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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봉으론 안된다_경향신문7.1 시론_강수돌

[시론]진압봉으론 안된다


1987년의 6·29와 2008년의 6·29는 너무 달랐다. 87년의 6·29는 그 본질은 어떻건 들끓던 시민항쟁을 잠재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6·29는 치솟는 시민저항에 '염장을 지르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질문은, 과연 1980년대 식 진압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을 구하'겠는가(경세제민), 하는 것이다. 벌써 수십 명이 구속되고 수백 명이 몸을 다쳤다. 그리고 수백 만, 아니 수천 만 명이 마음을 다쳤다.

 

'뼈저린 반성' 이란게 강경진압

 

이명박 정부의 실용적 존재 이유는 '경제 살리기'였다. 오죽하면 '시장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에 대부분 시장 사람들이 다 지지표를 던졌겠는가? 그리고 한반도 대운하, 광우병 쇠고기, 공기업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논란 속에 넉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오일 쇼크' 악몽에 물가 급등, 고환율,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증시,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하다.

 

'인적 쇄신'이라는 반복 구호 뒤에 '군기 쇄신'만 보인다. 경제를 제대로 살리려는 인적 쇄신은 별로 없다. 그렇게도 강조하던 인적자원은 모두 어디 갔나? 전투경찰과 촛불시민의 대결 속에 병드는 것은 풀뿌리 민중이다. 지휘부의 높으신 어른들은 '뒷산에 올라 갖은 생각만' 할 뿐이다. '뼈저린' 반성 뒤에 나온 강경 진압이 평화로이 저항하던 젊은 여성의 '뼈만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과연 '경세제민'이 가능할까?

 

'개념'이 없으면 사람이 제대로 못 살듯, 정부도 '개념'이 없으면 오래 못 간다. 이번 기회에 '개념'을 분명히 하자. 홍기빈 박사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엔 수천 년 전에 이미 사람들은 돈벌이 경제와 살림살이 경제를 확실히 구분했다 한다. 오늘날 우리가 잘 쓰는 '경제'란 말은 돈벌이 경제다. 원래 '이코노미'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과정, 즉 살림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크레마티스틱' 즉 고리대금업과 같은 돈 불리기 기술과 '이코노미' 즉 살림살이를 구분했다. 이게 근대 자본주의 이후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경멸하던 돈벌이 기술에 '이코노미'라는 포장지를 씌운 거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포장' 기술이 핵심인가?

 

대부분의 백성이 원하는 '재협상'대신 '추가협상'을 통해 '포장'을 다시 하면 광우병 쇠고기 공포는 해소되는가? 촛불소녀로부터 시작되어 유모차 아줌마, 농민, 넥타이부대, 대학생, 노동자들로 번져나가는 촛불 저항에 군홧발과 진압봉, 물대포와 체포령으로 강경 대응하면 과연 모두 저항을 포기하고 굴복할까? 그리고 밥상에서 3배나 값싼 쇠고기를 먹는다고 온 가족이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나아가, 미국 쇠고기가 수천 톤씩 들어오는 대신 한국 자동차가 수만 대씩 팔린다면 경제가 왈칵 살아나고 백성들 살림살이가 신바람 날까?

 

개념부터 바꿔야 '경세제민'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진압봉을 통해서 돈벌이 경제는 일부 살릴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의 살림살이는 살릴 수 없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백성들 살림살이 경제를 '희생'시켜 돈벌이 경제를 살려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 저항과 불복종이 거세기에 합법적으로 진압할 공권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존재 이유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경세제민' 시절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산다.

 

이제부터라도 살림살이 경제를 되살려야 한다. 온 대지에 생명농업을 살리고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자. 돈벌이보다 살림살이를 앞세우자. 강대국에 빌붙는 것보다 자립심을 키우자. 두레와 품앗이를 창조적으로 복원하고 아이들의 끼를 살리자. 나 혼자 잘 사는 것보다 더불어 살아보자. 이것이 대안이다. 저항의 촛불과 대안의 촛불은 하나다.

 

< 강수돌|고려대 교수·조치원 마을 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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