010’의 구호로 ‘혁신과 성장’(INNOVATION UND WACHSTUM)를 제시하고 있다. 실업급여를 줄이는 대신 저임 일자리를 많이 제공함으로써 정부와 기업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혁신과 성장’의 주 내용인 셈이다. 김대중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생산적 복지’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창출’이라는 성과에 대해 기민·기사련 같은 우파 야당 뿐 아니라 독일 재계도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이들과 독일정부는 화살을 노조로 돌려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 방위적 압력하에서 독일 금속노조(IG 메탈)와 지멘스는 생산시설을 국외로 옮기지 않는 대신 임금 동결과 주당 노동시간 연장에 합의했고 다임러-크라이슬러, 오펠, 폴크스바겐 같은 대표적 기업들은 일자리 보장과 노동시간 연장이 포함된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러한 노동복지 축소의 물결 와중에 해외토픽을 장식한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5년 1월 독일 연방정부의 직업소개소는 정보기술자 출신의 한 실직여성에게 ‘성매매 일자리’를 소개했고 이 여성이 거절하자 실업급여를 중단하려 한 것이다. 성매매가 합법화된 독일에서 정부가 제시한 일자리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면 실업급여를 중단하는 ‘하르츠 IV' 규정에 의해 정부 기관이 ’성매매 알선‘에 까지 나선 이 사건은 ’아젠다 2010‘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속내와 무관하게 ‘아젠다 2010’은 ‘생산적 복지’의 전범으로 각국 정부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고 초국적 금융평가기관들은 독일의 ‘개혁안’을 칭찬하기 바빴다. 2003년 여름까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던 사민당 정부의 지지율은 2004년 가을에는 30% 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모 신문은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슈뢰더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해가 국민 사이에 확산된 것”이라 평가하며 “슈뢰더가 2006년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성공 거뒀다는 ‘아젠다 2010’의 이면은

슈뢰더 총리와 기민련 당수 앙겔라 메르켈의 티비 토론
 AP통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성과’를 거둔 슈뢰더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며 조기 총선 실시라는 승부수를 띄운 것일까? ‘아젠다 2010’이 발표된 2003년 당시 독일의 실업률은 9.8%를 기록했다. 그런데 연이은 하르츠와 ‘일자리 창출’에도 불구하고 2005년 3월 독일의 실업률은 무려 12.5%로 급등했다.

이어 5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주정부를 구성하는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루르 탄광을 배후로 하는 전통적 광공업 중심지로 지난 40여년간 사민당이 한 번도 패한적이 없는 사민당의 핵심 지지 지역이다. 독일 남동부의 바이에른주가 기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정치권의 중심지라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슈뢰더 정부는 바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선거에서 참패해 독일 전역 16개 주 가운데 5개주의 정권밖에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9월 18일로 예정된 총선과 관련된 여론조사에서 동독 출신 여성정치인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연합은 현재 사민당을 넉넉히 따돌리고 있다. 전통적인 ' 기민VS사민' 대결구도에 새로 등장한 ‘좌파당’(Linke Partei)이 어느 정도 약진하느냐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기민련등 우파는 슈뢰더의 ‘아젠다 2010’을 그대로 이어 받고 긴축재정등을 통해 강력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총선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아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구도를 오른쪽으로 당겨버린 슈뢰더, 그리고 좌파의 대응

좌파당(Linke Partei)을 이끄는 오스카 라퐁텐
 독일정치전문 사이트 Politikerscreen
결국 슈뢰더의 ‘아젠다 2010’은 실효도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독일 내 ‘좌파VS우파’의 전통적 대립구도를 훨씬 우측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전통적 사민당 지지 계층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슈뢰더 사민당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사용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전통적 우파 세력이 신자유주의라도 잘 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지지 정당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거듭 주장하는 ‘대연정’의 향배가 짐작되는 지점이다.

한편 2004년 7월 사민당내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가 사회당을 탈당해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 그룹을 결성했고 사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거물 정치인 오스카 라퐁텐이 2005년 5월 이에 합류했다. 이들은 현재 구 동독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둔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이라는 선거연합당을 결성해 총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사민당은 7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오스카 라퐁텐은 “사민당의 ‘아젠다 2010’이 노동자의 복지를 축소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최저 임금과 연금액을 각각 월 1,400유로와 800유로로 올리고 실업보험금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저소득자에 대해 의료비를 면제하고 세금혜택을 주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게재 순서
(1)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만든 독일의 ‘아젠다 2010’

(2)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3)우정사업민영화, 340조엔의 우편저축액은 어디로?

(4)민영화 법안은 폐기되었다
요코 아끼모토 ‘ATTAC 일본’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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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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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2)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총선을 앞둔 독일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그 두 번째 순서로 갈현숙의 글을 싣는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구자인 갈현숙은 슈뢰더가 의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 독일 사회가 50여년간 유지해왔던 '사회시장경제체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 원인 그리고 이에 대한 슈뢰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을 구체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민당 정부가 내놓은 신자유주의적 대안(아젠다 2010)의 허구성과 한계를 지적한 필자는 새로운 좌파 정당(독일 내)의 등장과 유의미성을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진행할 수 있는 사회정치집단의 복원과 성장에 열정을 쏟아야 할 때"라 지적한다. 아래는 갈현숙의 기고글 전문이다.


연정 파트너 녹색당 무시하고 내각 재신임안 제출한 슈뢰더

9월 18일에 독일 총선이 열린다.
좌:기민당수 앙겔라 메르켈 우: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독일 공영방송 ZDF

지난 8월 24일자 인터넷 한겨레신문의 기사제목 중 <노대통령 '고이즈미, 슈뢰더 부럽다‘>가 눈에 띄어 기사를 읽게 됐다. 기사를 읽으며 슈뢰더의 재신임안 배경에 대해 도대체 남한에 어떻게 소개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노 대통령은 특히 슈뢰더 총리의 재신임 요구에 대해 이 일을 할 수 없으면 앉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를 마감하려는 것이고, 또한 정권을 바꿔서라도 이 개혁은 해야 되겠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던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추론한다."고 했다.

이 구절을 번역해서 독일국민들에게 보여주면 몇 사람이나 동조할지 의문이다.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전체적 맥락에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뽑아내져 국내사정에 맞게 위장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한 사건을 보는 입장은 다양하지만 입장에 대한 의사표현 이전에 반드시 전제돼야 할 것은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배경에 대한 정보의 공유일 것이다. 물론 의도적인 가감을 감안하고서도 말이다. 적녹(사민당과 녹색당)연정의 재신임안배경에 대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을 따져보자. 지난 5월22일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 주정부 선거에서 사민당이 참패하면서 16개 주선거에서 다섯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주정부를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에게 넘겨주게 됐다.

더욱이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지역은 39년간 사민당이 패배해 본 적 없었던 사민당의 표밭이었다. 한국에 빗댄다면 대구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과 비슷한 충격일 것이다. 선거결과가 확정되자 수상인 슈뢰더는 연정의 파트너인 녹색당에 묻지도 않은 채 현 내각에 대한 재신임안 요구를 발표했다. 발표 이후 재신임안 의결이 의회에 제출됐고 8월 연방의회의 동의를 거쳐 지난 25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연방의회선거를 9월18일에 시행하게 된다. 여당집권기간이 1년이 남아 있던 시점에 집권여당의 대표가 이런 결정을 한 데는 연방의회내의 과반수이상을 여당 의원이 차지하고 있더라도 지방의회선거결과 구성된 주 의회의 2/3가 야당 의원으로 구성되므로 주 의회가 연방의회의 강력한 비토(Veto)세력으로 자리해 사실상 정권과 연방의회가 그 수행능력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노르트라-붸스트팔렌 주정부선거 전에 사민당의 패배할 경우에 대한 우려의 시나리오가 이미 퍼져있었다. 노대통령은 슈뢰더 수상이 든든한 당의 비호를 받으며 강령한 개혁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천명하려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실은 내각과 연방의회를 통해 행사할 수 있었던 영향력이 차츰 주정부선거에서 사민당의 패배가 거듭되며 상실해 오다 결국 손발이 잘린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현 적녹연정을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일까? 그것은 적녹연정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을 대폭 개혁하기위해 고안된 "아젠다 2010(Agenda 2010: 독일어로는 아겐다 2010 이라 부른다)" 때문일 것이다.

기여금 원칙으로 유지해온 독일의 '사회시장경제 체제‘ 위기 봉착

독일 금속노동자들
 독일 공영방송 ZDF
독일은 2차 대전 후 사회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체제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시장경제시스템에 ‘사회’란 개념을 적용해서 경제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복지’ 역시도 국가의 중요한 책임으로 설정해 발전시켜온 것이다. 50년대부터 포디즘적 생산관계를 토대로 경제 부흥과 완전고용이 가능케 됐고 이러한 완전 고용을 기반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골격을 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의료보험, 연금, 실업보험 등의 각각 사회보장재원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반반씩 부담하는 형태의 기여금원칙을 근간으로 삼았다. 이에 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관장 및 관리하고 일부의 기여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왔다.

바로 이점이 북유럽 복지국가와 다른 점인데 북유럽의 경우 세금을 통한 재원의 재분배 형태라면 독일의 경우 기여금 원칙을 기반으로 한 사회보험의 형태이므로 상하 간 재원 재분배 정도는 북유럽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일 후 막대하게 투입된 통일비용에도 불구하고 비용만큼의 효율성을 창출하지 못한 구동독 재건프로젝트의 한계와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이 시기 더욱 강하게 작동되면서 독일의 복지국가 시스템에 이전보다 강력하게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복지국가의 위기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경제위기의 국면마다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는 독일의 생산력과 생산 입지의 비경쟁성과 관련 됐다기 보다는 현재의 기여금원칙에 입각한 사회보험시스템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했을 때 그리고 중심부,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 간의 축적구조와 생산관계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전지구적으로 작동하기 이전의 조건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과의 비교에서 원인이 발견될 수 있다.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기여금 원칙은 고실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예전의 모습으로 유지하기 어려울뿐더러 현재 실업의 문제는 노동의 유연화정책으로 출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16년 만에 정권교체가 되면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정부여당이 됐고 2002년 재집권에 성공해서 집권 2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독일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실업문제다. 독일의 실업률은 연평균 정권 교체기였던 98년 9.4%에서 다소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집권 2기째였던 2003년 9.8%상승하더니 2005년 3월12.5%까지 상승했다가 7월 11.5%로 다소 떨어진 상황이다. 열 명 중 한 사람이 실업자란 이야기고 구동독지역의 실업률은 구서독지역의 1.5배에서 2배를 상회한다. 실업자가 발생하면 일단 기여금을 통한 사회보장재정의 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실업보험과 생활보호지원금이 지출 돼야 하는 이중적 재정고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이 통일 후 가속화 되었고 좀처럼 실업률은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실업의 원인을 복지국가시스템과 강력한 노조 때문이라고 선전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와 크게 다르지 않는 노선을 적녹연정이 걷기 시작한 점이다. 집권 2기째인 2003년 3월 14일 연방의회에서 슈뢰더 총리의 "Agenda 2010"에 대한 기조연설을 시발로 같은 해 9월 기민/기사연합의 대폭적 지지로 통과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초기 Deutschland bewegt sich ‘독일이 움직인다’ 란 구호에서 ‘혁신과 성장’으로 변했다 (http://www.bundesregierung.de/Themen-A-Z/-,9757/Agenda-2010.htm). 독일이 움직여 혁신과 성장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내용의 혁신과 성장인지에 대한 사민당의 당성에 맞는 고민의 흔적도 내용도 찾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유권자들은 기민당과 사민당의 차이를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상당히 혼란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야만 한다면 보수당인 기민당이 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푸념도 있었다.

사민당 신중간 노선이 내놓은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안, ‘아젠다 2010’

아젠다2010 과 하르츠를 반대하는 집회
 독일인디미디어 de.indymedia.org
노대통령이 부러워했던 그 개혁의지란 것은 바로 슈뢰더와 소위 사민당 내부의‘Neue Mitte(신중간)’노선의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에 맞는 구조개혁의 전면 수용에 대한 개혁의지 였던 것일까? 이러한 개혁을 사민당이 정부여당이 되어 지난 7년간 진행시켜온 것이다. 그럼에도 사민당 평당원들은 그래도 보수당이 앞장서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것보다 낫지 않았겠느냐는 의구심에 가득 찬 질문을 스스로 던지곤 한다. 1869년 8월 8일 노동자 해방을 위해 건설된 사민당이 자본주의 의회정치 구조 안에서 이렇게 ‘진화하고 발전’한 것이다.

‘아젠다 2010’은 경제성장과 높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의 임금비용 및 사회적 비용의 감소와 이를 위해 노동시장개혁과 복지시스템의 대폭 혁신을 목표로 한다. 경제, 교육, 세금, 노동시장, 의료보험, 연금 등의 분야가 주요 개혁 프로그램의 대상이고 각각의 하위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로 꼽히는 것이 의료보험개혁과 노동시장 개혁 그리고 해고조건 완화이다. 독일의 의료보험은 개인기여금도 한국에 비해 높지만(서른이 넘은 학생신분의 여자의 경우 최하로 측정돼 한화로 약 15만원을 매달 의무로 기여해야한다) 병원 방문시 현금을 지불하는 일이 없었고 어떠한 병에 걸려도 추가로 개인이 지출하는 비용이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차츰 현금지불과 추가지불의 요소가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2004년부터는 일 년을 사분기로 나누어 매 분기별로 10유로를 지불해야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에 분노를 느낀 독일인들은 이 비용에 대해 의사를 만나기 위한 ’입장료’라는 쓴 소리를 하기도 한다. 즉 ‘건강’만큼은 사적 영역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예방,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라는 안목에서 공공의 영역 내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공공성이 ‘아젠다 2010’을 통해 심각하게 공격 받고 있는 것이다. 건강은 한 사회가 모두를 위해 공적영역에서 서로 책임지고 보호해야하는 기본 철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로 이전엔 실업자와 생활보호대상자에게 각각 따로 지불된 급여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덜고 노동동기를 유발한다는 미명하에 실업급여와 생활보호금을 장기적으로 하나로 통합하는 개혁이다. 이것이 현재 독일 서민들에게 일명 공공의 적으로 불려지는 ‘하르츠 IV’이다. 이 개혁프로그램이 시작되기 1년 전 실업률 감소를 위해 Minijob(하르츠II)을 정부차원에서 실시했다. 보통 일반 독일노동자가 고용이 되면 노동계약서를 써야하고 이는 해당 노동자의 사회보장보험에 강제적으로 가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Minijob으로 고용된 노동자는 사회보장보험에 가입할 의무도 없으며 해고규정도 유연할뿐더러 임금역시도 최저임금수준이다. 하르츠IV 개혁으로 실업기금을 1년까지 받은 후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 생활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노동의 의욕을 보여줘야만 한다. 슘페터식의 ‘노동을 위한 복지’를 부활시킨 것이다. 장기실업상태에 놓은 사람들은 생활보조금을 얻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창출’해 놓은 Minijob에 등록해서 최저 노동조건과 최저 임금을 감내하며 노동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의아스러운 점은 하르츠IV와 Minijob을 통해서도 실업률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과 실업기금과 생활보조금 지급액수가 감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르츠IV의 초기 단계에선 이전 시스템에서보다 더 많은 지출이 됐다는 것이다.

기업에게는 혜택을, 민중들에게는 내핍을 강요

'Geiz ist geil'현수막이 붙은 백화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함부르크 시민들
 독일인디미디어 de.indymedia.org
슈뢰더 정부는 독일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한편으론 해외로 도피하는 기업들에게 매력적 생산입지를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기업의 사회보장분당금을 줄이고 이들의 법인세(25%에서 19%로 하향조정-현재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를 책정하고 있다)를 연차적으로 줄이는 한편 노동자의 해고규정을 약화시켜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다른 한편 복지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공성의 축소와 복지와 노동을 연계시키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해서 약 2년 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위기에 대한 응급처치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의 위기에 대한 진단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일어날 뿐이다.

실제로 해외로 도피하는 자본이나 생산입지의 장점을 요구하는 기업가들의 요구를 들어줬음에도 그들은 생산 자본에 투자하지 않았고 금융 자본 쪽으로 많은 자본을 빼돌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번 더 많은 유연화와 더 유리한 조건을 앞세운다. 실제로 2002년 통계에 의하면 독일에서 있는 기업들이 기업의 총비용중 직,간접 임금으로 사용되는 부분은 21%에 불과했다. 문제는 기업가가 생산 자본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보다 금융자본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현재의 국면에선 더 많은 편안함과 장점이 유지되고 확장되는데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생산입지를 빌미로 정부와 협상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자본의 요구를 어쩔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대세인양 이제까지 비춰졌고 반복되어 왔다.

21세기 초반부터 독일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유령과 공포는 실제로 독일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보다 더 많은 위기가 조장되어 “우리는 더 이상 잘나가지 않고 우리의 연금은 바닥이 났고 우리의 미래는 불안하므로 있을 때 절약해야만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이 절약이데올로기는 한 전자상가의 광고문구로 요약된다. ”Geiz ist geil : 인색함이 끝내주는 거야!“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인 보핑어 교수는 이런 절약과 경제위기조장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국민경제에 악으로 작동해서 내수경기의 침체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요는 사민당이 정부 여당으로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한 고민의 지점들은 바로 이런 지점들에 있었어야 했다.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악화해서 상층부가 유지되는 아래로부터의 분배가 아닌 사회적 형평성과 기회의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민당의 노선이었단 말이다.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과 연합 ’좌파당‘의 출현

좌파당의 쌍두마차 게오르그 기지와 오스카 라퐁텐 포스터 앞을 지나가는 베를린 시민들
 독일 공영방송 ZDF
이런 정부여당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반기를 들며 사회정치세력으로 형성되어 출현한 것이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 Wahlalternative Arbeit & Sozial Gerechtigkeit)"당이다. 선거대안(WASG)당은 2004년 7월 사민당내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공공노조, 산업금속노조 간부 등이 사민당을 탈당해 그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올해 1월 정당으로서 공식출발해서 지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선거에서 2.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들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신자유주의 공세 이후 현실정당정치 내에서 점점 기반이 축소된 좌파세력의 새로운 공조와 시민사회단체 내에서 정당정치의 좌파세력 복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심이다.

이에 1995년 사민당대표를 거쳐 1999년 재무부장관직을 사퇴한 오스카라퐁텐이 5월24일 사민당을 공식적으로 탈퇴하고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 주정부선거 이후‘선거대안당’으로 입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연방의회선거에서 의회진출에 실패했던 민주사회당(PDS)과 함께 선거연합정당으로 ‘좌파당(Linke Partei)’이란 선거연합당명 아래 두 당이 선거운동에 임하고 있다.

좌파당은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당들 중 유일하게‘Agenda 2010’을 반대하고 있고 경제, 재정 그리고 사회정책에서의 기본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선거 주요전략을 소개한다면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사회적 정의 재고와 구축, 평화, 시민권보호, 국민생활 기초보장(Grundsicherung: 최저임금을 1400유로 선에 맞추고 빈곤문제에 적극 관여 가능한), 교육에 대한 동일한 기회, 형평성 있는 조세제도(꾸준히 증가한 노동자들의 조세율을 하향하는 반면 법인세 및 상위 소득자들에 대한 형평성에 맞는 세율적용), 구동독지역에 대해 서독지역만큼의 개발지원, 극우주의 퇴치 그리고 시장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과 사회의 안전을 위한 유럽연합이 될 수 있도록 합당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http://sozialisten.de/wahlen2005/positionen/index.htm)

이들이 연합정당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이 세달 남짓 되지 않는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는 최근까지 이들의 연합선거로 인한 연합후보자들에 대한 합법성을 심사하기도 했다. 초기 이들의 연합을 지켜보며 조사된 설문에선 평균 18%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지지율은 조금씩 주춤하며 하향하고 있는 것으로 매스컴은 보도하고 있다.

7월 중순부터 독일국영방송(ARD)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론조사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의회 그리고 정당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사민당 내부에선 좌파당을 향해 좌파의 분열은 독일을 위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닐 뿐 아니라 연정의 파트너로도 좌파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한국처럼 선거가 지나면 헤쳐서 다시모여 하는 식의 당 운동과 달리 독일의 정당운동은 백년의 세월동안 보수당, 사민당, 자유당의 큰 성향아래 각각의 정당들이 발전해왔다. 그런 이유로 이번 좌파당의 행보는 이전 독일 정당역사상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이자 그만큼 쉽지 않은 시작이었다. 게다가 동서를 어우르는 최초의 연합정당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자본주의 의회정치에서 좌파의 소리를 내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의회 안 정당들이 노동자와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은 대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해 왔고 거기에 사민당역시도 투쟁의 의지보다는 이러한 조류를 함께 형성하고 공고히 해왔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선거 국면에서 ‘더 많은 일자리, 더 적은 세금’이란 선거용 구호로 도시를 도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생략된 말들,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노동조건은 더욱 유연화 되어야 하고 해고규정은 약화되어야 하며 기업의 사회보장분담금은 줄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지는 확신은 못한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이니까“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을 독일에 묶어 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세율을 낮춰져야 한다. 이것은 모두 국민을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이렇게 생략된 말들 밝혀내야 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치개혁이 위기를 약화시키지도 해결시키지도 못했던 명백한 결과들에 대해 밝히고 그 책임에 대해 추궁해야 한다. 이미 검증이 나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정책들이 이름만 둔갑하거나 포장만 새로 해서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형태로 재등장하고 있다. ‘개혁’은 새롭게 고친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도 사민주의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개혁의 내용이 노동자, 시민들의 요구로 채워지기 위해선 다양한 정당이외의 사회정치 집단이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야한다. 그리고 그 압력은 민중과 시민들로 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아젠다 2010때문에 슈뢰더는 정치적 타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의회정치라도 시민 사회내에서 수용할 수 없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더불어 의회주의에 너무 익숙한 독일의 시민들은 의회주의 염증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투쟁해야 할 때다. 이러한 시점에서 좌파당은 하나의 가교가 될 수 있으리라본다.

9월 18일 독일은 연방의회선거를 치룬다. 국민 한 사람이 두 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한표는 지역구의 후보자에게 다른 한 표는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독일 국민의 선택이 어디로 향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도 기대를 품을 필요도 크게 없다고 본다. 다만 의회정치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진행할 수 있는 사회정치집단의 복원과 성장에 열정을 쏟아야 할 적절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게재 순서
(1)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만든 독일의 ‘아젠다 2010’

(2)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3)우정사업민영화, 340조엔의 우편저축액은 어디로?

(4)민영화 법안은 폐기되었다
요코 아끼모토 ‘ATTAC 일본’ 사무처장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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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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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독일 총선, 내각 구성 오리무중인 가운데 좌파당 약진 돋보여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기민·기사 원내 1당 차지했으나 사민당에 불과 3석 앞서

국제적 관심을 집중시킨 가운데 지난 18일 실시된 독일 총선의 윤곽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기민·기사 연합(CDU/CSU)이 35.2%의 득표율로 225석을 차지해 1당 자리에 올랐으나 사민당(SPD)과의 의석수는 3석에 불과해 선거전 초기의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또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 Wahlalternative Arbeit & Sozial Gerechtigkeit)"당과 민사당(PDS)의 연합으로 이번 총선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좌파당(Linke Partei)는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54석을 차지해 녹색당(GRUNE)을 누르며 기염을 토했다.

10월 2일 추가선거가 실시되는 드레스덴 선거구를 제외한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다.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전이 시작될 즈음에는 엥겔라 메르켈의 돌풍과 더불어 기민·기사 연합이 사민당을 20% 이상 앞서가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아젠다 2010 조차 부족하다는 기민·기사연합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고위 당직자들의 인종주의적 발언들이 결국 사민당과의 격차를 끌어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복잡한 연정 구도, 자민당과 녹색당이 캐스팅 보트 뒬 듯

한편 30%대 양당과 10% 미만의 세 당등 5개 정당이 사이좋게 의석을 나눠가짐에 따라 내각 구성을 두고 복잡한 머리싸움이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재 독일 언론들이 내놓고 있는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기민·기사연합 + 사민당 대연정(447석) △기민·기사연합 + 자민당 + 녹색당 (337석) △사민당 +자민당+녹색당 (334석)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327석).

위의 네 가지 조합 가운데 일단 두 번째와 세 번째 조합의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자민당의 경우 대체로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의 가운데에서 약간 우측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평가받는 중도우파 정당으로 기민·기사연합, 사민당과 각각 연정을 꾸린 경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양당 어디와도 다 연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녹색당의 주요 인사로 슈뢰더 내각에 외무장관으로 참여한 요슈카 피셔는 “우리(녹색당)은 정부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란다”며 “어떤 형태의 연정에 참여할 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총선 직후 내놓았다.

앙겔라 메르켈이나 슈뢰더 양자가 똑같이 상대와의 연정을 없고 자신들이 내각을 주도할 것이라 공언하고 있기 때문에 자민, 녹색당을 끌어들이려는 양자의 경쟁은 치열할 전망이다. 게다가 대연정의 경우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가 내고 슈뢰더의 사민당이 하위파트너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범좌파라는 점에서 사민+좌파+녹색당이 결국 내각을 꾸릴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좌파당이 내각에 들어가려면 아젠다 2010이 근본적으로 수정되거나 아니면 좌파당이 자신들의 입장을 바꿔야만 하기 때문이다.

좌파당의 총리후보로 나섰던 오스카 라퐁텐이나 기지 전 사민당수, 프란츠 뮌터페링 사민당수등 주요 인사들은 ‘슈뢰더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수차례 분명히 한 바 있고 슈뢰더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좌파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실리적 측면에서라도 사민당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비판하며 54석을 차지해 독일 정치의 한 축으로 선 좌파당이 연정에 참가할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

독일 총선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베를린에서 선전을 자축하고 있는 좌파당 당원들
 Linke Partei홈페이지

한편 예상대로 독일 총선은 유럽전역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급격한 우경화 행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범진보세력인 사민당 그리고 굳건한 양당구조를 깨고 세를 확산하고 있는 좌파당, 녹색당의 득표율을 합하면 과반이 넘고 기민·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을 합친 것보다 약 6% 정도 앞섰다.

이런 결과에 대해 프랑스 사회당등 이른바 ‘제3의 길’을 걷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와 미국독주에 반대하는 독일인의 선택”이라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성급하게 내놓고 있지만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등 유럽내 전통적인 주요 좌파정당들은 이미 ‘좌파’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잃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1980년 녹색당의 충격적 등장 이후 25년 만에 다시 거대 정당 구도를 깨뜨리고 의회 내의 비중 있는 급진세력으로 등장한 좌파당의 행보를 눈여겨 볼 만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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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독일 선거: 실망성 투표와 계급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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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독일 선거: 실망성 투표와 계급 균열
대연정인가? 신호등 연정인가? 아니면 재선거인가?
정병기 
대연정인가? 신호등 연정인가? 아니면 재선거인가? 지난 18일 치루어진 독일 조기총선 결과를 두고 모두들 연정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대정당인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이 1% 미만의 차이를 두고 득표했고 어떠한 연정 가능성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표 1> 참조). 또한 10월 2일에 다시 치루어질 드레스덴 선거에서 사민당이 의석을 추가한다면 기민/기사연과 정확히 동수의 의석을 갖게 되는 기막힌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표 1> 2005년 독일 총선 결과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검색일: 2005년 9월 19일)

가능한 연정 시나리오는 대연정(기민/기사연, 사민당), 신호등 연정(적황록: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흑황록 연정(기민/기사연, 자민당, 녹색당), 적적록 연정(사민당, 좌파/민사당, 녹색당)이다. 사실상 연정 교섭에서는 기민/기사연의 메르켈 후보보다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더 큰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비록 제1당은 아니지만 가능한 연정 조합이 많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제2당의 후보이지만 총리를 연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대연정의 가능성은 양대 정당 모두가 거부하고 있고, 녹색당과 자민당은 환경정책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한 배를 타기 어려우며, 좌파/민사당은 어떠한 형태의 연정 참여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의회가 3회까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하게 되면 재선거가 실시될 수도 있다. 현재 독일 정국은 어떠한 것도 분명하지 않다.

양대정당의 실표와 실망성 투표

좌우파 정당연립간의 비김수를 결과한 이 선거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7년 집권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온 적녹연정은 적지 않은 유권자들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기민/기사연 또한 정책적 차별성을 보이지 못해 실표를 한 것이다. 유권자들 절반이 투표가 임박해서야 지지 정당을 결정했으며, 약 1/3이 적극적 지지보다 실망에 따른 소극적 투표를 했다.

이러한 현상은 지지표의 이동에서도 명확히 나타났다. 사민당은 4.2%(약 236만표)의 실표를 했는데 사민당을 떠난 표들 중 약 97만표는 좌파/민사당으로, 약 62만표는 기민/기사연으로 갔으며, 약 37만 명의 지지자들은 기권했다. 3.3%(약 146만표) 실표한 기민/기사연은 사민당과 녹색당으로부터는 지지자들을 견인했으나, 64만 명의 기권자를 낳았으며 자민당에게 110만표를 빼앗겼다. 이번 총선은 기권자가 양산되고(투표참여율은 지난 선거보다 약 2% 낮은 77.7%), 표의 이탈이 두드러진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득표를 제고한 두 정당인 자민당과 좌파/민사당도 실망성 투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더욱 노골적인 자유시장 정책을 주장한 자민당은 2.4%를 더 얻었으며, 전통 좌파의 기치를 든 좌파/민사당은 4.7%의 득표를 제고했다. 그러나 표의 이동으로 볼 때, 자민당의 득표도 전통적 지지층의 확대라기보다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으로부터 옮겨온 지지자들이 많고, 좌파/민사당의 경우도 실망성 투표의 효과가 51%인 것으로 나타났다.

좌파/민사당의 약진과 계급 균열의 재등장

이번 선거의 승자는 자민당과 좌파/민사당이다. 물론 이 정당들도 실망성 투표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 득표율 제고가 전적으로 진정한 세력 강화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지표들의 종사상 지위별 성격을 보면 독일에서도 계급균열의 양상이 다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 2> 참조).

기민/기사연이 자영업자와 연금생활자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자민당은 자영업자들에게서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반면 사민당은 노동자층과 학생 및 연금 생활자로부터 높은 지지율을 획득했으며, 녹색당은 학생과 사무직 및 자영업자 등 인텔리층을 핵심지지층으로 하고 있다. 과거에도 사회계층별 지지가 10% 안팎의 차이를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기성 네 정당에 대한 지지율 분포가 과거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확대된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좌파/민사당의 지지율 분포이다. 좌파/민사당의 지지율은 압도적으로 실업자와 육체노동자들에 치중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한 좌파/민사당을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표 2> 종사상 지위별 투표경향(2005년 총선, %)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정책에 따른 투표 경향도 계급균열적 성격을 보여준다(<표 3> 참조). 유권자들이 선택한 투표의 정책적 동기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세정책과 외교안보정책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당별로 보면 매우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사민당의 경우 사회정책이 가장 높고 경제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이 유사한 비율을 보였다.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을 선택한 유권자들은 경제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을 중요한 이슈로 꼽았는데, 그중 경제정책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반면 녹색당 지지자들은 환경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은 사회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을 중시했다. 특히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의 사회정책에 대한 관심은 다른 어떠한 정당 지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60%를 보였다. 녹색당을 제외하면 우익의 자민당과 중도의 기민/기사연 및 사민당 그리고 좌익의 좌파/민주당이라는 구도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표 3> 정당 지지자들의 정책별 지지 동기(%) (* 복수 답변 가능)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wid246/umfragethemen0.shtml(검색일: 2005년 9월 19일). http://www.tagesschau.de/aktuell/meldungen/0,1185,OID4766402,00.html(검색일: 2005년 9월 19일)

노자 계급 모순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모순이자 근본적인 모순이다. 독일 사회에서 그 모순은 사회복지국가를 통해 완화되었지만,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인해 다시금 첨예해지고 있다. 2005년도 독일 총선은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는 만큼 그 희생자도 늘어날 것이며 제도적이든 비제도적이든 새로운 정치세력화가 그들을 결집할 것임을 드러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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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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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독일 2005년 총선결과와 남은 과제
갈현숙(베를린자유대) 
지난 18일 벌어졌던 독일총선에 대한 갈현숙의 글을 싣는다. 갈현숙은 이미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이라는 글을 참세상에 실어 독일과 한국에서 과감한 사회개혁안으로 포장, 선전되고 있는 아젠다 2010의 속내를 분석한 바 있다. 갈현숙은 이번에도 독일 총선 결과의 의의와 전망에 대한 깊이 있고 생생한 분석을 담은 글을 보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론, 선거제도 개편론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한국에서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정치제도상 최선의 개선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독일 총선을 바라본 갈현숙은 “독일식의 정당제도는 양당제도에 비해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오는 결점들을 채울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있다”고 그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제도로 풍부하게 할 수 있지만 바로 모두 한 표로 처리된 유권자들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지적한다. 이어 “만약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이번 선거의 결과를 아젠다 2010개혁을 완수하라는 국민의 뜻으로 오역하고 선전할 것이다”며 “뻔한 거짓말이 너무나 복잡한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이러한 완성된 절차에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음은 갈현숙의 기고글 전문이다.


총선 결과로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독일

지난 9월 18일 독일에선 2005년 독일 총선이 치뤄졌다. 선거결과는 이미 국내에도 보도됐지만 연립정부구성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현재 독일의 정계 및 이를 주시하고 있는 국민들의 시선엔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한 정당이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로 선거가 마무리 되면 정당간의 연립을 형성해서 정부여당을 구성하고 수상을 추대하기 때문이다.

2005년 총선이 그 이전의 총선과 구별되는 점은 이전의 경우, 보통 거대 정당 하나와 소수정당 하나와의 조합으로도 정부여당을 구성할 수 있는 의회의석의 과반수 이상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번 선거의 경우, 거대정당(1)+소수정당(1)의 조합으로 50%이상의 지지율을 넘지 못하는데 있다.

<2005년 독일 총선 결과.2005년 9월 19일 현재>


SPD:사민당, CDU/CSU:기민/기사연합, Gr?ne:녹색당, FDP:자민당, Linke.PDS:좌파연합당(WAGS, PDS)
첫번째 그래픽은 2005년 이번 선거에서의 득표율을 표시하고 있고, 두번째 그래픽은 지난 2002년 선거와 비교했을 때 득과 실을 비교한 것이다. 세번째 그래픽은 국회내의 의석수 중 각 정당이 차지하게 되는 의석수를 의미한다.
<출처>http://www.fr-aktuell.de/uebersicht/alle_dossiers/politik_inland/
bundestagswahl_2005/die_wahl/?client=fr&cnt=728803&src=180760

위의 그래픽을 보면 기존의 정부여당이었던 사민당 34,3% 녹색당 8,1%를 합하면 42,4%의 지지율이 보수당인 기민/기사연합 35,1 자민당 9,8으로 합산지지율은 44,9%이다. 즉 적녹연정의 경우도 보수자유진영의 경우도 기존의 연합정당으로만으로는 정부 여당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합 가능한 연정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다.

독일 총선 결과가 제기한 몇 가지 의미들

연정가능 시나리오들을 살피기 전에 이번 독일총선의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위에서도 말했듯이 더 이상 거대 정당-사민, 기민-중심의 정치에서 10%이하 지지율을 받는 정당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정당으로는 좌파연합정당, 녹색당 그리고 자민당이다. 거대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감소하는 반면 이당들에 대한 지지율 상승이 의미하는 바는 거대 정당의 정치력에 대한 실망감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정치의 다각적 발전의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둘째, 슈뢰더의 내각 신임안제출, 의회해산등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사민당은 기대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점과 그 어느 때보다도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기민/기사연합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점이다. 선거 이틀 전 까지만 해도 보통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은 41%를 넘었다. 반면 사민당은 평균 33%를 유지해왔다. 선거 초반기 만해도 사민당은 27%로 출발해서 선거전이 계속 되며 지지율이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기민/기사연합의 경우 시작도 40%이상에서 출발해서 크게 변화 없이 지지율을 유지해왔으나 이런 선거결과는 충적적인 것이다.

일반 대중의 목소리는 당연히 적녹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고 당연히 이번 선거를 통해 그런 불만의 목소리가 현실을 바꿀 계기가 될 듯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볼 때 과연 선거전 고양되고 조성됐던 그 불안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고 있다. 또한 선거운동기간 동안 나타난 지지율관련 여론조사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에 보인 유권자들의 판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적녹연정(사민/녹색)도 문제지만 기민/기사연합도 더 문제다‘

기민/기사연합의 양대 지도자
우:기사당의 슈토이버 좌:기민당의 메르켈
 www.tagesanzeiger.ch
아젠다 2010 개혁프로그램으로 인해 적녹연정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민심이 떠나있었다. 6-7월의 시기는 기민/기사연합에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고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거 전략을 구사해왔다. 문제는 이들이 구사해 온 선거전략의 기본을 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노선과 역분배적 사회복지 시스템이 그간 정권을 유지해온 적녹연정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들을 야기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을 국민들에게 전해 줬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기민/기사연합이 향후 재무부장관으로 지목하며 등용한 경제학 교수 키르히호프(Kirchhof)가 제안한 세율개혁안이다. 사민당은 소득세의 경우 최고소득자의 경우 42%인 반면 소득에 따라 15%까지 적용한다는 안을 제시한 반면 키르히호프의 경우 소득의 차이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25%의 소득세를 부과하는 안과 부가가치세의 인상을 묶어 제시했다. 이는 소득의 형평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직접세율이라는 점과 부가가치세 인상을 통한 간접세율의 상승이라는 점에서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세금정책인 것이다.

이러한 키르히호프의 제안이 현실화 될 경우 적녹연정보다 더욱 불합리한 상황이 촉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조성되기 시작했고 적어도 이들 연합이 정권을 잡게 하면 안 된다는 공감이 슈뢰더의 사민당에 회의적이었던 기존의 (사민당)지지자들을 묶어냈다고 볼 수 있다. 사민당 지지자들이 가진 딜레마는 지난 7년간의, 특히 정권 2기 동안의 슈뢰더 정권의 내용대로라면 사민당에 표를 던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기민/기사연합당이 정권을 잡게 둘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선거 전날 유권자들의 인터뷰중 이런 사민당 지지자들의 맘을 가장 잘 반영한 대화가 있었다. “슈뢰더가 계속 총리자리에 있길 원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제까지 처럼은 안 된다.“

미디어나 정치인, 경제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조건은 유연화와 해고조건 완화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분담금의 최대한 축소를 선전해왔다. 마치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오는 경제, 사회적 문제가 기존의 이런 시스템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는 비논리적 덮어씌우기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테두리에서 살아온 독일인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연금, 의료, 실업금여 등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공공성을 보장해 오던 제도들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어쩔 수 없는 대세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선거의 표로서만 그 분노를 표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민당은 기민/기사연정의 위험한 곡예로 인해 어부지리로 얻은 표도 상당한 것이다.

독일전역에서 고른 지지율 확보한 좌파연합당의 선전

셋째, 좌파연합당과 자민당의 선전이다. 우선 항상 6-7%를 유지해온던 자민당이 9%를 넘겼다는 점에서 현지에서는 자민당을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로 꼽기도 한다. 독일 정당정치상 자유민주당의 당성으로 흡수할 수 있는 지자들의 마지노선이 7%라는 주된 평가에서 나온 이번 선거결과는 실로 놀랍다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추가된 2%이상의 지지율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다름 아닌 기민/기사연합당으로부터 이전된 표가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자민당은 우선은 자축의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결국 연정을 형성해갈 파트너 당에서 표를 가져온 꼴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반의 승리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반면 좌파연합당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좌파연합당은 선거기간 내내 모든 미디어로부터 거의 봉쇄되다시피 해 보도도 잘 되지 않았고 더욱이 여론조사 지지율의 조작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민사당(PDS)의 표밭이었던 구 동독지역 뿐 아니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당 (WAGS)’이 구서독지역에서의 선전함으로써 독일전역에서 고른 지지율을 획득하게 됐다.

이는 통일 후 처음으로 현재 독일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동서독 모두를 아우르는 정당으로 그 입지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민사당은 그저 동독당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 좌파연합당의 선거운동을 통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좌파연합당이 그들이 선거를 위해 연합하며 가장 주요하게 내세웠던 대의인 ‘의회정치 안에서 의회 밖의 소리를 진정으로 담아내는 좌파당’으로 그 역할을 채워가는 것 일게다.

대연정, 신호등연정, 자메이카 연정 모두 쉽지 않은 조합

이제 독일의 각 정당들에게 남은 과제는 어떻게 연합정부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선거 다음날인 19일 월요일부터 다양한 조합가능성이 고려되고 있다. 우선 거대 연정으로 사민당과 기사/기민 연합이 제시되고 있다. 이 경우 세 당의 당성의 차이를 떠나서도 수상 자리를 슈뢰더가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복잡한 조합이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은 독일이 여러 면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느끼고 이러한 위기를 거대 정당간의 연정으로 극복해주길 바란다는 식의 여론이 보도 되고 있다.

두 번 째 가능성은 사민-녹색-자민(적-녹-황:신호등연정)이 제시되는데 이 연정에 대해서 이미 자민당은 절대 적녹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세번째 가능성은 기사/기민연합-자민-녹색(흑-황-녹:자마이카 연정-자마이카 국기와 색이 같다고 이렇게 부른다)인데 이 경우도 녹색당이 신호등 연정에서 자민당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무엇보다 녹색당의 경우 원전문제에 민감한 당인데 이 사안에 있어 흑황연합과는 적대적이다. 이 세가지 가능성외에 좌파당과 사민, 녹색당의 적적녹 연정도 이론상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그 어떤 당도 좌파당과는 연정의 뜻이 없다고 밝혔고 좌파당 역시도 야당으로 남겠다고 한 상황이다.

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증하는가?

10월 2일 드레스덴 선거에 출마하는 좌파연합의 카챠 키핑
 http://www.katja-kipping.de/

선거 직전 드레스덴에서 갑자기 지역구의원이 죽은 관계로 드레스덴만 10월 2일 선거를 치루게 됐다 (선거용지에 인쇄된 후보자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 연기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을 갖추는 일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드레스덴에서 채워질 의석수가 세석인데 만약 모두를 사민당이 차지한다면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예상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하여튼 선거 후 14일 내에는 연정에 대한 결론이 도출되야 한다. 꾸준한 물밑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조화 가능한 가능성이 아직 발견되지 못한 듯 싶다.

지난 18일 독일국민들은 그들을 대신해 향후 4년을 책임질 정치가와 정당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유권자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모두 같은 한 표로 처리됐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독일식의 정당제도는 양당제도에 비해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오는 결점들을 채울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있다. 위에 언급한 것 처럼 거대 한 당의 뜻대로 정권이 좌우 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의 장점을 말한다.

그러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제도로 풍부하게 할 수 있지만 바로 모두 한 표로 처리된 유권자들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이번 선거의 결과를 아젠다 2010개혁을 완수하라는 국민의 뜻으로 오역하고 선전할 것이다. 뻔한 거짓말이 너무나 복잡한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이러한 완성된 절차에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갈현숙 님은 베를린자유대 사회학 박사과정을 지내고 있다.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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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녹색당 제치고 제4당으로, 좌파연합의 승리&quot;

 
    칼럼 > 칼럼
"녹색당 제치고 제4당으로, 좌파연합의 승리"
[정대성의 독일통신](1) - 연정 구성을 둘러싼 독일 정가의 소용돌이와 9.18 독일 총선의 의미
정대성(빌레펠트대학) 
"슈뢰더는 영원한 총리가 되려는가?"
"나는, 게르하르트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난 23일 독일 <빌트>지의 일면을 장식한 머릿기사 제목이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복장을 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그래픽 사진도 곁들여졌다. 총선후 독일 정국이 연정 구성과 총리직을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서 연일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가운데, 매일 수백만 부를 찍어내는 유럽 최대의 '황색' 일간지 <빌트>가 슈뢰더의 총리직 '욕구'를 이렇게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야욕'에 빗대어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23일자 '빌트'의 1면 머릿기사
스캔들 기사를 선호하고 뚜렷한 보수 성향을 '자랑하는' 이 신문은 차기 정부의 출범 선언문이 다음처럼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황당하게 비꼰다. "나, 게르하르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기민/기사연합은 두 정당으로 분리되었다. 둘째, 따라서 나의 사민당이 원내 제1당이다. 셋째, 내가 총리를 계속한다!"

패러디를 넘어 공개적인 야유와 비아냥 수준에 이른 <빌트>의 이러한 '공격'은 총선에서 0.9% 차이로 기민/기사연합에 패배한 사민당 지도부가, 연방의회에서 '연합체'로 구성된 기민/기사연합을 두 개의 정당으로 쪼개고 제1당이 되기 위해 '연방의회 규정'을 바꾸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데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듯하다.

현 연방의회 규정은 기민당과 기사당이 연방의회에서 단일 의원단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민/기사'연합'이라는 명칭 그대로다. 물론 기민당과 기사당은 엄연히 다른 두 개의 정당이지만 기사당은 바이에른주에만 존재하고, 대신 바이에른주에는 기민당이 없다. 그래서 성향이 비슷한 형제당인 두 정당은 기민/기사연합으로 연방의회 선거에 임하고 하나의 의원단을 구성해온 것이다.

하지만 선거 직후부터 사민당은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은 두 개 정당을 합친 것이니 만큼 사민당이 최대의 지지를 받은 1당이라는 '논리'를 펴왔고, 급기야 녹색당과 좌파당의 지지를 얻어 연방의회 규정을 바꿔 원내 1당이 되려한다는 말이 흘러나오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사민당 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수 뮌터페링은 재빨리 그럴 계획이 없다고 밝혔지만, 보수 색깔을 분명히 하며 기민/기사연합과 그 당의 총리 후보 앙겔라 메르켈을 지지하는 <빌트>는 '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 온갖 추측과 예상이 난무하며 독일 정가를 달구고 있는 연정구상과 총리직을 둘러싼 힘겨루기와 줄다리기는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본적인 원인이 돌려진다. 하지만 독일은 전통적으로 한 정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해 연정형태의 정부가 구성되어온 것이 관례였다.

기실 이번 선거의 딜레마는 집권 사민당-녹색당은 물론 야당의 연정 파트너인 기민/기사연합-자민당도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민당-기민/기사연합의 대연정을 제외하면 3개의 정당이 함께 정부를 구성해야 할 처지에다, 총리직 싸움이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기민/기사연합의 주장은 간단하다. 최다 득표를 한 기민/기사연합이 연정을 주도해야 하고 총리 자리 역시 그들의 후보인 앙겔라 메르켈의 몫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총리직과 연정 주도권을 포기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슈뢰더와 사민당 당수 뮌터페링은 정색을 한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사민당에 20% 이상 앞섰던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이 수직으로 떨어져 결국 사민당보다 고작 0.9%밖에 많지 않고, 그마저도 두 정당을 합한 것이니 만큼 슈뢰더를 총리로 하는 사민당이 정부구성을 주도해야 옳다는 것이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기민당 지지자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민/기사연합의 구상은 우선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에 녹색당을 끌어들이는 흑-황-녹의 '자메이카 연정'(자메이카 국기가 흑.황.녹색으로 이루어짐)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슈뢰더 정부에서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녹색당과의 정책 차이도 만만치 않고, 녹색당 쪽에서도 당 노선의 수정을 감수하며 보수연정의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는데 적잖은 위험부담을 가지는 만큼 '자메이카 연정'이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예상대로 23일 녹색당과의 연정협상은 별다른 성과 없이 큰 차이점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기민/기사연합의 다음 카드는 사민당과의 대연정이다. 물론 현재 이 구상의 최대 걸림돌은 사민당이 총리직을 포함한 연정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는 점이다.

한편, 사민당의 구상은 일단 사민당-녹색당에 자민당을 데려오는 적-녹-황의 '신호등 연정'이었다. 하지만 선거 직후부터 자민당은 사민당-녹색당 정권의 수명을 '장관 자리 몇 개'로 연장할 뜻이 전혀 없다고 못박아 왔다.

그러면 사민당의 다음 대안도 기민/기사연합과의 대연정이다. 물론 슈뢰더를 총리로 앉히는 사민당 주도하의 연정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기민/기사당 역시 메르켈을 총리로 하는 연정 주도권 주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의 수뇌부가 모인 지난 22일의 연정협상 논의는 예상대로 별반 소득 없이 끝났다.

독일 언론은 정국의 이러한 상황을 가늠하며, '누구도 권력을 얻지 못한 카오스 선거'(<슈피겔>)에 뒤이은 '연정 주도권과 총리 자리를 둘러싼 싸움'으로 요약하고 있다.

'누구도 권력을 얻지 못한' 선거라는 평가는 수치상의 선거결과로 뒷받침된다. 집권 사민당은 34.3%로 지난 2002년 선거보다 4% 이상을, 기민/기사연합은 35.2%로 3% 이상을 잃었다. 사민당-녹색당 연정의 지난 7년간의 정책은 도합 42.4%의 지지율에 그쳐 결국 국민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선거 초반 과반수를 웃도는 지지율을 얻어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던 기민/기사연합-자민당은 45%를 얻는데 머물러 지지표가 대거 이탈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기민/기사연합은 선거 직전까지 각종 설문조사에서 40%를 웃돌던 지지율이 35% 남짓으로 곤두박질하는 충격을 받아 '패배한 승자'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독 시절부터 정권을 주고받으며 독일 정치를 이끌어온 거대 양당인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이 연방의회 선거에서 얻은 지지율의 합이 70%를 밑도는, 1949년 서독 최초의 선거를 빼면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는 2차대전 후 독일 정치를 주도해온 거대 양당의 힘이 균열되기 시작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제 거대 정당은 더 이상 그리 거대하지 않고, 군소 정당은 더 이상 그리 작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선거 당일부터 '이 날의 승자'로 공공연히 지목된 것은 군소 정당인 자민당이었다. 자민당은 지난 선거보다 2.4%가 많은 9.8%를 얻어 일약 제3당으로 올라섰고,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며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사민당의 슈뢰더는 그 날 저녁부터 자민당에 노골적인 '러브 콜'을 보냈다.

선거 승리에 환호하는 자민당 지지자들
그렇다면 자민당이 진정한 승자인가? 신나치 정당을 빼면 독일의 현 정당 구조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자민당은 분명 지난 선거보다 125만명의 유권자를 더 얻었다. 하지만 자민당은 유권자들의 정당별 이동상황 분석 결과 다른 정당들과 얼마 안 되는 유권자를 주고받았음에 비해, 같은 보수 진영인 기민/기사연합에서 125만 표를 뺏어왔다. 결국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 이동이 자민당을 제3당으로 만든 것이다.

자민당을 제외하면 지난 선거보다 득표가 늘어난 정당은 '좌파당'(좌파연합)밖에 없다. 민사당과 선거대안당이 연합해 당초의 예상을 깨고 거센 돌풍을 일으킨 좌파당은 결국 8.7%의 지지율을 획득해 녹색당을 제치고 제4당으로 당당히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민사당이 2002년 선거에서 겨우 4%에 그쳐, 지역구 직접선거로 당선된 2명을 빼곤 비례대표제 하한선인 5% 규정에 묶여 연방의회 입성이 좌초된 것에 비하면 무려 4.7%가 늘어난 수치이다. 그렇다면 '이 날의 승자'는 자민당이 아니라, 자민당보다 두 배나 득표를 늘린 '좌파당'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좌파당의 지도자 기지와 라퐁텐(우)
좌파당은 지난 선거와 비교해 200만 표 이상을 더 끌어모으며 모든 정당에서 유권자들을 뺏어왔다. 무엇보다 사민당이 96만표로 좌파당에 가장 많은 유권자를 빼앗겼다. 또 지난 2002년 선거에서 기민/기사연합,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 가운데 각각 74만명, 51만명, 12만명, 8만명이 기권으로 돌아선 반면, 유일하게 좌파당만 지난 선거의 기권자 가운데 39만명의 표심을 얻었다.

하지만 좌파당의 이러한 도약은 크게 언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선거 직후 어느 정당도 좌파당을 연정 파트너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파당만 빼고' 어느 정당과도 연정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태도가 시종일관 지배적이다. 현재로선 사민당-좌파당-녹색당으로 구성되는 적-적-녹 연정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좌파당 역시 선거 후 강력한 야당으로 남아, 복지국가의 토대를 허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본격적인 비판의 날을 세울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잡지 '포커스'의 선거 특집호 표지. 기민당, 자민당, 사민당, 녹색당을 대표하는 얼굴이 각각 실렸지만, 좌파당의 대표는 빠져있다.
물론 외면적 이념 성향으로 보면, 흔히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사민당과 녹색당에 좌파당을 더해 범 좌파 진영으로 분류할 수 있고, 중도 우파의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이 범 우파 진영을 이룬다. 산술적으로 좌파 진영의 득표는 과반수를 넘긴 53.1%이고, 우파 진영은 45%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 좌파진영의 연정이 '불가능의 영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사민당과 좌파당 지도부의 '개인적인 앙금'이다. 특히 좌파당의 돌풍을 진두지휘한 오스카 라퐁텐은 사민당의 옛 당수였다가 사민당을 탈당해 좌파연합을 성사시킨 인물로 슈뢰더와 '견원지간'이 된지 오래다.

사민당과 좌파당의 정책노선 차이도 이에 못지 않게 골이 깊다. 좌파당은 슈뢰더 정권이 사활을 걸고 추진한 '아젠다 2010'이나 '하르츠 IV' 같은 개혁을 누구보다 거세게 비판해 왔다. 또 좌파연합이 '좌파당'이라는 명칭을 택한 데에도 사민당을 더 이상 좌파 정당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적-적-녹으로 꾸려지는 '범 좌파 연정'은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4일자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 따르면, 언젠가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이 신문은 독일 국민이 좌파를 다수파로 만들었고, 이는 기민/기사연합-자민당의 보수 진영이 공공연히 찬동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하튼 좌파당이 일으킨 돌풍은 독일 여론이나 정치권에서 그에 걸맞는 관심이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좌파당은 과거 민사당이 구 동독 지역에서는 꽤나 표를 얻었지만 서독 지역에서 1%에 불과한 '무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은 것에 비해, 이제 서독 지역에서도 5%에 육박하는 득표를 올리며 54개의 연방의회 의석을 가진 명실상부한 '전국'정당으로 거듭났다.

좌파당 돌풍의 진원지는 물론 구 동독지역이다. 구 서독 주민이 좌파당에 4.9%의 지지를 보낸 반면 구 동독 주민들은 25.4%의 표를 던져, 동쪽지역에서 좌파당을 사민당에 이은 제2당으로 만들었다. 구 동독 주민들의 이러한 좌파당 지지는 동서 지역의 현격한 격차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그 '좌절한' 동쪽 주민들의 '분노한' 표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나아가 구 서독 지역에서까지 좌파당이 약진을 보인 것은 사민당 정부가 경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온 '복지국가 허물기'에 경종을 울리는 징후로도 읽을 수 있다. 선거전 막판에 사민당이 상당한 세력을 회복한 것도,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이 경제 회복을 내세워 사회보장과 복지정책의 후퇴를 '더' 강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반감의 결과로 보인다. 기실 사민당은 선거 막판 기민/기사연합에 맞서 '사회정의와 평등' 및 '약자를 보호하는 정당'이라는 고색 창연한 '옛'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전면에 내걸어 효과를 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선거 결과는 빈곤층의 확대 속에 독일 사회를 가로지르는 '사회 양극화' 과정의 반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민/기사연합의 표가 대거 더 오른쪽의 자민당으로 갔고, 적잖은 사람들이 맨 왼쪽의 좌파당에 기대를 걸었다. 좌파당의 정책은 '실현 불가능한 대중선동'이라는 다수 여론의 지속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10% 가까운 독일 국민들이 '복지국가의 틀'을 지키고 실업수당을 올리겠다는 좌파당의 공약에 표를 던졌다.

결국, 중도를 대변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세력은 약화된 반면, 오른쪽의 자민당과 왼쪽의 좌파당이 힘을 키우며 사회 양극화 현상이 선거 결과에 투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슈피겔>이 선거 특집호에서 '왕이 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꼬집은 슈뢰더와 사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왜 독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지난 7년간 이어진 적-녹 연정의 지속을 부정했고, 당의 지지율이 지난 15년 이후 최저에 그쳤는지 곰곰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7년 적-녹 연정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된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 문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기본적인 울타리인 사회복지의 급격한 후퇴만 낳고 별달리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려는 꿈을 부여잡고 있는 메르켈과 기민/기사연합 역시 이번 결과가 당의 역사상 3번째에 해당하는 최악의 득표임을 기억함과 아울러, 특히 선거전 와중에 불거진 구 동독 주민 모욕 발언에다, '가진자'에게 혜택을 준다는 비판의 도마에 오른 세제개혁 논란이 더해지며, 선거 초반의 압도적인 지지가 어떻게 급전직하했는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23일자 만평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총리직과 연정 구성을 둘러싼 두 정당의 '명분 없는' 주도권 싸움은 독일 국민들의 냉소만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23일자 <쥐트도이췌 차이퉁>은 슈뢰더와 메르켈을 암시하는 듯한 남녀가 협상 테이블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그림을 만평으로 실어, 총리직과 연정 주도권을 둘러싼 '이전투구'가 독일 국민들의 바램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도권 싸움은 두 정당 '모두' 선거에서 국민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끗이 망각한 채, 어떻게든 정권을 잡아 보겠다며 '도토리 키 재기'에 골몰하는 촌극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여하튼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은 오는 28일 다시 대연정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자메이카 연정'이나 '신호등 연정'이 난항을 보이며 실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지고 있어 '대연정'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고 있는 것이 현실적 배경이다. 또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독일 국민들은 높은 실업률을 비롯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연정을 선호한다고 드러나고 있어, 두 정당은 적잖은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대다수 독일 국민은 연정 협상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갈 경우 불가피한 길인 '재선거'에 반대하고 있음을 여론조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돌아오는 대연정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몰라도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이전투구 만평'이 그대로 재현되기를 바라는 독일 국민은 없을 것이다.

68혁명 당시 '비상권한법' 반대 시위 장면
하지만 전후 서독사에서 1966-69년에 단 한번 존재한 대연정은 당면한 경제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일각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명실상부한 야당의 부재로 인해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침해된다는 거센 비판 속에, 비상사태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 권한법'에 반대하는 저항을 조직한 '의회 외부 반대파'(APO)가 결성되는 등 독일 '68혁명'의 분출에 한 기폭제가 되기도 했던 역사를 안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감안할 때, 두 거대정당이 한 울타리에 동거하는 대연정이라는 옷이 과연 독일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안성맞춤'일지는 섣불리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대성 님은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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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노래’와 ‘증오의 노래’

 

    칼럼
‘해방의 노래’와 ‘증오의 노래’
[정대성의 독일통신](2) - 불안의 시대를 파고드는 독일의 신나치 록 음악
정대성 
“꿈이 노래를 잃으면 제 마음을 묶는 사슬이 되는 법이다.
혁명이 사랑을 잃으면 추하고 가공할 폭력이 되는 법이다.
사랑을 잃은 폭력이 노래를 좋아하면 그 노래 역시도 사슬이 되는 법이다.”
- 이청준 <흰 옷> -

‘노래하는 혁명가’와 ‘전자기타를 든 테러리스트’ - 역사와 감옥 속으로 들어가다

칠레, 1973년 9월.
2001년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노래하던 미국의 심장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던 때로부터 꼭 28년 전의 그 날인 9월 11일, 남미 대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대통령궁도 전투기의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다. 칠레 민중의 염원을 등에 업고 3년 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민중연합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미국을 등에 진 군부 쿠데타에 맞서 ‘기관총을 들고’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아옌데 대통령 최후의 사진. 가운데가 아옌데 대통령
4일 뒤, 노래와 기타로 아옌데와 함께 하며 선거를 통한 민중연합 정권의 창출에 기여한 칠레 민중의 벗이자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도 수많은 동료와 함께 무참히 학살당한다. 시체 더미 속에서 발견된 하라의 몸은 총탄 자국 투성이고, ‘해방 세상’의 염원을 기타에 담아내던 두 손은 처참하게 부러져 있었다.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는 ‘해방의 무기’인 노래와 함께 그렇게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독일, 2005년 3월.
록 밴드 <란처>가 연방 법정에 선다. 죄목은 ‘범죄단체 결성’이다. 밴드 멤버들이 모여 총질이라도 도모한 것일까. 아니, 그들의 ‘무기’도 노래이다. 하지만 ‘검둥이의 선거권은 목 메달고 배에 총알을 박아 버려’ 같은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극단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노래 가사이다. 나아가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 진드기, 그 더러운 것은 어서 모조리 사라져야 해’ 같은 외국인 증오를 드러내 놓고 부추기는 섬뜩한 가사도 스스럼없이 무기로 사용했다. 30여년 전 빅토르 하라가 부러진 손으로 내려놓은 ‘무기로서의 노래’를 이들이 다시 집어든 것이다. 그것도 정 반대 방향에서.
밴드 이름부터가 ‘병사’란 뜻으로 나치 냄새 깨나 풍기는 이 그룹의 노래 가사에 대해 연방 판사는 ‘죄다 범죄감’이라고 밝힌다. 담당 검사는 그룹 <란처>가 미국을 비롯해 스웨덴,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의 극우파 네트워크를 통해 음반을 만들어 배포했으며, 예술가라는 포장은 순전히 가면이고 ‘전자 기타를 든 테러리스트’가 자명하다고 단언한다. 법정은 이 밴드의 목표가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증오심을 퍼트리고 극우파적으로 선동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룹의 보컬이자 작사자는 결국 3년 4개월의 중형을 선고받는다.
‘전자 기타를 든 테러리스트’ <란처>는 ‘증오의 무기’인 노래와 함께 그렇게 감옥 속으로 들어간다.

‘범죄 선동은 범죄가 된다’

극우 민족민주당의 시위에 가담한 '란처'의 보컬

독일에서 음악 그룹이 ‘범죄단체’ 결성 죄를 선고받은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는 필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일 듯하다.
물론 밴드 <란처>의 음반은 독일 음반가계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약 10만장에 달하는 이들의 음반이 이미 독일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본다. 그 대부분이 불법 복제 음반으로 주로 학교 파티나 청소년 모임에서 틀어진다고 한다.
또한 <란처>는 여러 극우파 록 그룹 가운데 단연 간판 격인 밴드로 이들의 선동은 실제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몇 년 전 신나치 성향의 청년들이 베트남인 둘을 폭행으로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법정에서 피고들은 범행 당시 <란처>의 노래를 불렀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그밖에 신나치의 다른 외국인 폭행사건 현장에서도 이 밴드 노래가 불려졌음이 밝혀졌다. <란처>를 범죄단체로 판결한 판사는 이 밴드가 그러한 폭행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질책했다.
그렇다면 ‘예술적’ 표현도 범죄가 되는가?
‘음악은 범죄가 아니다!’
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는 신나치 시위대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 자체로 보면 참 흠잡을 데 없는 말이다. 하지만 독일 법정은 예술이 다른 사람들의 인권 침해나 공공연한 차별을 넘어 범죄 행위까지 선동한다면 ‘범죄가 된다’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판결했던 것이다.

독일 극우 록 밴드 -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팽창

독일에서 1989년에 10여 개에 불과하던 극우파 성향의 록 밴드는 불과 10여 년만인 2001에 200개를 넘어서며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옛 동서독 지역을 불문하고 독일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는 상황이다.
이들 극우파 밴드는 그 이름부터가 극단적이고 과격하다. <아리안 혈통> 같이 나치를 곧장 연상시키는 이름을 비롯해 <진군>이나 <피와 명예>, <살기> <폭탄> <독재자> <강자의 권리> <증오 공동체> <돌격대> <테러 99> 같은 명칭들은 한눈에 이들의 성향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이에 비하면 앞서 말한 ‘병사’라는 이름은 다소 평범한 느낌까지 든다.
또한 이들은 음반 표지에 나치 문양이나 나치 병사를 등장시키기 일쑤고 전투 장면이나 유혈 낭자한 폭력 장면을 흔히 이용한다. 그들은 짧은 군인 머리나 빡빡 머리를 좋아하며 문신 새기기를 즐기며 전투화를 선호한다.

외국인과 좌파 - 극우 밴드의 공적 1,2호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무기인 ‘증오의 노래’로 무엇을 주장하는가? 극우파 록 그룹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원천은 앞서 독일 법정이 지적하듯 무엇보다 노래가사에 있다. 특히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선동적이고 폭력적인 가사는 이들 극우파 그룹을 이해하는 척도이자 판단의 핵심 열쇠임에 틀림없다.
그룹 <란처>의 노래 ‘병사’는 “우리의 혈관에는 바이킹의 피가 끓는다. 우리는 아리안족 청년들의 목소리다”라고 외치며 나치의 망령을 스스럼없이 불러낸다. 극우파 록 그룹의 노래가사에서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폭력 찬미이다. <강타>라는 그룹은 ‘독일 청년’이라는 곡에서 “우리의 얼굴은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폭력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고 노래하며,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니 딴 생각말고 때려 죽여라”고 소리친다.
나아가 신나치 그룹들에서 ‘독일’은 단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 그 자체이다. ‘독일을 위한 투쟁’이 그들의 전부이며, “신성한 것은 사람들이 언젠가 불태워버린 책도 인간도 아니고, 오로지 조국 그 하나이다”(<0815>의 노래 ‘우리의 조국은 신성하다’).
이제 이들은 조국의 영광을 가로막는 적들을 만들어 낸다. 좌파는 “공산주의 돼지 새끼”(<란처>)이거나 “아나키스트 돼지 새끼”(<0815>)이고 이주자는 “외국인 돼지 새끼”(<돌격대>)이거나 “터키인 돼지 새끼”(<민족의 분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공적 1호는 ‘외국인’이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범죄자이고, 마약상이며, 포주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지되고 “우리나라에서 나가”(<돌격대>)야 한다.
공적의 2번째 자리는 ‘좌파’의 몫이다. “우리는 너희를 증오한다, 너희는 쓰레기일 뿐이거든. 우리는 너희를 증오한다, 너희는 좌파 기생충일 뿐이거든”(<겨자 머리>).
이처럼 독일 극우파 록 밴드의 ‘무기’인 노래가사는 외국인이나 좌파 및 유대인에 대한 증오나 폭력 선동을 비롯해 나치 시대를 연상시키는 독일 민족의 영광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무기로서의 노래’ - 세계로 퍼져나가는 극우 밴드

신나치 록그룹의 자켓 이미지

비록 독일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지만 극우파 록 밴드는 사실 오늘날 유럽 전체를 망라하는 현상이다.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핀란드를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를 넘어 동유럽 나라들까지, 극우파 록 밴드가 음반을 내고 정치적 극우파들의 ‘음지의 나팔수’로 활동하지 않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야 할 정도이다. 물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극우파 밴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세계적으로 극우파 밴드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특히 9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외국인이나 유대인, 정치적 좌파에 대한 증오와 폭력적인 수사로 가득한 수많은 불법 음반들을 쏟아내며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고 있다. 독일의 신나치 밴드 <돌격대>가 “노래는 탱크보다 위험한 우리의 무기”라고 외치듯, 극우파 록 밴드의 노래는 목적의식적인 강력한 선동이자 정치의식의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가 극우 밴드와 극우 정당을 살찌운다

극우파 밴드 노래의 대표적인 소비자는 30세 이하의 남성들이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극우파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이들의 노래는 듣는다. 노래를 통해 감정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하고 정치적인 일체감을 가지기 위해서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극우파 록은 “인종 전쟁을 위한 음악”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 음악이 주로 극우파나 인종차별주의자 세계에서 유통된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이들 밴드를 듣거나 음반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극우 록 음악은 금지되어 있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더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 연방 법정의 유례없는 이번 판결은 현재 가뜩이나 극우 세력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극우 신나치 밴드의 이런 선동적인 노래가 특히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데 제동을 걸려는 의도로 보인다.
더불어 이번 판결은 음지에서 ‘예술의 가면’을 쓰고 청소년들을 선동하는 극우 록 밴드뿐 아니라, 5백만 실업자라는 ‘불안의 시대’를 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애꿎은 외국인이나 유대인에게 돌리며 세력을 키우려는 극우 정당을 겨냥한 매서운 경고가 되어야 할 듯하다.

빅토르 하라의 ‘해방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빅토르 하라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의 ‘해방의 꿈’은 비록 칠레 인민연합 정권의 ‘천일의 꿈’과 함께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로만 남았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은 오늘도 여전히 ‘못 다한 해방’을 노래하고 있다. 하라의 노래 <민중이 일으키는 바람>이 아직도 세상을 흔들어 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꺼지지 않는 ‘민중의 바람’이 아직도 그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네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네
영혼이 나를 울리는 사이
시인은 그렇게 ‘민중의 길’을
노래할 것이네
언제까지나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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