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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7/27
    별 하나의 염세
    free-vahn
  2. 2004/07/27
    집개.. 들개..
    free-vahn

별 하나의 염세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염세, 염세, 염세...


내겐 그랬던 것 같다.
꼭 정량적으로 시간을 꼬집긴 힘들겠지만 1990년대 대략 10년간은 지독히 pessimism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실어증 환자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엔가 염세 마저 지겨워지던 때가 있었다.
누구나 가슴 한 켠엔 고독이란 화초를 키우고 살 것이다. 애써 그 화초를 은닉하고 밝게, 그렇게 살 것이다. (안 그러면 내가 더 억울하자나.. 씨~ 왜 하필이면 지금 월광 소나타가 들리는거야...??)

외로움은 환경이 주는 거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는 거란다.
그렇다면 내 90년대의 편린, 아니 지금도 해방되지 않은 이 눅눅한 기분도 환경이 / 아니면 주체적으로 지고가는 것일까?

억지지만 [별 헤는 밤]에 이런 우울함을 이입해보면 아마도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는 까닭" 때문일거다. (나 아직 청춘이네..?? @.@)
어차피 세상이 익사이팅하고, 쿨하지 않을거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적막한 새벽 3시10분, 월광 소나타 같은 노래를 들으며 음침해지는 기분을 억제하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술도 다 깼는데.. 뭘 쓰고 싶었던거지???????????????????????????

맞다!!! 여기서 질문!! [레옹]에서 마틸다가 말 했던...

"어른이 되어도 이렇게 살기가 힘든건가요?"  (역시 난 아직 청춘!! 캴캴캴~)





별 헤는 밤

시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래도 윤동주 시인에겐 패, 경, 옥이란 여친이라도 있었지....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린 이유를 창씨계명 이후 한국 이름을 (바닥에) 쓰고, 얼른 지웠으리란 추측이 있지만.. 지금 난 센티해진 자아를 황급히 정리해버린 걸로 해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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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개.. 들개..

나는 왜 통조림만 보면 화가 날까

통조림에 대해서 경배하라 (통조림이 훈계한
다) 어차피 그대가 기다리는 세상은 오지 않
는다 통조림이 되는 일만이 성불이다 영광이
다 애국애족이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해도 통
조림은 결단코 부패하지 않는다 (나는 먼 산을
바라 본다) 생명에 절대가치를 부여 하지 말
라 만물은 통조림이 되기 위해서 존재할 뿐
가죽을 벗겨내지 않으면 뼈를 발라내지 않으
면 내장을 뽑아내지 않으면 어찌 통조림을
만드나 눈물은 비천하다 통조림은 거룩하다
(산 너머로 해가 진다) 이제 세상은 온통 통
조림으로 가득차 있다 통조림이 통조림을 만
들고 통조림이 통조림을 먹는다 (어둠이 성큼
성큼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다) 영혼의 존재
를 믿지 말라 그대가 애송하는 시들도 통조림
이 되었고 그대가 숭배하는 신들도 통조림이
되었다 아는가 단지 통조림이 되지 못한 그대
하나 때문에 아직도 세상이 완전무결하지 않다
는 사실을 (객석을 가득 메운 통조림들을 향해
나는 씨팔이라고 소리친다 황급히 막이 내린
다)

李外秀


통조림

개성이 없다.
컨베이어 밸트에서 획일적으로 양산되는.. 하지만 포장만은 잘 된 소모품, 그러므로 독자적 정체성도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특징은 자유, 퍼스널리티.. 이런거 주장하고 다니지만 일정한 틀에서 양산되는 천편일률적인 붕어빵 뿐이다. 모두가 비슷한 기호, 비슷한 이즘, 비슷한 상품가치... 통조림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익명성에 자신을 감추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왜? 책임질 필요가 없거덩.. (자신의 독자적 실존 마저도..)

생명력이 없다.
참치캔에 고등어를 넣는다 해도 소비자는 잘 속아준다. (만두 사태 봤쥐??) 타자는 껍데기를 볼 뿐이지 그 내용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다 못 해 재래시장에서 꽁치를 한 마리 사도 그 신선도와 영양 상태, 질량을 따지지만 통조림은 그것을 따질 수도 없거니와 따질 필요도 없다. 중량 100g ..


집개

주인이 시간에 맞춰 먹이를 주면 먹으면 될 뿐이다. 대신에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고 '난 당신의 사랑스런 애완견이예요..' 하는 제스춰를 해야 한다.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쫄지 않고 짖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관상용'이 아닌 주인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음을 확인 시켜야 한다.
목걸이를 걸어야 한다. 길들여짐... 목걸이란 자유의 제한이다. 하지만 어쩔텐가 알아서 밥 주는데....
"가죽을 벗겨내지 않으면 뼈를 발라내지 않으면 내장을 뽑아내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주인의 논리에 맞춰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


들개

이외수 선생님의 묘사를 빌리자면 "누구에게 사육되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뿐 아니라 외로운 방황, 맑은 배고픔, 적당한 야성"을 갖추고 있다. - 소설 [들개]
어디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먹이를 손수 구해야 한다. 들개는 그 존재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왜? 자유, 방황, 야성 같은 소중한 의미를 사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 엄밀히 말하면 사회가 던져주는 먹이 이외의 다른 먹이를 먹는 존재만으로 "아직도 세상이 완전무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던져주는 먹이 보다 더 양질의 먹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사회의 큰 위협이 된다.
하지만 모든 취사선택, 가치 설정의 주체는 자신이다. (사회가 아니라..)
따라서 결코 편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있다!!'


기질

정말 노력도 해봤는데.. 남들이 좋아하는 효리, 헐리웃 영화, 쇼프로, 어서 빨리 중산층이 되서 인생을 즐겨봤으면 하는 생각, 섹시한 여자 만나 인형 같은 자식 낳아 행복해야지 하는 생각, 적당히 야비하고 적당히 위선되고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영악하고..(이들은 절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젠장... 난 도무지 이렇게 살아지지 않더라..
통조림이 얼마나 편한지 나는 아주 잘 안다. 내가 불편한 만큼 비례해서 편할 것이다.
로뜨 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란 시집이 있다. 거기서 화자는 남들과 같은 미소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입을 귀밑까지 찢는다. (마치 [배트맨]의 조커 처럼...) 하지만 외견상 그들의 그것과 유사해졌는데 내면적 자아는 여전하대더라...
나는 집개의 인생을 결코 가치하락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아마도 왕따(들개) 비슷하게 살아온 나의 경험으로 습득된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각자 자신의 가치대로 움직일 따름...  그러니 날 좀 내버려다오.. 먹이 찾아 사냥하기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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