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과 함께, 안녕.

2007/12/31 15:02

나는 언제나 호기심과 궁금함이 많다.

 

하지만 겉으로는 표정의 변동이 별로 없고 과묵한 성격이기 때문에

 

좀 둔한사람들은 내가 딱 자기 분야에만 관심이 있고 또한 집중력이 높은 줄 안다.

 

하지만 사실은 집중력은 별로 없고 대단히 상념과 잡념이 많아, 나 외의 다른 것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어쩌면 자신을 잘 믿지 못하고 타인에게 너무 휩쓸리는 성격이기에 이런 관심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 자체를 사실 스스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휩쓸리

 

 는 한이 있더라도 그 관심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에 한번쯤은, 나를 온전히 쏟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소설이든, 학문적 결과물이든, 아니면 홈페이지에 올려서

 

몇명만 공유할 수 있는 꽁트나 에세이류에 그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기전에 꼭 하고 싶어졌다. 

 

아마 이십대에 들어와서 나는 내가 꽤나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 성격이나 대인관계의 한계상 외부로 표출할 수 없는 감상들을 나 스스로 조합하여 분석하고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스토리로 만들어보려는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상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원인이나 숨겨진 이면을 보는 것 역시 몸에 배어있다는 것도.  

 

 

 

대학에 와서 내가 접하게 된 이들중의 다수는 기본적으로 뜨거운 감동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혁명가들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 닥터지바고 에서

 

보면,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지바고는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라라의 남편인 파샤

 

는 연인보다는 대의를 훨씬 더 중시하는 심히 도그마틱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러나 죽기전

 

마지막 순간에는 라라를 보러오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파리한 지바고가 아니라 파샤다.) 뜨거운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따뜻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때는 세세한 감정의 가지를 잘라버리고 결국 겉에 보이는 결단을 보일 수 밖에없는 것이

 

혁명가이다. 그러나 그 결단을 내리기까지  또 내린 후에도 미세한 자신의 감정의 충돌에 민감하

 

게 반응하는 이들은 소위 운동한다는 이들중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자신이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철저히 검증하고 싶은 강박증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어쨌든 나는 자신의 마음속의 목소리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들,  세상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

 

아가는 것에 대해서 쉬운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변에 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환경은

 

내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용인해 주고,  그나마 다른 환경보다는 그런면을 지지해준

 

편인것 같다.  (어릴때는 세상이 다 그런줄 알았다. 왠걸, ) 그래서 나는 마음놓고 더 예민해졌다.

 

 

 

 

 물론 그들중에 다수는 지금은 ' 운동' 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이,  초등학교때 할머니가 수업

 

중에 교실문을 벌컥 열면서 ' 00아! 할미가 우산가져왔다~'  했을때처럼, 때에 맞지않는 당혹감과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인것처럼 암묵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계속 ' 모색중'  ' 준비중' 인 사람들도 있고, 조용히 묵묵히 계속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면서

 

직업속에서, 삶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

 

 

 나는 80년대도 아니고 90년대 초중반도 아닌

 

21세기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서글퍼 하거나

 

의아함을 가지는 것 자체가 순진한 것이라고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꾸준히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가져온 이들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날카

 

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나 자신을 보면서  그게 너 자신에게 왜 문제가 되느냐 수차례 되물었다.

 

왜? 네가 타인에게 관심이 많아서?아님 결국 그 바닥에서 끝까지

 

노력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치지 못한데서 나오는 열등감에서 남도 같이 끌어내리려는 물귀신의

 

심리이냐?  아님 단지 내가 까다로울 뿐이냐?  그렇다면 그 까다로움은 과연 자격이 있는건지,

 

아님 자격불문하고 그 근원을 정직하게 잠망경으로 들여다봤을때 과연어떤 나의 욕망이 거울에

 

비추이는지 되물었다.

 

 

그 되물음은  시간이 지나서 이런정도로,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비난하고 싶을때에

 

는 결국 그 상대에 대한 비난을 통해서 자신이 인격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법이다.

 

물론, 좀 그러면 어떠냐 싶기도 하다. 그러나 무기력한 자신이란 존재의 무력함을 타인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통해서 채워보려는 그 가파른 심성은 깍이고 파내고 뒤집어짐을 반복하다가

 

이제 불도저로 싹 밀려버리면서 그 밑바닥을 드러내었을 때, 나는 그 밑바닥에 남은 욕망에서

 

보잘것없는 것과 내가 계속 가지고 가져갈만한 것들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런 소재를 가지고 자꾸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구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주

 

변의 인간관계에서 불분명한 충돌을 할때마다 내가 자주 휩쓸렸던 이유는 바로 위와같은 소재에서

 

내가 불안정하게 기우뚱 거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볼때도, 판단할때도 난 늘 어려웠

 

다.  어려운 소재에 대한 답변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니 그럴수밖에 없다. 

 

여성주의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것 외에도 문제가 많았던  학회 선배들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누군가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게 싹둑, 누군가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서서히 멀리 관계를 정리했다. 

 

 도저히 못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지금도 그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지만, 같은 선택이었

 

어도 그 과정에서의 나의 마음가짐이나,  정리의 방식이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인것이다.

 

어차피 나와 같은 목적으로 학회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에 대해서 불필요한 기대와 질문

 

을 너무 많이 가졌다.  그건 적절하지 않았다.  그 학회에서 나를 대할때 수업중에 우산가져온

 

할머니를 대하는 것 같은 불편함을 살짝 숨기던, 전학협에서  활동했던 선배. 그를 바라보던 나의

 

핀트는 너무 적절하지 않았다.  연애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학내에서 만난사람 아니더라도,

 

' 그렇게 길러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은근 내가 너무 가혹했다. 지금 생각하면 ' 적절하지 않았다'

 

라는 판단밖에 들지 않는다.  내 마음, 내 문제는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듯 했지만

 

결국 비슷하고 같았던 것 같다.

 

 

 

 

 

 

 

이런식으로 자신의 욕구가 어디로 향해있는지 그 안테나조차 바로잡지 못한 채 몇년을 보냈고,

 

그렇게 몇년을 흘러보내면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냉철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금까지 나는

 

 비틀거리는

 

sociopath혹은 psychopath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그 위치가 이제는 지긋지긋하기 때

 

문에 직업을 가져 성실히 일하고, 할 수 있는만큼 활동하는게 최고라 여겨져서 나의 나무젓가락

 

만큼이나 가늘게 근근히 버텨오던 고집들을 모두,  예전같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쳐버렸다.  어차피 쓸데없는 것들이었을지도 모르고, 쓸데 있건 존재의 드러냄 그 자체이건 이제

 

피곤해져버린것이다. 

 

 

그러면서 '남들처럼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지' 생각하면서 '

 

신경쓰지 않는 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들은,  이제 거짓말처럼 신경쓰지 않게 되는 것이 서서히

 

익숙해진다.   그러면서 타인에 대한 미움도 관심도 거짓말처럼 폭 사그라 들었다.  지금은

 

이런 나의 모드가 정말 맘에 든다.  비인간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제껴두고 단순하게 결정내리기, 혹은 중요하지 않게

 

비껴내는 것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너무 편하고 보람되기까지 하다.

 

 

사람으로 인하여 휩쓸

 

려서 버러지같이 살아오던 시간이 싫은 것도 아니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문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냐, 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경험자체는 나의 일부이고, 그 또한

 

나이기에 가치가 있지만, 되짚어 보면 내가 한 몇년간의 경험중에서 그 자체로 마음에 남는다는

 

경험은 눈에 띄게 걸러진다.   그것에 집중하고 싶다.  그게 ' 오히려'  나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

 

어서 다른 세상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역시나 언제나처럼 삼천포에 빠진 내용이지만, 결국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아마도 대학생활

 

을 다 보내버린 지금,

 

머릿속에 얼기 설기쳐진 '관심' 이라는 이름의 전선들을 걷어내버리면서 내 주변에 나와 사이좋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화해하고 싶은 것 뿐인것 같다.  (화해인지, 휴전인지, 무덤덤한 결별인지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분별한 관심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담아 표현하고 싶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오히려 나를 더 사악하게 만들었을 뿐인것 같다는 것이다.  몇년내내

 

나의 시선에서, 관념에서,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관심이라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사람들, 그리고 콘트라스트와 채도만 달리할뿐 늘 같은곳에 촛점을 맞추던 카메라를 다른 곳으로

 

시선을 틀고 싶다.  쭈욱 같은 줄기, 같은 갈등의 근원은 나 자체라고 할 수 있기에 소중하지만,

 

그래도 다른 모드로도 나자체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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