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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6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지수
  2. 2010/02/16
    대학이 춥다
    지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성서를 읽다 보면 늘 이 대목에서 걸린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분이 어찌 개와 돼지를 멸시하고 저주하시는 겐가. 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다 맞는 말씀이다. 중세 로마교황들은 스승 예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단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짓”이라던 루터나 칼뱅도 매한가지로 적들을 화형시켰다. 차라리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그 가르침을 둘러싼 미움도 죽임도 없었으리.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께서도 깨달음 뒤 망설이셨던 게다.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나만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긴 고민 끝에 당신께서는 45년의 기나긴 가르침의 길에 나서셨건만 그 제자들은 끝없이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분은 세상 모든 존재와 사건이 고유의 독립된 실체가 없으며, 모든 게 원인과 조건에 따라 서로 기대어 일어났다 사라진다 하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정반대로 실체로서의 극락이며 서방정토며, 영원히 여기에 머무르는 ‘나’를 믿었다. 미륵불과 아미타불 같은 신들도 만들어냈다. 45년의 가르침은 다 어디로 간 건가. 그래도 그분들은 제자들에게 진주를 던져주었다. 그래서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나 아닌 타인과 다른 사물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리.

 

요즈음 법치주의가 꼭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신세가 되었다. 가히 대한민국은 법치만능 내지 법치과잉의 시대다. 모든 일이 법으로 간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 대북송금 문제가 법으로 갔다. 헌법재판소는 남북 정상회담의 개최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법권이 관여할 성질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송금한 것은 사법심사의 대상이라 판단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민주당 지지 발언으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고 탄핵심판까지 받았다. 대한민국 수도를 옮기는 것이 합헌인지도 법관의 손에 넘어갔다. 미네르바 경제평론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 보도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주장도 모두모두 재판을 받았다. 본래 법치주의란 절대군주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한하기 위해서 법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바이마르공화국에 이르면 법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배도구로 전락했다. 헌법책에는 이 시기를 합법적 불법국가라고 규정했다. 1949년 독일 기본법은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고 정의·평화를 보장하는 올바른 법만이 실질적 법치주의라고 못박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언론관련법이나 4대강 관련 특별법, 노동관련법들은 국민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외면하는 한 법률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한들 더는 법이라 할 수 없는 합법적 불법들이다.

 

본디 법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할 능력도 없고 진리를 탐구할 능력도 없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며 사랑이나 융통성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법은 그저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과 경제적 이익을 지켜주는 소극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사회의 전면에 나서거나 모든 문제의 해결사를 자임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대표성도 없고 국민에 대해서 책임도 지지 않는 법원이 우리 사회의 근본을 좌우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현 정부가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는 법들을 만들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들을 법으로 끌고 가는 건 법치주의의 남용이요, 타락이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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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춥다

국회가 지난 18일 협상과 진통 끝에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를 통과시켰다. 그 며칠 전에는 학생식당 고급화로 밥값이 오를 것을 반대하여 대학가가 들썩인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때 대학생들은 빛나는 존재였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존재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때가 있었고, 아무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군부의 총부리와 맞서 겁 없이 민주화 투쟁을 해낼 때 그들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의 존재는 어떤가?

다수가 학자금을 빌려 대학을 다니는 빚쟁이가 되었고, 졸업 후에도 그 빚을 갚을 길이 막연해져서 그것마저 탕감을 받게 된 복지의 대상, 세금을 축내는 수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총학생회는 등록금과 교내 식당의 밥값을 흥정해야 하는 기구가 되었다.

창대한 미래를 꿈꾸며 기고만장하던 학생을 가르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지라 한 목숨 부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에 나는 적응이 안 될 때가 많다. 일본의 한 대학 국제학부 교수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오는 지원자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세계를 걱정하고 사회적 감각을 가진 청년들이었는데 더 이상 그런 열정을 가진 학생을 만나기 힘들어졌다면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가?

대학이 글로벌 100위 대학에 들어야 한다는 깃발을 높이 세울수록, 기업에 봉사하는 ‘인재’를 키우겠다고 나설수록, 캠퍼스가 화려하고 말쑥해질수록 대학생들은 점점 초라하고 불안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들은 뭔지 모르게 기가 죽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일류대 진학에 성공한 지방 출신 학생은 대학에 입학해서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자신이 얼마나 가진 것 없는 존재임을 절감했다고 했다.

실제로 화려해진 대학 캠퍼스를 활보하는 학생보다 초라함을 느끼는 학생 수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을 겸비한 0.1%의 ‘엄친아’들에게는 9000원의 점심 값이야 별 것이 아니겠지만 부모의 빠듯한 재력과 ‘동생의 희생’으로 일류대 진입에 성공한 경우라면 5000원도 무리한 가격이다.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일찍부터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적나라한 ‘격차 사회’에 살고 있음을 수시로 인지시켜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소식에 놀란 가슴에 시장근본주의로 방향을 튼 지도 10년이 지났다. 이제 대학은 충격으로 인한 강박에서 벗어나 다시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인재를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 ‘0.1%의 명품인재’를 키우겠다는 말을 대학 경영인들이 스스럼없이 하고, 성공한 자만이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라 가르치는 대학, 승자 독식을 당연시하는 대학이 진정 인재를 배출 할 수 있을까?

인재란 자고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며 창의적인 인재는 친구들과 지지고 볶고 시시덕거리는 경험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학 경영자들이 좋아하는 ‘수월성’은 잡다한 평범함이 어우러지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지 돈을 좇는 학생들 간의 경쟁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대학은 시장이 아니다. 대학에 온기가 필요하다.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곧 봄은 올 것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

ⓒ 경향신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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