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칼럼

케인즈주의나 사민주의 등 현대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질서에 결함이 있으니 그것을 정치제도로 견제하자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으니 민주주의로 견제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훈련된 귀는 불협화음을 감지한다.

위의 명제는 경제질서와 정치제도를 별개로 본다. 한쪽에는 경제질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치제도가 있어서 정치제도로 경제질서를 견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치제도는 경제질서에 종속된다. 인위적으로 어떤 정치제도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어도 경제질서는 그 초기의 형태를 자기에 맞게 점점 빚어간다. 그래서 기존 경제질서를 고집한다면, 민주주의를 채택하여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실제 모습은 제국을 닮아간다. 경제질서에 따라 정치제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우린 지금 민주주의를 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이다. (필자는 국민國民보다 백성百姓이라는 말이 좋다. '국민'은 국가라는 틀에 백성을 밀어넣으니 파시즘적이고, '백성'은 백가지 성씨라는 뜻이니 다양성을 드러내고 아나키즘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백성이 주인인가? 특권계급이 이 땅의 주인이며 대다수는 노예다. 좀 더 살만한 노예와 먹고 살기 팍팍한 노예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자본가 계급도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그 사람들 역시 삶을 지배하는 동기가 돈에 붙들려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들 삶에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자기가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모으다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그들이 남긴 재산은 가족들의 유산다툼 문제를 유발하면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린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는 합법적으로 백성의 뜻을 묵살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기존 경제질서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분열되므로 그 안에서 어떤 정책을 제시하고 찬반투표를 하더라도 그것은 찝찝한 결과만 남긴다. 모두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므로 그건 아무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타협안이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누구도 자기 뜻대로 세상을 빚어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대다수는 무기력에 빠져 있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이나 별볼일없는 취미생활, 미디어가 보여주는 조그만 즐거움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정말이지 대다수 백성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액면가가 불변하는 돈"과 "땅사유권"은 이자와 지대를 통하여 부와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킨다. 그리고 집중은 더 많은 집중을 낳는다. 에너지와 산업과 인구와 재산 등 많은 것들이 집중되면 리스크가 커진다. 사고·자연재해·전쟁·환경파괴·공황·혁명 등으로 한꺼번에 모두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통제가 요구된다. 따라서 집중은 더 많은 집중을 낳고, 통제는 더 많은 통제를 낳는다. 당연히 정치는 민주주의에서 멀어진다. 민주주의는 요식행위가 되고 실제로는 소수가 권력을 움켜쥐고 모두를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 견제하자는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한데 자본주의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겠나? 경제활동으로 드러나는 실제 삶의 모습이 노예와 마찬가지인데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를 낳을 수 있는 경제질서"로 교체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제질서가 바로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다.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는 돈 액면가가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므로 돈이 꾸준히 순환하여 돈의 불균형적인 분포가 끝없이 완화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낙수효과가 가능해진다. 돈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땅 국유화하공공임대하여 그 지대를 공공복지에 사용하면 노동분화로 생기는 유익이 모두에게 분산된다. 이렇게 땅의 유익과 돈이 분산되면 사람도 산업도 에너지도 그리고 부와 권력도 분산되고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로 갈아타려면 기존 사회운동과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 기존 사회운동, 특히 맑스주의는 경쟁을 부정하고 재산공유를 주장한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취약계층이라면 모를까 중산층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방법에 기대를 거는 건 시간낭비다. 또, 이타주의를 강조하면서 대중을 낚으려고 하거나 묶으려는 것도 결국 실패한다. 그것은 인위이고 사람의 본성에 맞서기 때문이다. (필자는 훌륭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타주의가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평생을 남의 이익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몇몇 사례들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사회운동의 바탕을 환상에 두는 것과 현실에 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이기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심리적 에너지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결합하는 방법을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이 나쁜 것이다. 게젤이 제안하는 해법은 바로 그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를 운동의 바탕으로 삼지 않았다고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할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이익에 호소해야 한다. 특히 중산층 개개인의 이익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중산층이 자기 노동대가에서 지대와 이자로 얼마만큼 도둑질 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통계자료를 근거로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원래 당신 것이지만 시스템이 털어갔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한국인 전부가 지대와 이자로 털린 노동대가를 총 인구수로 나누면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실제로 빼앗긴 것은 그 이상일 것이다. 지대와 이자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더 많은 부를 생산할 수 있었을 테니까. 따라서 그런 기회비용까지 계산한다면 중산층이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다. (최소 1/3, 많게는 1/2 이상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다. 평생동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정치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예주의다.)

우리는 그저 팩트를 제시해야 한다. 경제질서의 모순을 드러내고 해법을 제시하며, 해법이 아닌 것들이 왜 해법이 아닌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실제로 이 해법을 채택할지 말지는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다. 그건 영원히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겠다고 하면 스스로 게젤의 방법을 채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스스로 제거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사회운동은 많은 에너지를 절약해준다. 사회운동 자체가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므로 사회운동도 저항이 아니라 가속을 낳게 된다. 그런 운동은 스스로 점점 빠르고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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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14:36 2015/11/2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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