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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변혁은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by이진성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자본을 넘어선 자본>
ⓒ2004 그린비
한참 주목받다가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뉴-라이트(New-Right)'운동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들이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우파를 새롭게 했다는 것인지 참 모를 일이지만, 아무 이론적 새로움도 없는 이들이 자신의 '새로움(New)'을 주장하는 근거는 동구권 붕괴 이전의 좌파와 자신들을 비교함으로써인 것 같다.

물론 이들의 말대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했다.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방법론들은 폐기되거나 재고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세상을 변혁하려는 모든 시도의 폐기를 의미하는가? 이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미래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때부터 '뉴-라이트'는 새로운 이념적 운동이 아니라 위기의 우파를 위한 '정치적 캠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맑스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우파가 냉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적(敵)'을 한번도 업데이트하지 않는 동안, 오히려 68년 혁명 이후의 좌파들은 '맑스'를 읽는 다양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동구권의 붕괴를 비롯한 일련의 위기들과 휘몰아치는 세계화의 논리에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자 했다. 국내에서도 그런 작업들은 활발하게 계속되어 왔는데, 지금부터 소개할 이진경은 현대 사유를 통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를 통해 현대 사유를 새로이 해석해 온 저작들로 오래 전부터 주목받아온 학자이다.

외부를 통한 사유의 가능성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껏 만나온 '사유'란 외부의 조건들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내적 성질이나 보편적 양상으로 서술해왔고, 어떤 외부의 조건과도 무관한 보편적 진리를 자신이 설파하고 있는 듯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학문이라는 말로 다른 앎들을 억압하는 '보편성'의 시도와 체계적이고 위계화하는 '내부성'의 논리에 강한 반감을 보여왔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외부를 통한 사유'로 정의하고 여러 저작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열어왔다.

내부성의 형이상학과 관념론이 삶이나 사물, 사건 등을 관념의 내부에 쑤셔넣어 결과적으로는 '외부'를 말살하는데 집중한다면, 그가 주장하는 '외부성의 유물론'은 내적인 보편성의 형식조차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과 권력이 작동하는 '배치'를 통해 의문에 부치려 할 것이다. 관념론에 오직 '이성의 목적'이라는 '내부'로의 한가지 방향만이 있다면, 유물론에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방하는 '외부'의 모든 방향으로의 열린 길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 책의 부제를 '자본과 그 외부'로 삼아도 좋겠다고 밝힌 그에게서 <자본>을 요약하고, 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주석서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보편타당한 과학으로 설명하고, 정치 경제학이 어떤 외부도 포괄할 수 있는 철의 법칙임을 주장하는 소위 '정통' 좌파들의 작업 방식에 해당될 텐데, 그런 작업방식과 그가 그리는 사유의 선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궤적을 그릴 것이기에.

정치경제학적 법칙들과 유명한 명제들을 쉽게 풀어놓은 이 책을 통해 중요한 고전임에는 분명한 맑스의 <자본>을 나름대로 요약, 정리해 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을 활용하는 가장 재미없는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이 책을 차라리 '변혁을 꿈꾸기 위한 도구', '변혁을 기획하기 위한 기계'로 활용하길 바랄 것이다.

'외부'를 통해 다시 읽어낸 <자본>

일견 <자본>은 자본의 발생과 가치론 등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이 정치경제학의 법칙들을 완성하고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 그것을 끝까지 밀어부쳐 그들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드러내고, 결국 근본으로부터 전제들을 붕괴시키는 '외부'를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둔 책으로 해석한다.

<자본>은 근면과 성실을 통해 자수성가한 자본가의 신화를 계보학적으로 탐색해 그 안에서 자본의 역사가 본원적으로 수탈의 역사임을 밝히는가 하면, 화폐의 발생이 시장이 아닌 국가의 초월적 힘을 통해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없는 가치 증식이 가능해진 기계적 잉여가치의 시대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 가치론이 허구임도 보여준다. 따라서 얼핏 가치법칙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기술과 기계의 발전들도 자본의 계급투쟁 전략임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끊임없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법칙에 잡히지 않는 '외부'가 모든 법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를 통해 이진경은 '외부적 조건'으로부터 무관한 자본의 법칙은 없으며, 그 법칙들은 '외부'의 처절한 계급투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오늘과 대화하는 새로운 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을 이책에서 기대한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책의 '활자적 물질성'과 그 안의 서술을 신성화하기 보다, <자본>이 쓰여졌던 상황과 다른 '외부적 조건'과 함께 사유하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만 <자본>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변혁의 가능성을 제한당한 <자본>을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조건으로 다시 읽어내고, 각자의 창조적인 욕망의 흐름을 통해 가능성의 뇌관을 복구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자본의 생산과 계급투쟁의 전략이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TV와 인터넷 등 생활의 곳곳에 침투한 시대에, 그리하여 사회의 전 영역에 잉여가치의 수취가 확대된 지금, 더 이상 변혁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이라는 식의 대응을 통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광고시청이나 인터넷 배너처럼 대중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모든 부분에 자본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안은 더 이상 가치의 생산을 자본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욕망을 통해 조직화하고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모든 법칙에 '외부'가 있음을 안 이상, 자본주의의 공리계에도 '외부'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므로.

변혁을 꿈꾸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권력에게 포획되지 않은 욕망을 통해 그 '외부'를 가시화하고 현재화하는 것, 아마 그것은 <자본>만을 읽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고 여성과 소수자, 생태학적 관심 등의 다른 가능성들과 연대함으로서 보다 풍부해질 것이다. 그를 통해 아마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미 와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리라. 그리하여 '새로움(New-Right?)'을 가장해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처음부터 '낡았음(Old-Right!)'을 깨닫고 비웃게 되리라.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의미는 한번에 현전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된다. 의미를 확정하려는 보편성의 시도를 비웃으며 오늘도 기존의 의미를 뒤집는 반역적이고 발칙한 읽기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작업만이 '새로울' 수 있음을 잘 안다. 그 끊임없는 '새로움'이 말해주듯 '변혁'을 꿈꾸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에 휩싸였음을 알려둔다. 김재인을 필두로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이진경의 들뢰즈 이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자본의 두얼굴>에서 김동수는 "정통 좌파의 입장에서 이진경이 들뢰즈 모방하기에 그쳤다"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이진경 측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론을 펴지는 않고 있다. 이들이 자신과 수준이 다르다거나 자신의 논점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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