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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8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한, 이유있는 미래 풍경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인간에게 언제나 과학기술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극복하는 희망이자 마취제와 같았다.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 그 굴뚝 공장에서 쉴틈없이 나오는 상품더미,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에 인류는 경이의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상품이 넘쳐날수록, 인류의 진보와 고른 분배가 위로부터 슬슬 아래 밑바닥까지 퍼져나갈 줄 믿었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학기술에 탄력을 받아 이룬 생산력의 진보가 현실의 불균형 문제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 골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20세기 전반 밀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점점 깊어만가는 계층간 모순의 골 때문에 들끓었다. 하지만 당시의 혁명들조차 탐욕의 인간을 미워할지언정 기술에 대한 신뢰는 거두질 못했다. 마르크스 할아버지까지도 과학기술로부터 얻은 생산력이 찬란한 사회주의를 위한 토대라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흘러, 이제 우리는 기술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바야흐로 유비쿼터스 시대로 가고 있다. 현실의 불균형과 모순은 그대로 떠안은 채, 어디든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실기간으로 접속되는 미래 모습에 우린 또 한번 열광한다. 한때 과학기술이 마련한 생산력의 마술에 흥분했다면, 이젠 언제 어디서든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매 시대마다 열광은 달랐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과학기술은 그저 좋은 것이요, 쓰임새에 따라 좋기도 하고 심하게 나빠지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 믿음은 기술의 산업화가 급진전된 이래 아직까지 굳건하다. 하지만 현실이 삭제된 과학기술의 동경은 근거없는 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호는 그 과학기술의 경이에 마취된 시대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영화들을 몇 편 소개할까 한다.

 

물밑 잠수함을 통해 본 미래

과학 모험소설의 대가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역시 쥘 베른 (Jules Verne)이다.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1916)>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베른의 <해저2만리>가 영화화되었지만, 내가 유독 이 때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베른조차 소설 속에서 묘사하지 않았던 선장 네모의 출생사가 담겨있고, 과학에 대한 당시의 시대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네모 선장의 출생 배경은 이렇다. 지금은 세상을 등지고 바다에 떠돌며 불의와 싸우는 독특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네모 선장은 원래 다카르(Daakar)라는 이름의 인도 왕자였다. 찰스 덴버(Charles Denver)라는 영국 무역상의 음해로, 영국 식민군에 반해 이들을 추출하려는 모반을 꾸민다하여 급기야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식민 군인들과 인도인들의 충돌 도중 덴버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딸까지 잃고 왕국은 폐허로 변한다. 결국 네모는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분노를 삭이며 식민주의자들과 싸우는 인물로 설정된다. 세월이 흘러 '신비의 섬'에 홀로 사는 자연인이 바로 네모의 딸로 판명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불쌍한 부녀가 극적으로 상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모는 그 충격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대부분이 <해저 2만리>를 연상할 때 떠올리는 장면은 '괴물문어'와 인간과의 싸움 장면이다. 허나 이 영화는 사건의 중심에 '괴물문어'의 습격을 막기 위한 탐사선의 모험담을 늘어놓기보단, 선장 네모를 통해 당시 식민주의의 거친 시대 상황을 표현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대한 동경과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데에 이르러서는 많이 과장되어 있다.

선장 네모는 미국 정부의 탐사선, '아브라함 링컨호'에 탑승한 과학자 일행을 자신의 잠수함 노틸러스 (nautilus)'에 감금한 채, 일행에게 과학기술의 숭고함을 성토한. 현실 세계의 인간들은 선장 네모의 시선으로 미래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체험한다. 그 당시 물밑을 가는 배가 존재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노틸러스 그 자체는 기술의 경이였고, 해저 밑바닥에서 산호초 등 그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고강도 '신비의 유리 창문' (선장 네모는 그리 불렀다) 또한 그저 상상의 기술에 가까웠다. 우주복과 같은 해저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을 거니는 것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실제 방수 카메라 장치가 없던 시절에 찍었던 이 영화에서 바닷속 촬영은, 윌리암슨 형제가 수중유리 박스에 카메라를 대고 비춰진 전경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어쨌거나, 새로운 해저 세계의 경험은 기술에 의해 인도된 신세계임에 틀림없었다. 선장 네모는 "신조차 우리에게 보여주길 꺼렸던 것들을 (인간의 기술을 통해) 보여준다"며 인간 과학의 성과에 대해 침을 튀기며 극찬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당시 식민주의 현실의 권력 관계와 인간의 탐욕 등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기술에 인도된  물밑 신세계를 통해 인간이 바라는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찬탄하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시선을 통해 본 미래

미래 공상과학 소설의 대가하면 우린 누구보다 웰스 (H. G. Wells)를 떠올린다. 그가 소설을 쓰고, 영화의 각본을 맡은 영국 영화, <다가올 세상 Things to Come (1936)>은 과학기술 예찬론의 극단에 서있다. 1940년 크리스마스날 한 가상의 도시, '에브리타운 (Everytown)'이란 곳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은 30여년간 지속되며 인간의 문명을 잿더미로 만든다. 게다가 전쟁 중 창궐한 돌림병 (the wandering sickness)은 수많은 사람들을 앗아간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지역 자치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주위 자치구를 정벌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과학자들은 이라크의 바스라를 거점으로 지금의 UN 비슷하게 전세계의 무정부 상태를 원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세계연맹 (Wings over the World)'이란 조직을 구축한다. 이들은 미래 기술로 중무장하고 자신의 이름 아래 세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자치구들을 진압한다. 주로 진압의 기술은 '평화의 가스 (the Gas of Peace)'라는 것으로, 미래형 전투기들을 통해 자치구에 가스탄을 살포해 도시의 시민들을 잠들게 한 후 이들 지역을 포획하는 방식이다.

시대가 흘러 2036년이 되면서 인류는 지하에 거대한 미래 도시 문명을 건설한다. 아테네 아고라 광장을 연상시키는 건축과 그 시대의 복장들을 하고 나타난 미래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만끽한다. 그 와중에 인간의 끊임없는 기술발전의 욕망에 넌더리를 내는 한 선동가에 의해 기술파괴의 러다이트 (Luddite) 봉기가 일어난다. 하지만 과학의 무궁한 기대치를 갖고 있는 지도자는 '스페이스 건' (space gun)이라는 대포 장치에 그의 딸을 우주선에 실어 달나라에 쏘아보낸다. 영화는 성난 군중들이 난입해 들어옴과 동시에 그 지도자가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개척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면서 장렬히 끝을 맺는다.

영화 <다가올 세상> 2차 대전의 전운을 감지한 덕에 그 빛을 발했다. 실제 1939년을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시점으로 본다면 1940년의 전쟁 상황 설정은 상당히 적중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 문명의 말살이라는 메시지가 유효했지만, 영화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과학 예찬의 경구는 지겨울 정도다. 전쟁 이후 생존한 과학자들에 의해 꾸려지는 미래 세계라는 설정은, 사회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평화의 역할자로 과학자 엘리트 집단을 다룬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시각이다. 게다가 과학의 미래를 불신하는 대중선동가와 이를 따르는 대중을 철저히 과학에 무지하고 걸리적거리는 부류로 치부한다.

        

가공의 기업 도시를 통해 본 미래

어쨌든 <다가올 세상>에서 큰 사회적 화두가 전쟁의 참혹상이었다면, 시아 혁명의 파고가 휩쓸고 간 시대에 토픽은 단연 사회에 뿌리깊은 계급 불평등의 문제일 것이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는 공상의 미래 기업 도시국가에서 계급 불신의 골을 다룬다. 랑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급간 화해와 공존이다. 영화 시작을 알리는 경구용 자막에도 "머리와 손의 중개자는 가슴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서 머리란 지식노동자 혹은 경영자요, 손은 공장 노동자를 지칭한다. 가슴은 노사간 '신뢰'(trust)에 해당한다. 결국 영화는 계급 혁명으로 한쪽을 멸하는 방식이 아닌, 노사 화합의 믿을만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당의성에 집착한다.

어설프게 계급 화해를 부르짖는 내용에 눈살이 찌푸려지긴 해도, 랑이 그리는 메트로폴리스의 미래 도시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풍부하다. 공중을 나는 비행선들, 고층빌딩 숲을 지나는 고가도로들, 미래의 고층 도시들, 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가는 기계 장치들, 이 모두가 미래의 미장센(배경소품)들로 선택된다. 미래에도 노동자들의 땀을 쥐어짜는 시스템은 더욱 강화한다. 모든 시계는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인 10시간으로 고정되어있고, 노동자 군상들은 기계처럼 좀비처럼 혹은 군인처럼 어두운 작업복을 입고 작업 교대를 위해 묵묵히 발맞춰 공장으로 걸어간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곳은 빛이 들지 않는 깊은 지하에 위치하며, 일이 파하면 다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거처로 내려간다. 가진 자들은 지상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조 프레데르센(Joh Fredersen)과 그의 아들 프레더(Freder) '하이 타워'에 살면서 도시를 지배한다.

프레더는 우연히 노동자 마리아를 첫눈에 보고 사랑하게 되나, 미친 과학자 로트왕(Rotwang)의 농간으로 붙잡혀 그녀는 '퓨쳐라'(futura)라 불리는 사이보그에 정념을 심어넣는데 이용된다. 이후 마리아를 통해 프레더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강조할 바는 랑의 미래 기술 묘사다. 비록 결론에서 자본가인 프레데르센와 노동자들의 리더인 그로트 (Grot)가 계급 화해를 하는 예고된 식상함을 보여줬지만, 이 영화는 기술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데 있어서만큼은 꽤 사실적이었다. 첨단 기술아래 허덕거리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인조인간 퓨처라의 부정적 묘사는, 기술이 중립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각본에 의해 생성됨을 새삼 깨닫게 한다. 계급간 모순을 감상으로 봉합하려는 각본이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긴 하나 미래 과학기술에 대한 깊은 회의를 담은 점은 남다르다. 랑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기술관에 큰 시사점을 준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품어 안고 간다는 사실 말이다. 뒤집으면, 모순의 해결없이 진보는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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