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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괴담

학원 첫 개강, 샘이 날 보자마자

"어머, 고등학생?" 이런다.

"아니요, 나이 먹을 만치 먹었어요."

자타가 인정하는 동안인 나는 이때문에 참, 사는게 괴롭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싸움이 일어나면 "민증까, 몇살이야?"라고 말하며

나이가 자연스런 서열이 되는 이 곳에서 살아가는게 참 괴롭다.

나이어리고, 체구작고, 키도 작고 더구나 여성인 나는 그야말로 이곳에서

한주먹이면 끝날 상대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매순간 빠짝긴장하며

쫑긋 레이다를 세워 눈에 힘을 줘도 으레 당하기 일쑤다.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번번이 "머리에 피도 안머른 계집애."로

종결이 나 맥이 빠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때때로 폭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아니, 개개인의 행동이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데 거기서 대체 왜 나이와 성을

들먹거리는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토요일 밤 지하철에서도 참 비참했다.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간신히 한 자리에 앉게 된 나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옆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술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 뭐 사람이니까 당연히 숨도 쉬고 술도 마시지, 거기까지는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다리가 닿아 조금씩 내가 다리를 좁히자 그 이상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닌가?

이쯤되면 난 이게 성희롱인지 아닌지 정말 헷갈리다.

의도를 품고 여름철 얇은 옷에 숨겨진 살결을 느끼려는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이기적인 행동인지 판단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어쨌든 사람도 많고 밤도 깊고 피곤도 하고, 그래서 그냥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성희롱인지 아닌지는 뒤로 하더라도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리를 차지하는게 너무 한다 싶어 한 마디를 꺼냈다.

 “아저씨, 자리가 너무 좁은데요. 옆으로 좀 가주실래요?.”

 “뭐?”

 “다리 좀 옆으로 치워주세요, 저 더 이상 옆으로 갈 데가 없어요. 안 보이세요?”

 “거 참, 충분히 앉아서 가는데 뭘 좁다고 그래?”

 “지금 앉아서는 가는데요, 충분히 앉아서 가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저씨거든요.

  “아, 학생이 뭘 몰라서 그런가 본데 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가야 건강이 안상하거든.”

뭔 소리래? 아니 그럼 남자는 다리를 벌리고 가야 건강하고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가야 건강하단 건가? 말도 안 되는 그 사람의 말에 정말이지 기도 안 찼다.

아니 그리고 이 사람 왜 보자마자 반말 하는거지?

 “아저씨 건강이 어떤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요, 지금 아저씨가 필요이상으로 제 자리를

 넘어온 것  확실히 알겠거든요. 충분히 좁힐 수 있는데 왜 그러세요?”

그 후 몇 마디가 더 오고가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던지 그 사람은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며

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몰라? 모르면 배워. 남자들은 여기 가운데 다리가 생명이라고 알았어? 알았냐고!

  근데 니가 뭔가 다리를 다물라 말라고 명령이야 명령이. 어?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서 함부러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내가 내 딸이 이러고 다니면 귀싸대기를 날리지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GAME OVER, GAME OVER” 라는 환청이 윙윙 들려왔다.

그래 말이 통할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이런 행동 하지도 않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이 아저씨 점점 더 거친 말을 내뱉으면 삿대질까지 해댄다. 

 

 

그래서 그 날 싸움의 결과가 어땠냐고?

마침 열리는 지하철 문이 내 눈에 보이고 뻘겋게 흥분한 채 점점 내쪽으로 다가오는

아저씨의 거대한 몸이 보였다.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그 아저씨를 확 밀어

넘어뜨리고는 그냥 냅다 지하철 밖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숨이 턱에 차도록 미친 듯이

뛰어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왔다. 한 마디로 처참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도망치는 내 뒷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정답이었을까?

앞으로 또 이런일이 생기면 그냥 참아야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날 나는 길거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너무도 억울해서 조금 울었다.

필요이상의 자리를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서 까지 차지하려는 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이 성희롱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나로서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날 내가 참

비참했다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 여성이라는 것, 힘이 없다는 것은

때때로 필요이상으로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다 주곤 한다.

아, 정말 그때 나는 어떤 행동을 했어야 하는 걸까?

 

 

그냥 모른 척 일어나야 했던 건지,  그 자리에서 소리치며 싸워야 했던 건지

난 여전히 알 수 가 없다. 결국 도망쳤던 나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지켜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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