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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어니스트 칼렌바크/1975
21세기의 어느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를 포함하는 일대 일부는 '과격한' 생태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미국에서 떨어져나간다. 전쟁이 금방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시기를 거친 두 나라, 미국과 에코토피아 사이에 교류가 완전이 끊어진 채 20년이 경과하고, 타임스 포스트지의 윌리엄 웨스턴이 미국 주류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에코토피아에 취재를 나서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24신으로 나뉘어 윌리엄 웨스턴이 미국의 독자들에게 에코토피아의 여러 모습을 소개하고 그 바로 뒤에는 웨스턴이 쓴 그 즈음의 일기를 덧붙인 형태의 이 소설의 구조는 '에코토피아'라는 미지의 나라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소설속에서 신문을 읽는 독자뿐 아니라) 소개하기에 알맞다. 모어의 유토피아도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나.
웨스턴이 소개하는 에코토피아의 식량문제, 도시생활, 문화생활, 경제, 정치, 교육, 의료 등 각 분야는 60년대 후반을 거친 그 시절의 이상향을 총집결한 기분이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의 최대치라고 할까.
그 시절의 사람들이 꿈꾸던 것의 한계도 보인다. 에코토피아의 국가원수는 여성이고, 집권당의 대다수과 고위직, 정계나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여성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성적소수자에 대한 언급은 책 전체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웨스턴이 에코토피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소개하는 전쟁놀이가 있다. '문명 국가의 국민들에게 에코토피아에 대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기괴한 관습'인 전쟁놀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체계에는 신체적 경쟁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욕구를 공공연하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 같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논리에 따라 진행되는, 사람을 다치게 할 만한 무기를 들고 실제로 누군가 다칠 때까지 진행하는 놀이다. 에코토피아 사람들은 전쟁놀이로 인한 인명손실이 전쟁 등의 인명손실에 비할 바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하긴 사람들은 스포츠를 하다가도 다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죽기도 하지 않나.
아니 이것보다 궁금한 것은, (전쟁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고찰은 차치하고)'신체적 경쟁욕'이 몸에 내재되어 있냐는 거다. 이 시절의 평화운동은 아직 반전운동의 형태만 띠고 있었다. '폭력적이지 않은 모든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하나의 내용이 된 지금 이 소설이 다시 쓰여진다면, '에코토피아의 어두운 면'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 폭력이나 파괴를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면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라도 풀어야 하는 것일까. 평화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면 느껴지지 않는 후천적인 행동양태일까.
그리고 그런 본성은 남성에게만 있는 것일까. 칼렌바크는 국가원수의 자리나 사회활동의 상당한 부분에 여성을 배치하는 상상력은 발휘하면서도, '신체적 경쟁욕'이 내재된 몸의 주체는 남성으로만 한정한다. 즉 전쟁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다. 웨스턴은 이 부분에 대해 에코토피아의 여성은 정치나 경제같은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이라고 슬쩍 변명하고 넘어간다.
사실 이 부분(전쟁과 여성)에 대해서는 나르니아 연대기의 아슬란이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전쟁에 여성이 끼면 보기 흉해진다." ...정말 명쾌하시군요, 아슬란. =ㅅ=
한편 이 소설은 서구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던 제국주의시절의 초기에 쓰여진 많은 모험소설의 형식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문명사회'의 상당한 학식을 갖춘, 스포츠도 잘 하는 남성이 미지/미개의 지역에 뛰어들어 그 세계를 관찰하고, 문명의 힘을 보여 그 세계의 '착한 세력'의 조력을 얻고, 아름다운 '원주민 처녀'의 환심을 사고, 그가 '선한 세력'의 복권이나 집권을 돕고, '선한 세력'은 그가 '성과물'을 갖고 '문명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돕고, 이후의 교류협력(이라고 쓰고 복종이라고 읽는)을 약속하고, 그 여성의 피부색이 옅은 색이라면 함께 문명세계로 돌아가 '문명의 자애'를 과시하는.(그 여성의 피부색이 짙다면 돌아가는 도중이나 클라이막스의 사건에서 유명을 달리하기도 한다.)
에코토피아는 '미개사회'는 아니지만, 또 웨스턴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원주민 처녀'와 에코토피아에 남지만, 이 소설의 위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어린 시절 즐겁게 읽었다가 머리가 커지면서는 떠올리면 씁쓸해진 옛 소설의 그림자들이 떠올라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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