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랑시에르-지식의 미학1

[사고들]

Jacques Rancière, Thinking between disciplines: an aesthetics of knowledge1), (tr.) by Jon Roffe, Parrhesia, 2006.12.01

 

 

분과학문들 사이에서 사고하기: 지식의 미학

 

자끄 랑시에르

 

 

1-1. ‘지식의 미학’을 요청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분명히, 지식의 형태들(forms)이 반드시 미학적 차원을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미학적 차원이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겉치레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내재적인 소여(所與)라는 의미를 뜻한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를 앞으로 살펴보겠다. 내가 제안하려는 테제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지식의 미학적 차원을 표명하는 것은 지식 자체의 관념과 실천을 분할하고 있는 무지(ignorance)의 차원을 표명하는 것이다.

 

1-2. 이러한 명제는 분명히 ‘미학’의 의미에 관한 어떤 전제를 함축한다. 전제(thesis)는 다음과 같다, 미학은 아름다움이나 예술(기예, art)에 관한 이론이 아니며, 감성(sensibility)에 관한 이론도 아니다. 미학은, 예술의 가시성과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에 관한 특정한 체제를 가리키는 역사적으로 한정된 개념이며, 감각적 경험과 경험에 대한 해석의 범주들이 재배치(reconfiguration)되는 도중에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체계화한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학적 경험이란 감각적 경험의 습관적인 조건들로부터 특정한 분리를 의미한다. 칸트는 이것을 이중부정의 형식으로 요약했다, 미학적 이해의 대상은 지식의 대상도 아니고 욕망의 대상도 아닌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형식에 대한 미학적 이해는 개념 없이 이루어진다. 예술가는 지식(savoir)의 기능에 따라서 주어진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

 

1-3. 따라서 아름다움의 근거(reason)는 예술의 근거로부터 분리된다. 아름다움의 근거는 또한, 어떤 대상을 욕망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근거로부터도 분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중부정은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조건들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험의 정상적 조건들에 대한 필연적인 중지를 규정한다. 이것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의 서두에서 궁전의 사례를 들어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그 사례에서 미학적 판단은 형식을 홀로 분리하는 것이고, 궁전이 졸부의 허영을 채우는 것인지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역이 궁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적절히 사용되었는지를 아는(savoir) 데에는 무관심하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길, 궁전의 형식을 미학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반드시 무시되어야만(ignored)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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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원문은 온라인에서 제목으로 검색하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번역은 장담을 하지 못하니 가려서 보시기 바랍니다. [ ] 표시는 역자가 첨부한 말입니다. 작년 랑시에르의 한국 방문 때 강의와 많이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지식과 무지 -- 마찬가지로, 지식인/대중, 과학/이데올로기 등에 관한 사유-전투는 최근 한국 내 여러 논쟁(혹은 의미투쟁)과 관련해서도 눈여겨 볼만 해서 옮겨 둡니다. 한 번에 올라가지 않아서, 네 번으로 분할해서 올립니다.

 

1) 이 글에서, 영어로 ‘knowledge(지식/앎)’은 불어 명사 connaissance(인식)나 동사 connaitre(인식하다)의 번역어이며, 이 용어의 이론적 의미에서 지식을 뜻한다. 단 불어 savoir(앎)라는 단어를 ‘지식’으로 옮길 때마다, 프랑스어를 병기하였다. 이러한 번역 방식에 대한 랑시에르 교수의 관대함에 감사한다.[영어의 ‘knowledge’가 불어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면서도 변별되지 않는 것처럼, 한국어도 대응되는 단어를 찾기 힘들다. 보통은 connaissance를 ‘인식/하다’나 ‘지식’으로, 또 méconnaissance를 ‘오인’으로 옮기고, savoir를 ‘앎/알다’로 옮기지만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영역 본에 따라 옮겼다.]



2-1. 칸트가 단언했던 이러한 무지에의 의지는 소란을 불러일으키길 멈추지 않았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테제를 입증하는데 6백 쪽을 헌정하였다. 즉 이러한 무지란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도록 점점 더 정교하게 가르치는 것에 대한 획책된 오인(méconnaissance)이다. 무관심한 미적인 판단이란, 사회의 각 계급은 그들의 에토스, 즉 계급의 조건이 계급에 부여하는 존재 및 감정의 매너에 상응하는 취향의 판단을 지닌다는 사회학적 법칙으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 — 또는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에 따르면] 궁전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한 판단이란 사실상 궁전 주인들의 몫도 아니고 궁전을 건축한 사람들의 몫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이나 자본의 고역으로부터 자유롭고, 스스로 보편적 사고와 무관심한 취향의 위치를 점유하는데 탐닉하는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의 판단인 것이다2). 따라서 그들의 예외[적 위치]가 바로 취향의 판단이란 사회적으로 결정된 에토스를 번역하는 사회적 판단을 사실상 통합하고 있다는 규칙을 확증하는 셈이다.

 

2-2. 부르디외의 판단, 따라서 미학적 환상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의 판단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대안에 의존한다, 즉 당신은 알고 있든지 아니면 모르고 있다[on connaî̂t ou méconnaî̂t]. 만일 당신이 모르고 있다면[méconnaî̂t], 그것은 당신이 감상(look)하는 방법을 모르고[sait] 있거나 당신이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또한 감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철학자든 쁘띠 부르주아든 간에,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곧 미학적 판단의 무관심한 성격을 믿는 사람들은 보려고(see)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결정된 체계 내에서 점유하는 자리가, 여타 사람들의 자리와 마찬가지로, [결정된 해당 체계에 대한] 어떤 적응의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적응의 양식은 오인[méconnaissance]의 형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짧게 말해, 미학적 환상이란, 주체들은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체계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확증[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체계의 작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체계의 작동방식 자체가 오인[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란 체계적 근거들(reasons)의 이러한 정체와 체계의 오인에 관한 근거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3-1. 지식의 이러한 배치(configuration)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대안에 의존한다, 즉 깨달게 하는 진실한 지식(savoir)과 무지하게 하는 거짓된 지식(savoir)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거짓된 지식은 억압하고, 진실한 지식은 자유롭게 만든다. 한편, 지식(savoir)의 미학적 중립화는 이러한 도식이 너무 단순하다고 주장한다. 미학적 중립화는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두 개의 지식이 존재하고, 각각의 지식(savoir)은 특정한 무지를 수반하고, 따라서 [억압하는 무지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지식(savoir)과 [자유롭게 하는 지식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만드는 무지 또한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집짓는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궁전 거주자들에 대한 용역에서 지출되는 자신의 착취에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그들이 착취에 무지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들의 조건이 그들을 억압한다기보다는 그들에게 특정한(another) 신체와 특정한(another) 보는 방식을 만들어낼 필요를 부과하기 때문이며,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궁전에서 단지 궁전이 투여된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과 게으른 졸부들이 이러한 노동을 전유한다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단수] “지식”(savoir)이란 항상 둘로 겹쳐져(double) 있다, 즉 [단수] 지식은 지식들(connassances)의 앙상블이면서, 또한 위치들(positions)의 편제된 분할(partage3))이다. 따라서 집짓는 사람들은 둘로 겹쳐진 지식(savoir)을 지닌다, 즉 그들의 기술적 행동(태도, comportment)에 관련된 지식과 기술적 행동(태도)의 조건에 관한 지식을 가진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볼 때 각각의 두 지식들은 어떤 특수한 무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곧 자신의 손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작업이 보다 나은 목적에 적합한지를 아는데 무지하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이, 자신이 계속 본분을 다할 필요가 있다고 그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것을 “알고 있다”(sait)고 말하는 것은 [즉, 손노동/기술적 행동을 “알고 있다”는 주장은] 그들이 어떠한 역할들의 체계가 필요한지를 [즉, 손노동/기술적 행동의 조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사실상, 말하는 것이다.

 

3-2. 플라톤은 이것을 단호하게 설명했었다. 장인들(artisans)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도시의 공통적인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 첫째는 그들의 작업이 때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이 도시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황금을 심어준 것처럼 장인들의 정신에 쇠를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장인들의 직업은 [그들의] 기질들(과 어리석음)을 규정하며, 정반대로 장인들의 기질들은 그들로 하여금 특정한 직업에 헌신하도록 한다. 장인들은, 신이 정말로 그들의 정신에 쇠를 심었다고, 또는 자신들의 통치자들의 정신에 황금을 심었다고 진심으로 확신할 필요는 없다. 장인들은 [신의 원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원리(basis)를 쫓아서 마치 원래 그랬던 냥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그들의 팔, 그들의 응시, 그들의 판단은 자신들의 노하우[savoir-faire]를 만들어 내고 그들 각자가 적응하고 있는 자신들의 조건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 낸다는 것으로 충분하며, 또한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어떠한 환상도, 어떠한 오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믿음(belief)’의 문제이다. 하지만 믿음은 지식에 대립되고 현실을 감추는 환상이 아니다. 믿음은 두 개의 ‘지식들’과 두 지식들에 상응하는 ‘무지들’ 간의 결정된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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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l est propre à cette petite bourgeoisie intellectuelle qui prend son séjour entre les deux chaises du traveil et du capital pour le siège de lq pensée universelle et du gou désintéressé.”

 

3) 여기서는 불어 partage를 영어 distribution으로 옮겼다. 이 용어는<<감각적인 것의 분할>>(2000)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랑시에르의 핵심어 중에 하나이며, 이 책에서 제시된 테제들은 여기에서 편제된 구획(division)으로 제시되는 테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영역자는 partage를 본문에서 distribution(분배), 각주에서 division(구획)으로도 옮기고 있으며, 여기서는 두 의미를 모두 살려 분할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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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4:33 2009/05/29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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