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여기서 사회학적 방법은 미리 설정된 결과를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학은 ― 정론(正論, orthodoxy)과 이론(異論, allodoxy)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이기 전에 ― 하나의 정론, 즉 이론(異論)에 대항하는 전쟁기계이다. 하지만 이론(異論)을 요청하는 것은 사실상 미학적 불화이며, 목수의 팔과 응시 사이의 틈이며, 신체와 신체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 둘로 겹쳐진 앎이라는 의미에서 ― 감각적인 단절이다. 사회학자가 칸트와 치루는 청산은 무엇보다도 목수와 치루는 청산인 것이다. 사회학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대학에서 분과학문으로 교육되기 이전부터 민주주의 혁명들의 시대이기도 한 미학의 시대에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시대가 지닌 분쟁들에 대응하기 위해 발명된 전쟁기계이다.
7-2. ‘사회에 대한 과학’이 되기 이전부터, 사회학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사회를 재편성하는 기획이었다. 사회학은 [자신이], 추측컨대 철학적 추상, 청교도적 개인주의, 혁명적 형식주의가 분할한 이 사회를 위해 신체를 개조하려 했다. 사회학은 주어진 자리(place)에 위치한 개인들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상응하면서 동시에 전체집합적인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에토스, 곧 느끼고 사고하는 방식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조직을 재편하려 했다. 오늘날의 사회학은 확실히 스스로를 이러한 유기적 사회관으로부터 거리를 둬 왔다. 하지만 과학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회학은 계속해서 과학이 사회의 선(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길 원하며, 사회적 조건들이 그런 조건들에 속한 자들의 태도들 및 판단들과 조응하는 법칙을 이해하려고(savoir) 한다. 판단들의 이론(異論)에 대항하는 과학적 전쟁은 행위의 ‘아노미’에 대항하는 정치적 전쟁, 다시 말해 정치체(the body politic) 자체 내부의 분할이 일으키는 미학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불안에 대항하는 전쟁을 계속한다.
8-1. 따라서 사회학은 플라톤적 윤리적 기획과의 논쟁적[이면서도] 연루에 가담한다. 철학자가 주장하는 것이지만, 사회학이 거부하는 것은 불평등이 하나의 술책(術策, artifice), 즉 부과되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회학은 불평등이란 사회적 행위 속에 통합된 현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함축하는 판단들 때문에 불평등은 오인된다고 주장하려 한다. 사회학은, 과학이 알고 있는 것은 정확히 자신의 대상들이 알지 못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8-2. 나는 계속해서 사회학의 사례를 들어 왔다. 나는 마찬가지로 역사학의 예를 들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학(historical discipline)이 지난 한 세기 이상 자신이 혁명 도중에 있다고 선언했던 방식을 알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은, 자신을 위인들에 관한 사실들과 이들의 연대기 기록자들, 신하들, 사절들이 작성한 문서들에 집착하게 했던, 편년사(編年史)로부터 스스로 분리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학은 스스로 평범한 민중(common people)의 삶 속에 있는 물질적 사실들과 장기시간들에 몰입한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역사학은 자신의 과학적 지위를 특정한 민주주의와 연관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주주의 역시 또 다른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민주주의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심층적인] 삶의 장기 순환들을 가진 물질적 현실을, 집짓는 사람들의 응시가 지닌 기분 전환(distraction, 착란; 소동)처럼 표면을 전복하는 동요들(agitations, 흥분)과 대립시키며, 또한 순간적인 혁명적 일지(日誌, journal)와 대립시킨다, [그에 반해] 혁명적 일지 속에서 표면은 다시 이야기되어진다(recount). 마르크 블로크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을 시간 속에서 다루는 과학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 속에서’란 사실상 시간의 편제된 분할이다. 그것[역사, 하나의 편제된 시간의 분할]은 다음을 승인한다, 즉 집짓는 사람들의 진정한 시간이란 삶 자체를 재생산하는 삶의 긴 시간이지 미학적 경험의 중단된 시간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역사, 하나의 편제된 시간의 분할]은 공적 영역에서 행위자가 되는, ‘짧은’ 시간, 곧 ‘순간적’ 시간을 삶의 긴 시간에 대한 일탈로 만든다. 그것은 고수되어야 하는 윤리적 원칙으로 기능하며, 그 원칙은 시간과 공간의 점유자들이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한다. ‘새로운 역사’, 다시 말해 물질적 삶과 심리적 태도(mindset, 심성)의 역사는 마찬가지로 사회학이 전개하고 있는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다.
8-3.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해당 분과학문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분과학문이란 항상 대상들의 주어진 영토를 사고하게 하는 [소송] 절차들(procedures)의 앙상블 이상임을 상기하는 것이다. 분과학문은 무엇보다 이러한 영토 자체의 구성이며, 따라서 사고 가능한 것에 대한 특정한 분할의 설립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분과학문은 사유와 언어의 표명들로 이루어진 공통 구조(common fabric)에 끼어듦[말참견]을 전제한다. 분과학문들은 목수의 표현들이 진술하는 것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 사이에 틈을 설립함으로써, 즉 목수들이 우리에게 묘사하는 것과 그러한 묘사 뒤에 숨겨진 진리 사이에 틈을 설립함으로써, 분과학문 자신들의 영토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분과학문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매여 있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지식과 또 다른 무지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분과학문들은 반드시, 노동자 자신이 투쟁하고 있는 전쟁에 대항한 전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질서 잡힌 사회는, 자신을 구성하는 신체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상응하는 지각들, 감정들, 사고들을 갖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응(correspondence, 일치; 조화)은 끊임없이 교란된다. 주인이 없이, 자유롭게 순환하는 단어들과 담론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단어들과 담론들은 신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지들을 바꾸어서, ‘인민, 자유, 평등’ 등과 같은 특정한 단어들 언저리에서 운동들을 전개하게 한다. [또한] 응시를 손으로부터 분리하여 노동자를 탐미가(耽美家, aesthete)로 전화하는 광경들(spectacles)이 존재한다. 분과학문적 사고는, 신체의 지위들(sates)과 지위들에 상응하는 지각 및 의미[작용]의 양식들(modes) 사이에 안정적인 관계를 설립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러한 출혈(出血, haemorrhage)을 끊임없이 저지해야만 한다. 분과학문적 사고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지만 그것을 진압 작전처럼 수행해야만 한다.
9-1. 따라서 분과학문 사이의(in-disciplinary) 사고란 전쟁이라는 맥락, 푸코가 말한 ‘전투의 아득한 노호(怒號)’를 상기하는 사고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정한 무지를 실천해야만 한다. 그것은 분과학문의 경계들에 무지함으로써 논쟁의 무기로서 분과학문들의 지위를 복귀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사고는, 예를 들어, 내가 목수들의 어구들(phrase)을 그것들의 정상적 맥락으로부터 뽑아내면서 수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상적 맥락이란 사회적 역사의 정상 맥락이며, 그것은 목수의 어구들을 노동자가 처한 조건의 표현들로 취급한다. [반면에] 나는 상이한 경로를 취했는데, 즉 이러한 어구들이 체험된(lived) 상황의 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상황과, 상황에 속한 사고에 대한 능력들 및 가시성의 형식들이 맺는 관계를 다시 발명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내러티브[récit]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신화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것은 반(反)플라톤적 신화, 숙명에 대한[숙명을 거부하는] 반(反)이야기이다. 플라톤적 신화는 조건과 사고 사이에 상호간 [순환하는] 확증의 관계를 규정한다. 목수의 반(反)신화는 순환을 중단시킨다. 따라서 분과학문 사이의 소송절차(procedure)는 반드시, 신화와 [반]신화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가시화할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텍스트적이고 의미 작용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9-2. 이것은, 평등의 공간이기도 한 [분과학문] 경계들이 없는 공간의 창출을 전제하며, 그 속에서 목수의 삶에 관한 내러티브는 역량들과 운명들의 편제된 분할에 관한 철학적 내러티브와 대화(dialogue)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철학의 또 다른 실천 ― 분과학문 사이의 실천 ―, 즉 인간과학들과 철학이 맺는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실천을 내포한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인간과학들과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을 성찰하거나, 그것들에 기초를 제공하는 일종의 최고-학문(super-discipline)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위계적 질서가 담론의 세계에서 설립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학들은 [철학의] 이러한 지위에 반대할 수 있으며, 그것을 환상으로 취급하고 자신을 철학적 환상에 대한 진정한 지식으로 내세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위계, 담론들을 자신의 자리(place)에 머물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하지만 쟁송(爭訟, proceeding)하는 제 삼의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담론의 질서를 기초 짓는 철학적 주장이 전복되고, 내러티브의 평등주의적 언어를 통해서 이러한 질서의 무작위적 본질을 선언하게 되는 순간을 쟁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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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옮긴이] orthodoxy/allodoxy는 같음(동일자)/다름(타자), 고정/변동, 직선(곧바름)/곡선(굽음)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전체 맥락이 주로 정통/이단을 뜻하지만, 분과학문과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론(正論)과 이론(異論)으로 옮긴다.
6) 랑시에르의 조어(造語) “in-diciplinaire(분과학문 사이에서/의)”는 그대로 (영어로) 옮겼다.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disciplinary(분과학문의)’에 여타 접두어를 붙인 표현과는 완전히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non-disciplinary(분과학문이 아닌)’은 분과학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뜻이 되고, ‘ant-disciplinary(분과학문에 반하는)’은 랑시에르의 기획을 [이러한] 기획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분과학문들 간의 전장(戰場)으로 되돌아 가게 한다. 게다가, ‘indisciplinary(분과학문 사이에서/의)’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랑시에르가 강조는 지식의 핵심에 있는 무지와의 연관성을 살리는 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