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 2004/09/14 23:32

*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님이 어느날 전화를 하셨다.

지금은 연재가 끝난 '한겨레21'의 '하종강이 만난사람'이란 기사에 내 이야기를 실으시겠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

몇차례 간곡히 '아니됩니다'를 외쳤지만, 평소 지은 죄가 많았던지라 끝내 거절치 못하였고, 하소장님은 감히 거절코자했던 내가 미웠던지 제목도 '공개구혼'으로 뽑아 한동안 아는 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게 죄송해서 메일을 보냈었는데, 하소장님은 홈페이지에 메일을 공개하는 한편, 마지막 연재기사에서 내 사진과 편지내용 일부를 다시 게제, '확인사살'까지 하시는 바람에 대략 낭패스럽기 그지없었다.

 

[메일 내용]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중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쓰신 글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옛날에 할머님께 들으셨다는 어느 독립군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녀는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오가며 연락병이었다고 합니다. 애 둘이 딸려 있어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한 녀석은 앞에 매달고, 또 다른 녀석은 등에 업고 종횡무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다니셨답니다. 이 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유는 그녀만의 독특한 장비 때문이었는데, 이 양반이 길을 나설 때면 허리에 커다란 빗자루를 꽁꽁 동여매셨답니다. 누가 "애 둘을 데리고 뛰어다니기도 불편할 텐데 웬 빗자루까지 매고 나서냐"고 물으면 이 분은 "혹시라도 눈길 위에 내 발자국이 남을까봐 빗자루를 매달았소. 등에 매달고 뛰면 자연스레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겠소"하며 호탕하게 웃으셨다더군요.

백 선생님은 그 이야기 말미에 역사를 움직여 온 것은 이렇게 제 발자국을 지우며 묵묵히 살아온 민중들이 아니겠느냐고, 운동이란 걸 할라치면 제 이름자 남기는 일 따윈 관심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은하의 장강을 도도히 흐르게 하는 건, 역시 수억년 동안을 이름도 없이 제 자리를 지켜온 뭇 별들이라고, 운동을 하며 산다면 이 위대한 진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 친구녀석 중에 온갖 엠티며 농활, 수련회까지 모두 빠짐없이 참석해서 식사준비에 설거지 등등 갖은 뒷치닥거리를 도맡아하던 녀석이 있었습니다. 헌데 그 녀석, 과학생회실에 수북히 쌓인 각종 행사 사진들 어느 곳에서도 쉬이 찾을 수가 없더군요. 간혹 그 녀석이 출연한 장면이래봐야 친구들이 사진 찍느라 온갖 폼을 다 재며 서 있는 한쪽 귀퉁이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우연히 잡힌 모습 정도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남들이 사진찍는다고 난리치고 있을 때에도 온갖 뒤치닥꺼리를 하고 있거나 사진기를 들고 친구들 사진 찍어주는 일을 주로 했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사진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저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지 않는' 사람 이렇게 두가지로 구분이 되더군요. 그러면서 혹여라도 '사진에 찍히는' 일이나 자리를 탐하며 살진 말자, 누구도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살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야 워낙 재주도 없고 눈에 띄는 실력도 없어 경찰에게 불법행위(?) 장면이 채증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카메라빨 받을 일은 없어서 평소엔 별 걱정은 안하고 삽니다.

소장님께서 "왜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건방 떤다고 혼날 것 같아서 차마 드리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죄송합니다.

한가지 더...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어 솔직히 자백하겠습니다. 재정문제와 관련해서 철이 들어가면서 저는 두 가지 원칙을 생각했습니다. '자력갱생'과 '무소유'입니다. "운동한답시고 최소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자. 내 건강한 노동으로 먹고살 것이며 행여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며 살진 말자"는 것과 "돈이건 내 몸뚱이건, 능력이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 모든 것은 이 더러운 자본가 세상을 뒤엎기 위한 투쟁에 쓰여야할 소중한 혁명의 자산이며, 혁명이 내게 잠시 관리를 위탁한 것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탐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선배 집에 가서 맘에 드는 책들을 때로는 애원해서 때로는 훔쳐서 들고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어느 선배가 호통을 치더군요. "활동을 하는 놈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보따리 하나면 족하지 뭐 그리 욕심이 많으냐"고... 물론 그 선배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보안' 문제였겠지만, 문득 "입 속엔 말이 적어야 하고, 머리 속엔 생각이 적어야 하고, 뱃속엔 밥이 적어야 한다"는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본주의를 뒤엎겠다는 놈이 '자본주의적 소유욕'에 찌들어 살고 있구나 하는 뼈아픈 반성이었습니다. 그 뒤론 재정문제에 대해서도 자력갱생의 원칙은 철저히 지키더라도 통장에 쌓이는 돈들을 결코 '내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놈의 '소유욕'이란 게 칼로 무 베듯 잘라지지는 않아 고민스럽습니다)

소장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금은 기분이 우울했습니다. 무엇하나 누구 앞에 내놓고 얘기할 꺼리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초라한 진실을 '겸손한 태도'인척 자기 위안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고민들이 마구 들었습니다. 물론 소장님이 쓰신 '진짜 노동자'의 주인공이 된다는 일이 저에겐 평생 없을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저 때문에 글쓰기가 막막하셨을 소장님께도 정말 죄송했습니다. 소장님께서 써주신 글... 더욱 열심히 살라는 호된 꾸지람으로 알고 늘 반성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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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32 2004/09/1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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