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브라운,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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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 브라운(지음), 이승철(옮김),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갈무리, 2010.(원제: Regulating Aversion:Tolerance in the age of Identity and Empire)의 한국어판 서문을 옮겨둔다.

 

한국어판 서문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다니 무척 기쁘다. 이 책은 주로 유럽과 북미에서의 관용 담론의 부흥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아마 한국 독자들의 관심도 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의 목적은 관용의 실천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에 이 책은 관용 담론이, 좀 더 실질적인 권력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하는 각종 불평등과 갈등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관리하는지, 또한 이슬람 주민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적대 행위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비록 이 책의 내용이 유럽-북미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만, 관용이 헤게모니 언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 책의 분석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관용을 악랄한 방식으로 활용한 조지 W. 부시의 재임기에 쓰여졌다. 하지만 이 책의 일반적인 주장은, 지난 세기 후반에 일어난 관용 담론의 부흥이라는, 좀 더 장기적이고 광범위하며 정치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 책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이 관용을 다양한 갈등과 차별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담론으로 차용한 방식과, 그 결과 관용이라는 진정제가 어떻게 권력과 지배에 대한 실질적인 도전을 방해하고, 전치(displace)시켰는지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보편성의 기치 아래 불평등을 비판했던 맑스주의와 자유주의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이제 통약 불가능한 사회적 차이―인종적, 종족적, 성적 차이들―를 긍정하는 목소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부활한 관용 담론의 일차적인 기능은, 이러한 새로운 정치학이 가진 지적·정치적 잠재력을 제약하고 왜곡하는 데 있다. 사회적 차이의 가변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각종 이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실제 정치적 삶에서 차이는 거의 존재론적 차이의 수준까지 물화(reify)되고 있다. 오늘날 관용이 차이의 윤리적 중개인이자 해결책으로 격상된 것은, 이러한 차이의 물화를 배경으로 한다. (알다시피, 관용 담론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규범적이고 물질적인 힘의 작동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다.)

따라서 관용에 기반한 다문화주의 담론의 아이러니는, 이 담론이 본질화된 정체성에 문제 제기하기보다는 정체성을 한층 더 자연화하며, 나아가 차이 자체를 적대 행위와 혐오감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이러한 차이의 자연화와 존재론화에서, 편견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기술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오늘날 관용은 차이를 그저 묵인하면서 이를 향한 적대 행위를 줄이고, 모든 차이를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의 지배와 우월성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러한 관용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이 추구하는) “관용의 승리”라는 이름하에 찬양되었고, 이어서 오바마가 자신의 취임식 기도를 동성애에 반대해 온 복음주의 목사와 동성애자 가톨릭 신부에게 동시에 맡긴 것 역시, “관용의 표현”이란 이름으로 옹호되었다. 첫 번째 사례에서 사람들이 관용의 이름으로 흑인의 종속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흑인들은 이 승리를 관용한 백인들의 미국에 다시 종속된다. 두 번째 사례는 편견의 관용과 동성애자를 향한 관용을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시민권에 관한 복잡한 정치적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례 모두에서 관용은 불평등, 배제, 갈등을 탈정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새 정권과 함께 시작된 이 두 가지 예는, 부시 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관용 담론이 인종과 이민, 이슬람, 섹슈얼리티, 문화 등과 관련된 각종 논의 속에서 계속해서 활발히 등장할 것임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나의 주된 관심사는 자유주의 정치 담론의 공허한 약속과 정체성의 정치가 직면한 함정들, 그리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탈(脫)민주적 힘들에 관한 것이었다.(각주 1) 관용 담론의 부흥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작업의 일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사상과 비판이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역사가 우리 시대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민주적 미래와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그것의 원리―대의제와 권리, 형식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전부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겠다. 나에게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데모스(demos)의 지배를 말하며, 우리 자신을 통치하는 권력을 공평히 나눠 가진다는, 현실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어하는 권력을 완전히 투명하게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기에 실현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본을 비롯한 소외된 권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이상이기도 하다.

정치 이론의 역사라는 렌즈를 통해 현대의 정치 활동을 조명하면서, 나는 이론과 정치 간에 뚜렷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이론이 곧바로 정치적 행위로 번역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또한 정치 행위가 섬세한 이론적 비판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요구해서도 안 된다. 기껏해야 이론은, 현실 정치가 처한 곤궁을 파헤치고 새로운 가능성을 자극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이 책의 관용 담론 비판은, 현대 자유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가 가진 몇 가지 특징들을 조망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꼭 관용에 대한 정책이나 행동 강령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이유로, 현실 정치와 정책이 비판이론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현실 정치가 이론적 기획과 직접적으로 뒤섞여서는 안 된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이다. 반면에 이론은 기껏해야 이러한 투쟁을 비판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정치 이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을 강령적인 것으로 후퇴시킴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를 권력과 실천을 위한 긴급한 요구에서 떼어 놓음으로써, 이론과 정치가 주는 자극과 그것의 범위를 모두 제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론과 정치의 효과가 기입되는 장소가 상이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론과 정치가 가진 각각의 힘이 이러한 탈구(disarticulation)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고, 결과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 Wendy Brown.

 

각주 1) 내 첫 저서인 <서구 정치사상에서의 남성성과 정치>(Manhood and Politics in Western Political Thought, 1988)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 막스 베버의 사상을 통해, 서구 정치사상에서 남성 주체가 정치적 삶과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해 왔는가를 살펴본 책이었다. 이후 나는 <상처의 상태:후기 근대의 권력과 자유>(States of Injury:Power and Freedom in Late Modernity, 1995)에서, 맑스, 푸코, 니체의 사상에 기반해, 오늘날 정의 기획(justice project)에 만연해 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의 호소를 그 특징으로 하는 상처 입은 정체성(wounded identity)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탈역사적 정치>(Politics Out of History, 2001)에서는 <상처의 상태>에서 전개한 자유주의 비판을 확장하는 한편, 맑스, 니체, 프로이트, 벤야민에 기반해 도덕주의와 원한의 정치가 가진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법학 교수인 자넷 할리(Janet Halley)와 공동 편집한 <좌파 법치주의, 좌파적 비판>(Left Legalism, Left Critique, 2002)에서는, 20세기 후반 좌파 사회 운동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법과 법정에 호소하려는 경향과 이 경향이 가진 탈정치적이고 반동적인 효과를 분석하였다. 이어 출판한 <경계에서>(Edgework, 2005)는 지식과 정치에 내재하는 권력에 대한 논문 모음집이다. 최근에 나는 신자유주의 정치 합리성에 대한 책인 <정치의 새로운 옷: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Les Habits Neufs de la Politique: Neoliberalisme et Neoconservatisme, 2007)를 프랑스어로 출판하였다. 최근 나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맑스의 종교 비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국가 주권의 쇠퇴와 민족-국가 간 장벽의 강화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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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웬디 브라운이 국내에서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비통신에 의하면 미국 내에서는 주디스 버틀러보다도 문제적인 인물로 정평이나 있다고 한다. 이런 농담이 새로운 '스타'를 갈구하는 출판 시장에서는 잘 먹히겠으나, 그것보다는 이 책이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매우 치열하다. 최근에 관용(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 관용 없이, 국가정체성 토론을 정부가 조직하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관용'이라는 말은 '한계 내에서' 관용, 또한 탈정치화의 수단임을 상기하게 된다. 한때 프랑스의 관용은 한국사회에서 성숙된 서구 정치사회문화의 표상이지 않았는가. 어디 관용뿐이겠는가? 대표적으로 '인권' 담론이 그러하고, '다문화주의'도 그러하고. 민주대연합이니 진보대연합이니 한라당 양계파에도 못미치는 선거연합 논의가 한창일 때, 훨씬 더 정치적인 글을 읽고 긴호흡으로 생각하는 것, 한국 진보는 너무나 약(하)고 얇다. 08년 촛불 이후로 잠시 논의되었던 것과 달리 -- 예를 들어, 한계는 있으나 생활정치니 욕망의 정치니 하면서 --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드러내는 작업과 논의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내가 너무 과문한가? 여하튼, 브라운의 작업과 같은 개입적 글쓰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그러한 글쓰기가 가능한 조건을 바라면서, 잡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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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8:05 2010/03/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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