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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거리를 반역의 거리로: 뱅씨(Banksy)

살벌한 군사 문화의 시절을 겪은 우리는 도시 거리를 오직 두 잣대로 재는데 익숙하다. 정화된 거리와 말쑥한 거리. 정치 군인들의 정화된 거리가 단정, 질서확립, 처벌, 훈육, 통금, 단속, 금지, 일렬종대 등을 떠올리게 하는 데 반해, 문민의 말쑥한 거리는 정돈, 청결, 맞춤, 효율, 박제, 안정 등을 연상케 한다. 이도 저도 인간이 살만한 거리의 풍경이 아니다. 우리에겐 정화와 정돈이 아닌 반역과 저항의 거리 풍경이 흔하지 않다. 고작해야 80년대 대학내 캠퍼스 벽과 바닥 곳곳에 그려졌던 민중 그림들이 전부다. 그도 군사 문화의 억압을 피해 제한된 공간 내에 자리를 폈던 정도다. 태초 인간들이 동굴 벽에 낙서를 즐겨 새겼던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한참 표현의 욕망을 억누르고 제도권의 거리 풍경에 몸을 맡겨온 셈이다. 벽낙서, 흔히 그라피티(graffiti)의 역사는 인류 태초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 중 스텐실 그라피티는 정치 예술과 인연을 맺으며, 그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2차 대전 중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선전용 벽보로 길거리에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스텐실 그라피티를 애용했다. 이와 달리 70년대 남미에선 멕시코인들이 스텐실 그라피티를 저항 매체로 활용했고, 80년대 초에는 펑크 문화와 결합되면서 북미, 특히 뉴욕에선 일약 그라피티가 하위문화의 상징처럼 자리잡는다. 그라피티 예술은 권력의 죽은 거리를 반역이 숨쉬는 거리로 바꾼다. 방식은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의 달려드는 가속을 이용해 자신의 몸 위로 그 덩치를 던져 넘기듯, 번뜻하게 차려진 자본의 상징물에 끝마무리로 저항을 각인한다. 정치 권력과 자본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건물 하나 하나가 저항의 캔버스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라피티는 정치 소외의 배설로가 아니다. 오히려 크고 작은 권력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자기 표현이다. 일반 그라피티가 한 장소에 붙박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손쉽게 찍어낼 수 있는 스텐실의 복제 가능성과 그 강렬한 이미지가 이에 배가 효과를 발휘한다. 영국 출신의 로빈 뱅씨(Robin Banksy)는 바로 스텐실 그라피티를 통해 권력을 조롱하고 뒤튼다. 정치적 성격의 그라피티를 제작해 잘 알려진 쉐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가 가공할 권력의 힘을 심각하게 경고한다면, 뱅씨는 일상 권력의 편견과 독단을 냉소적으로 비꼰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라피티를 시작했다. 74년생인 뱅씨가 대중의 주목을 끌었던 계기는 런던 동물원에 그린 벽화가 시발이다. 그의 그라피티는 철창 속의 동물들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구경꾼들에 혹사당하는 동물들의 애환과 창살 안의 지루함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뱅씨의 작업은 80년대 말 이후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화염병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 청년, 기관총을 든 모나리자, 프로펠러 아래 빨간 리본을 달고 질주하는 아파치 헬리콥터, 한쪽에 총을 세워놓고 조심조심 쉬야를 하는 영국 황실 친위대원, 게이 경찰들간의 뜨거운 키스, 벌거벗은 아프리카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미키 마우스와 맥도널드 가이 등등, 그의 그라피티에는 현실 속에 도사린 정치 권력, 엄숙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기와 저항이 묻어난다. 2001년 뱅씨는 멕시코 농민운동군인 싸빠띠스타와의 연대의 일환으로 치아빠스를 방문해, 그 곳에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남기고 왔다. 이처럼 정치적 자의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것이, 그의 그라피티에 날이 선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전세계 주요 미술관들이 그의 그라피티를 실내로 끌어들여 대대적인 전시회를 열 정도니, 단지 그라피티가 길거리 낙오자들이나 부랑자들의 반사회적 일탈이나 반항이 아닌 것만은 입증된 셈이다. 뱅씨는 그라피티가 예술가가 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 얘기한다. 정규 예술 교육이나 돈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 그라피티다. 이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그라피티의 대중화를 독려한다. 권력의 이미지로 가득한 거리 곳곳을 대중의 캔퍼스로 바꾸는 일은,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요 누구든 페인트나 스프레이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면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 인터넷 문화의 경전으로 알려진 <와이어드> 잡지에 뱅씨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를 어떻게 봐야할 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스텐실 그라피티의 예술적 탁월함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영감을 안겨줬던가, 아니면 그의 저항 예술이 결국 자본의 상품 구도 내에서 수용 가능한 일탈 정도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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