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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10

 

감시사회의 섬찟한 미래가 우리의 진짜배기 현실로 되돌아온다면...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챨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를 보면, 한 굴뚝 공장에서 경영주가 노동자를 제어하기 위해 쓰이는 갖가지 기법들을 동원한다. 컨베이어벨트, 자동 식사장치, 노동 분업 등은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출입 펀치 카드 리더기와 폐쇄회로 TV는 소위 '농땡이'치는 자들을 파악하는데 이용된다. 영화에서 채플린이 쉬야하러 화장실에 가서 몰래 담배를 꼬실르다 거기에 설치된 공장주의 폐쇄회로를 통해 뒷덜미를 잡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감시는 이렇듯 보이지않는 은밀한 곳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난다. 감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부터 생성된다. <모던 타임즈>에서 감시는 공장 안이란 공간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뽑아내려는 자의 권력과 전제적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감시는 요즘엔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소비 행태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우리가 아는 감시는 무엇보다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크게 저질러졌다. 사회의 불순분자 혹은 반체제 인사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 도청, 감청, 위치추적, 미행 등이 그것이었다. 소위 유비쿼터스 사회로 오면, 감시의 행태는 좀 더 숨고 식별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감시자는 언제나 감시 행위를 시민들의 효율적 관리라는 명분으로 감싼다. 그래서 효율성의 논리 밑에 가려진 감시의 그늘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렵다. 게다 첨단 기술의 발전은 그 은밀함을 더욱더 강화한다. 작아지고 이동 가능한,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유무선 감시가 활개친다.  

 

테크노-관료사회의 미래

어느 누구보다 감시사회의 미래를 잘 표현했던 작가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꼽을수 있다. 그는 SF소설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되는데, 이는 상상에 의존한 기존의 장르 표현과 달리 있음직한 현실에 기반해 서사를 풀어나가고, 정치적으로 경직된 관료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형상화하고, 그 결말 또한 비관적이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르 특성에 보다 많은 다양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오웰의 대표작 <1984>를 영화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956영국에서 이뤄졌다. 가상의 핵폭탄이 터져 세계는 불과 몇 개의 대륙만이 남고 그 중 '오세아니아'라 불리는 대륙은 '빅브라더'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 영토 안에서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이 빅브라더의 통치권자 아래 감시된다. 눈깔처럼 깜빡거리는 '텔레바이저들'(televisors)이 그의 수족이 되어 모든 곳을 지켜본다. 한편 주인공 윈스턴(Winston) '진실부'(The Ministry of Truth)라는 곳에서 과거 사실과 역사를 현재에 맞게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일을 맡고 있다. '사상관리 경찰국'(the Thought Police)에서 일하는 쥴리아(Julia)는 언제부터인가 윈스턴을 사랑하고 그에게 마음을 전하려 한다. 이들 둘은 깊은 관계를 지니지만, '빅브라더' 통치 아래서는 적에 대한 증오 이외에 남녀간 사랑의 감정은 금지돼 있다. 밀정에 의해 그들의 감정이 발각된 윈스톤과 쥴리아는 결국 취조실에 잡혀가 '빅브라더' 사회에 금지된 불순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세뇌를 받고 빅브라더의 힘에 굴복한다. 영화는 비관적으로 끝을 맺는다. 윈스턴은 한 때 그의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쥴리아를 외면한 채, "만수무강 하십시오, 빅브라더!"를 미친 듯 소리치며 거리를 뛰쳐나간다.     

 

사랑과 자의식은 권력의 적

프랑스 뉴시네마의 기수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가 만든 영화, <알파빌 Alphaville (1965)>은 또 다른 감시사회의 비전을 펼친다. 이 영화는 빅브라더 컴퓨터와 이를 만든 과학자에 지배당한 한 사회를 음울하게 보여준다. 영화 촬영 거의 대부분이 밤에 이뤄진 이 영화는 침침한 르와르 장르에 전통의 SF영화를 뒤섞고 있다. 주인공 이반 존슨(Ivan Johnson) --- 그의 본명은 레미 꾸숑(Lemmy Caution)으로 후에 밝혀진다 --- 외계(the Outlands)에서 알파빌이란 도시로 보내진 비밀 첩보원이다. 그의 임무는 알파빌에 건너가 연락이 끊긴 자신의 동료들을 찾고,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동료의 행방을 찾다 그는 알파빌 시민들이 폰브론(Vonbraun) 교수와 그의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60'에 의해 감시받고 세뇌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이반은 폰브론의 딸 나따샤(Natasha)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알파빌이 사랑이나 인간의 자의식 등 비논리적 감상을 퍼뜨리는 자들은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프로그래밍과 기억국'이라는 곳에선 매일같이 단어의 의미를 컴퓨터 논리에 맞춰 새로 만들고 수정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을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는 사회임을 깨닫는다. 예컨대, 알파빌 사람들은 컴퓨터 논리에 따라 '왜냐하면'을 표현하지만, '?'란 단어와 그 물음을 기억에서 지우고 산다. 권력에 대한 의문 혹은 감정에 충실한 언어들은 철저히 그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그럼에도 나따샤는 이반을 통해 그 잃어버린 사랑과 의식이란 단어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알파60으로부터 외계 첩보원임을 발각당한 이반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결국 그는 폰브론 교수를 총으로 살해하고 나따샤와 함께 그 마을로부터 탈출한다. 자동차로 떠나면서, 나따샤는 그녀가 힘겹게 떠올린 단어 "사랑해"를 이반에게 속삭인다.    

           

이름대신 일련번호로 호출되는 사회

조지 루카스(Geroge Lucas) 감독의 초기작 (1971)>은 감시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그리는데 그 절정에 서 있다. 그가 그린 감시사회의 인간 모두는 머리를 밀고 하얀 환자복같은 옷들을 입고 다니며 이름 대신 일련번호로 호명되어 살아가는 몰개성의 생명체다. 거대 정신병동을 연상시키는 이 지하도시에서 모든 이들은 권력자에 의해 투여되는 약물로 통제된다. 이 약물은 개성을 말살하고 사랑과 섹스 등 인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쓰인다. 또한 이 사회에선 인간들을 감시하고 실제 폭력을 써서 통제하는데 사이보그 형태의 '안드로이드' 경찰들이 동원된다. 어느날 여주인공 LUH3417은 그 약물의 중독성을 깨닫고 은밀히 자신의 약을 줄이고, 함께 룸메이트로 기거하는 남자주인공 THX1138의 약 또한 바꿔치기 한다. 약물 중독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이 둘은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급기야 사회로부터 금지된 섹스 행위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권력자의 레이더망에 잡혀, 결국 이들은 출구가 보이지않는 시뮬레이션의 백색 방에 각각 감금된다. 후에 THX1138은 자신이 사랑하는 LUH3417이 이미 권력에 의해 소생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인간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체념한 채, 결국 바깥 세계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안드로이드 경찰들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하 긴 터널을 지나 이제껏 보지못했던 태양으로 이글거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자유의 땅에 당도한다.          

        

미래 감시사회의 모습

예서 짧게 소개된 세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지만 다같이 감시사회의 공통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어느 정도 과장은 있어도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사람들은 이름 대신 사회가 부여한 일련번호로 호명된다. 일련번호는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컴퓨터의 언어고, 통제와 분류 목적으로 이용된다. 한국 사회의 문제많은 주민번호도 그에 상당부분 상응한다. 휴대폰 개통, 교통카드, 인터넷 실명제 등등에서, 우리가 나면서 지니는 주민번호는 스스로를 호명하는 족쇄로 쓰인다.

        다음으로 인간 감정의 통제다. 특히 영화들에서 사랑은 금지된 덕목이다. 세 영화 모두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이 권력과 반목을 이룬다. <1984>에서는 사랑대신 증오를 키우고, <알파빌>에선 아예 사랑이란 말을 사전에서 없애버렸고, 에선 권력이 사랑의 감정을 거세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한다. 섹스 행위도 권력이 허하는 선에서만 이뤄진다. 오직 차가운 과학의 논리가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다시 우리 현실을 보자. 우리는 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 정책 수립시에 효율성의 논리를 외친다. 게서 소외되고 침묵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시민의 개개인 감성을 죽이는 기계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감성의 억압 행위는 오늘날 관료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적 통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언제 어디서든 노출된 개인의 사생활이다. 에서 LUH THX, 그리고 <1984>에서 윈스톤과 줄리아의 은밀한 사랑은 권력자들의 시선에 완벽히 노출돼 있다. <1984>에선 이웃에 의한 감시마저 가세한다. <알파빌>에선 '거주자 통제국' (Residents Control)이란 곳에 설치된 알파60이 전 도시의 시민들을 세뇌하고 지켜본다. 홀로된 곳에서 움치고 뛸 수 있는 자유가 완벽히 차단된 최악의 사회들이다. 이제 우리는 유비쿼터스 사회에 열광한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된 사회의 위험성은 모든 곳의 감시 가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 공적 공간에 은밀히 설치된 폐쇄회로 TV, 몰래카메라, 휴대폰 카메라, 인터넷 쿠키, 모바일 친구찾기 서비스, 지리정보위치 시스템(GPS) 등 편의와 효율성에 받아들인 기술이 우리 스스로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이들 영화는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기 이전에,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되돌아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않으면 영화 속 섬찟한 상상이 우리의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종도 덧붙인다.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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