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는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기 위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쿨 앤 드라이', 건조하고 차가운 장소에서는 유기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
돌에 부딪친 물이 크고 작은 포말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눈을 감고 돌아다니가다 벽을 만나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처럼 앎은 경계와 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표지는 감정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이며 가능성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데, 이건 너무도 당연하다.
감정은 정치의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유도 사랑도 없다는 것, 따라서 삶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e/motion)의 어원은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 나가는 것(moving out of oneself) 즉, 여행이다.
근대의 발명품 이성(理性)이 정적이고 위계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움직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감정의 부재, '쿨'함은 지배 규범과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응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든 느낌, 모든 즐거움, 모든 열정, 모든 생각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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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많이 상처받는 사람이 되자.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대화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꿈꿀 수 있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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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오랜만에 들러요.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요? 이 글 많이 공감되어 내 블로그로 복사해 갑니다. 상처라는 것...글처럼 된다면야 좋겠지만...좀 더 두고봐야겠네요.
오~ 정말 반가워요. 요즘 회사와 공부 병행은 잘 되시는지요? 저는 작년보다는 훨씬 건강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올해와작년, 무엇이 변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음..크게 변한 건 없고 회사 내에서 팀을 옮긴 지 4개월 정도 되어 좀 무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학교는 계획에 따라 휴학했다는 것... 그리고 연애는 고백 후 잘못된 길로 접어 들었다가 어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수정을 꾀하려는데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 뭐 요 정도..가 내 근황입니다.
그렇군요. 시간이 허락하면 언제 술한잔 하고 싶네요.
나야 요즘 공부는 하지 않아 무척이나 한가하답니다. 시험기간으로 보이는데 아무때나 괜찮아요. 이번 토요일과 다음주 화,수,토,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간이 텅 빈 상태구요. 술한잔하게 되면 내 연애상담 해주느라 진이 빠질지도 모르는데 감당이 된다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