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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9/20 22:59

# 용서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상하다.

실제에 있어 그는 반성이 아니라 처벌을 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냥 복수하고 싶다고 얘기해야 한다.

반성은 벌을 받은 다음에 하고, 그때서야 용서를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것 아닐까.

 

# MBTI - 신탄진의 경험

- MBTI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어렵다는 얘길 들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이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얘기를 해준 동지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부끄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단어들이 어렵게 느껴질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까..

- 자가채점식 MBTI 문제지(?)에 학력과 전공을 적는 란이 있다.

  학벌없는 세상이 와야한다며 떠들던 나는 그것이 문제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MBTI 개발자측에서는 이후의 통계등을 위해서 만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이용자들이 학력과의 상관성을 통계내는 것도 아니라면 불필요한 문항들이다.

  다음부터는 잘라내고 사용해야겠다.

 

# 군대

- 징집제가 시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군대는 결국 국가노예제도이다.

  인신을 구속하고, 때로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제도일뿐이다.

- 여대에서도 ROTC를 설치한다고 난리다. MC몽이 고의로 이빨을 뽑아서 군대를 면제받았다고 야단들이다.

  이런 문제를 접할때마다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가 나를 괴롭힌다.

-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는 이상, 당장 없애지 못한다면 최소한 국가노예제도인 징집제라도 폐지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과 왜 헌법상 의무앞에 모두가 평등하지 못하냐는 불만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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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0 22:59 2010/09/2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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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8/16 13:09

# 애인 또는 배우자의 핸드폰, 이메일 뒤지기

DAUM 아고라등에 가끔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애인 혹은 배우자의 행동거지가 이상해서 또는 우연히

상대방의 핸드폰이나 이메일을 봤는데 다른 사람이 있다며

이를 어찌해야겠느냐는 사연들이 있다.

배타적 독점적 연애, 결혼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치하고

도대체 다른 사람(아무리 애인이거나 배우자라 하더라도)의 핸드폰과 이메일등을

뒤져볼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게다가 그런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전혀 하지 않는다.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걸어두거나 그 비밀번호를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아 싸웠다는

얘기들까지 심심찮게 올라오는 것을 보면

심지어 애인 또는 배우자 관계라면

마치 상대방의 핸드폰이나 이메일은 당연히 볼 권리가 있다는듯 생각하는듯 싶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대책없는 결혼

결혼을 준비중인 몇몇 사람들에게

결혼후의 재정운영이나 출산 및 육아, 가사분담등에 대해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한결같이 아직 토론은 하지 않았고,

결혼후에 얘기할 계획이거나 논의할 생각도 안해봤다고 한다.

또한 본인의 생각을 물었을때

대부분 '남들 하는대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도 신비로왔다.

결혼이라는, 나로서는 상상만으로도 피곤한 삶을 선택하면서

그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뒷전이라니.

그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과 합의가 먼저고

그 결과를 토대로 결혼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은데

내 기준에서 보자면 정반대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셈이다.

활동가들마저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인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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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3:09 2010/08/1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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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8/13 15:23

* '남근주의'의 반대말은 무었인가?

 

* '반여성주의'의 반대말은 '반남성주의'일까? 아니면 '여성주의'일까?

  또는 '반남성주의'와 '여성주의'는 같은 말인가?

 

* 여성주의는 보통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여성주의'에 반대하면 성차별에 찬성하는 것인가?

 

* 집회에서 여성동지가 여경들에게 질질 끌려갈 경우,

  또는 농성장에서 여성용역에게 여성동지가 다구리 당하고 있을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실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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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3 15:23 2010/08/1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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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8/12 13:10

글을 쓴다.

자기만의 단단한 논리로 진지를 구축한다.

화려하지만 날카롭기 그지없는 수사들로 수려한 바리케이트도 친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지적 장신구로 용도변경된다.

 

누군가 한마디 한다.

존경하는 몇몇 선현들의 이름을 나지막히 불러본다.

그분들은 시공을 건너와 꽃이 되어주신다.

그 꽃을 한마디 던진 그에게 건네준다.

그러면서 가슴 깊숙히 비수도 꽂아준다.

그는 내심 치명상을 입었으나 아직 숨통이 끊기진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전문의료인이 등장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난독증'을 진단한다.

어디선가 선무당도 홀연히 나타나

그에게 악귀가 들렸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진단은 조금 달랐으나 처방은 모두 몽둥이질이 특효란다.

이제 구경하던 이들도 이제 손에손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그 불쌍한 자의 난독증 치료에 동참한다.

덕분에 치료가 조금 수월해진다.

 

그렇게 한참의 몽둥이질이 끝나자

그는 더이상 이해하지 못한다는 불평이나 헛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상태는 조금 안좋아 보였지만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난듯 하다.

 

만족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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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3:10 2010/08/1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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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6/01 15:28

#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아본 심상정동지의 말들

 

“단일화 여부만 기준으로 선거 평가를 내리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출마에 목적이 있고, 제가 지향해온 진보정치에 대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단일화를 가지고 진보정치에 대한 평가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어떤 상황이더라도 진보정치에 대해서 원칙에 따라서 평가를 받겠습니다.” - 5월 28일 아침 sbs 라디오 <서두원의 sbs전망대> 인터뷰중 [출처] 심상정, 어떤 상황이더라도 진보정치에 대해서 원칙에 따라서 평가 받겠다.

 

 

“지난 번 유시민 후보의 단일화 과정을 지켜보더라도 사실 민주노동당이 단일화 했지만, 후보가 단일화 했지만 지지는 다 쫓아가질 않은 거죠. 그래서 우리 사회에 대해서 변화에 대한 분명한 요구와 신념을 갖고 있는 그런 지지표가 단순히 그냥 후보 간에 단일화 한다고 해서 업혀질 것이냐에 대해선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지지층까지를 합쳐낼 수 있는 단일화라는 것은, 말하자면 추구하는 가치나 또 정책 그리고 과거 해 왔던 여러 가지 평가에 대해서 충분한 공감대가 있어야...” - 2010년 5월 27일(목) 오후 6시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출처] 심상정, 단일화에만 매달림으로서 한나라당의 북풍 대 노풍 전략에 말려들었다.|작성자 심상정

 

 

“과거를 대표하는 골리앗이 아니라 미래를 약속하는 다윗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반성 없이,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대한 내부적인 규명과 책임 없이 그분들이 유지 계승이라고 나서고 있는 것을 국민들이 크게 공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전 그렇게 보거든요”

“사회운동에, 정치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 다 다르죠. 저는 이제 남자친구 쫓아 다니다 운동권이 됐고(웃음) 구로공단에 공장 활동가서 여성노동자들 보면서 노동운동 결심을 했지만, 당시에는 어떤 이념에 의한 그런 선택이 많았던 것 같아요... ... 그래서 그때는 이게 비주류지만 그 이념이 머지않아 주류로 성공할 거라는 전제 속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 많지 않았나. 그건 동구 사회주의가 망하면서 많은 분들이 운동권을 떠나셨다는 점으로도 증명이 되죠.”

- ‘심상정과의 만남’ 딴지일보(2010.02.01.)

 

 

“반MB연합을 구성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데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구성의 원칙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노선차이를 넘어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MB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명박 정권의 무엇을 넘어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이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을 분명히 전제해야 한다. 상징적으로는 한미FTA와 비정규직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서는 민주당과도 연대할 수도 있다. 민주당과는 절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직된 사고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연합의 수준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민생민주국민회의가 반MB 전선 구축을 명분으로 한미FTA 같은 핵심적인 의제를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방향과 내용이 전제되지 않는 반MB전선 구축의 최대 수혜자는 결국 박근혜가 될 것이다.” - “신자유주의 극복 못한 반MB연합, 수혜자는 박근혜” / [참세상 기획인터뷰6]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2009년 01월 07일)

 

 

# 지난 금요일 저녁쯤 심상정 후보의 동향이 수상쩍다는 얘기를 듣고난뒤에

'노회찬은 계속 가고, 심상정은 사퇴하는'이런 그림이 되겠다고 예상했다.

노회찬후보마저 사퇴하면 진보신당이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반반씩 부담을 나눠갖는 이른바 고육지책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현재까지는 적어도 결과만 놓고본다면 나의 예상은 맞은 셈이다.

 

#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중 하나는그가 누구에게 어떤 칭찬을 듣느냐, 또 누구에게 어떤 욕을 먹느냐이다.

들어서 수치스러운 칭찬이 있고,먹어서 영광스러운 욕이 있다.

 유시민을 지지해달라며 사퇴를 선언한 심상정후보,

그는 누구에게 칭찬을 듣고 있으며누구에게 욕을 먹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심상정의 사퇴에 대한 내 평가의 1차 기준이다.

 

# 위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작금의 사태에 대해 매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진보신당의 선거전술을 음해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내 기준에서 심상정의 사퇴가 진정 그녀만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돌출행동이었다면,

첫째, 진보신당은 심상정의 사퇴승인서를 발급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 적전투항에 따른 분명한 징계조치가 있어야 한다.

최소한 두가지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이번 사퇴가 진정 심상정 개인의 속죄의식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다.

 

# 민주노동당 분당과정에서 전진동지들이 보였던 당내 민주주의와 당기원칙에 대한 단호함이 이번에 얼마나 선명하게 주장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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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15:28 2010/06/0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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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10/05/01 19:00

정세균, 한명숙...

그들이 호명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산자부장관시절 쌍용차를 팔아먹었던 정세균,

ktx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을 짓밟고 대추리를 군화발로 뭉갰던 한명숙.

그들이 민주노총의 노동절집회에 '내외빈'으로 참가했단다.

노사관계로드맵에 반대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조직할때

불법파업이라며 엄정대처 운운했던그들을 '외빈'으로 앉혀놓고 근심위투쟁, 복수노조관련 투쟁을 얘기하는건 도대체 무슨 코메디인지...

 

줄줄이 이어지는 문화프로그램들.

요즘 방송에서 예능프로그램을 안하니 민주노총이 예능잔치를 벌이나 보다며 옆자리의 동지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연단'과 함께 등장한 위원장이 '발령'하신 '투쟁지침'에서

오직 구체적인 전술은 6월 지자체선거때 꼭 투표하라는 얘기뿐이었고

노동해방을 외쳐도 부족할 집회에서

'투표천국' '기권지옥'을 외치라는 무대위의 주문은 더욱 씁쓸했다.

 

차라리 한국노총이랑 같이 마라톤을 뛰지...

그러면 건강에라도 도움이 되었을 것을...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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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1 19:00 2010/05/0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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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9 16:20

나더러 근본주의자라고들 한다.

원칙주의자라고도 한다.

20여년 가까이 들어온 말이지만

그것이 칭찬인지 욕인지

나는 여전히 구분을 못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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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 16:20 2009/12/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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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8 09:48

* 열린사이버대 발달심리학 과제용...
 

인간의 삶은 죽음과 함께 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어간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슬픈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그 잊음은 프로이트식 표현에 따르자면 어쩌면 ‘의도적 실착’일수도 있다. 아무리 잊고 산다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유한한 좌표축 어느 지점만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점유할뿐이다. 그 한계와 시간의 불가역성앞에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은 그래서 숙연하고 경이롭다.

 

 

David Fincher 감독이 만들고 Brad Pitt, Cate Blanchett 등이 출연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0년대에 쓴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던 마크트웨인의 명언에서 피츠제럴드가 작가적 영감에 의해 충동적으로 쓴 이야기가 근 60년만에 영화로 완성된 것이다.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으로서 직역한다면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정도 일텐데, 한국 개봉명은 엉뚱하게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여든살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가 아기의 모습으로 ‘늙어 죽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보편적 발달 과정을 역행하는 주인공 벤자민의 삶과 사랑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곧 죽을것 같은 노인의 얼굴과 몸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양로원 앞에 버려진다. 양로원을 운영하던 흑인여성 퀴니는 이 아이를 ‘벤자민’이라고 이름짓고 자기가 키우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았던 아이는 조금씩 일반적인 인간의 생체주기를 역류하며 젊은이로 성장해 간다. 젊은 벤자민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선원이 되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성인이 된다. 몸의 나이만 거꾸로 먹어가는 사람은 역시 외롭다. 세상에서 오직 그의 몸만이 다른이들과 반대방향을 향해 가면서 그는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로서 존재한다는 인간의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된다. 그 소외의 심연에서 그를 건져올린건 사랑이었다. 순행과 역행의 짧은 교차점에서 평생의 사랑 데이지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결혼하여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몸의 나이가 시간을 배반하면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떠나게 된다. 아이에게 필요한건 ‘놀이친구’가 아니라 진짜 아빠였기 때문에. 그렇게 벤자민은 떠나지만 이 둘의 운명적인 사랑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늙어버린 데이지와 어린이가 되버린 벤자민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둘은 평생을 함께 한다. 물론 오직 둘만이 아는 비밀을 간직한 채.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지고 생체 나이가 유년에 가까워진 벤자민은 치매에 걸리고 결국 데이시의 품에 아기의 모습으로 안겨 노환으로 죽게된다.

 

 

한국 개봉명처럼 시간이 ‘거꾸로’ 가진 않는다. 생체발달이 시간의 일반적 흐름을 역류할뿐이다. 그래서 그의 삶의 발달과정을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몸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정신을 기준으로 할것인가의 고민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쟁주제였고 아직도 보편적으로 합의된 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기도 하다. 몸의 시간을 따라가자면 영화의 스토리 전체를 역산하여 재배열해야 한다. “cogito ergo sum”의 전통을 따르기로 한다.

 

 

벤자민의 아동기는 명백히 ‘애늙은이’의 삶이었다. 날때부터 백내장에 관절염을 앓고, 피부의 탄력은 없으며 손발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다. 보통 다른 이들이 축복속에 태어나 부모의 따뜻한 양육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것과는 달리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곧 무덤에 갈 노인들만이 있는 양로원에서 자란다. 아버지조차 버린 아이를 ‘퀴니’는 ‘기적’이라며 자신의 아이로 키운다. 퀴니에게 벤자민은 단지 기적 ‘같은 것’이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이들에게 삶은 기적 같은것이 아니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다. 양로원에서 자라는 벤자민은 자신이 어린애였다는 것도 모르고 스스로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 한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커간다. 그러나 역시 벤자민은 거리에는 뭐가 있을지, 길모퉁이에는 뭐가 있을지 호기심에 가득한 아동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주위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벤자민의 호기심앞에 어머니 퀴니는 “모두가 한 두가지씩은 다르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우린 결국 같은 곳을 향해 가지. 단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 뿐이야..넌 너만의 길을 가는 거고.”라며 주워진 길이 있음에 감사하며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평생의 사랑 데이지를 만나게 된다.

 

 

그의 청년기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도전과 사랑의 시기였다. 예인선 선원으로서 한사람의 사회적 개체의 삶을 시작한 벤자민은 어머니 퀴니가 얘기한 것처럼 자신만의 인생길을 걷게 된다. 엘리자베트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세계 제2차대전에도 참전한다. 그리고 운명인지 필연인지 다시 데이지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청년기의 벤자민이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운명에 도전하는 삶을 상징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엘리자베트의 도버해협 횡단이다. 플로렌스 카탈리나라는 영국 여성의 실제 경험담을 차용해온 장면에서 감독은 인생은 도전하는 것이며 포기하는 자만이 실패한다는 사실, 스스로 행복하고자 노력하는 자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플로렌스도 두 번째 도버해협 횡단 도전에서 성공한뒤 “안개 때문에 포기한 것이었다. 500미터 앞이 해안이라는 사실만 알았어도 끝까지 전진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한바 있다. 극중 최고령 할머니로서 34시간 22분 14초만에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한 엘리자베트도 “난...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소감을 밝혔다. 벤자민도 역시 주어진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과 사랑을 개척해 갔다. 숱하게 많은 걱정과 우려를 이기고 데이지를 만나 딸을 낳아 잠시나마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아이가 커가고 벤자민 스스로도 중년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많아진다. 아이에겐 놀이친구가 아니라 ‘진짜 아빠’가 필요한데, 점점 어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그건 아이한테도 불공평한거야..난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아”라며 벤자민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난다. 그러나 아내와 딸에 대한 그칠줄 모르는 사랑으로 매년 딸의 생일에 세계 각지에서 엽서를 보낸다. 무엇이 ‘책임감’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 홀로 여행을 계속한 것이다. 그 여행에서 벤자민이 얻은 결론을 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치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거니까. 최고로 잘 할수도 있고, 최고로 못 할 수 도 있지. 난 네가 최고로 잘 하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뭔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단다. 서로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단다. 너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이것이 한 사내의 시간을 역으로 돌려가며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인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벤자민의 노년은 데이지와의 재회로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폐가에서 치매에 걸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벤자민은 데이지와의 사랑을 비롯한 자신의 인생 전부를 기록한 일기장과 함께 살다 이미 늙어버린 데이지 곁으로 돌아온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며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벤자민은 ‘평생을 살았던 그런 느낌’을 간직한채 날고 싶어한다. 세상과는 반대로만 흐르던 자기 몸과 그 몸으로 인해 감내해야 했을 인생의 힘겨움을 마지막까지 벗어버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런 평생의 소원을 안고 벤자민은 데이지의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다.

 

 

감겼던 태엽이 다 풀리면 시계는 멈춘다. 그렇지만 시계가 멈춘다고 시간도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다고 해서 시간이 반대로 흐르지도 않는다. 인생의 시련앞에서 인간은 햄릿의 나지막한 독백처럼 “노도처럼 밀려오는 운명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에 맞서 싸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인생의 불가역성은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숙명이다. 과거나 주어진 상황에 발목 잡히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지길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구나 자기의 길을 걸으며 행복할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은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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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9:48 2009/12/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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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8 09:24

기관지 편집팀에서 일하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비폭력대화에 관한 원고를 하나 써달라는 취지였다. 워낙에 글재간도 없는데다 비폭력대화센터에서 초급과정을 잠깐 듣긴 했지만 글을 쓸만큼의 배움도 없다고 나름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가 어떤 점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한계도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판단도 안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전화를 건 동지는 ‘부탁’이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하며 ‘무조건’ 써달란다. 이 경우 그 동지의 요청은 과연 ‘부탁’이었을까? 상대방에게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요구는 그것이 아무리 공손한 말들로 표현됐다 하더라도 ‘강요’다. 비폭력대화에서는 부탁과 강요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한다.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 cation)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에 의해 제안된 대화방법(말하기와 듣기)이다. ‘관찰-느낌-욕구-부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연민이 우러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본 골격은 상대의 행동이나 말을 비디오로 찍은 듯 관찰하여, 그것을 보거나 들은 나 자신의 내면에 든 느낌을 확인한 다음 그 느낌 뒤에 존재하는 욕구를 확인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이다.


회의에 자주 늦는 동지가 있다고 치자. 이 동지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은 “넌 왜 항상 늦냐!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고도 네가 활동가냐!”라는 것이다. 비폭력대화는 이럴 경우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회의에 늦게 오니까(관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도 되고, 회의 시간 내내 다음 약속 때문에 초조했어(느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제때 회의를 시작하는 게 나한테 중요하니까(욕구) 다음부터는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부탁)”라는 식으로 얘기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회의에 늦게 온 입장이라면 어느 쪽이 더 편안한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변명하거나 물러나거나 반격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회의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게 하는가?


누구에겐가 화가 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기분이 불쾌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은 될수 있어도, 결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상대방에게 융단폭격같은 분노를 쏟아 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낼 때,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터운 방탄복을 걸쳐 입고 그와의 일대결전에 나서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결국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쓰라린 상처만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사람의 행복을 창조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우리는 서로 받아주고, 성숙해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관계맺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비폭력대화는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을 듯싶다.


집회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갔다가 우연히 보았던 「보고서 작성요령」이란 책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지침은 “운동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경찰 내부에 운동권의 사상을 자기도 모르게 유포하는 경우가 있으니 순화해서 사용하라”였다. 일테면 ‘가두투쟁’은 ‘가두불법시위’로, ‘민중문학’은 ‘좌경의식화문학’으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을 때에는 ‘소위’나 ‘이른바’등의 부사를 붙여서 쓰라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언어정치가 낳은 대표적인 사례가 ‘민노총’이란 불가사의한 명칭이다. ‘민주’노총이란 말을 쓰기 싫어 ‘민노총’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썼던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저들은 이렇게 단어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계급적 입장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말글살이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자유와 평등의 이념, 그리고 동지에 대한 애정이 우리의 언어에는 얼마나 올곧게 담겨있는가? 이제 동지들과 무심결에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에도 차별과 착취의 폭력적인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다운 희망과 의지를 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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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9:24 2009/12/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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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9/12/07 21:32

 

* 권두섭변호사가 '한내'에 기고한 글

 ( http://hannae.org/giwa/newsletterBoard.do?method=itemView&regNo=-218)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은 여러개가 모이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곱해진다. 하나의 편견은 의심을 낳지만 두 개이상이 조합되면 확신이 된다. 그 무모한 확신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집단학살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얼굴’을 인식하는 뇌의 영역을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얼굴인식불능증’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물은 구분할수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구별하지 못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자동차사고로 뇌의 일부기능에 손상을 입은 ‘링컨’씨. 그는 시각적으로 상대의 얼굴을 완벽하게 볼 수는 있지만 그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는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에 대한 또다른 흥미로운 연구는 얼굴표정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인종간 교차연구를 진행했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인종과 문화가 달라도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표졍을 보고 기쁨, 슬픔, 분노등 대표적인 몇가지 심리상태를 거의 정확하게 맞출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능력은 자신의 생존을 최대한 보장할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앞의 예들로부터 가능한 추론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바로 동족인 ‘호모사피엔스’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그가 적인지 동지인지, 혹은 나에게 우호적일지 공격적일지를 빨리 판단해서 그에게 다가갈지 아니면 도망칠지를 정확히 선택할수 있는 인식능력을 진화과정에서 갈고 닦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은 아직도 무척 한계적일뿐이어서 인류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으며 지구상에서 동족에게 가장 악랄한 존재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왼손잡이인가? 혹시 귀가 늘어졌다거나 이마나 광대뼈가 다른 사람들보다 튀어나왔는가? 치아가 불규칙하거나 날때부터 코가 구부러져 있진 않은가? 당신이 이런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면 21세기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시라. 이탈리아의 범죄학자 롬브로조는 앞에 열거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자들이 교화 불가능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생래적 범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은 단종법이 1958년까지 존재했었고 그로인해 6만여명이 생식기를 제거하는 단종형을 받았다 하니 그런 야만스런 시대에 이 얼굴로 태어나지 않은게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21세기 지금의 사회에서도 얼굴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의 힘은 살벌하게 강력하다. 나의 얼굴과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상근자라는 사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때로 이 사회에서 지울수 없는 카인의 표식으로 인식되곤 한다.

 

2000년 이랜드투쟁이 한창일 무렵, 생판 모르는, 얼굴한번 본적 없는 사람이 나로인해 전치8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엄히 처벌해달라고 고발장을 날렸다. 구사대 역할을 하던 입점업체 주인 한명이 집회현장에서 다쳤는데, 집회사회를 자주 보던 내게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경찰, 검찰 조사과정에서 억울하다고 주장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마저 평소의 내 행실을 익히 알고 있는데 자기한테까지 거짓말이냐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소동은 어렵게 찾아낸 동영상과 난생처음 당해본 거짓말탐지기 조사 끝에 일단락됐다. 나의 무죄가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거짓말로 나를 무고한 자들은 명백한 증거앞에 무너졌으나 이 사회의 옹골찬 편견의 벽은 더욱 단단하게 나를 가로막았다. 무죄를 선고한 1심 판사는 법정에서 “법적으로는 무죄이나 도덕적으로 당신은 유죄”라며 “오죽했으면 그 선량한 상인들이 무고까지 했겠냐”고 나를 나무랐고, 검사는 항소포기를 제안하던 변호사에게 “범인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항소하겠다. 그자의 얼굴을 봐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검사부장은 나에게 “그자들이 무고한 것은 인정되지만 민주노총이 주최한 집회에서 사람이 다쳤다면 누군가 책임져야하는것 아니냐?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져라”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억울하게 무고를 당해 경찰, 검찰, 법원에 십수회 들락거리고, 실험실의 개구리마냥 몸 여기저기에 전선을 덕지덕지 붙인채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받아야 했던 내게 누구도 사과는 커녕 위로조차 하지않았다. 모든 국민의 평등함을 선언한 대한민국 헌법 11조에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만 되어있을뿐 '생김새'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지 않아서였을까? 세상은 내게 너무도 당당했고, 그 가혹한 당당함에 깊이 베였던 나는 아직도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따위를 볼때마다 괜히 주눅이 들곤한다. 얼굴을 뜯어고치든지, 세상을 뜯어고치든지 해얄텐데 내몸에 칼대긴 너무 억울해서 세상을 바꾸는게 내가 행복하게 살수 있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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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7 21:32 2009/12/0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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