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 2006/08/26 17:12

학습지노조의 부산지역 간부가

아주 오랫만에 연락을 했다.

본사앞 집회가 있어 서울에 올라왔는데

잠깐 얼굴이나 보자 해서 사무실로 오시라 했다.

일보러 밖에 나간 사이에 그가 사무실에 먼저 도착했고

내가 들어서자 반갑게 악수를 청하러 내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아차' 싶었다.

나는 얼마나 기억력 나쁘고 동지에 대한 기본 배려조차 없는 놈인가!

 

그는 얼마전에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꽤 오랫동안 지고 있었다.

다행히 생명이나 의식엔 이상이 없었지만

정확히 몸의 반이 마비가 되어 장장 6개월을 병원에 누워있었고

지금도 매일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마비된 몸의 반이 아직도 온전치 못해

절룩이며 내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엔

반가움과 고통스러운 표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가 아프단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왜이리도 바보인가!

 

학습지노조의 초기 조직사업에 몸과 마음과 돈을 바쳐 헌신했던 사람

그의 등엔 손수 제작한

"2010년 학습지 노동자 총파업"이란 구호가 적혀있었고

성치않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몇개 더 꺼낸 작은 현수막엔

"특수고용 노동자 연대파업으로 노동자성 쟁취"등의

구호가 가득했다.

등에 그런 현수막을 매달고

절룩이며 절룩이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을 그의 모습이 그저 마음 시리다.

 

기천만원이나 드는 병원비가 없어 고생했다 한다.

한동안 버는 족족 노조활동에 쏟아붓고

워낙에 가진것 없는 특수고용 노동자였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주변의 선배들, 학습지 간부들, 조합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줬고

그의 아내는

"남들 다 드는 건강보험 하나 안들더니 당신에겐 노조가 보험이었군요"하며

탄식했단다.

 

자신도 해고자 신분이라 근근이 과외로 연명하고 있는 애 둘달린 대전쪽 간부는

매달 10만원씩을 치료비에 보태라며 보내준다고 한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는 이렇게 늘 슬프고도 아름답다.

 

일요일 부산집회에 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부산역으로 나오겠단다.

몸도 성치않을텐데 괜찮다고 만류했으나

그는 "고문과도 같은 물리치료 꼬박꼬박 받으며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그런 곳에 가고 싶어서인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투쟁의 현장에서 봅시다!"라며 슬며시 웃고는 절룩이며 길을 나선다.

걸을때마다 흔들리는 그의 뒷모습에 왈칵 눈물이 났다.

 

누가 혁명은 끝났다 하는가.

불구가 되어 절룩이는 걸음이어도

혁명은 여전히 제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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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6 17:12 2006/08/2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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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마움 2006/08/26 1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보니 가슴이 아프면서도 따뜻해지네요. 아프신 동지의 계좌 번호 올려주실 수 있을런지요.

  2. 새벽길 2006/08/27 0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내시라는 말씀 밖에 못드리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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