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랑시에르-지식의 미학2

[사고들]

4-1. 미학적 경험은 바로 [두 지식들과 두 무지들의] 이러한 배치(장치, dispositif)를 탈규준화 한다. 따라서 그러한 경험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미학적 경험은 노하우(savoir)로서 지식(connasissance)과 역할들의 분할로서 지식 간 순환적 관계를 중립화하는 종류의 경험을 규정하는 데 관여한다. 미학적 경험은 위계적 질서를 구조 짓는 역할들과 역량들의 감각적 분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의 무관심한 보편성을 믿는 철학자들이 가진 환상쯤으로 취급하고 싶어 하는데, 왜냐하면 무관심한 판단은 노동자들의 취향과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조건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집짓는 사람들은 사회학자들보다 플라톤을 더 믿는다, 즉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고 미학적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신념[믿음] 체제의 변화, 다시 말해 팔이 작업하는 방식을 아는 것과 눈이 볼 수 있는 것 간 관계의 변화이다.

 

4-2. 이것이, 칸트로부터 50년 후, 1848년 혁명기에 쓴 한 노동자의 일지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집짓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일을 다시 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판단력 비판>>을 개인적 표현으로 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텍스트 중 일부를 인용하자면,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믿으면서, 바닥을 모두 깔 때까지 그는 [공사 중인] 방의 배치를 찬미하게 된다. 만약 창문이 정원을 향해 열려있거나 창문으로 그림 같은 지평선의 광경이 내다보인다면, 그는 이웃한 저택 소유주 이상으로 그 광경을 즐기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잠시 멈추고 탁 트인 시야를 향해서 상상의 나래로 빠져든다.4)”

 

5-1. 건축 중인 집이 다른 사람의 소유라는 사실에 무지한 것, 그리고 마치 응시가 즐기는 것 또한 자신에게 속한 것처럼(as if) 행동하는 것 — 이것은 팔과 응시 간 효과적인 분리의 작동이자, 직업과 직업에 상응하는 기질들 간 분리이다. 이것은 하나의 ‘마치처럼’을 또 다른 ‘마치처럼’과 교환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복수의] 기술적 지식들을 ‘목적’을 지닌 단하나의 지식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이야기들(histoires), 즉 신화들을 들려준다. 목적(ends)을 지닌 이러한 지식은 위계적 질서를 기초 짓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식들(savoirs)과 지위들의 분할을 위해서 기초를 제공해주는, 이러한 덧붙임(supplement)은 그 자신을 논증할 수 있는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르므로] 그것은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전제를 취하기 위해서, 위에서 밝혀진 [믿음의] 의미에서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어떤 이야기를 서술하는(recount, 다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5-2. 플라톤은, 지식은 사실상 늘 둘로 겹쳐진 탓에 이야기들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윤리적 프레임 내에서 파악하려 한다. 미학과 마찬가지로, ‘윤리(Ethics)’는 그 의미가 반드시 상술되어야만 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윤리를, 보편적 가치들에 따라서 특수한 사실들이 판단되는 계기와 쉽게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에토스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아니다. 법률이나, 도덕이나, 가치를 상기하기 이전부터, 에토스는 벽돌집(séjour)을 가리킨다. 게다가, 에토스는 이러한 벽돌집에 상응하는 존재의 방식과, 어떤 주어진 장소에 거주하는 아무개들에 속하는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플라톤적 신화들에서 핵심이 사실상 바로 이것이다. 플라톤은 이야기들을 자세히 서술하는데(recount, 다시 셈하는데), 이야기는 어떤 조건에 속한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방식을 정해 준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시인의’ 작품들을, 그러한 작품들이 교훈이 되고 시인이 인민들이나, 선이나, 악의 교사가 되게 하는 프레임 안에 등록시켰다. 이것은, 플라톤을 따라 말하자면, ‘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3. 미학은, 사실상, ‘목적 없는 목적성’(finalité sans fin), 목적들을 가진 모든 과학으로부터 분리된 쾌락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처럼의 지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궁전의 형식을 바라보는 미학적 응시는 궁전의 기능적 완벽함과는 관계가 없으며, 궁전이 사회의 질서에 등록되어 있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미학적 응시는, 마치 응시가 궁전의 건축에서 사용된 지식(savoir)과 궁전에 그것의 맥락을 제공해주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지식(savoir)이라는 궁전과 지식이 맺고 있는 둘로 겹쳐진(double) 관계로부터 궁전을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장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잘 알법한, 그러한 주택에서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마치 그들이 정원의 풍광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믿음’은 어떠한 현실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은 이러한 현실을 둘로 겹치며(double), 반면에 윤리적 질서는 현실을 유일한 하나로 간주하려 한다. 이러한 결론에 따를 때, 장인들은 자신들의 노동하는 정체성들을 둘로 겹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로서 정체성은 규정된 체제 내에 편하게 거주하고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에 추가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 주체의 정체성은 할당된 사적인 조건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의 일에 개입할 수 있다.

 

6-1. 사회학자는 바로 이러한 둘로 겹치기(doubling)를 거부한다. 사회학자의 설명에서, 마치처럼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지식은 미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미적인 것(the aesthetic)과 반대여야만 한다. [하지만] 미적인 것은, 실질적으로, 지식의 구획이며, 다시 말해 사회적 위치들, 취향들, 태도들, 지식들[savoirs], 환상들을 [서로] 조응하게 하는 감각적 경험의 질서에 간섭하는 것이다. 미학을 향한 부르디외의 논쟁은 사회적 현실의 한 특수한 측면에 관한 일개 특정한 사회학자의 작업이 아니라, 그러한 논쟁은 구조적인 것이다. 한 분과학문(discipline)은, 사실상, 일차적으로 특정한 영역이나 특정한 유형의 대상에 적합한 방법들의 집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과학문은 무엇보다 사고의 대상으로서 이러한 대상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지식에 관한 특정한 관념 — 다른 말로 하자면, 지식과 위치들의 분할이 맺는 관계에 관한 특정한 관념을 입증하는 것이다.

 

6-2. 분과학문이 뜻하는 바란 이러한 것이다. 분과학문은 언제나 이러한 영토의 개척(exploitation)이상의 무언가이며, 따라서 지식(savoir)에 관한 어떤 관념의 입증이다. 여기서 지식(savoir)에 관한 관념이란 두 개의 지식들(savoir)과 두 개의 무지들 간 관계의 규준화(regulation)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고 가능한 것(the thinkable)에 관한 관념, 즉 어떠한 지식의 대상들 자체가 사고할 수 있고 알 수 있는가에 관한 관념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불화(dissensus)에 대한 특정한 규준화이며, [따라서] 윤리적 질서에 따라서 특정한 유형의 조건이 특정한 유형의 사고를 함축하기 때문에, 불화가 윤리적 질서에 일으키는 틈(écart)에 대한 특정한 규준화인 것이다.

 

6-3. 부르디외가, 고상한 계급과 통속적 계급 각각은, 칸트가 뭐라 말하든 간에, 그들의 자리에 상응하는 취향을 선택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씨들과 사진들을 배열(dispositif)할 때, 바로 이러한 사고 가능한 것이라는 맥락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는 질문문항들은 특히나 ‘이론(異論, allodoxy)’ 현상이 없도록 설계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의견이 일반 공중에게 제시된다, ‘나는 고전 음악, 예를 들어 스트라우스의 왈츠를 좋아한다.’ [이러한 질문에서] 의견을 묻는 표현은, 거짓을 말하려는 노동자들을 가려내려는 함정으로 생각된다, 즉 자신이 고전 음악을 좋아한다고 응답하지만, 사실은 [그 응답으로 인해 응답자가] 스트라우스가 고전 음악의 작곡가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점을 누설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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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G. Gauny, “Le Travail à la tache”, Jaques Ranciere, La Nuit des prolétaires(1981: Fayard, Paris), 91; John Drury 역, The Nights of Labor(1989: Temple University Press, Philadelphia), 81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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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4:43 2009/05/29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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