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우연의 일치일까
- 티코
- 2019
-
- 후보비방죄 집행유예 16주년
- 티코
- 2019
-
- 오랜만의 만나샘 저녘 예배
- 티코
- 2019
-
- 사람이란 존재
- 티코
- 2019
-
- 잔인한 성 프란시스 인문과정
- 티코
- 2019
| |||
|
♧ 글쓴이: 사실의 힘 ♧ 2003/12/12(금) 07:22 (MSIE5.5,Windows98) 218.147.115.160 1024x768 | |
좌파를 권하는 사회
1990년대(?)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한 십년이 지난 것 같다. 내가 사는 유명한 관광지로 들어가는 곳에 철거반대 철탑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가끔 버스를 타고가다 무심히 무심히 그곳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 곳은 우리 지역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그 곳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2003년 12월 어느 날. 대한민국의 모든 부가 집결된 서울의 한 동네, 이전에 어느 대통령의 계보를 지칭하던 아주 유명한 동네에서, 다시 10여년이 지난 한 풍경을 신문을 통해 보다. 복면을 하고 한 남자가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고 있다. 아이는 울고 철거반들은 다가오고 있다. 또 그곳에는 재개발을 되어 호화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겠지. 그러나 그 재개발의 장소에는 이 아버지와 젖병을 문 아이는 없겠지. 이들은 이 추운 겨울 바람을 타고 어디로 흘러갈까. 영구임대주택의 입주권 하나 얻기 위해, 지금 그들은 춥고 무서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삶의 변두리에 놓인 인생들은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을 확인한다. 혹 저 젖병을 물리는 아비는 내가 사는 도시의 그 철거 지역에서 살다 흘러간 소년이 아닐까. 그리곤 이제 그곳에서 자기 애비처럼 아기의 손을 잡고 또 어디론가 흘러갈까. 가난이 유전되는 사회 속에서 또 그 아기는 지애비와 할애비의 그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까. 근대화 100여년, 바뀐 것도 많지만, 바뀌지 않은 것들도 또한 많다. 철거민 아비와 아기의 저 유전하는 인생 계급은 아직도 여전하다. 이것이 여전히 내가 좌파의 변두리에 남는 이유이다. 가구당 주택수는 100%를 넘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여전히 자가보유율은 50%가 안된다고 한다. 최근의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경매에 나온 임대주택 한동을 한 사람이 샀다고 한다. 그리고 저 위의 철거민 가족은 영세민들을 위한 영구임대아파트 하나 좀 빌리자고 갓난 아이를 안고 싸우고 있다. 저 생존의 최극단에 선 철거민 가족들에게 쉴 공간을 하나 마련해주는 것이 좌파라면, 나는 좌파하겠다. 사회가 나에게 좌파를 권하기 때문이다. <펌> 진보누리 '꿈꾸는 사람' |
좌파참여 정권이 시장개방 더 적극적 | |||
| |||
◆돈이 모이는 나라 / (5) 인도◆
지난해 12월 13일 오전 9시 30분 인도 최대 금융ㆍ상업 중심지인 뭄바이(옛 봄 베이) 빅토리아역.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 역사를 통해 교외에서 뭄바 이 시내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인도 출근시간은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로 탄력적이다. 출근자 교통편의를 위해서다. 뭄바이 소재 대기업에서 운전기사로 근무하는 볼라람(46)은 "인도 경제가 상승 세를 타면서 시내에 많은 직장이 생겼지만 치솟는 집값 때문에 교외에서 출근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인도 경제 활기는 뉴델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델리와 뉴델리 사이에 위치한 신도시 사우스익스텐션에는 쇼핑몰이 수십 개 들어서면서 서구 도시 같 은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쇼핑몰 주변에는 서구식 아파트단지들이 속속 들어 서고 있다. 김승호 코트라 뉴델리무역관 차장은 "인도 경제가 커지면서 외국 브랜드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다"며 "월급생활자들이 자동차 가전제품 등을 구매하기 시작 하면서 경제성장에 탄력이 붙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 경제가 90년 개혁ㆍ개방으로 전환한 뒤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지난해에 는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 회의론이 급부상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 다. 인도 주식시장은 지난해 5월 갑자기 하락세로 돌변했다.
대표지수인 BSE30지수 는 2003년 중반을 기점으로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기에 전세계 투자자
이목이 집중됐다.
공산당과 연합한 BJP연정 탄생을 전후한 극적인 변화였다. BSE30지수는 2002년 말 3000 전후에서 2003년 말에는 6000 전후로 상승했지만 BJP연정 승리로 4400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그후 인도 주가지수는 다시 상승반전하면서 지난해 말에는 사상 최고치 인 6617로 마감했다. 인도 신정권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외국인 투자자 신뢰를 회복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 우파정책 확대하는 좌파연정=선거 전후에 주가가 폭락하자 새 정권 재무장 관으로 임명된 필라니아판 치담바람은 취임 즉시 인도 금융ㆍ상업 중심지인 뭄 바이를 방문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만나는 등 시장 진정시키기에 나섰다. 새 정권 총리인 만모한 싱 역시 91년 인도가 경제 개방ㆍ개혁을 시작할 때 재 무장관으로서 인도 경제체제 변화를 이끈 인물. 그러나 BJP 연정 승리는 분배정책을 내걸고 농민 등 로카스트(낮은 계급) 표심 을 산 데 있었다. 기존 UPA 연정 역시 경제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로카 스트 계층 불만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 정권을 잡은 뒤 BJP 연정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더 이상 의혹의 눈초리를 받 지 않을 정도로 기존 경제정책을 유지했다. 오히려 항공 통신 등 기간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한도를 더 늘리는 등 시장친화적 정책을 펼친 것이다. 통신은 외국인 지분한도가 49%에서 74%로 높아졌다. 지난 1월에는 인도에 합작사를 두고 있는 외국기업이 동종업종에 추가 투자할 때 기존 합작사에서 승인을 얻도록 하는 규정을 폐지해 외국인 직접투자 여건 을 대폭 개선했다. 또 최근에는 부동산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자유화하고, 건설개발 분야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도 100% 허용하기로 했다. 우메쉬 쿠마르 인도 상공부 산업정책국장은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개혁ㆍ개방 을 통한 성장정책은 그대로 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줬다"며 개혁ㆍ개방의 불가 피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설명했다. BJP 연정은 물론 공약사항인 '분배'를 위한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성 장을 지속하기 위한 시장친화적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를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인도 정부 고위 관리는 "분배는 경제의 끝이다. 다 나눠주고 나면 뭐가 남는가"라며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배경을 설명했다. 가진 게 있어야 나누는 게 아니냐는 컨센서스가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얘기다. ◆ 몰려드는 외국자본=새 정권 정책의지가 확인되자 인도 주식시장은 곧바로 상승가도에 복귀한 뒤 고공비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포트폴리오 투자는 2004회기연도(2004년 4월~2005년 3월)에 100억달러를 웃돌 것으로 전망되고, FDI는 46억달러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인도 최대 금융ㆍ상업 중심지인 뭄바이 달랄스트리트는 이에 따라 요즘 외국자 본 투자열기로 뜨겁다. 최근 1년 동안 아시아 주요국을 대상으로 외국자본 투자유입액을 보면 인도가 최대 자본유입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건스탠리 투자비중지수인 MSCI신흥시장지수에서 아시아 주요국별 비중을 보 면 인도는 5.8%로 한국 17.7%, 대만 14.2%, 중국 8.2%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낮다. 그러나 투자조사기관인 EPFR(Emerging Portfolio Fund Research)가 지난해 9월 까지 1년 동안 외국자본 국별 유입액을 조사한 결과 MSCI 비중과는 달리 인도 로 자금유입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인도는 지난해 9월까지 1년 동안 14억달러가 순유입돼 아시아 국가 중 자본 유입이 가장 많았던 국가로 나타났다. |
|
|
제14강의: 유럽통합과정과 좌파정치 |
강의의 목적:
1. 고찰의 대상
유럽에서 좌파세력이란 사민주의세력으로부터 극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세력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유럽좌파세력의 주류를 이루는 유럽통합과정과 관련하여 '사회적 유럽의 건설', '시장과 사회정책의 조화'를 제창하면서 자본주도의 신자유주의적 통합과정에 일정하게 유보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통합과정에 대항하기 보다는 그 과정에 기본적으로 순응하면서 그 과정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이나 병폐를 치유하는데에 관심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사민주의세력을 제외하고 유로코뮤니즘적 전통을 지닌 운동세력과 좌파적 사회운동세력 및 비판적 노동운동세력이 유럽통합과정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어떠한 대안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2. 유럽통합에 대한 입장
유럽통합에 대한 좌파세력의 태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수동적 수용' 입장 |
프랑스 공산당 등 |
(2) '적극적 개입' 입장 |
비제도좌파세력으로는 '또 다른 유럽을 향한 국제연대회의', '네들란드연대회의', 'Kairos Europe', 'TIE' 등 제도좌파세력으로는 '이탈리아재건공산당'(PRC), '스페인공산당'(PCE), '독일민주사회당'(PDS) , 유럽의회의 녹색당 불럭 등 |
(3) '적극적 반대' 입장 |
'국제노동자위원회'(CWI) , '그리스공산당'(CPG) 등 |
(1) '수동적 수용' 입장
- 프랑스공산당은 원래 유럽통합과정이 독일자본의 헤게모니 하에서 진척되고 있고, 이로 인해 그것이 만들어낼 사회적 결과를 주권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가능성마저 프랑스민중으로부터 박탈한다는 이유를 들어 유럽통합과저에 대해 명백한 반대의 입장을 견지햇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입장을 변경해 "유러봉합에 대한 찬성, 반대을 외칠 시기는 지났으며, 유럽통화연맹(EMU)의 회원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프랑스 공산당의 견해에는 프랑스의 변화를 통한 유럽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유럽차원의 새로운 사회적 진보불럭의 형성 등을 위한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유럽전략을 국가별전략의 부수적 요소 내지 민족국가의 새로운 개조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 프랑스공산당이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스페인 공산당 등의 다른 유로코뮤니즘적 제도좌파세력들과는 다르게 이와 같이 수동적 수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 '국가주권의 방어'를 중시하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
(2) '적극적 개입'의 입장
적국적 개입의 입장은 유럽통합과정을 현 시기 세게자본주의의 지구화경향이 만들어내는 거부할 수 추세로서 파악하면서 그 경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유럽통합의 성격을 진보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럽 차원의 변혁을 추구하는 좌파세력은 '비제도좌파'와 '제도좌파'로 구분될 수 있다.
가. 비제도좌파의 입장
- 유럽통합프로젝트를 근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유럽통합과는 구분되는 '인간중심의 유럽통합' 내지 '사회적 유럽'을 제시하는 비제도좌파세력으로는 크게 보아 '네들란드 연대회의'와 'Kairos Europa'와 같은 좌파적 사회운동세력들과 'TIE'와 같은 비판적 노동운동세력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비제도적 좌파들은 국가지향적, 선거지향적인 각국의 제도좌파 및 계급타협적인 노조를 비판하면서 유럽차원에서의 대중투쟁과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기본적인 투쟁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
- '또 다른 유럽을 향한 국제연대회의'는 가국의 계급타협적 노조와 제도좌파에 대해 비판적인 노동운동단체와 정치조직 및 Kairos Europa와 같은 진보적 사회운동단체들이 망라되어 있는, 약 200여개의 조직들이 가입하고 잇는 연대단체이다. 이 조직의 슬로건은 '또 다른 유럽을 향해'(Towards a different Europe)이다. 그런데 가입단체들의 지향점은 자보주의체제 내에서의 진보적-민주적 개조로부터 대안적 사회체제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가국 제도좌파들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관료성 등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 연대조직의 주요한 착목지점은 '실업자의 조직화'인데, 이들은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실업문제의 해결 등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범유럽차원의 실업문제 대처와 실업자들간의 연대와 투쟁을 중시하고 있다.
- 기독교계열의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인 Kairos Europa 역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유럽통합을 부유한 국가들 중심의 유럽통합을 추진하고 있고 유럽통합과정에서 민주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계층간의 불평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하면서 '보다 평등한 통화통합, 고용과 사회적 응집을 위한 공동정책 및 초국가적 자본에 대한 통제의 확보 등을 주창하고 있다.
- 대다수의 노동자들과 대중들이 제도좌파 및 계급타협적인 노조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이들 제도좌파의 힘은 매우 미미한 편이다. 이 점에서 이들에게는 유럽차원의 진보 불럭을 형성함에 있어 제도좌파 및 제도노조와의 연대와 분할 계획이 요구되고 있다.
나. 제도좌파의 입장
- '사회적 유럽의 건설'이라는 화두로 유럽차원의 정치적 개입에 적극적인 제도좌파 중 유로코뮤니즘의 전통을 지닌 이탈리아공산당과 스페인공산당은 유럽을 '전략적 자기정체성의 공간'으로 정의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민족국가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확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전통적으로 가장 유럽적인 공산당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유럽통합에 대한 유럽좌파의 전략적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유럽통합이 국제 대자본의 포로젝트임을 인정하지만 임금생활자 등이 직면하고 제반문제들은 현대의 국제적 사회화에 직면하여 단순한 국가별 전략의 전망에서는 해결할 수없다는 인식아래 유럽차원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구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을 지닌 것인데, 이들은 유렁비 세계정치의 결정과정에서 배제된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두 개의 초강대국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의 '유럽의 자주성 확보'를 중시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재건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만큼 유럽차원의 실천 및 진보불럭의 형성에 아직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 독일 민주사회당 역시 '사회적 유럽'의 건설을 적극 제기하면서 '노동하는 빈자층'을 창출하고 있고 복지체제의 해체 및 값싼 노동국가의 포섭을 지향하는 미국식 현대화전략과는 구분되는, 유럽적 발전모델의 창출을 주장하고 있다.
- 유럽의회내 녹색당은 현재의 유럽시장 통합프로젝트가 대자본과 은행 및 농사물기업체에게 더 많은 권력을 가져다주고 있고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더 가혹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의회내 녹색당의 F. O. Wolf같은 사람은 두 개의 유럽을 영구히 지속시키는 현재이螁 '유럽통화동맹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유럽통합과정이 사회적진보적, 생태적 개조과정과 함께 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사회적 유럽' 건설을 적극 주창하는, 기타 주요한 제도좌파세력으로는 유럽의회내 공산당그룹인 GUE, 좌파정당들간의 네트웍인 '새로운 유럽좌파 포럼'(New European Forum), 위에서 말한 Wolf가 주도하고 있는 '완전고용을 위한 유럽회의'(European Assembly for Full Emplyment) 등이 있다. 그런데 '사회적 유럽' 건설을 주창하는 좌파세력들은 비제도적 운동과의 연대에 매우 미온적인데다가, 유럽차원의 실천적 연대에 아직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
(30 '적극적 반대' 입장
- 그리스공산당은 마스크리히트조약과 유럽연합을, 그것이 독일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속에서 3-4개 강대국의 지배를 강화시키고 있으며, 현재의 틀 내에서 민중의 이익에 합치한느 해결책의 강구란 환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적극 반대하고 있다. 그러한 유럽통합과는 달리, 그리스공산당은 ''국간 평등관계의 수립'을 중시하고 잇는데, 이는 그리스가 유럽내에서 최빈국의 하나이며 유럽통합과정에서 '주변화될' 위험에 놓여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견해이다.그런데 이들은 국제주의를 국가간의 평등관계 이상으로 사고하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 국제노동자위원회는 현재의 유럽통합이 자본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반대하고 있다.
3. 평가
- 유럽통합과 관련하여 유럽좌파들의 입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과거의 논쟁은 주로 유럽통합에 대한 찬반논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현재에는 '사회적 유럽'의 건설이라는 입장으로 접근-수렴하고 있다.
(2) 유럽좌파의 견해에서 나타나는 '국가주권방어' 담론은 '경제논리에 의한 수직적 통합'에 대한 저항이자 자국 유권자층의 민족주의적 정서에의 부합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3) 서구자본주의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체제 및 계급타협체제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여향은 유럽좌파들의 유럽중심주의적, 개량주의적 사고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4) 유럽의 운동사에서 고착화된 정당-노조간의 전통적인 역할분담론과 일국주의적 접근이 현재 한계에 부딪치면서 제도좌파와 제도노조 간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업자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이익은 정당과 제도노조 어디에서도 적극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5) '대안적 유럽'을 주창하는 모든 유럽좌파세력들은 '생태문제'의 적극적 해결을 위한 유럽차원의 '환경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 유럽차원에서 계급간의 힘관계가 자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 속에서 좌파세력이 주장하는 '사회적 유럽'의 건설이란 시장주의적 통합을 보완하는 부차적인 요소로서 의미를 지니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제도좌파세력이 순응전략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잇는 만큼 대안적 유럽의 건설은 기본적으로 제도적 틀을 깨고 나오는 대중투쟁과 대중투쟁과 결합하는 비제도적 좌파세력의 활동이 크게 진출하는 조건 속에서 진전하리하고 예상된다.
<참고문헌>
이창근, "유럽통합에 대한 유럽진보운동의 대응전략",
김세균, "신자유주의와 정치구조의 변화", [ ], 문화화학사, 1998
김윤자,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정치사회운동", [ ], 문화화학사, 1998
프랑크 데페, "EC통합과 서구 노동운동", [동향과 전망], 1992
International Coalition Towards a Different Europe(Alternative Summit in Amsterdam), 1997.6.
PDS, For a European Union, 1997.4
Frieder Otto Wolf, Maastricht 2, Eco-solidarity and the Necessary Reforn of EMU, 1996
국가와 좌파The State and the Left리오 파니치(Leo Panitch)가 세계화, 국가, 그리고 좌파가 국가의 구실에 대해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관해 진저와 토론했다. ▲ 진저 : 당신은 국가의 구실이 상당히 변했다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투쟁의 관점에서 어떤 구실도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 파니치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대한 재미난 변형이겠지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에서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실제로 이해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관계, 그리고 심지어는 자유시장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어쩔 수 없이 유발하는 갈등과 모순을 감당하는 국가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 진저 : 기업이 공적, 사적 국제시장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고 좀더 강력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강조점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 파니치 : 기업은 국가가 없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기업이 체결하지 않았고, 기업이 고안하지도 운영하지도 않습니다. 세계무역기구와 국제통화기금은 국가 대표들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기업이 아니라, 이런 전략을 이해한 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료와 경제학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자본의 압력은 노동계급의 요구와 국가의 재정 위기와 나란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본이 국가를 벗어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 진저 : 당신은 이러한 점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싸움을 주도하는 것이 국가라는 데 동의하시겠군요? 10년전 기업 세력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사회복지 프로그램 축소 로비를 벌이는 동시에 기업 자신들의 인력 규모를 줄임으로써 이 싸움을 부추겼습니다. 지금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의 첨병은 다름아닌 국가 그 자체입니다. ▲ 파니치 : 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진저 : 세계화 이래 국민국가가 아직도 투쟁의 초점입니까? ▲ 파니치 : 만약 국가가 세계화를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세계화를 처리할 국가도 필요합니다. 지금 자본이 국가를 무시하고, 국가가 시종 구실만도 못하게 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를 포기하고 다소 공상적인 국제주의에 열중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많이 보고 있잖아요. 이것은, 가상 공간에서 가상 자본을 갖고 뭔가 일을 하는 어떤 국제 시민사회가 생성되리라는 약간 모호한 개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 진저 : 요즘 지방 도시정부(또는 도시 지자체, city state)를 자본의 기술적 변화와 혁신의 중심 근거지로 표현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도, 지방 도시정부가 탈규제화하는 대신 노동복지정책과 같은 제도로 규제를 다시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 파니치 : 나는 도시 수준의 정부가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별로 확신하지 않습니다. 명백히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그런 기능을 하지만 뉴욕 또는 토론토 행정부가 자본 흐름을 촉진시키는 주도적인 기관이라는 견해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도시가 금융 자본이 집중적으로 모여있고, 전체 경제를 후미로 둔 자본 집중의 매듭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토론토, 런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뉴욕은 그런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 옮긴이) 재정부가 베이가(Bay Street)에 하는 것이나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월가에 하는 것같은 구실을 도시 정부가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진저 : 그러나 캐나다 정치 환경에서는 지금 신보수주의적 정책들이 해리스주의자 등의 관점을 빌어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보시죠? ▲ 파니치 : 국제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해리스의 사례와 다릅니다. 캐나다인은 종종 시대에 뒤떨어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클린턴-블레어 스타일 정부가 현재는 더 전형적입니다. 물론 사민주의적 형태의 전략에 되어 먹지 못한 것이 얼마나 포함되어있나를 따져보는 척도의 하나는, 그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여하지 못하는 모순에 갖혀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육에 투자할 계획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부자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진저 : 복지 정부 또는 공공 훈련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클린턴이 정부 개입을 강하게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은 점점 사유화되고 있습니다. ▲ 파니치 : 그점을 아주 잘 지적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그 방향입니다. 그들이 복지국가를 재편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을 이러한 훈련 체제에 종속시키고 밀어넣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유지할 때는 해리스 류의 `신병 훈련소'(boot camp)를 만들 수 없습니다. 노동복지정책 뿐 아닙니다. 직업훈련도 같습니다. 진보적인 이들은 평생교육을 말하곤 했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치 바다표범이나 원숭이라도 되는 양 훈련에 대해 떠듭니다! 레그 위테커(Reg Whitaker)가 말했듯, 사람들이 직업훈련을 받는 것은 고용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 진저 : 국가에 대해 조직적 요구를 제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좌파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파니치 : 가장 우선적인 것은 외국과 협력해 자본 통제를 다시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머리속에 진짜 우리의 국가를 확립하고 세계의 여타 운동 세력들도 이것에 우선권을 두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재정부 또는 캐나다은행(Bank of Canada)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은 좌파가 충분히 진보시키지 못한, 역사적으로 약한 문제입니다. 이랬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언제나 국가는 시들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이 좌파가 국가의 구조적 틀과 구성을 너무 신경쓰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우리가 몰두해야 합니다. 리오 파니치(Leo Panitch)는 토론토의 요크(York)대학 정치과학과 교수이며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이다. 출처: 진저 (www.web.net/~beng/ginger) 98년 7월. 김승현님이 이 글 맨 앞 파니치 교수의 첫번째 답변 처음 몇 문장의 명백한 오역을 지적해주셔서, 1999년 11월8일 수정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몇곳도 어색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고쳤습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한 대역본을 준비했습니다. 영어 원본은 여기 (http://www.web.net/~beng/ginger/articles/issue2/panitch.htm)에 있습니다.
|
올해초에 나온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이 생각보다 꽤 많이 읽힌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68년의 유럽과 70년의 미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보통 68혁명으로 통틀어져서 불리는 반전, 흑인민권운동, 교육 운동, 반문화 운동 등의 일련의 운동들은 이전의 몇몇 중요한 혁명들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서구의 혁명들. 1793년 프랑스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등등. 이 혁명들에는 모두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열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던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에너지들. 68혁명은 그런 점에서 기존의 혁명들과 닮아있다.
하지만 68혁명이 기존의 혁명들과 차별점을 가지는 것은 바로 기존의 권력을 전복시키고 그 권력을 획득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혁에 대해서 열망했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건 나타내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의 혁명들에서도 권력을 바꿈으로써 삶의 변화를 꿈꾸고 실천했다. 하지만 68혁명처럼 그 문제가 혁명의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또 68혁명처럼 문화와 정치가 융합될 가능성을 표출했던 적은 없었다.
이러한 68혁명은 기존의 몇몇 혁명처럼 정치권력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68혁명은 서구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부분들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철학적 논의 및 유럽의 공산당과 맑스주의 내부에서도 존재했다. 선험적 진리를 구하려고 했던 근대 철학이라는 사실에서 한치도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유럽 맑스주의는 68혁명 속에서 공산당과 좌파 실천가들의 보수적 태도에 반성을 시작했고, 그 반성에서 비맑스주의적인 철학적 조류들과의 절합이 시도되었다. 특히 프로이트와 언어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구조주의 이론들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탈구조주의.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그 진리를 추구하려는 힘을 찾아내려는 니체의 영향. 그리고 소련이라는 사회를 거쳐서 해석된 맑스가 아니라 처음의 맑스로 돌아가 다시 새롭게 해석되는 맑스. 크게 이러한 3가지 바탕 아래에서 맑스주의 및 사회 이론에 대한 재구성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 중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신좌파 이론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상들은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의 사상이다. 특히 문화과학이나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상에 대해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능력과 지식 부족으로 그것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다. 또 그들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계간지 '문화과학 18호'에서도 보듯 아직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아직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신좌파라는 개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 개념들이 제대로 작동해본 적도 별로 없다. 신좌파들의 주장이 기존의 한국 진보 사상과 실천들에 유의미한 점들이 있을 듯한데 처음부터 오해되고 거부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무식함을 드러낼 각오를 하고 몇 가지 유의미한 논의들을 알튀세르와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바탕으로 풀어내보겠다.
사회과학을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알튀세르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자세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알튀세르에게서 중요했던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보겠다. 우선 알튀세르에게서 가장 중요했던 개념으로 '모순의 중층결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꽤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도 상당히 맑스주의의 중심 도그마가 되었던 '토대구조(경제)에 상부구조(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등)가 제약된다'는 이론에 대해서 알튀세르가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지배 계급과 이에 대항하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이항적 관계 속의 변증법을 통해서 세계가 진보한다는 생각에 수정을 가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제 이외의 부분들이 부각되기 시작되었고 현재의 지배 체제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알튀세르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론들이 문화라는 부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틀거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알튀세르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맑스주의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알튀세르 이전에는 일부 예외(라이히 정도?)를 제외하고는 의식의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혁명을 사고할 때도 지배 계급의 허위적 의식의 폭로를 통한 기층 민중들의 사고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사고했던 부분은 바로 무의식의 차원이었다. 당시의 구조주의 이론들을 맑스주의에 도입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에 중요한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얘기했다. 특히 알튀세르가 중요하게 분석했던 것은 가족제도와 교육제도였다.
이런 알튀세르의 이론은 우리나라에서 80년대 말 이후로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부분에 대해서 분석하고 개입해 들어가는 이론적 틀거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강내희 교수의 말을 빌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가족과 교육의 영향력을 압도하였고, 그 문화를 분석하는데도 알튀세르의 논의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런 알튀세르의 논의를 통해서 결국 강조될 수 있는 부분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이진경의 말을 빌자면 '생산양식'이 아니라 '주체생산양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맑스주의가 생산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전복시킬 꿈을 꾸었다면, 알튀세르는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관계에 편입되어 들어가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그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실마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결국 혁명이나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의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장치와 배치'에 주목을 해야하고, 그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지배적인 집단들 뿐 아니라 맑스주의자들 내부에게도 적용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튀세르의 이론들은 사회를 분석해내는데 유용한 해석틀을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알튀세르의 이론들은 '그럼 누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연구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지 않을까 싶다. 들뢰즈/가타리는 저항과 탈주의 문제를 사고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니체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진리의 문제를 추구하던 때에 니체가 한 일은 바로 '누가 왜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 통용시키려고 하는 권력의지와 그 권력의지에 의한 진리효과만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진리)은 죽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이 사상을 들뢰즈/가타리는 어떻게 자신들의 사고틀로 끌어들였을까? 들뢰즈/가타리가 강조하는 것은 진리효과를 생산하는 힘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는 '생산적인 욕망'이다. '유목민적 삶을 지향하는 욕망'은 그 삶들을 한 곳에 고착시키려는 '영토화'의 힘에 맞서서 '탈영토화'를 감행한다. 이런 벗어남에 대해서 다시 '재영토화'의 위협이 가해져 오지만 고착된 그 지점을 벗어나려는 욕망들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꿈꾸는 삶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몰적 경직성'을 반대하고 '분자적 미시정치'를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복수성은 단일한 목적하에 훈육하고 위계화할 수 있는 표준화되고 질서정연한 체계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 상이한 지층들은 계급, 연령, 성별, 출생지, 직업 유형, 성적(性的) 성향 등으로 구획되는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결코 한 덩어리의 바위 같은 통일성을 이루지 않는다. 대중들의 투쟁에 통일성을 기초짓는 것은 바로 그들의 욕망의 단성성(單聲性)이지, 그 욕망을 표준화된 목적들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통일성은 욕망의 복수성을 방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이 욕망들이 대표자로서 당이라는 전체주의, 총체화기계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 통일은 욕망의 복수성에 장애가 된다.(펠릭스 가타리, 파시즘의 미시정치 中)
재영토화하는 힘에 대해서 끊임없이 탈주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틀에 박힌 자본주의사회의 규율적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이것은 기존의 운동 집단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메타 담론 아래에서 일사분란하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선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는 운동을 하는 것. 하지만 이러한 분자적 미시정치가 거시정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
학이나 화학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분자들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에너지의 이동을 가져오듯이, 미시정치도 거시정치로 전화할 가능성들은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총체화하는 힘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빌자면 '수목적 활동성'이 아니라 '리좀적 활동성'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와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배경으로 신좌파에게서 주목해야 될 점들을 내 나름대로 3가지로 정리해 보겠다.
첫째로 미시정치와 거시정치의 절합 가능성이다. 구좌파들이 거시정치에 집중적으로 역량을 쏟아온 것이 사실이고, 지난 10년 동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조류와 함께 개인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 담론을 파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사회 성원들을 폐쇄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소비자본주의라는 또다른 메타담론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신좌파의 탈근대적 기획은 주체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되 그것이 폐쇄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과 쟁점 사이에서 새로운 연관을 맺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미시정치를 행하되 연대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거시정치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둘째로 생산성 개념에 대한 다른 인식이다. 기존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생산된 잉여가치를 누가 가져갈 것인가를 가지고 계급 투쟁을 벌였다. 그러한 계급 투쟁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간에 끊임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계급 투쟁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기본 전제로 깔고 있었던 것은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축적'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임투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기본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별로 없다. 신좌파들은 이러한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축적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 자원, 필요노동시간의 사용을 줄일 것을 주장한다. 대신 그 남는 시간을 자기 이해와 자기 충족성을 증진시키는데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최근에 얘기되고 있는 '문화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의 주장은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진보의 개념도 '분배적 평등'에서 '자율성과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셋째로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이해이다.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이해는 주로 의식적인 면에서만 강조되었다. 허위 의식을 통하여 성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거나 묵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신좌파들은 '욕망/감성적신체/무의식'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그 체제의 충실한 수행원이 되는 과정에는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장치들에 의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신체적 규율과 무의식의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대중문화에 대해서 분석할 때 의식의 문제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대중 문화의 폐해에 대해서 비판은 열심히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별 뾰족한 개입을 해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대중문화 속에 투영된 욕망들을 읽어나갈 태도를 가졌을 때 그 욕망들을 어떤 식으로든 분석할 수 있고, 그 욕망들을 자본주의의 질서에서 이탈하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할 여지가 남겨진다.
(1999년 8월)
사진/ 브레너는 아시아 경제위기 또한 제조업 자본간 경쟁 격화의 결과라고 본다. 주가 폭락에 울어버린 홍콩의 주식중개인.(AP 연합)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브레너는 <혼돈의 기원>과 <호황과 거품>(Verso, 아침이슬 근간)을 통해 오늘 세계경제위기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새롭고 중요한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세계화’는 없다?
첫째, 브레너는 얼마 전까지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통념으로 통하던 독점자본주의론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같은 단계론적 자본주의관을 거부한다. 브레너는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경쟁이 독점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경쟁이 오히려 더 격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너는 우리나라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최근 유행하는 프랑스의 조절이론 역시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경쟁적 조절’에서 ‘독점적 조절’로의 이행이라는 단계론적 도식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거부한다.
둘째, 브레너는 세계경제위기는 노동자 투쟁에 따른 이윤압박이 아니라 국제적 자본간의 경쟁 격화에 따른 제조업 제품가격의 하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브레너는 노동자 투쟁은 단기적·국지적으로는 이윤율을 저하시킬 수 있어도, 장기적·체제적으로는 이윤율 저하와 이에 따른 경제위기를 야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브레너는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위기를 이른바 포드주의(Fordism)의 진부화에 따른 생산성 위기가 초래한 임금상승-이윤압박이나 노동자 투쟁의 격화에 따른 임금상승-이윤압박으로 설명하는 신리카도주의자들 또는 네그리(A. Negri) 등 좌파 경제학자들의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셋째, 브레너는 오늘 세계경제론의 화두라고도 할 수 있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문제설정 자체를 거부한다. 브레너의 현대자본주의 분석에서 다국적기업, 금융세계화, 헤지펀드 등의 논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브레너는 오늘 세계경제의 구조와 동학을 국민적 자본주의들간의 불균등결합 발전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이 점에서 브레너는 요즘 우리나라 좌파 경제학자들이 애호하고 있는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등의 세계체제론과 거의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넷째, 브레너는 또 1997∼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책임론 및 이와 함께 거론되는 자본주의 유형학의 ‘라인자본주의’ 대안론(자본주의를 영미형 대 라인형으로 구분하고 주주 중심과 시장절대주의를 내세우는 영미형보다 노사타협과 국가의 시장규제를 중시하는 라인형을 한국사회가 지향할 대안으로 제시하는 입장- 편집자)도 정면으로 비판한다. 브레너는 신자유주의는 오늘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1965∼73년 이윤율의 저하와 함께 이미 시작된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대응이라고 본다.
다섯째, 브레너는 얼마 전까지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통념이었던 신경제론 혹은 디지털혁명론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브레너는 신경제란 한마디로 금융거품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은 이 점에서 마이클 만델 등의 ‘인터넷 공황론’과도 명백히 구별된다.
신경제는 금융거품에 불과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은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가 지배한 기존 좌파 경제학의 주류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이단적인 접근이다. 그러나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은 경쟁을 자본주의의 고유한 동학의 원천으로 보고, 부르주아사회의 총괄로서의 자본주의 국가의 복수성을 강조하며, 자본주의 공황을 자본 자체에 내재한 모순의 필연적 폭발로 간주하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론을 오늘 세계경제위기 분석에 적용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진/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장(경제학)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