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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27
    그립다. 추억의 그맛...
    더불어 함께
  2. 2006/02/03
    유전무죄 무전유죄!!
    더불어 함께
  3. 2006/01/2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더불어 함께
  4. 2006/01/24
    화가 났을때..
    더불어 함께
  5. 2006/01/23
    난 처음부터 혼자였어.
    더불어 함께
  6. 2006/01/21
    다 바람같은 거야~~!!
    더불어 함께
  7. 2006/01/20
    좋은 사람...
    더불어 함께
  8. 2006/01/19
    [퍼옴] 그냥..넋두리
    더불어 함께
  9. 2006/01/16
    흙과 마루
    더불어 함께
  10. 2006/01/06
    <김광석> 오늘따라 너무 그립습니다.
    더불어 함께

그립다. 추억의 그맛...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매년 생각나는 정월 대보름 음식들...

여기에 더불어 어머니가 찹살로 새알심을 빚어 만들어주신 동지 팥죽도 그립다.

 

웹서핑하다가 생각이나서... 맛있겠다.^^



하찮은 호박쪼가리가 주는 근사한 감동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108] 대보름 별미 중 으뜸, 호박쪼가리볶음
텍스트만보기   김규환(kgh17) 기자   
▲ 호박나물과 토란줄기, 취나물 요리법이 대동소이하다. 단, 호박고지는 국물이 더 있어야 밤새 밖에다 뒀다가 다음날 아침 살얼음이 낀 상태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
ⓒ sigoli 고향
호박고지, 호박쪼가리 말리던 추억

지난 늦가을 참 열심히도 호박을 말렸다. 늙고 노란 호박이 아니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말렸다. 그렇다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두 번째까지는 궂은 날씨가 반복되어 마를라치면 눅눅해지고, 괜찮다 싶어 뒤집어보면 뒤쪽은 곰팡이가 탱탱 슬어 결국 썩히고 말았다.

아까웠지만 밭에 다시 버려야 하는 수고도 감수했다. '어어, 이러다 올 가을 정말 호박쪼가리는 날 샜나 보네'하며 거의 포기할 즈음 콩대를 베러 갔더니 호박이 대여섯 개나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기뻤다. 요, 이쁜 놈들을 조심히 싸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날이 더 선선해지고 하루 바짝 햇볕이 들자 쪼글쪼글 부각처럼 빠득 말랐다. 그걸 긁어모아 담는데 어찌나 맑고 고운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지 소음에 찌든 귀가 고향의 소리를 들은 듯 즐겁다 했다.

여기서 내가 말렸던 호박은 기다란 마디애호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쇠어서 익기 직전 늙은호박도 아니다. 서리만 맞았다 하면 곯듯 얼음을 잔뜩 머금고 푹 떨어질 가장 늦가을에 열린 여리고 둥근 애호박이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내 주먹덩이만 하다.

▲ 호박을 썰고 있는 시골 아주머니, 동창생 김영임 어머니가 늦가을 호박을 썰어 말리려 한다.
ⓒ sigoli 고향
쏠쏠하고 오졌다. 호박 몇 덩이 가지고 이렇게 기뻐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말려보니 자각자각 바다자갈 소리로 나를 매료시켰지만 떠보지는 않았으나 참고 또 참아 정월대보름날 먹기엔 충분한 양이다.

예전 어머니와 나는 동구 밖 마당바위를 소쿠리에 호박을 썰어서는 무던히도 오갔다. 일년 중 딱 하루를 위해서 보통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가 연애하듯 호박쪼가리를 빌미삼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때 여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 아이가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인데 호박 말릴 때는 절대 뒤집지 말아야 한다고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훈수를 두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오빠에게 아는 체를 하는가 말이다.

단 한 가지 비법도 아닌 비밀은 날 좋은 아침 일찍 얄팍하게 썰어서 말리고 날이 궂지 않을 성 싶으면 밤이슬을 맞혀야 더 쫄깃하고 가을 향기를 가득 품게 된다는 사실 뿐이다.

들기름과 들깨국물에 자작자작 조린 둘도 없는 나물 요리

아, 아쉬운 설도 지났다. 물리게 먹었건만 기름진 것 투성이었으니 이젠 정말로 속을 달랠 때다. 어루만져주고 다독여 보해주면 제들도 잇속 차린다고 뭔가 보답은 하지 않겠는가.

▲ 돼지고기도 볶거나 굽지 않고 두부를 깎뚝 썰어 이렇게 하면 별미다. 이번 보름엔 이렇게 먹어보자. 전혀 느끼하지가 않다.
ⓒ sigoli 고향
갖가지 아니 열댓 가지 으뜸나물 죄다 차리노니 미어터지겠으나 다들 제 풍미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 제 자랑들 하느라고 품은 향기를 맘껏 발산하니 씁쓸하고 강렬하다. 과하지 않으면서 살살 녹여주는 것 뭐 없을까.

이에 보드랍고 살살 녹는 두어 가지가 있으매 한 가지는 두부와 쌀뜨물만 넣고 끓인 돼지고기요, 또 하나는 무채를 썰어 매한가지로 자작자작 물 잡아 끓여 숨죽인 하얀 나물반찬이다.

이도 아쉬우니 이제 본격 호박고지, 호박쪼가리로 어릴 적 어깨 너머로 흘깃흘깃 훔쳐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복잡다단하게 요리조리 할 것 없이 간단한 몇 번의 과정을 밟아 오늘의 주인공을 빛내고 내 살아 있는 미각을 일깨우고 싶다.

호박고지를 뜨뜻미지근한 물에 불려 놓으면 서서히 풀어진다. 곧 쪼글쪼글 잔주름을 펴면서 부풀어 오른다. 파르란 기운이 되살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덜 익은 호박씨도 야들야들해지니 굳이 떼어낼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제들끼리 변화무쌍한 변신을 하면 물을 따라버리고 꾹 짜둔다. 묵나물에 잘 어울리는 들기름과 멸치국물, 다진 마늘을 넣고 집 간장으로 간하여 지글지글 볶아놓는다. 이제 진짜 국물을 준비해야 한다.

▲ 쌀뜨물과 들깨국물을 잘 활용하면 훨씬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생 통들깨를 갈아 국물을 내는 전라남북도 탕이 맛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sigoli 고향
통 들깨를 씻어 물을 넣고 갈면 뽀얀 국물이 나온다. 체에 밭쳐 국물만 쪽 빠지게 하고 건더기와 껍질은 버린다. '아이고, 간단하다더니 보통이 아닐세'라고 나를 구박하지 마시라. 아서라. 다 끝났다. 뭐든 한번 먹어보려면 실상은 재료 준비에 들어간 공이 더 크지 않더냐.

들깨국물을 넉넉하게 잡고 볶아놓은 호박쪼가리를 넣고 맘껏 끓여주자. 속이 부글부글 끓듯 다갈다갈 끓는 모습을 한번 보라. 과장된 영화장면에서나 본 듯하다. 방구들이 지진 영향을 받아 들썩인다. 용암이 거품을 뽀글뽀글 뱉어내듯 얇실하고 넓게 뜬 수제비처럼 기지개를 한껏 켜고 양이 더 늘어만 간다.

여긴 흰 국물과 하얗고 포롬한 연둣빛이 다소 섞여 있을 뿐이다. 고춧가루는 애당초 쓸 명분이 없다. 국물 한 번만 떠먹어보고는 더 이상 퍼지지 않게 뚜껑을 열어 차가운 곳에 놔두자. 아직 오곡찰밥과 갖가지 나물이 대령하기엔 이를 뿐 아니라 호박나물은 시원하게, 가능한 차갑게 먹어야 진가가 발휘되니 "참아야 하느니라"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풋풋하고 달보드레하고 감칠맛 나고 쫄깃한 감동

식혀서 쌀쌀한 바깥에 두면 더 좋으련만. 상에 차릴 것 다 차려지는 동안 속에 부담되지 않은 것부터 한 수저 떠먹는 시식 시간이 잠깐 있으면 좋으리라. 그 중에서도 맨 먼저 내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음식은 여태 만들어놓았던 호박고지나물이다. 다시 한기를 머금어 금세 약간은 쪼그라들었다.

▲ 요즘도 오곡찰밥을 시루에 쪄서 먹는 사람 과연 얼마나 될까? 쌀 미리 불리고 팥 따위를 삶아 물기를 쪽 뺀다음 시루핀을 붙이고 바닥에 깔고... 참 일이 많았지만 맛은 최고였다. 저 팥과 강낭콩을 섞으면 더 포근포근한 맛이 난다.
ⓒ sigoli 고향
국물 한 술 먼저 뜨니 입안이 잔잔한 감동으로 가득하다. 들깨 알에서 빠져나온 자잘한 알갱이, 분말이 혀를 감싼다. 살포시 내린 큼지막한 눈발이 포근히 내려앉은 느낌이다. 주당들이 약주를 거나하게 할 요량으로 미리 우유나 기름진 걸 위벽에 바를 때와 다르지 않으니 뭐든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손이 바빠진다. 고루 잘 퍼진 찐 찰밥이 당도하여 찹쌀과 팥이 으깨지면서 진득한 끈기로 풍악을 울리니 마침내 나는 자작한 국물과 건더기가 있는 호박나물을 떠 넣는다. 목멜 듯하다가 이내 정상을 되찾았다. 오랜 가뭄 끝 단비라고나 할까.

질겅질겅 씹힌다.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보드라운 입감에 질기지 않는 쫄깃함까지 곁들여졌다. 호박씨마저 볼가져 나와 이가 심심할 새도 없다. 달보드레하고 감칠맛이 난다는 건 이럴 때라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찮은 호박쪼가리가 내게 이런 근사한 감동을 선사하다니!

▲ 여기서 간단히 소개된 무나물이 왼쪽에 있다. 뿌리를 채 썰어 육수 넣고 간하여 끓이면 된다. 고사리와 고구마순도 쫄깃쫄깃하겠네. 실고추를 써야 맛이 깔끔하다.
ⓒ sigoli 고향
늦가을 풋풋한 들을 다시 만난 듯 향기롭다. 혀에 감칠나게 감기고 나서는 한 번 두 번 씹으면 아삭아삭. 넘어가는 기분도 참으로 좋다. 이렇게 난 시원한 맛에 가을 향기를 가득 머금고도 모자라 다그치고 졸라대니 연신 밀어 넣기에 바빴다. 왜 그리 자주 손이 가는지 희한하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고 있노라면 옆에 있던 사람이 불쑥 한마디 던지는 게 일상이었다.

"너 혼자 다 먹을라고 그러냐?"
"바깥에 많으니까 또 갖다먹으면 되잖녀."

미안한 마음에 부엌을 들락거렸다. 이게 볶음이던가. 조림일까. 에라 모르겠다. 볶다가 졸였으니 알아서 이름 짓자. 호박고지, 호박쪼가리 나물은 맞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30년 전 어머니가 대충 만들어줬던 지독한 사랑,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오늘 오후를 어찌 보낼지가 명확해졌다. 오늘같이 좋은 날 어디 있는가. 아이와 아내를 위한 밸런타인데이에 작은 설 대보름까지 겹쳐 있으니 한번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깝지 않은 날 아닌가.

▲ 맛있는 대보름 맞이를 위해 가까운 시장으로 나가보자. 미어터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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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바쁘다던  둘이 참 오랜만에 얼굴봤다.

전교조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윤희샘과 함께 봤다.

 

지강헌(영화인물 지강혁)이 마지막 외쳤던 여덟글자를 이전부터 알고있던 나로선 이 영화가 제작된다는 말을 듣고 기대했었다.


영화관에 불이 꺼지고..스크린에 하얀 화면이 나타났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태권도 공연의 송판처럼 무기력하게 무너지던 서울의 한 판자촌..
힘없이 자기의 집으로 들어가던 할아버지를 삼킨 무자비한 포크레인의 갈퀴는 내 가슴 속 한 가운데 긋은 선명한 핏자국 같았다..


외국인들에게 서울올림픽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판자촌에 사는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극중 표현)일 뿐이었다.
30만원을 훔치고 징역 7년 형에 보호감호 10년을 받고, 수십억을 횡령하고도 징역 3년 형을 받는 현실 속에서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든 법의 여신은 불행하게도 정의 구현하겠다고 자기 눈을 가린 헝겁에 의해 칼(공권력 - 경찰, 법원)이 저울(평등)을 내리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사회에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인 법을 고발하고자 한 그들에게는 강도, 살인 등의 각종 범죄적 수식어가 붙었다.

1988년 10월에 실제로 일어난 인질범일당의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스톡홀름 증후군'을 유발시켰던 '홀리데이'를 보면서, 2시간동안 느꼈던 울분과 분노 그리고 오열.. 이는 어쩌면 범죄를 저지른 고위관직자가 1심 7년, 2심 3년이라는 뉴스를 보고 욕하는 영화속 인질의 모습이 우리의 본모습이고, '유전무죄 무전유죄' 를 외치면서 법의 부당함을 호소하던 지강혁에게 '특종' 거리의 스포트라이트를 키던 기자들이 지강혁일당이 소탕된 후, 경찰에게 박수를 치는 아이러니하고 야누스적인 영화 속 배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자화상이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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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복많이 들 받으세요 건강하시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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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을때..

 

화가 났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나지 않은 척해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지 않은 척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지금 화가 났으며

그래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말은

아주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야 한다.


- 틱낫한의《화》중에서 -

............................................................................................

화가 나는 것,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화를 다스리고 푸는 것입니다.

화를 다스릴 줄 모르면, 한 순간의 화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재앙(禍)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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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부터 혼자였어.

어젠 故김양무 선생님 6주기 추모식에 참석했었다.

 

새해를 맞고 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질겸 망월동을 찾곤했었는데..

어느새부턴가 김양무 선생님 기일에 맞춰 망월동을 찾았다.

 



난 참 부족한 사람인데..

어찌 이 힘든 길을 선택했을까?

 

아니 아직도 이길에서 빗겨 나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건 아닌가?

동지들이라고 매번 말하고 있지만 내 곁엔 진정한 동지는 없는 듯 느꼈던 몇날 며칠.

불면의 밤을 지새고 예전에 없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를 참 많이도 경험했다.

 

외롭냐?

 

함께 가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실천을 함께해도.. 한순간이다.

 

깜깜한 저녁이면

난 또 혼자가 된다.

 

어제 망월동을 다녀온 후 후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도 난 혼자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오가는 술잔..서로의 말과 웃음 속에서도.. 난 하나가 되질 못했다.

겉돌고...흘러내리고..

난 후배들에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사실 좀 아프긴 했다.)자리를 떴다.

 

집에 오는 길에..

걸어오면서 하나 하나 생각을 해봤다.

 

깊은 한숨.. 그리고 내마음의 엉켜버린 타래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내 마음.. 내 욕심..

 

비우자!! 마음을 비우자!!

 

난 처음부터 혼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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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람같은 거야~~!!



다 바람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 건 다 한 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 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가을 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들을 떨어 뜨리 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 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리
결국 잡히지 않는게 삶인 걸
애써 무얼 집착하리

다 바람인거야.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게 좋아.

                                              글/묵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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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참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예전 직장에서 일할때 만났던 시청 공무원들인데..

너무나 인간적인 분들입니다.

 

실천연대 정기총회에 들렀다가

곧바로 약속장소로 향했습니다.

 

4개월만의 보는 사람들임에도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던지.^^

 

기분이 좋아서 얼큰하게  취했더랬습니다.

 

후배 은영이가 와서 더욱 흥을 돋구었고....

 

친한 친구녀석인 수철이를 만나서 늦은 저녁에서 새벽으로 시간은 흘러 갔고

마주치는 술잔에서 서로의 情을 확인했답니다.

 

좋은 사람...

좋은 시간...

 

나를 살게하고 나를 추동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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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그냥..넋두리

마른수건같은 건조한 일상에

필요한건

오히려 더더욱 메말라버린 감정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이미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단걸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는

너무 고달퍼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리기로 한다

 

뭐 또

생각나면 뒤돌아볼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른 일상과 다른 기분이 되어

나는 또다른 결정에 이르게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가

어쩌면 내 삶을 가늠할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모든게 귀찮아

그마저 예상치 않기로 한다

 

확실히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만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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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마루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시간이 바빠서 자주가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심란할때나 아님 뭔가 조용히 사색하고 싶을때 찾아 가는데.

 

특히나 도심속에 이런 곳이 있나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흙과 마루.....

 

오늘도 들렀다가 좋은 사람이랑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다 왔는데.

 

넘 좋다.

 

흐르는 노래 좋고..

분위기 좋고 사람이 좋으니 ^^

 

흙과 마루 날적이에 쓰여진 글 중에...이런글이 있었다.

 

 

"그대는 너무나 눈부십니다.

누가뭐라해도 그대는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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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오늘따라 너무 그립습니다.

그립다.

오늘은 광석이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난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바쁜 틈을 타서 자료 하나 올린다.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세이 6층 아트홀에서 김광석 추모 콘서트가 있다.

 



[오마이뉴스 김은주 기자]

 
때로 지나간 시간들은 음악으로 남는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향기가 있고,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색깔이 있기도 하다. 혹은 특별한 손짓이나 몸짓만 선명하게 남기도 한다. 하지만 불쑥불쑥 아무 때고 흘러나와 심장을 치고 가는 음악만큼 힘이 센 매개물이 또 있을까.

파도 소리를 들으면 서귀포 앞바다에서 듣던 '제주도 푸른 밤'이 저절로 떠오르고, 오늘은 별이 참 곱구나,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부르던 '별이 진다네'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유행가를 들으면 모두들 "저거 딱 내 얘기라니깐"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 지나간 시간들엔 유독 김광석의 노래가 자리하고 있는 순간들이 많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불쑥 끼어들어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직하고 슬픈 노래들을 불러주던 김광석. 그가 다른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10년이란다. 나는 그가 살아있던 시절보다는 이미 가버린 다음에야 그가 내보였던 슬픔의 정서에 깊이 동화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한다.

내가 나이를 먹는 동안에도 김광석은 조금도 나이가 들지 않은 채, 여전히 청춘으로 남아 있다. 그 주름 가득한 웃음이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맙다. 김광석을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언제나 맑고 깊은 슬픔으로 보듬어준 그의 노래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리며….

[풍경 ①-열일곱살] 나의 짝사랑과 함께 온 노래 '변해가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 말고는 세상에 도통 가수라곤 없는 줄 알고 살았던 내가 김광석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대구에는 '시인'이란 이름의 찻집이 있었는데, 늘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시인 지망생들과 담배 연기가 꽉 차 있던 곳이었다.

학교 문학 동아리 소속이었던 나는 덕분에 일찌감치 그곳엘 드나들기 시작했다. 토요일마다 모여서 다른 학교 애들이랑 시 토론을 했는데, 어느 날엔가는 동아리 출신 선배들이 그 집에 잔뜩 몰려와서 인사하는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자기 소개를 하고, 노래도 한 자락씩 하는데 선배 하나가 무지하게 멋진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바로 '변해가네'였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지/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내게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아직 사랑을 몰랐던 어린 나는,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간다던 노랫말을 모두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선배에게 반해버릴 만큼은 자라 있었다. 노래 잘하는 사람에게 반하면 약도 없다. 짧았지만, 꽤 달콤했던 짝사랑은 선배의 애인을 본 뒤 한 달 만에 접어야 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변해가네'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는 학교 총각 선생님부터 이웃 남학교까지 짝사랑할 대상은 차고 넘쳤으니까.

[풍경 ②-스물살] 최루탄 연기와 함께 온 노래 '그루터기'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김광석은 이미 노찾사 활동을 접은 뒤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루터기'나 '광야에서' 같은 노래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입학 후 첫 집회가 끝난 밤,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학교 강당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술잔을 돌리면서 선배들이 부르던 노래는 때론 '노찾사'의 것이었고, 때론 '천지인'이나 '꽃다지', 그리고 또 불쑥 김광석의 노래가 끼어들었다.

목소리를 높이던 집회가 끝나고, 긴장 속에 도로 위에 누워있던 시간이 가고, 참혹했던 열패감의 순간들도 가고 난 뒤, 가없이 쓸쓸한 마음을 김광석의 노래가 다독여주었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새'나 '사랑이여'와 더불어 참 좋아했던 노래, '그루터기'.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들/ 붉게 익히면/ 푸르던 날 어느 새/ 단풍 물든다."

무모해서 아름다웠던 이십대를 떠올릴 때, 내 마음에도 덩달아 단풍이 물들곤 한다.

[풍경 ③-스물두살] 떠나버린 사랑에게 보내는 노래 '그날들'

돌아보면 늘 서툴기만 했던 나의 사랑은, 그가 떠난 뒤 속수무책으로 저 혼자 계속되고 있었다. 정작 함께였을 때는 툴툴대기만 하고, 뚱해 있기나 하고, 내 감정을 숨기고 덮어두려고만 했던 주제에, 헤어진 뒤에야 내 사랑은 저 혼자 깊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입대하기 며칠 전, 그를 만나 오래오래 함께 캠퍼스를 걸었다. 다 주지 못한 사랑이 애달파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 사람이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를 부르며 이등병이 되었을 때, 남은 나는 그렇게 부질없이 '그날들'만 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996년 겨울, 김광석도 세상을 떠났다.

[풍경 ④-스물일곱]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다 '서른 즈음에'

스물넷에 시작한 서울살이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지하철을 타려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어 어리벙벙 서있기만 했는가 하면, 지나치게 많은 건물과 너무 많은 차들과 사람들 속에서 낯선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하던 일을 3년 만에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무렵에 연대 앞에 있는 '서른 즈음에'에 처음 갔다. 작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조금은 시끄러웠고 또 조금은 우울한 곳이었지만, 그곳에 가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틀어달라고 우기는 나의 스물일곱은 그리 절망적이진 않았다. 세상 전부와 맞짱을 떠도 해볼 만하다고,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씩씩하게만 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던 모양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워 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백수의 하루하루가 멀어져 가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살까, 무엇에 내 인생을 걸어볼까, 참 진지하게 고민했던 날들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무지하게 괴롭히면서. '서른 즈음에'와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를 번갈아 부르면서 나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서른살 생일엔 꼭 '서른 즈음에'에 와서 술을 먹어야지, 하는 결심을 혼자 했더랬는데, 어쩌다 보니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어 버렸다.

[풍경 ⑤-요즘] "싸구려 감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잖아, 이건!"

어제 나랑 술을 먹던 후배에게 김광석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뜸 그런다.

"누나도 김광석이야?"

녀석도 분명히 김광석을 사랑하고, 그가 노래하는 슬픔의 정조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냥 혼자 알아서 추억하게 내버려두지 못하고 여기저기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게 싫단다. 자기 감정을 싸구려 감상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 같아서, 덩달아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게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아껴둔 마음 속 이야기를 누군가가 헤집어 놓는 것을 보는 일이 유쾌할 순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또 이렇게 촌스럽게, 김광석을 추억하고 있다.

1993년 2월에 내놓은 음반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에 김광석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2006 미디어신나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 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보고 내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모습을 말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 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보고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미련 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 말고 문득 바라본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오늘, 그 사람, 김광석이 참 그립다.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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