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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03
    2004. 2. 올랑의 사이보그 성형수술 극장
    두더지-1
  2. 2006/01/03
    2004.1.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두더지-1

2004. 2. 올랑의 사이보그 성형수술 극장

올랑의 사이보그 성형수술 극장 자신의 외모가 내면적 본질에 비해 턱없이 소외되었다는 강박에 이르면 정신의학적으로 일부는 ‘신체기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에 걸린 것으로 의심해야 한다. 성형이 하고 싶어 얼굴이 근질거리거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잘난 여성의 얼굴 거죽을 벗겨내어 자신의 얼굴에 이불 깁듯이 기워 넣고 싶다거나, 진공 청소기로 몸의 과장된 일부를 쭈욱 흡입시켜버리고 싶은 지경에 이르면 장애가 중증으로 돌변한다. 유명 여성들의 가장 잘난 부분을 자신의 얼굴에 꼴라쥬로 이어 성형한다면, 이건 완전 ‘울트라 엽기짱’ 수준일까? 실제로 올랑(Orlan)이란 프랑스의 한 멀티미디어 행위예술가는 ‘최고의 걸작: 성녀 올랑의 환생’이란 기획으로 8번 이상의 성형수술 극장을 선보였다. 모나리자의 이마, 프시케의 눈, 유로파의 입, 다이애나의 코, 비너스의 뺨 등 유명 그림들에 나오는 여성들의 이목구비를 디지털 이미지로 조합한 ‘얼굴본’을 가지고 그녀는 실제 성형 작업에 임했다. 올랑은 80년대부터 성형수술 과정을 통해 소위 ‘카날 아트(carnal art)’를 꾸준히 소개한 국제적 인물이다. 그녀를 첫 대면하는 사람은 ‘카날’과 ‘카니발’의 경계를 구분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필자 스스로도 93년 뉴욕에서 행해진 그녀의 수술극장 퍼포먼스 비디오를 보면서 구토를 일으켰고, 한 등발 좋은 여성이 기절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올랑은 그저 포스트모던한 ‘엽기녀’ 혹은 중증의 성형 수술에 시달리는 여자에 불과할까? 우리에게 정체를 구성하는 외모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는 의도한대로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외모의 시간적 변화 또한 자신에게서 ‘타자’의 영역에 속해 있다. 자신으로부터 외모가 소외되는 현상은 ‘바깥’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더욱 더 강화된다. 여성성, 물신성 등의 가치는 바로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이며, 신체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것’ 혹은 ‘의복’의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올랑에게 신체는 오직 사회적으로만 구성된다. 그녀의 수술극장은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규정된 여성 외모의 미적 규준을 깨기 위해 그녀 스스로 극장의 감독이 되어 벌이는 예술적 퍼포먼스다. 환자, 시술자, 참관인들은 파코 라반에서 디자인된 오트 쿠튀르 수술복을 입는다. 수술실은 소품용으로 준비된 십자가상, 모조 과일, 수술극장의 큼지막한 크레딧 벽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녀는 시술 동안 정신분석과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위성을 통해 자신의 관객들과 전화를 나눈다. 그녀의 이러한 엽기적이고 키치적인 시술에는 다중(multiple) 정체성에 대한 예술적 실험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외모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현대 여성들이 지닌 욕망의 광기를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90년대말 이후 그녀의 시술은 멀티미디어 작업으로 확대된다. 포토샵 등의 작업을 통해 그녀의 얼굴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위성이나 이메일 팩스 등으로 작업 내용을 전송하는 전시 기획도 갖고 있다. 애초 그녀의 얼굴이 수정, 제거, 덧붙이기가 가능한 ‘소프트웨어’와 같다고 언급했을 때, 이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특히 멕시코 여행을 통해 얻은 1999년 디지털 작업 ‘자아-잡종들(self-hybridations)’은 얼굴 이미지의 사이보그적 변형성을 극대화시킨 퍼포먼스로 기록된다. 올랑은 고정화되고 닫혀있는 전체로서의 신체 개념을 수정과 변형의 대상으로 역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신체 재구성은 궁극적으로 사이보그 정체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일찍이 ‘사이보그 선언문’을 썼던 도너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를 일종의 ‘해체되고 재구성된 후기모던의 자아’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권력에 의해 타자화 된 신체의 해체와 재구성을 올랑은 수술극장을 통해 현실화하고 있다. 물론 그녀에게 새로운 디지털 기술은 신체를 재가공·재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수술에 의한 변형과 디지털에 의한 신체의 재디자인은 최종적으로 신체 소멸을 위한 기획이다. 서구의 기술 수단을 가지고 서구의 미적 기준을 깨려 한다. 하지만, 매일 밤마다 그녀를 괴롭히는 수술 후유증은 여전히 큰 고통으로 남는다. 포스트모던한 다중의 정체성에도, 그녀에게 끈질기게 달려드는 그 아픔은 절대 지우지 못할 ‘단 하나’ 남는 ‘모던’한 실체인 셈이다. 올랑의 홈페이지 http://www.orl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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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고 인간 감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시도는 먼 과거부터 존재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실험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을 우리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불렀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이 182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관찰하면서 붙인 이 말은, 줄곧 사회에 복무하는 예술의 해방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였다. 생시몽의 개념에 부합하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이제부터 ‘사이방가르드(Cyvantgarde)’라는 개념을 꿔다 쓰겠다. 필자가 보는 사이방가르드의 덕목은 우선, 자유로운 실험 정신이다. 다차원적인 미디어 실험은 디지털 예술에 오면 더욱 빛이 난다. 둘째로 예술의 자기 함몰적이고 주관적인 자세에 대한 극복이다. 방법에 있어선 집단적 창작이 수시로 모색될 수 있겠고, 관점에 있어선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는 예술이 발굴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정신이다.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숨어든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 저항이 예술가의 당연한 덕목이 돼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이러한 전제 조건을 갖춘 아방가르드로 단연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앙상블이 다년간에 실험하고 정리한 디지털 네트워크 공간에서의 저항 이론은 새로운 디지털 실천 방식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들이 지닌 기술 현실 비판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예술적 재능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 맥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유용할 뿐이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이 펼친 중요한 퍼포먼스로는 우선 에이즈 위기에 대한 미국 정책을 비판하면서 플로리다에서 이루어졌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뉴욕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 영국 쉐필드에서 벌어진 ‘실업자들을 위한 국제 끽연 캠페인’에서의 거리 시위, 유전공학의 위험성을 알리는 ‘신(新)이브의 컬트’라는 제목의 유럽 순회 공연 등이 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같은 국제적 디지털 예술가들의 각종 모임에서도 시연, 강연 등을 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94년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저술을 벌이고 있는데, 뉴욕 아우토노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이제까지 발간된 다섯 권의 게릴라 포켓북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저항 전략과 전술을 모색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교란(The Electronic Disturbance)>(1994)에 이은 <전자적 시민 불복종(Electronic Civil Disobedience)>(1995), <디지털 저항(Digital Resistance)>(2001), 이 세 권 모두는 움직이는(nomadic) 권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유목적 저항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두 권의 책, <신체 기계(Flesh Machine)>(1998)와 <분자 습격(Molecular Invasion)>(2002)은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시도되는 신체 관리의 유전학적 미래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앙상블의 책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온라인상에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앙상블은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 또한 이들에게 ‘예술가’란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오히려 ‘문화 노동자’의 지위에 처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적극적 의미를 살려 예술가를 ‘미디어 전술운동가(tactical media practitioner)’라 칭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의 운동이 바로 ‘미디어 전술운동’이다. 미디어 전술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아방가르드의 저항 정신을 고무한다. 그들의 창작과 실험은 모두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질기고 영구적이다. 일상에 미치는 미·거시 권력들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가는 길밖엔 없다. 서서히 끈질기게,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확장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 http://www.critical-art.net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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