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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10/12

공동체적 협동과 조화로운 유연성 속에 희망이 있다

지식, 경험은 나누는 것이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가진 자가 그러지 못한 자 아니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서양에서 흔히들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거 별거있나? 이게 바로 그거지!! 나누는 대신 존경과 권위라는 명예를 갖게 되는 것 그러나 요즘 자본주의체제를 도입한 지금의 현대 사회는 어떤가?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서 그것을 자신의 출세수단이자 부를 거머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그들끼리 조직화 해서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 철저하게 기득권을 확대재생산시키려고만 드니........과연 이런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무슨 살맛을 느낄까??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밟히지 않기 위해 죽자살자 그들의 블럭 안에 편입되기 위해 오늘날 망국적인 사교육열풍이 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지니....이러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설령 느끼더라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아니라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누구나 똑같이 사회적 가치 있는 노동을 하며 교양과 지식을 쌓아 사회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삶, 그런 사회? 과연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걸까????

 

 

자본이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그렇게 좋던 사람 사이가 돈 때문에 많이 깨지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돈이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없어지는 형국이 되고 있다. 강제로 퍼다 주거나 빼앗지는 않지만 현실 사회가 꼭 그렇게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자본이 인류에게 그 모든 것이요, 만사가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 초등학생들도 이미 물들어 있다. 많은 대학이 철학을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꾼 지는 이미 오래다. 대학생들에게 쓸데 있는 것은 정신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경쟁력 있는 경제력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이 사람을 주물러대고,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겠는가?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가는 열 사람 보다 혼자서 한 사람만 앞서 나가는 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보통 사람 열 사람이 아닌 똑똑한 지도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일등이 되기 위해 미쳐 있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경제적 가치만을 우선시할 뿐 생명이나 환경 따위는 뒷전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희망, 그 자체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떤 희망을 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희망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인간의 삶을 황폐케 하는 것이면 그것이야말로 없애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가 그렇다면 어떤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할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우리 시대 여덟 명의 영적 스승들이 들려주는 <희망의 숲>(김성수 외· 예담)은 그래서 소중한 책이다.

"세상은 힘센 사람들이 앞에서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없고 가녀린 사람들이 손을 맞잡아 옳은 길로 밀고 가는 힘이 더욱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스승들이 민초들과 직접 만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민교육의 첫걸음일 수밖에 없다." (머리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했던 강의들을 한데 묶어 종이에 옮긴 것이다. 시민교육의 장을 지면에 옮긴 것에 불과하지만, 책에 쓰인 내용들은 결코 그 테두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학습장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이 시대 모든 시민들을 위한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 시민들이 어떤 사회를 그리며 나아가야 할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주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토록 해 주는 책이다.

그 속에서도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초점은 바로 '더불어 숲'을 이루며 사는 일에 맞춰 있다. 이를 위해 각 연사들이 나서 하나하나 연설을 해 나가고 있는데, 모든 나무들이 곧게만 자라지 않고 옆의 나무와 서로 기대며 자라듯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시민시회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옆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시민, 이른바 열린 마음을 갖고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곧 많이 가진 자이든 적게 가진 자이든, 한국 노동자이든 외국인 노동자이든, 모든 사람이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온 몸에 전신 3도 화상을 입었지만 신념과 신앙으로 절망을 이겨낸,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인 채규철 씨는 인간에게는 적어도 네 가지 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시간이고, 둘은 죽음이고, 셋은 책이고, 그리고 넷은 친구라는 것이다. 시간 앞에 평등하고, 죽음 앞에 모두 평등하며, 책 앞에 노숙자나 대통령도 다름없이 평등하며, 그리고 어떤 친구를 사귈지도 평등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 평등의 요소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꿀지, 그것은 철저히 자기 몫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대신하여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남길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보람 있는 이야기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신념으로 이겨낸, 겨울을 견디는 나무 같은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몸으로 써내려가야 할 몫이다."(53쪽)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건용 씨도 "작곡하고 연주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거나, 그것으로 더 많은 인기를 유지하고 확보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란다. 그가 곡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오로지 청중들, 다시 말해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민중들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건용 씨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자기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진정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은 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세상이 진정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그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희망의 삶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형적 소유의 양이나 거창하고 화려한 것에서 기쁨을 찾기보다는 내면적 체험의 깊이를 추구하며 공동체적 협동과 조화로운 유연성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살맛나는 세상이고 바로 서는 세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살림과 나눔의 생활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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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건 비우는 것

삶 1

산다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도 같아야 합니다.
작은 생의 아픔속에도 아름다움은 살아 있습니다.
삶이란 그 무언가를 기다림속에서 오는 음악같은 행복
삶의 자세는 실내악을 듣는 관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 2

시간을 낭비하는 삶은 위험한 생존법입니다.
시간속에는 삶의 지혜가 무진장 잠겨있는 것입니다.
성장할 수 있는 삶은 노력함속에 잉태합니다.
삶의 가치는 최선속에 있는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삶 3

사람은 강하고 높아질수록 낮음을 배워야 합니다.
강자가 된 사람은 쉽게 자신을 망각하게 됩니다.
강한 사람일수록 적을 많이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강자란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삶 4

사람은 고난이 깊을수록 철학을 깨우칩니다.
시행착오 속에서 더욱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 깊은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습니다.






삶 5

부자와 가난은 한 겹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통하여 의지를 갖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로 통해 자신을 발견합니다.
부자란 자신을 잘 지킴속에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삶 6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전쟁입니다.
그러나 삶을 위해 투쟁하는 행복한 싸움입니다.
산다는 것은 의문이오, 답변을 듣는 것.
승자되는 삶이란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삶 7

강자일수록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강자의 그늘속엔 언제나 약자가 칼을 갑니다.
강자의 정면속에 또 다른 강자가 도전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강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닫습니다.






삶 8

고난이 깊은 사람일수록 인생의 참 맛을 압니다.
산다는 것은 비우는 일입니다.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없는 것.
노력함 속에 중요한 삶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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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자동차를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나?&quot;

곰치는 고려 때 글자를 모르는 어느 상놈의 이름

▲ 작가 김곰치 르포 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
ⓒ2005 녹색평론사
""'삶의 구호'라고 할까.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 내 몸 밖의 존재들에 대한 집중력을 잃을 때, '발바닥, 내 발바닥' 하고 외워 본다. 그러면 잠이 깨고 눈이 밝아지고 오늘 하루도 귀하게 살 투지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십억! 십억!'하며 삶의 욕망을 일깨웠다고 한다.

'십억!'하고 외치면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고 화장실 가는 발걸음부터 가벼워졌다고 한다. 그는 대학 때부터 군대 다녀와 직장생활 삼사년간을 그랬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뒤 그의 구호는 달라졌다. 딸아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곤함도 잊고 돈을 벌려고 천지사방으로 쫓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발바닥, 내 발바닥'이란 나의 구호에도 사연은 있다. 후배 하나가 자동차를 끌고 왔다. 나는 자동차에 대한 반감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환경재앙이 올 때, 분노에 찬 사람들이 골목길에 주차돼 있는 자동차부터 때려부수지 않을까, 상상할 때가 있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나는 걷는 게 좋아. 자동차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니? 난 내 두 발이 참 좋아. 발바닥은 지구를 느끼며 걷기를 좋아해.'"

-192~193쪽, '발바닥, 내 발바닥' 몇 토막


여기 '곰치' 라는 독특한 필명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있다. 우리 말 중에는 '곰치'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낱말들이 참 많기도 한데, 이 작가는 왜 동해의 사나운 물고기인 '곰치'란 필명을 지었을까. 김경태란 본명도 참 좋은 이름인데, 이 작가는 왜 얼른 듣기에도 좀 미련스러워 보이고, 좀 무식해 보이는 '곰치'란 이름을 고집하는 걸까.

작가는 "곰치는 고려 때 어느 상놈의 이름이었는데 그 녀석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고, 또 왜 죽는 건지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글자를 전혀 몰라 그저 심심한 상놈의 삶을 살다 갔다"며, 오랜 세월 동안 양반들의 소유였던 문자에 한 맺힌 그 상놈이 20세기에 환생한 게 바로 나"라고 말한다.

작가 김곰치는 "제 필명은 오만한 문명의 질주에 반대하는 말로 자연과 민중의 혼융을 뜻한다"고 되뇐다. 이어 작가는 "우리의 고된 역사 속에서 민중은 늘 지배세력에게 당해왔고, 자연은 늘 사람한테 당해왔다"고 덧붙인다. 이 말은 곧 작가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동해를 누비고 다니는 곰치처럼 온몸으로 헤집고 나아가겠다는 그런 뜻이다.

발바닥으로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이자 온몸으로 쓰는 것

"발바닥으로 쓰지 말고 온몸으로 쓰라고? 발바닥은 몸 아래의 가장 밑바닥이므로 사실 위의 모든 것을 짊어진 글쓰기다. 발바닥으로 쓴다는 것은 곧장 온몸으로 쓴다는 것이다. 손으로 머리로 엉덩이로 글을 쓴다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발바닥이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라는 것을 새삼 알겠는 기분이다./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이다" - '책머리에-발바닥으로 글쓰기' 몇 토막

지난 1999년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김곰치(35·본명 김경태)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사람 편리 위주로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발바닥이 부르터지도록,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찾아다니며 꼼꼼하게 기록한 르포ㆍ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을 펴냈다.

이 책은 모두 4부에 26편의 땀내 밴 르포와 산문, 꽁트, 단편소설이 작가가 이 땅 구석구석에 꼭꼭 찍어놓은 발자국처럼 새겨져 있다. '기억을 향한 투쟁'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도룡농 소송 재판부에 올리는 탄원문' '그놈 한 분-백무산 시인께' '똥 생각' '소설가가 된 청소부' '발바닥으로 쓴 일기' '곰치를 아시나요' '삼춘, 공부하나?' 등이 그것.

발바닥이 쓰는 르포, 온몸으로 쓰는 산문
작가 김곰치는 누구인가?

▲ 작가 김곰치
ⓒ녹색평론사
"그는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산하와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풀뿌리 삶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사태 앞에서 깊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해왔다. 그러나 그는 자폐적인 슬픔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발품을 팔아 현장으로 달려가 몸소 그 파괴를 실감하고, 그러면서 그 파괴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발견해왔다."-김종철(문학평론가, <녹색평론> 발행인)

작가 김곰치는 19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991년 단편 '토큰 한 개의 세상'으로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받았으며, 199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푸른 제설차의 꿈'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시와 사상>에 문학평론 '민중시를 위한 밤'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는 지금 부산에 살면서 '시 21 동인'에 참여, 시 읽는 기쁨을 한껏 누리고 있다. 1999년에는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 문학상을 받았다.

/ 이종찬 기자
작가 김곰치는 책머리 말에서 "민중의 삶은 주류 지식에서 비껴있기 마련이고, 주류 지식을 민중은 불신하면서도 그 파괴력을 무서워한다"며, "글을 쓴 시점과 비교할 때 현장마다 이런 저런 변화가 생겼지만, 글에 담은 나의 울음 섞인 노래만은 이 세상의 아픈 누군가에게 연대와 격려가 되리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새만금 갯벌 양식장 허가권 쥔 사람들 대부분은 외지인

"김제, 군산, 부안에 걸친 4만여헥타르의 갯벌을 농지와 호수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 이를 단일사안으로 하여 지역에서 반대조직을 결성한 것은 작년 11월 '부안사람들'이 처음이다. 사진사, 학생, 사업가, 전기기사 등 저마다 생업을 가진 20여명이 개인별로 참가했다.

"우리의 목표는 사업중단이다. 그렇지만 방조제를 다 들어내라는 건 아니다. 배가 다니고 물길이 드나들도록 중요한 물골이라도 다시 트라는 거다. 농업기반공사는 방조제를 방치하거나 철거하면 더한 환경파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방조제 내부는 새만금 바다에서 퍼낸 해사로 채워져 있다. 좀 쓸려간다고 해도 바다가 황폐화될 거라는 건 협박에 가깝다"

김 씨는 새만금사업을 찬성하던 지역정서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만금 전시관에 가보면, 야 이렇게 우리 지역이 발전하는구나, 우리 전북도 이제 찬란한 미래를 맞는구나, 다들 입이 쩍 벌어진다. 없던 애향심도 새로 생긴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시화호가 썩어버리는 걸 보고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업 강행론자들은 재빨리 개발과 환경,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65~66쪽,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몇 토막


작가 김곰치는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이 있는 전북 부안에 가서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실제 갯가에서 살아가는 어민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민들은 작가에게 "이 지역에서 논 10필지, 그러니까 60마지기를 가지고도 (정부로부터) 학자금을 지원받지 않으면 자식 둘 대학 보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어민들은 새만금 갯가에 나가면 "맨손어업이라도 끄랭이와 찢어진 구럭 하나 달랑 들고 하루 서너시간 갯벌 뒤지면 오만원에서 십만원은 번다"고 작가에게 설명한다. 즉, 바다와 갯벌만 굳게 믿고 자식 둘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 하지만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대로 진행되면 이곳 어민들이 보상을 받아봤자 많게는 팔백만 원이요, 그밖에는 대부분 오백만 원뿐이어서 자식들 대학 공부는커녕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진다는 것이다.

이 곳 어민들의 말에 따르면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바다와 갯벌에 의지하며 살아온 어민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 그들은 곧 이 곳 갯벌의 양식 허가권을 가진 사람들, 적게는 몇 억에서 많게는 십억 가까운 보상을 받는 외지인들이다. 또한 그들은 갯벌이 사라지든 바다가 죽든 우선 보상금만 두둑이 챙기면 되는 사람들이다.

지율스님이 살아야 천성산도 영원히 살 수 있다

"스님, 용서해주십시오. 스님은 천성산이 뚫린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스님의 간절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천성산은 곧 뚫린다고 각오하려 합니다. 진행중인 국책사업, 어려운 나라경제라는 이유말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깊은 이유로 천성산은 뚫려나가야 하는 운명의 산인 것 같습니다.

설사 우회노선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작은 산과 들, 그리고 근처 지역주민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천오백년 전 원효 스님이 산에 드셔서 화엄 강의를 하시고 천 명의 성인을 배출해낸 산, 바로 우리 천성산은 너무도 뜻 깊은 산이라 다른 존재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천성산은 '오냐, 지율이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오너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성산도 자체의 대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널이 뚫려도 터널은 결국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 터널을 뚫는 순간부터 산의 저항은 시작됩니다."

-141쪽, '지율 스님께 드립니다' 몇 토막


작가는 천성산 터널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지율 스님께 천성산은 언젠가는 뚫리고 말 것이라는, 다소 회의적인 편지를 쓴다. 하지만 작가는 예정대로 천성산 터널을 뚫게 되면 천성산 스스로 "콘크리트의 틈을 노려 물을 누수시킬 것이며 엄청난 지압으로 콘크리트를 찌그려 뜨리려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는 또한 "산 자체의 객관적 특성이면서 태고적부터 산이 산다울 수밖에 없었던 산의 성정이자 생명력"이며, 산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작가는 강원도의 수많은 산들을 들먹인다. 강원도의 산들도 탄광 때문에 속내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산 스스로 수맥의 새 진로를 찾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의 자생력 때문에 작가 김곰치는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는 것보다 오히려 지율스님을 더 많이 걱정한다. 만약, 법원에서 터널공사를 하라는 판결문이 나오면 그 판결문을 들은 지율스님이 또다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지율스님에게 천성산 터널공사가 시작되더라도 지울스님이 살아 있으면 천성산도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식은 절대 안 된다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나는 노총각이다. 새해 서른두살이다. 애인도 없다. 작년 가을, 참 힘들었다.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해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한 선배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재작년 여름, 서른다섯에야 노총각 신세를 탈출한 자다.

"형, 가을이 무서워 죽겠어." "자슥아. 서른 넘으면 원래 그래. 두어 번 가을 더 맞으면 적응한다. 그 다음부터는 쭉 순항이다." 이건 위로가 아니고 협박 같다. 그러면서도 "얼른 여자 만나 결혼해, 개기지 말고" 한다. 나는 대답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옛 애인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스물두살 대학 4학년 때 만나 스물다섯살 군대 있을 때 헤어졌다. 첫 애인이자 마지막 애인이다. 헤어진 지 벌써 7년이다./ 그녀는 4년 전 이미 결혼을 했다. 이제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녀 생각은 내가 굳이 하려고 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년에 한번쯤은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232~234쪽, '황당하고 절실한 약속' 몇 토막


작가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은 늘 약한 자를 대상으로 수탈과 억압을 일삼는 지배계급을 향해 날리는 민중의 불화살이자 대자연을 사람 편리주의로 마구 뭉그려뜨려 생태계를 혼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자연의 붉은 경고장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물질 문명이 낳은 편리함이 언젠가 지구촌에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문학평론가 김종철은 "문학이 자기 본연의 역할, 즉 가장 근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비타협적으로 얘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김곰치의 르포 산문집은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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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안위 걱정하는척 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2편의 칼럼

믿지말자 권력!! 이젠 권력이 백성을 생각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할때... 권력이 하는 일은 언제나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그것을 강화하려는것뿐....

 

금속활자, 왜 한글은 없나?

 

한글날이 되면 신문과 방송은 늘 그래 왔듯 일제히 한글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거들기도 한다. 외국인(그것도 이른바 선진국 학자들!)까지 한글의 우수성, 과학성을 칭송한다는 말을 들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기분이 갑절이나 좋아지리라. 나 역시 과거에 적잖이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이토록 잘난 민족의 일원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글날이 되면 이 상식적 기쁨을 배반하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솔솔 피어난다.

뭔가 하면 금속활자와 인쇄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글은 1443년에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10년 전인 1434년에 세종은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제작한다. 금속활자야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찍어낸 것은 조선 건국 이후다. 태종 3년(1403)에 계미자를 만들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세종 16년(1434)에 다시 갑인자를 제작한다. 이후 갑인자는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종수(種數)의 책을 쏟아낸다. 이뿐이랴. 갑인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많은 활자의 모본(母本) 구실을 했으니, 그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갑인자는 한자(漢字) 활자다. 그런데 왜 한글 활자는 없는가. 갑인자를 만든 바로 그해 세종은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란 책을 편찬한다. 그리고 10년 뒤 언문 제작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 모두가 쉽게 깨달아 충신.효자.열녀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세종은 한글로 표기된 서적을 백성들에게 보급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금속활자 갑인자는 다수의 책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과 금속활자를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문서적을 언해(諺解)하면서 극히 소수의 한글 활자를 만들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 언해 서적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삼강행실도'가 언문으로 번역된 것은 성종 때였고 그 번역물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기묘한 것은 이 목판본 '삼강행실도'가 조선 전기의 백성들에게 직접 읽히기 위한 거의 유일한 책이라는 점이다. 즉 '삼강행실도'를 위시한 극히 소수의 윤리 서적 외에 백성들에게 공급되는 책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 갑인자는 양반을 위해 막대한 분량의 한문서적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종시대의 금속활자는 오로지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의 지식과 교양을 생산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한글 인쇄물이 제법 나오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다. 하지만 대부분 목판 인쇄였고 질과 양에서 한문 인쇄본을 따를 수 없었다. 한글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쏟아낸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한글은 금속활자화하여 한글 인쇄물을 쏟아내지 못하고 20세기를 맞았던 것이다.

민중이 문자를 갖는다는 것은, 무지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그 해방은 다름 아닌 인쇄물, 곧 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데, 조선의 한글은 분명 민중의 문자로 만들어졌으되, 지배층은 민중의 책을 찍는 데 인색했다. 세종의 시대에 금속활자가 개량되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또 그 시기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둘은 결합하지 않았다. 금속활자는 모두 한자 활자였으며, 그 소유주는 국가와 양반이었다. 애당초 적극적으로 책을 통해 민중을 무지에서 해방한다는 생각은 왕과 양반들의 머릿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지 않은가.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훌륭함을 한목소리로 찬송한다. 찬송가 부르는 것을 누가 탓하랴만, 찬송과 함께 그 이면의 사정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김치 먹어도 되냐고요?

 

1998년 7월 검찰은 W, D, N사 등이 포르말린을 넣은 통조림을 만들어 팔았다고 발표했다. 통조림의 내용물인 번데기.골뱅이가 상하지 않도록 제조사가 포르말린을 넣었다는 내용이었다.

퇴근길 골뱅이나 번데기 안주에 생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달랬던 사람들은 분노했다. 시체 부패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품이 들어 있는 안주를 먹었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통조림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포르말린 양이 자연상태의 표고버섯에서 검출되는 양보다도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성급한 발표가 공연히 국민의 불안감만 증폭시킨 것이다. 통조림을 생산하던 업체의 도산도 이어졌다. 일부 피해자는 국가와 언론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내기도 했다.

벌써 16년 전 일이지만 '라면 공업용 우지(牛脂:쇠기름) 파동'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89년 가을 검찰은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내용의 익명 투서를 받고 수사를 시작했다. 팜유를 사용하던 농심을 제외한 거의 모든 라면 제조업체의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100억원대의 라면제품이 수거되고 당시 라면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했던 삼양식품(당시 삼양식품공업)은 3개월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10%대로 떨어졌다. 10여 년이 지난 97년 대법원 판결에서 모든 혐의가 무죄로 드러났지만 삼양식품은 파동 이후 아직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 회사가 사라질 위기까지 몰렸다. 삼양식품은 올 3월 말 화의를 마치고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특정 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 나오면 그때마다 한 차례씩 홍역을 치른다. 국민은 불안에 떨고, 해당 식품을 생산한 기업이나 팔았던 업소가 문을 닫기도 한다. 명백하게 건강을 해치는 성분이 포함된 식품을 만들고 판매한 기업이나 업소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산 수입 장어의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 검출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외신이 중국산 장어에서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됐다고 보도하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국민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말라카이트 그린은 전문가들조차 "물고기에 대해 독성이 있지만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는 성분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곧바로 수입 장어의 성분을 검사해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암에 걸린다'며 보양식으로 즐기던 장어를 멀리했다. 그 결과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국내 양만(養鰻) 업계의 매출까지 평상시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채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당시 중국산 장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일본의 대응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에 사는 교포는 "(일본 국내에서 장어 파동이 났을 때) 일본 언론은 말라카이트 그린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 후생성은 중국산 장어의 성분 검사를 우리보다 20일 늦게 했다. 일본의 차분한 대응이 검역시스템의 한계인지 국익을 생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혼란을 줄이는 효과는 있었다.

식품의 위해성 여부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거나 몸에 해로울 수 있는 특정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만 가지고 유해성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 식품의 유해성을 판정하는 기준 중에는 체중이 70㎏인 사람이 70년 동안 계속해 노출(섭취)됐을 경우 100만 명당 1명꼴로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라는 조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 물질을 경고할 때는 노출 양과 시간, 위험 등 납득할 만한 분석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시민단체나 정치권, 사법 당국도 한건주의식 공개는 자제해야 한다.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실 공개로 국민이나 관련 기업들은 충격받고 불안해한다.

국민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1일에도 국정감사장에서는 '김치의 안정성'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야당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김치에 납이 얼마나 들었느냐'가 아니고 '먹어도 되느냐'라는 점을 공방의 당사자는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송상훈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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