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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7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2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2
[분배의 문제]

죽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되도록이면 조심해야할 것이다. 산 사람이야 변명이나 항변을 할 여지라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가정에서 조심스럽지 않은 평가는 폭력이다.
더더욱 자살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조심해야할 것이다. 경우 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얼마나 괴로왔으면 자살했을까?

근래 들어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 제일의 황태자라 할 수 있는 정몽헌회장의 자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식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여러 말들이 많지만 착안하고 싶은 대목은 가난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을 던졌을까?
대기업에 들어가 엥벌이를 하면서 더욱 안티해졌다. (말로만 듣던) 한국이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인줄 절감에 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1%를 위해 나머지 99%가 아니 적어도 80%가 피를 빨리고 있다.
(한계레 21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진 동심'(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38.html)과 '지금 그들은 한국에 없다'(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27.html) 참고..)
더욱 한심한 작태는 시스템의 오류를 알더라도 개선은 커녕 그 1%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아귀다툼이다.
이런 상황을 한탄하면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일반적인 서민이 두, 세번의 봉변을 당한다면 누구나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한국은 이렇게 불안한 나라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한국을 떠난 이유는 단순이 돈을 구걸하는 깡패들 때문만은 아닐꺼다..

사실 오류를 개선하는 것 보다 오류에 적응하게 사는게 더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에서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무한한 욕심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분배와 배분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마도 모든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상가가 경제 시스템 부터 적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거다.
분배는 공평하고 정교해야 한다는건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고 문제는 노동가치 만큼의 분배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자본논리는 겉은 그럴듯 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모든 자본 논리가 가진자들의 세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약자는 항상 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먹이사슬의 법칙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나 경제적 측면의 신 자유주의, WTO체제는 번지르르한 사기로 없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완벽하게 GATT체제 아래서 대기업만 성장시켰던 모델이었다. 국민들은 고가의 질나쁜 대기업 제품들을 소비해줬고, 저임금으로 대기업 및 대기업에 대한 하청 작업을 해주면서 대기업을 공룡으로 만들어 줬다. (아시겠지만 7,80년대 우리 노동자 부모님들은 100 hour week로 병걸려가며 일해줬다.)
대기업의 부실이 대한민국의 부실로 이어지고 여러가지 형태(국민연금, 의료보험, 신용카드...)로 국민들은 대기업의 부채책임을 양도하고 있다. IMF당시 부채의 대부분은 기업이었던 반면 현재의 부채는 개인 부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 2003년에 와서 가난해서 자식과 함께 자살하는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래도 오류 시스템의 적자이고 싶은가? 당신이 패자(敗者)가 된다하더라도 이 시스템을 인정할 것인가?
분배의 문제에 심각해져야 하고 노동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들은 제자식을 아파트에서 던져버리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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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1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
[존재가 존재할 수 있기까지..]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이 시스템을 만들 때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변수가 소유에 대한 것일겁니다.
사실 저는 곙제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아서 수다쟁이님 처럼 레퍼런스들을 나열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맞을 겁니다.

이유는 두 가지 요소일 겁니다.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욕심...
역사를 더듬어 보면 몇몇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욕심의 분량만큼 재화를 획득하려는 전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투는데 부터 시작해서 얼마전 있었던 이라크 학살에 이르기 까지..
사실 여기까진 진부할 정도로 공감하는 내용일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 삽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 소유, 명예, 존재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이 형태도 여러가지여서 - 인간의 욕심은 신기하게도 - 이것 중 하나를 위해 사는게 아니라 복합적으로 네 가지 가치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롬의 예가 아니더라도 사회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경제적 욕구, 권력욕, 명예욕이라고 한다니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부터 도가 사상에 대한 환상을 갖았습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신선 처럼 살기, 적어도 내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지 정의하기, 세상이 제시한 기준이 아닌 내가 도덕, 율법, 자유, 존재의 의미.. 같은 것들을 정의해 보기..
그렇기 때문에 프롬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가장 무난한 존재 획득의 조건이나 방법은 그 전의 세 가지를 획득하는 것 입니다. 생존에서 소유로, 소유에서 명예로... 그리고 존재로 계층적인 발전.
하지만 이 방식은 잘 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무리한 방식입니다. 더러 생존의 문제로 싸워야 하는 사람에겐 만용이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가장 안전하게 존재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한된 제화의 체제에선 몇몇 혜택받은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정신을 차리고 길을 모색한다면 다른 세 가지 변수와 무관하게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자의 방법 보다 더 가혹한 수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주로 이런 길의 모색은 종교의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제시한 종교의 교의 자체가 존재의 획득하기 보단 존재를 획득한 것 처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마치 박카스를 먹으면 피로가 해소됐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스팀팩을 맞은 마린은 당장 힘이 배가되지만 생명은 줄어들죠.. )

종교와 유사하게 사회라는 조직이 주는 박카스가 더 무섭습니다. 종교의 경우 어느정도 자의적 선택을 보장하지만 사회/국가라는 조직은 출생과 함께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렇게 만듭니다. 존재 = 명예, 존재 = 소유, 존재 = 생존..
하지만 존재는 이외의 것과 무관한 종류입니다. 설령 존재의 본질이 위와 같은 도식이라 하더라도 이 도식을 짤 수 있는 주체는 '나'이어야 하지 국가나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제일 불쾌한 일 중 하나가 존재에 대한, 가치에 대한 결정권이 박탈당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박탕당했습니다. 입시제도라는 성적표에, 돈이라는 모호한 형태의 가치에, 도덕이라는 불합리성에.. ) 존재의 결정권을 착취당했다는 것은 노예의 직인이 찍힌 셈이 됍니다. 조그만 치즈 하나를 위해 수없는 미로의 벽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생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먹고 싶은 치즈가 무엇이고 내가 건너야 할 벽이 무엇인지 정도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 결정을 위한 고민의 자유를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답안을 작성하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존재의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기회라도...
그리고 첨언하여 프롬의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겠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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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4 variable : RonJeffries 의 'The King's Dinner' 에 대한 오상인 님의 번역글

xprogramming.com RonJeffries 의 'The King's Dinner' 에 대한 오상인 님의 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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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제가 전에 번역했던 것입니다. 지금 보니 넘 형편없는 번역 솜씨군요 .. ^^;

www.xprogramming.com 사이트를 둘러보는 중에 글이 너무 좋아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번역을 해 놓고 보니까 글을 읽는 것 하고 번역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틀리군요. 글을 읽을 때에는 그냥 문장의 요지만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는데 번역은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야되니까 힘드네요. 그리고 번역을 하다 보니까 저의 영어 문법 실력이 너무나 형편없음을 실감하게 되네요. 중고등학교때 영어 공부 좀 해둘꺼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현재에 영어를 문법부터 하자니 시간이 없네요. (현재 건설현장에서 종사(?)하고 있어서, 퇴근하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공부하는게 힘드네요.^.^;, 이거 번역하는데 틈틈히 시간을 내어서 삼일 정도 걸린 것 같네요)


이 글은 XP에서 네가지 변수인 Cost, Quality, Scope, time에 대해서 왕과 한 장인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RonJeffries는
Cost라는 용어 대신에 Resource라는 단어를 썼네요. 이 글을 읽고나면서 저는 KentBeck 만큼이나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마 C3의 일원이었나요? 이 글에서 왕은 고객, 수석 장인은 프로그래머 그리고 마법사는 조언자(coach)로 비유되고 있네요.


전에 XPE와 PXE를 읽었을 때 네가지 변수에 대한 내용이 어렵게 느껴졌었는데 이 글은 너무나도 쉽게 설명을 하고 있네요. 같은 내용인데도 설명 방법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실감하네요. 이런식으로 XP를 설명하면 더 XP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드네요. 담에 시간이 되면 이런식으로 XP를 설명하는 글을 써볼까하네요. 이 글을 읽고 의미가 이상하다거나 더 좋은 문장과 해석이 약간 안된 부분에 대한 의견을 달아주시면 좋겠네요.


왕의 만찬(The King's Dinner)


이 짧은 이야기는 자원(Resources), 품질(Quality), 범위(Scope) 그리고 시간(Time)의 주요 측정 변수 관점에서 팀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이 글은 Ron Jeffries가 바빌로니아의 설화를 번역한 것이다.


옛날 옛적에 …


자신의 가장 가까운 수천 명의 친구들을 위한 국가적인 만찬(State Dinner)을 바라는 왕이 살았다. 그는 자신의 수석 장인(Chief Artsan)을 불러서 만찬 계획을 알렸다. 왕은 자신이 원하는 훌륭한 테이블 셋팅(settings) - 모두 금이고 온통 보석으로 아로새겨진 -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수석 장인은 약간의 초안을 잡고 왕이 바라는 바에 동의했다. 왕과 수석 장인은 몇 주내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과 테이블 셋팅에 대한 제작 일정(schedule)을 잡는데 동의했다.


몇 주후에, 수석 장인은 왕에게 알렸다. 수석 장인은 왕에게 원형 셋팅(prototype settings)의 생성을 보이는 시간 일정과 최종 테이블 설정에 대한 제작 일정을 제시했다. 그 일정은 11월내에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날씨가 좋은 10월의 어느 날에 연회를 하기를 원했다. 다음 회의 전에 수석 장인은 10월까지 완료되는 것에 동의했다.


일정대로 수석 장인은 원형 모델을 가지고 나타났고, 10월까지 완료되게 제작 일정을 수정했다. 수석 장인은 또한 진행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만나기를 권했다. 왕은 짧은 마감 시간상의 이유로 장인이 간략화한 원형 모델을 검토했다. 왕은 접시에 더욱 많은 케루빔(cherubs, 아기 천사의 그림), 보석으로 치장된 더욱 아름다운 조각과 나이프와 포크에 더욱 복잡한 소용돌이 장식을 요청했다. 수석 장인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는 일정을 위태롭게 한다고 얘기했지만, 왕은 장인에게 누가 왕이고 왕이 아닌지를 상기시켰다(역주 : 아마도 왕은 자신이 지위가 높으니 자신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석 장인은 물러났다.


다음 회의시, 다소 시간이 늦어졌다. 너무 적은 보석이 준비되었다. 그래서 접시는 완전하지 않았고, 너무 적은 나이프와 포크가 준비되었다. 왕은 장인에게 더욱 열심히 일하라고 요구했다. 수석 장인은 반발했지만, 왕은 다시 자신과 수석 장인간의 상대적인 위치를 상기시켰다. 왕은 추가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심지어 이미 동의했던 것보다 더욱 자주 말이다.


다음 회의시, 더욱 많은 것이 완료되지 않았다. 왕은 완료된 것을 보기 위해 작업장(shop)을 방문하기를 마음먹었다. 다음날 왕이 도착했다. 장인들(역주: 작업장안에 있는 장인들이다. 수석 장인을 포함하여)은 다소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알고 있으며 대개 보통의 노력으로 계속 일을 했다(?, 이 부분 해석이 영 다소 이상하군요. 제가 워낙이 영어와 국어가 딸리니 좋은 해석이 안되네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고 왕이 물었다.


"오, 왕이시여! 그는 눈과 손을 쉬고 있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괘씸하고 무례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군. 저들은 밤에 쉬어야지, 작업 중에는 아니다"라고 왕은 얘기했다.
"오, 왕이시여!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저쪽에 있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고 왕이 물었다.
"오, 왕이시여! 그는 자신의 연장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또다시 시간을 낭비하고 있군. 일이 잘 안되는 것이 이상할게 없군. 차후, 도구를 다듬는 것은 작업 중에가 아니라 밤에 하도록 하여라"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왕께서 바라는 데로 하겠나이다"라고 수석 장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음 검토 때까지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They parted until the next review.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parted라는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문장상 서로 떨어져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다음 검토시의 중도에서, 수석 장인은 수석 집사(Chief Steward)에게 작업하는데 도움을 줄 새로운 견습생 - 특히 연장을 다듬는 - 을 요청했다. 왕의 예산에 염두는 두는 집사는 집사의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 검토시, 실제로 더욱 많은 작업이 완료되었다. 왕은 완성된 접시와 용품들을 관찰했다. 처음에 만족스러운 미소였지만, 더욱 자세히 살펴볼수록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이 접시의 케루빔 장식은 거칠군, 좋지 않아. 이것이 그대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손님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할 것 같군."라고 왕은 투덜거렸다.


"오, 왕이시여! 작업은 거칩니다. 그것은 왕께서 무딘 연장을 사용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짐은 서투르게 작업을 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장인이여! 짐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왕께서 좋은 음식과 셋팅 없이 좋은 연회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장인들은 무딘 연장으로 좋은 예술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짐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가? 연장을 다듬을 누군가를 고용해라!"라고 왕이 소리쳤다.
"오, 왕이시여! 저는 연장을 다듬을 목적으로 새로운 견습생을 요구했었습니다. 하지만, 집사는 저의 요청에 답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짐을 괴롭히지 말아라, 장인이여!, 짐은 왕이다. 장인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연장을 다듬도록 허락하노라. 하지만, 그들은 초과 작업을 해야만 하느니라"라고 왕이 소리쳤다.
"오, 왕이시여! 그렇게 하겠나이다"라고 수석 장인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왕은 다시 관찰했다. 즉시, 그는 다시 격노하게 되었다. "이 접시의 많은 것은 아직 보석으로 세공 되지 않았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라고 왕이 물었다.
"오, 왕이시여! 보석의 손상이 증가했었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이것의 원인이 무엇이냐? 그대들의 솜씨가 부족한가?"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외람되오지만, 보석 세공은 세밀한 작업입니다. 주기적인 휴식 없이는 조각가의 눈은 피로해지고 손은 떨립니다. 결과적으로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그대는 매우 어리석군, 그대는 짐의 비싼 보석을 망친 작업자를 벌하도록 해라. 명백히 그 작업자는 조심성이 없도다"라고 왕이 말했다.
"명한 대로하겠나이다"라고 수석 장인은 말했다.


다음 검토시, 왕은 그동안의 의심이 말끔히 사라졌다(the king swept into the area filled with suspicion and with a visible air of challenge, 보통 challenge가 도전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suspicion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 것 같네요. 적당히 말을 예쁘게 만들어야겠는데 힘드네요). 왕이 세공의 품질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 평온을 되찾았으며, 대부분의 접시가 보석으로 제대로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매우 행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왕은 완료된 작업의 수를 세어보았다. 그리고 품질이 향상된 반면에, 많은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장인이여? 그대는 벌을 받아야겠군?"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저의 중요한 몇 몇 장인들이 벌로 인하여 아프게되었습니다. 왕이 명하시어 작업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몇 몇은 왕국을 떠나 자신의 진가를 더욱 발휘하게 될 이웃 왕국으로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업자가 줄어들었고 생산량이 줄어들었습니다"
"짐은 그대의 장인들에게 초과 노동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향상이 아니 되었는가?"라고 왕이 소리쳤다.
"오, 왕이시여! 사실 그 반대였습니다. 다시, 장인들은 자신이 더욱 인정을 받게될 곳을 찾아서 왕국을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장인들은 대부분 기술들이 낮습니다. 그들은 정력적이기는 하지만, 왕이 요구한 작업을 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초과 노동으로 그들이 피로해질수록, 다시 작업을 망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군! 짐은 그대에게 대단히 실망했소, 장인이여. 그대의 처소로 돌아가서 운명의 결정을 기다려라"라고 왕은 말했다. 그리고 수석 장인은 떠났다. 확실히 끝이었다.


왕은 매우 근심했다. 수석 장인은 왕의 기대를 저버렸으므로,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적인 만찬은 중요하며 셋팅은 완성되어져야 했다. 그리고, 왕은 이런 일을 허락하는데 언짢았지만, 수석 장인은 왕이 명령했던 대로 열심히 수행했었다. 왕은 자신의 젊은 시절 이후로 조언자였으며 회의시 잘난 체하는(?, sounding board) 마법사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사자를 보내기 전에, 큰 폭발과 연기는 마법사의 도착을 알렸다. 마법사는 누군가가 자신을 생각할 때를 항상 안다고 전해졌다.


후에(?, After jumping a bit), 왕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왕은 만찬에 관련된 사건들을 설명했으며, 이 때 자신의 걱정을 얘기했다. "마법사여! 수석 장인은 짐에게 불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죽여만하오. 그런데, 적절히 수석 장인에게 충고할 수 없음 때문에 문제를 나무라는 것을 짐이 참지 말아야하오? 그리고, 수석 장인이 없는 그런 경우에, 장인들이 과연 어떻게 만찬을 준비할 수 있소?"라고 왕이 말했다.


마법사가 손을 들어 허공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냈다. 칼을 빼어 비둘기의 창자를 드러내려는 순간에, 자신이 왕궁에 있음을 상기했다. 비둘기를 자신의 넓은 주머니에 넣고, 대신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어 약간의 불꽃의 섬광 후에 연기를 자욱하게 했다. 마법사는 단지 마법사만 볼 수 있는 패턴을 식별하는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왕에게 돌아왔다.


"폐하, 저는 오랜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와서 약간의 식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숙고해야하는 작업의 관점들에서 이것은 단지 네 개뿐입니다. 이것을 자원(Resource), 범위(Scope), 품질(Quality) 그리고 시간(Time)이라 합니다. 자연 불변의 법칙은 이 관점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해서 고찰을 하고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보겠습니다"라고 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사가 계속해서, "저는 폐하께서 요구하는 작업 즉, 일의 모든 합(the sum of all tasks)을 범위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마법사여! 흥미로운 이름이지만 짐은 그대의 이상스러운 방법에 익숙하오. 계속하시오"라고 왕이 말했다.
"지금 자원들을 고찰해보겠습니다. 이 자원들은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장인들의 수입니다. 만약 한 장인이 없어졌다면, 작업 또는 범위가 증가 혹은 감소하겠습니까?"라고 마법사가 물었다.
"그것은 없어져 버린 장인이 유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그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지에 의존하오"라고 왕이 대답했다.
"오, 왕이시여! 폐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정당히 요구할 때, 폐하의 장인들은 꽤 유능하며 그들은 확실히 책임을 일반적으로 현명하게 분배합니다. 그렇다면, 이 때 자원들의 감소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마법사가 물었다.
"짐은 여전히 짐이 요구한 것을 요구하오. 그리고 작업은 최상의 품질이여야 하오. 이 때, 작업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오"라고 왕이 생각 깊게 대답했다.
마법사는 끄덕였다. "오, 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만약 범위와 품질이 변하지 않고 자원이 감소된다면, 이 때 시간은 늘어날 것입니다. 폐하는 현명하십니다"라고 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사는 계속해서, "오, 왕이시여! 지금 만약 폐하께서 일정한 자원을 가지고 보다 적은 시간으로 장인들이 동일한 작업을 산출하기를 원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때 무엇이 발생하겠습니까?"라고 마법사가 물었다.
"그들은 짐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할 것이오"라고 왕이 대답했다.
"이것을 폐하께서 경험하셨습니까?"라고 마법사는 장난스레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했음에도 아니오. 처음에 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체로는 보다 적게 일이 완료됐소. 그리고 짐이 더욱 많은 결과(output)를 요구했을 때, 작업 자체는 형편없었소. 그들이 더 많이 일하는 것은 단지 형편없는 결과를 나았을 뿐이오. 그리고 어떤 중요한 장인들은 실제로 이 왕국을 떠났소"라고 왕이 시인했다.
"오, 왕이시여! 범위와 품질의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대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마법사가 물었다.
"마법사여! 생각해 보겠소. 음, 짐은 이렇게 생각하오. 만약 자원과 범위가 동일하게 남아 있고 시간이 감소된다면, 이 때 품질은 불가피하게 감소되어야 하오"라고 왕이 대답했다.
"오, 왕이시여!, 맞습니다"라고 마법사가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소!, 짐이 원하는 물건은 최상의 품질이어야 하오!"라고 왕이 울부짖었다.
"폐하, 이 때 완성될 수 있는 공식이 무엇입니까?"라고 마법사가 물었다.
왕은 자신의 왕국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여, 그대의 질문은 짐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 같소. 그러나 생각해 보겠소. 짐은 그대의 미궁을 완전히 볼 수 있소. 기다리시오, 생각났소! 그대는 왕인 짐조차도 이 관점들의 네 가지들 모두를 요구할 수 없음을 깨닭게 하는군. 만약 짐이 자원, 시간과 품질을 가진다면, 이 때 자연(Nature)은 범위를 지배(control)하오. 그런데도, 짐이 자원, 품질 그리고 범위를 가진다면, 이 때 자연은 시간을 지배할 것이오. 이것이 그대의 과제요?"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폐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폐하의 장인들은 이런 주어진 제약 속에서 폐하를 잘 시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항상 최상으로 발휘되게 적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자연의 법칙을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마법사가 대답했다.
"이 때 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나, 완성될 것 혹은 언제 완성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가?"라고 왕이 울부짖었다.
"오, 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작업 중에, 폐하의 수석 장인은 이런 관점들간의 관계를 잘 이해합니다. 만약 폐하가 그에게 세 가지(역주: 자원, 범위, 품질과 시간 중에서 임의의 세 가지 것)에 관해 바라는 것을 말한다면, 그는 네 번째(역주: 선택된 세 가지 이외의 한가지의 것)의 값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세부적인 결과를 변경한다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측정에 대한 진행 정도를 폐하가 결과를 바라는 꼭 좋은 때에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사여, 잘된 일이오. 그대는 짐을 도와주었소. 그리고 수석 장인의 생명을 구했소"라고 왕이 말했다.


왕은 마법사에게 물러가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가 없어져 버린 것을 알았다(처음에 연기처럼 나타난 것처럼 연기처럼 사라졌을 것 같군요^.^;). 으쓱거리며, 왕은 수석 장인에게 사자를 보냈다.


수석 장인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왕궁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과 자신의 작업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떨리지만 당당히, 그는 왕의 검을 기다렸다(역주: 즉 죽음을 기다렸다).


"장인이여, 두려워 말라. 짐은 그대가 말했던 것을 지금 이해했소. 짐이 생각했던 만찬을 최고로 준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그대가 말한 것을 신뢰하오. 그러나, 초대장은 발송되어서 날짜를 연기할 수 없음을 명심하시오. 더욱 많은 장인들이 도움이 되겠소?"라고 왕이 물었다.
수석 장인 잠시 생각했다. 이 때 그는 "몇 몇 장인들을 추가함으로 향상되겠지만, 이것은 시간에 대해 효과가 매우 적을 것입니다. 또는 아마도 새로운 장인들에게 우리들의 방법(methods)을 가르치므로 효과가 느려집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했다.
왕은 못마땅하기 시작했다. 이 때 자신이 배웠던 것을 생각했다. "장인이여, 그대가 추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최선을 다해 짐을 시중들기를 알고 있소"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그렇습니다. 여기 저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저희는 자원들을 많이 변경할 수 없으며 시간은 한정되어져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최상의 품질을 바라십니다. 이것은 저희가 범위를 변경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장인이여, 그대는 짐이 오늘 배웠던 어구를 사용했다. 짐의 마법사와 이야기 한적이 있느냐?"라고 왕이 물었다.
"오, 왕이시여! 실제로, 마법사는 저희가 작업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자주 충고를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작업 프로세스(Work Process, 고대에 이런 어구를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네요^.^;)라 했습니다. 그는 색달랐지만, 그의 생각은 저희의 작업에 강력한 효과를 미쳤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장인이여, 그는 색다르지, 참으로 색달라. 그러나 계속해서, 범위에 대해서는?"라고 왕이 말했다.
"여기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최상의 품질로 왕께서 바라는 모든 셋팅 장소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저희는 전에 보였던 접시의 디자인을 더욱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케루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최상의 품질일지라도 저희는 간단한 용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는 보다 적은 접시나 용구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폐하께서 선택하여 주십시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왕은 생각했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짐의 손님들은 왕궁 동물원의 관람 동안 에피타이저 - 식욕을 돋구는 간단한 음식, 흔히들 에피타이저라고 해서 굳이 번역을 피했다 - 를 먹을 것이다. 짐은 손으로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할 것이다. 이런 음식은 쟁반에 담아 손님들에게 돌아다니는 순결한 처녀가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다 적은 접시와 용구가 필요로 할 것이다
"오, 왕이시여! 좋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이 촉박합니다. 열심히 일할지라도 작업을 완료하지 못하는 위험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하며 떠나려고 했다.
"장인이여, 기다려라. 그대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는가? 위험이 남아 있다면,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더 얘기를 해야 한다"라고 왕이 말했다.
장인은 기다렸다.
왕은 계속해서, "그래, 그대는 국가적 만찬을 최대한 가능하게 할 그대가 제안한 세 가지 모두를 이행할 것이다. 그대는 짐이 이미 명령했던 것 보다 적은 수의 접시와 용구들을 만들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만드는 이것들의 디자인은 더욱 간단하게 할 것이지만, 여전히 짐이 바라던 최상의 품질을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물론입니다. 만약 제가 만찬을 위한 접시들에 노력을 많이 들인다면, 그렇지 않은 다른 접시들의 디자인을 더욱 간단히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하게 다시 만찬을 위한 접시들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용구들을 간단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수석 장인이 대답하고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 장인이여! 이것은 충분할 것이다. 그 외에 더 있는가?"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그러시다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지 잘못되면, 인도(delivery,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보통 인도라고 번역들을 하기에 그대로 썼다)를 보장하기 위한 세부 디자인의 변경할 권리를 간청합니다. 저는 당연히 폐하께 즉시 동의를 얻기 위해 알릴 것입니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장인이여! 좋다. 그러나 만약 세부 디자인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짐에게 노력의 감소에 대해 요청을 해야한다(?). 짐은 에피타이저를 변경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필요하다면 후식을 변경할 수 있다"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정말이지 현명하십니다. 그렇게 하겠나이다"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장인이여!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것은 너무 수월하여 확실치는 않으나(?), 목적들을 간신히 충족하기 보다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라면, 왕께서는 적당히 디자인을 더 세련되게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혹은 손님들에게 약간의 선물을 주길 바랍십니까?"라고 수석 장인이 말했다.
"이것은 확실하지만, 아마도 목표를 간신히 충족하기 보다는 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왕께서는 디자인을 적절히 강화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손님들을 위한 약간의 선물을 바라십니까?"
왕은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그대는 모든 면에서 짐을 지원하는 진정한 수석 장인처럼 느껴지는군. 짐은 지금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그대를 벗어나게 하여 그대가 더욱 많은 혹은 적은 일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러나 지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대가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기다려라. 마법사가 말했던 것처럼, 범위가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모여서 결정할 것이다. 아마도 휴식(time off, 원래 일시적인 중단이라는 뜻인데 휴식이라는 의미가 더 어울릴 듯 합니다)이 주어질 것이다(Perhaps we will even give your people some time off 혚 no, this is, after all, only the 10th century).(이후에 몇 문장이 더 있는데 도저히 해석이 안되겠더군요.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 ^.^; I am ahead of myself. Workers혪 rights are centuries away. In any case see Us, and together we shall decide what to do)라고 왕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원하신 대로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폐하를 섬길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라고 수석 장인은 행복해하며 인사하고 떠났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장인들이 자신이 요구한데로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만찬은 매우 성공 이였으며, 수석 장인은 한 하녀와 가깝게 되었다. 후에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마법사여! 그대는 짐에게 자연이 자원, 품질, 범위 그리고 시간과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소. 그러나 짐은 이웃 왕국의 장인들은 짐의 장인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생산한다는 것을 들었소(역주: 즉, 이웃 왕국의 장인들이 더 속도(velocity)가 빠르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이오?"라고 왕이 말했다.
마법사가 대답하기를 "오, 왕이시여! 자연은 실제로 이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폐하의 장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거나 더 오래 일함으로써 결과를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일하는 방법을 향상시킴으로써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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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사의 길 : 서석호님 번역

우사의 길
번 역 : 서석호
출 처 : Applied Software Architecture

12.1 Creating a Vision
-유능한 architect가 되기 위해서는 비젼이 필요하다. (최종 시스템이 어떤 모습일지, 용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머지 회사에서 추진 중인 과제 및 비즈니스적 목표와 연관성이 짙은지, 등등...) architect는 application domain (**소프트웨어 사용 용도?**) 과 시장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배우든지, 아님 다른 자원을 찾아야 한다. 이는 좋은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를 디자인 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architect로서 당신은 당신 제품이 갖춰야 할 사양과 한계를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를 이용하여, 시스템의 전체적인 견해를 만들 것 이다. 처음에는, 각각 컴포넌트가 대강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노력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기초적인 아이디어들을 구상하고, 디자인이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생각하고, 피드백을 받고, 아이디어들을 약간 고치던가, 다시 도전 해야 할 것 이다. 이는 무한한 반복의 과제이다. 종종 새로운 기술을 쓰는 것이, 새로운 시장들을 공략하던가, 시장에 반응하는데 빠르다 (**time-to-market ... 확실하지 않으나 제 생각에는...**). 만일 프로젝트 메니저와 architect가 진정으로 이 과제가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과제를 찾아 나서는 것이 가능성이 없는 과제와 실랑이를 버리는 것 보다 낳기 때문이다. architect의 무한한 상상력을 지속 시키려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의 신기술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신은 회사의 기술들은 물론 시장의 신기술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제품의 사용자들 또한 영감(?)중에 하나이다. 사용자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에플리케이션, 마케팅, 그리고 커스터머 전문가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의 사이트를 직접 가보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사용자가 어떻게 제품을 사용하는지, 사용자가 어떠한 문제점들과 맞닥들이고 있는지, 또 어떤 부분의 개선을 원하는지를 직접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첫 아키텍쳐 디자인이 설립되면 (종종 종이 한쪽에) architect는 이를 감독하고, 정리-진행하고, 결정하고, 이행시기는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프로젝트 메니저와 함께 팀을 하이레벨 디쟈인 부터 제품개발까지 하게 될 것 이다.
architect로서 당신은, 아키텍쳐 디자인의 주요 인터페이스 부분을 정리하고 제어 해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주요 컴포넌트들을 알고 있고,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조합이 되어 시스템을 이루는지 알기 때문이다. system architect가 시스템의 하드웨어를 설정하지만, 당신이 사양을 정하고 소프트웨어가 전체적인 제품에 어떻게 맞는지를 정하고, 나중에 이 정해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한다. 아키텍쳐의 스케치로 당신은 상업적 구성요소들과 현존하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시스템을 구상할 것이다. 이 비전을 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낸다든지 아님 조직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당신은 자주 팀에게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소개하는 개척자가 될 것이다. 잘못된 점이나 고쳐야 할 점을 찾을 때마다 당신은 중간에 이들을 팀과 연락하며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12.2
software architect로서 당신은 프로젝트 메니져의 주요 기술 고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프로젝트 내의 주요 기술들을 결정 짓게 될 것이다.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프로젝트 메너져와 동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architect는 프로젝트 메니져와 가깝게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프로젝트 메니져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architect가 필요하고, 이에게 기술적인 권한을 줘야만 성공할 수 있다. 어떤 프로젝트에는 메니져와 architect를 한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다. 이두 임무를 합함으로써 둘중의 하나에만 치우치는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 프로젝트들에서는 이 두 임무가 효과적으로 합쳐질 수 있다. 혹은, 두사람이 (architect와 technical lead -기술자) architect의 임무를 나눠서 하는 경우도 있다.
큰 프로젝트에서는 인터페이스의 조종이 중요함으로, 한사람이 architect의 임무를 다 수행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그룹의 architect가 system design review board (**?**)를 이룬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한으로 architecture을 완전한 상태로 보전 한다.
table 12.1은 메니져와 architect의 기타 역할들을 적고 있다. 프로젝트 메니져는 프로젝트의 구성과 자본을 확보하고 그리고 스케쥴을 관리한다. architect는 팀을 architecture 디자인과 이행 부분을 감독한다. architect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이 정보를 이용하여, 프로젝트 메니져에게 어떻게 자원과 인력을 배치해야 하는지를 조언한다.
(**table 생략**)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개발팀 조직은 소프트웨어 개발 조직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architect가 프로젝트 메니져에게 팀장의 선택과, 섭-시스템 팀의 크기, 필요로하는 능력, 등등의 조언을 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경우에, 하이-레벨 디자인 팀의 맴버들이 나아가서 서브 시스템과 주요 컴포넨트 개발들을 지도한다. architect의 자문들이 이들의 디자인 능력과 잠재적 인력 경영능력 (**people management skills**) 등을 프로젝트 메니져와 다른 메니져들이 요구 할 가능성이 높다.
프로젝트 메니져는 마케팅과 협상을 하고 제품의 필요 조건을 상세한 조건으로 해석한다. architect는 필요 조건들을 설립하지는 않지만, 이를 비평하고 기술적으로 가능한지를 가늠져야한다. 아키텍쳐 디자인이 진형되어가며, architect는 필요 조건을 다시 정의 할 것을 교섭해야 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 조건을 충족 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던가, 다른 더 중요한 요소들과 맞 바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메니져는 직원 관리를 한다. 예를 들어서 해고, 고용, 능력 평가, 봉급, 과 보너스 등을 관리 한다. architect는 지망자 인터뷰와 직원들의 기술적인 능력을 알고 있어야 한다. 둘 다 팀을 프로젝트가 완성 될 때까지 이끈다.
이 둘의 관계가 잘 적용되고 있을 때는, 프로젝트 메니져는 architect의 기술적 자문을 지원하고, 이를 돕기위해 직원들을 교육하며, computer-aided software engineering tools를 사고, 아님 전문가를 고용하여 이를 가능케 한다.
프로젝트 메니져가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기는 하나, architect가 디자인의 품질을 지도한다. architect는 상세 디자인과 코드 속의 의존물들이 architecture design에 따르고 있는지를 살피지만, 더욱더 깊이 내려가서 코드가 상세한 디테일 디자인 까지 따르는지를 확일 할 필요는 없다. 이는, peer review (**동료들이 서로의 일을 검토하는 것**) 상태에서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메니져는 프로젝트 팀의 생산력을 제는 책임을 진다. architect는 디자인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는 팀내의 가이드 라인(코드와 템플리트)의 확립과 시행이다.

12.3
하이 레벨 디자인 팀은 주로 소프트웨어 architect와 서브시스템의 팀장이나, 기술쪽 전문가, 혹은 분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다. 소프트웨어 architect로서 당신은 디자인 팀의 리더이며, 초기의 디자인 결정들을 내려야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의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의 균형을 정하고 팀이 이들 교환들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 해야한다.
architect로서 당신은 어느 정도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전문가여야 하지는 않다. 왜냐 하면, architect는 도메인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사이를 잇는 다리이기 때문에 당신은 도메인에 관한 지식으로 디자인 교환을 분석하지만, 디자인을 실행하는 지식 까지는 필요 하지 않다. 당신에게 도메인/분야 경험이 부족하다면, 자주 분야의 전문가에 의존할 수 있다.
당신은 항상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나 완전한 전 팀의 일치를 갖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은 시간에 적합한 판단을 내려 데드라인을 맟춰야 한다. 토론을 종료하고 결정을 내려야할 시기가 왔다는 것은 당신이 결정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빨리 전체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위험을 찾아 내야 한다. 다른 결정들을 정확하게 시간에 맟춰내리는 것에도 기술이 있다. 이는 결정을 최대한 늘려, 너무 늦지 않게, 내리는 것이다. 장점은 디자인이 융통성이 유지되고, 좀 더 유연하게 변화된 필요 조건이나 다른 요건들에 맟춰 질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나중에 고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결정을 아주 안내려 개발을 지연 시키는 것보다 훨 유용하다는 점이다.
스케줄에 의존하는 요소들을 보고 결정을 내려야하는 시기를 찾도록 하자. 당신의 자원에 앞서 일하고, 당신의 목표의 뒤에서 일함으로서, 당신은 당신의 결정들로 몇가지 제약들을 해결 할 수 있다. 당신은 제품 출시의 마케팅 우선도와 프로젝트 스케줄, 그리고 신기술이 미칠 영향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기술의 선택은 다른 선택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소프트웨어 플렛폼의 선택은 상업적 도구 선택이나 팀의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구성 요소 발표 계획에 들어가는데, 이는 시스템 개발 전략을 결정한다.
architect로서 당신은 전체적인 글로발 결정을 책임진다. 당신은 마이크로매니져가 되기에는 시간이나 자원이 턱 없이 부족하다. 당신은 결정의 부분부분을 특정 분야의 전문가에게 맏기고, 디자인과 이행 작업 및 결정을 팀에게 맏긴체 팀을 필요할 때 감독해야 한다.

12.4
software architect는 소프트웨어 개발 팀 (software development team)의 감독 역할을 한다. 일단, 마케팅이 제품의 개념과 제품의 필요 사항들을 정하고 나면, architect는 프로젝트 메니져와 함께 디자인 팀을 구성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주로 소수의 인원으로 하이 레밸 디자인 부터 시작을 한다. 이 시점에서 더 많은 인원을 끌어 들이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라. 이 페이즈에서는 작으면 작을 수록 좋다.
직원 보충은 로우레밸 디자인과 이행 (implementation) 작업이 설립되면서 더해진다. 프로젝트의 크기에 따라, architecture 디자인은 특정 팀 리더나 직원에게 배정하기 좋은 시점이다. architect는 프로젝트 메니져와 함께 일하며 각 팀 멤버들에게 작업을 할당한다. 우리는 (저자) 당신이 초기의 개발 시점에서 아키텍쳐 디자인의 컴포넨트들을 프로토타입으로 감정하길 권장한다. 이는 프로젝트의 위험성을 낮추고 새로운 팀 멤버들의 아키텍쳐와 기술 교육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소프트웨어의 아키텍쳐 디자인을 완성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architect로서 당신의 임무는 아키텍쳐의 디자인에서 시작 된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모두가 이 디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줘야하고, 실질적으로 이행/임플라멘트 될 수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팀 멤버들과 어느 정도의 대화 관계를 설립해야한다. 이로 그들에게 중요한 디자인 요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주고 받고 관계의 감독과 더 독재적인 역할의 결정자 사이에 균형을 줘야 한다.
팀 멤버들은 상세하게 서브 시스템을 디자인 할 수 있을 정도로 소프트웨어의 아키텍쳐 디자인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를 시작하는 한가지 방법은 시스템의 나머지에 그들의 서브 시스템과 그 인터페이스의 분해를 디자인 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행/임플레멘트에 필요 시간을 어림하게 하는 것을 프로젝트 메니져가 스케줄을 정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이 연습은 또한 각 팀 멤버들에게 아키텍쳐 디자인과 개발 스케줄에 수요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좋은 감독관의 기질 중 하나는 언제 방종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architect로서 당신은 디자인의 전체적인 구조를 공급해야 하지만 동시에 각 팀 멤버들에게 자기가 맡은 부분의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책임과 과제를 맡겨야 한다. 무엇이 적당한지는 디자인의 진기함, 관련된 위험성, 그리고 팀의 능력에 따라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가끔 당신은 팀 멤버들의 사소한 실수를 용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배우고 또한 이 실수가 프로젝트의 목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시스템이 발전해감에 따라, 당신은 아키텍쳐의 정직함을 유지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당신의 임무는 제품의 유지 단계에 들어 가며 바뀐다. 이 단계에서는 당신의 개입이 덜 필요 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원래 디자인에서 동떨어지기 시작해 더 이상 유지가 안되는 아키텍쳐를 다시 조직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여해야 하는 수도 있다. 아니면, 현존하는 시스템이 새로운 제품버전으로 업데이트 되어서 새로운 제품 목표를 이에 수용하기 위해 아키텍쳐가 제구조 되는 경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제품들이 새로운 버젼의 발표로 서서히 발전되어 간다. 대부분의 경우에 본래 버젼의 아키텍쳐가 장기간의 제품 발전에 따른 예측할 수 없는 기술 진보와 제품 사양들을 수용할 수 없기때문이다.

12.5
소프트웨어 아키택트는 팀 멤버들의 활동을 아키텍쳐의 디자인 요소들에 맟춰 정하게 된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는 제품 개발을 완성하기 위한 엔지니어링과 관리에서 만들어져야하는 타협을 통일하는 주제이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는 프로젝트의 많은 국면이 회전하는 중심의 요소를 제공한다. 메니져는 아키텍쳐를 복잡한 과정을 처리가 가능한 과제들로 나누는 개체라고 여길 수 있다. 기술적 마케팅에서는 아키텍쳐로 제품의 사용 기간동안의 새로운 기술을 첨부를 지원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성능, 재활용 가능성, 그리고 발전에 대해 걱정을 할 수도 있다. 즉, 소프트웨어 아키텍쳐의 선택, 개발, 그리고 정련은 소프트웨어 개발의 성공 여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아키텍쳐의 수문장으로서, 당신은 아키텍쳐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활동을 주관한다. 디자인이 완성됨에 따라, 당신은 주요 인터페이스들을 조종하고 설립한다.
아키텍트는 또한 소프트웨어의 개발과정을 따라가며 중요한 아키텍쳐 디자인이 이루어 졌음을 확인해야한다. 디자인 리뷰는 두가지의 일을 수행하는데, 이는 아키텍쳐의 견고함과 품질을 보증하며, 참가자들이 디자인을 이해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키텍트는 프로젝트 메니져와 함께 일하며 디자인의 다른 분야 별로 팀리더의 책임을 설립해야한다. 또한 당신은 팀리더들간의 화합을 주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책임하에의 서브시스템들이 아키텍쳐에 맞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 같이 일해야 한다.
디자인의 일관성과 아키텍쳐가 따라 가진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만일 따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이는 이유가 기록 되어야한다.

12.6
분석과 하이 레벨 디자인 외에도,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는 시스템의 임플라멘팅에서 역할을 한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중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프로그래밍 기술에 맞추고, 신기술과 새로운 기본사양들을 알고 있어요 할 것이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쳐와 상세한 디자인 사이에 항상 확실한 차이가 없다. 종종 아키텍트는 시스템의 위험도가 높은 부분들을 상세히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왜냐 하면, 디자인 이행이 알려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우레벨을 상세히 봄으로서 초기의 디자인 개념을 갖는데 도울 수 있다. 아키텍트는 시스템의 수직 박편을 이행 함으로서 이행에 따른 위험을 감축할 수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아키텍트가 이행한 것이 팀 멤버들을 교육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적인 개념으로 문제를 접근하면 아키텍트가 초기의 배이스 클래스들을 디자인하고 코드를 임플레멘트 한것들이 다른 사람들이 배우는 예제로 사용 되는 것이다.

12.7
아마도 소프트웨어 아키텍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를 지지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는 당신의 조직의 중요한 재산이며, 아키텍트로서 당신은 이 재산의 가치를 조직이 상기 시켜야 한다.
당신은 현존 하는 소프트웨어의 아키텍쳐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아키텍쳐를 개발할 수도 있고, 합쳐서 제품군 아키텍쳐 (product-line)로 만들어 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또한, 경제적으로 수지에 맞는 제품군 아키텍쳐를 만들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프로덕트 메니져들을 자연스레 한가지 프로젝트에 몰두하지만, 아키텍트로서 당신은 제품의 굴레를 벗어나 다시 쓸 기회들을 봐야 한다. 아키텍트는 현존하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쳐 기술들과 새로이 나타나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쳐 기술들을 지지하고 평가해야 한다. 당신은 연구 결과와 다른 기관의 경험의 도움도 받아 이 기술들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들 외부의 결과와 경험들은 당신에게 경영진들이 조직네에 새로운 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재공한다.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는 또한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를 개발 과정에 수용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쳐 디자인 과제와 이에 따른 결과들을 조직네의 기본적인 운영 순서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더 하이 레벨의 아키텍쳐 디자인 서류를 만드는 것을 의미 할 수 있으며, 좀더 형식적인 기관에서의 아키텍쳐 디자인 검토를 의미 할 수 있다. 아니면, 여러 개의 조직과 인터페이스의 기초가 되는 프로토 타입들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아키텍트는 아키텍쳐 디자인 검토를 지지해야하고 아키텍쳐 서류의 표준을 세워야 한다.
당신의 조직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발전 그룹이나 챔피언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프로젝트 중 문제가 많은 프로젝트에는 역할이 확실한 아키텍트나 역할이 확실한 임플러맨팅을 위한 개발 단계가 존재치 않는다.
설사 당신의 프로젝트에 공식적인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권한을 가진 정식적인 자리가 아닐 수 있다. 당신은 프로젝트 메니져와 함게 일을 해가며 당신의 의미와 역할을 인증 시킬 필요가 있다. 않그러면, 프로젝트가 압력에 놓였을때, 당신의 역할은 단순히 위기들을 차례 차례 맞는 것 외에는 아키텍쳐로서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야가 넓은 아키텍트 없이는, 종종 아키텍쳐는 단기의 편의 사항이 장기에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키텍쳐는 서서히 원래 추구했던 디자인에서 다른 제어가 힘들은 디자인으로 넘아간다. 그리고는 이행되는 시스템의 비젼이 사라지게 된다.

12.8
만일 지금 막 소프트웨어 분야에 뛰어들어 앞으로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당신은 우선은 전문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되는 것에 관점을 두어야 할 것 이다. 무엇 보다도 경험이 유능한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를 걸으면서 당신은 기술적인 면과, 리더쉽, 대화 능력, 그리고 인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처음에 개인 공헌자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서 원로 소프트웨어 앤지니어가 되어 나중에 팀리더로서의 책임을 맡을수도 있다. 당신은 늘어나는 책임과 더 도전적인 작업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상적으로, 당신은 경험이 많은 아키텍트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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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을 사용할 때

Refactoring과 Pattern의 관계는 모순적이면서 의미심장합니다.
전통적인 방법론적 접근법은 강화된 디자인에서 S/W를 구현하는 반면 XP 적인 접근법은 구현 먼저, 좋은 디자인 도출의 방법입니다.
GoF가 설명했던 Design for change와 Target for Refactoring의 관계와도 맥을 같이하는데요..  
즉, 모든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도록 패턴들을 적용해서 절대 뚤리지 않는 방패(디자인)을 만들 것인가? 시행착오를 통해 정제되는 모델을 패턴으로 인도할 것인가? 의 접근법의 차이 입니다.
상철님이 아래 게시판에서 말했던 대로 이런 서로간의 다른 목적과 접근법이 상반된 둘 간의 허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패턴의 사용 시점은 분석모델 설계, Architecture 수립단계, 디자인 단계, 구현 단계에 걸쳐 각각 Analysis, Architectural, Design, Idiom 패턴을 적용합니다.
하지만 '얼마만큼 적용할 것인가?'가 관건이 될 겁니다.
패턴을 배웠던 초창기에 오버하게 패턴을 적용해서 예쁜 디자인을 만들고 구현시에 감당치 못한 군더더기 때문에 자승자박했던 경험이 많았습니다.
이런 전차로, 제 사견으로는 예측가능하고 이 중에서 특히 진짜로 발생할 사실들에만 패턴을 적용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발견되는 예측 못 했던 문제들을 Simple한 코드로 구축하고 (XP의 접근법 처럼) 어느정도 완성도가 이뤄졌을 때 패턴을 적용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개발자의 능력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경험 많은 개발자들은 패턴을 적용할 범위가 넓겠고 그렇지 않은 개발자들은 적을 겁니다.
즉, 아무리 Pattern Vocabulary나 Pattern System, Pattern Laguage를 많이 확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선견지명이 있거나 신기 있는 개발자가 아니면 보배로 만들기 힘들다는 거죠..
- 소프트웨어의 위계적 고찰에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바로 이 부분이 소프트웨어적 접근법에 회의를 느끼는 부분이지만요..

물론 초창기 패턴의 교육시에 패턴의 장점을 침소봉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패턴이면 다 돼!!' 라는 투의 매력을 강조한 반면 적용 시 주의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던 탓이겠죠..
"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을 버려라"란 왕필의 말 처럼 패턴을 배웠으면 최대한 패턴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게 패턴을 소개해줬던 재하님의 "패턴이 지은 죄는 패턴으로 닦아라!!" 란 말이 기억납니다.
이제 RF란 든든한 도구가 생겼으므로 "패턴이 못 본 구멍은 RF로 막아라!!"라고 수정하고 싶은데요.. 패턴과 RF와의 관계가 바로 이런 조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전제라면 패턴을 사용할 단계는 RF를 기준으로 개발전과 후라는 symmetrical한 구도가 되는군요...

하지만 여기에 시행착오와 선경지명이라는 인적인 요소가 자리하는군요..
바로 이 구멍을 설명할 수 있고 밝혀진다면 아마도 이 논의는 종결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위의 Pattern과 Refactoring에 투영된 접근법 (RUP vs. Xp)전쟁은 이제 변증적인 방법을 모색할 단계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objectworl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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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패턴 랭귀지가 되려면 어떤 걸 만족시켜야 하나요?

objectworld.org에 종호님 질문(패턴 랭귀지가 되려면 어떤 걸 만족시켜야 하나요?)에 대한 답.

안녕하세요? 종호님..... UML1 스터디에 안 나간지 오래되서 얼굴 못 뵌지 꽤 됐네요..
잘 지내시죠???

패턴 랭귀지의 조건을 규정하기란 퍽 힘든 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개념에 대한 정의는 규정 보다는 직유로 많이 표현하고 또, 정의되었다 해도 단체나 학회마다 의견이 다를 뿐더러 너무 추상적이어서 정확한 이해를 유도하기 힘듭니다. - 아마도 오류, 예외 가능성을 배제하다 보니 추상화 레벨이 엄청 높은 정합적 정의를 내리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전차로 저 또한 패턴 랭귀지에 대한 '이미지 설명' 정도 밖에 못 할 것 같은데요...


"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 - Ludwig Wittgenstein or "No Pattern is an Island"


패턴 랭귀지를 묘사 할 때 흔히 'Domain Specific Language'라고 합니다.
특정 도메인에 등장하는 패턴들의 집합으로서 도메인의 지적, 경험적 자산을 정리해놓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턴 랭귀지는 단순히 특정 도메인에 등장하는 패턴들을 서술 하지 않고 패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No Pattern is an Island)
하지만 "No Pattern is an Island"란 단어는 그다지 생경하지 않지요? GoF의 Design Patterns 에서도 등장한 개념입니다.
GoF의 Pattern Vocabulary 개념과 다른 점은 패턴 랭귀지에 와서는 특정 도메인에 등장하는 문제점과 다른 문제점들의 상호관계를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패턴들과 다른 패턴들간의 관계로 매핑시킵니다.
즉, 하나의 Problem과 패턴의 관계는 1:1..n 의 관계가 되며 이 (1..n 개의) 패턴들이 다른 Problem에 대한 (1..n 개의) 패턴들과 상호관계를 갖게됩니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구성된 특정 도메인의 패턴 집합체를 패턴랭귀지라고 합니다.

상술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에서 어림잡을 수 있듯이 이런 각각의 (도메인에 대한) 패턴 랭귀지를 정복한다면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체계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겠죠...


패턴들간의 관계


패턴 랭귀지의 패러다임에 들어서면서 패턴에 대한 자산이 꽤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술했던 것 처럼 하나의 Problem에 하나 이상의 Pattern이 등장하게 되고 패턴들간의 관계도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데요..
패턴 랭귀지의 특징 중 하나가 이 패턴들의 다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 '관계'들을 설명하자면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1) 상생할 수 없는 관계 (재하옹에 의하면 경쟁관계) :
    하나의 Problem에 대한 같은 Solution을 갖는 패턴들의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자는 각 패턴의 Force에 따라서 하나의 패턴만 선택하게 되죠..

2) 포함 관계 :
    하나의 패턴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패턴(들)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Architectural Pattern과 Design Pattern의 관계가 이런 형태를 보이는데요... 이를테면 MVC 패턴은 이벤트 전달을 위해 Observer 패턴을 사용하고 또, 메시지의 detail한 부분과 처리의 추상화를 위해 Command를 사용하죠...

3) 사용 관계 :
    패턴이 처리를 위해 다른 패턴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2번의 [포함 관계]와 다른 점은 2번의 패턴들의 관계가 Aggregation 관계 라면 3번의 관계는 Association 관계 정도 되며 2번은 '구성'의 (sub 패턴이) 필수 요소인 반면 3번의 경우는 '처리'의 관점에서 다른 패턴을 사용합니다. POSA2의 예로 Reactor가 Connection에 대한 처리를 위해 Acceptor-Connector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 2,3번의 다른점을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군요.. ^^;

4) 인접 관계 :
    패턴들 간의 Sequencial Cohesion을 갖는 경우입니다. J2EE 패턴의 경우 Business Delegate에서 클라이언에게 비즈니스 서비스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고 Business Delegate는 실제 서비스 처리를 위해 Session Facade에게 위임하는 경우입니다.

끝으로 Douglas C. Schmidt 박사는 패턴들간의 관계를 위해서 다음 두가지 스텝을 밟는다고 합니다.
1) Identify pattern relationships.
2) Define pattern ord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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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어에 대한 생각

RUP에서나 Xp에서나 아키텍처를 논할 때 메타포어를 이용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공감대 형성을 위해 즉, 인식이 적은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잘 알고 있는 개념이나 형상을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하지만 메타포어의 오용으로 많은 혼란과, 더불어 비생산적인 소모를 하게 되는데요...

메타포어를 사용한다면 공감대가 형성된 대상을 적용해야 할 겁니다. class를 설명하기 위해 이데아를 메타포어로 사용한다면 이데아를 모르는 청자는 class를 이해하기 위해 더 큰 짐을 지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다음으론, 메타포어를 공격할 때는 메타포어로 적용한 context 안에서 해야할 것입니다.
Brooks의 No silver Bullet을 논하면서 소프트웨어 공정과정에서의 많은 난점들과 늑대인간과 다른 점을 공격한다면 피곤해지죠.. ^^
사실 metaphor는 옳은 표현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메타포어는 의미상 직유(simile)이지 은유가 아닙니다.
끝으로 메타포어 사용은 쉽고 개념적 유사도가 높아야 할 것입니다. 잘 못된 메타포어로 대상을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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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에 대한 위계적 고찰


패턴의 설명을 일축할때 신상호님이 말했던 '패턴은 우라다'란 명언을 사용합니다. 패턴은 흔히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일반적인 문제와 요구영역에서 해결책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패턴을 디자인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물론 상당부분 디자인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POSA 1(Pattern Oriented Software Architecture)[1]의 분류처럼 Architecture, Design, Idiom의 단계와 범위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Process Pattern[2]이나 Analysis Pattern[3]에서 처럼 소프트웨어 공정과정에서 패턴을 적용하기도 합니다.

좀 더 영역을 확대한다면 형태와 행동을 갖는 모든 것이 패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데의 형이나 태권도의 품세, 태극권의 식(式)은 유명한 패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패턴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위해선 패턴의 아버지인 알렉산더의 말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Each pattern describes a problem which occurs over and over again in our environment, and then describes the core of the solution to that problem, in such a way that you can use this solution a million times over, without ever doing it the same way twice”- Christopher Alexander [AIS+77]


하지만 패턴이란 무공을 펼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구에서 맛세이(=찍어치기)를 하기 위해서 300 다마 정도 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나 당구공을 찍어칠 수 있지만 찍어칠 때를 구분하는 것과 때를 안다 하더라도 적절히 적용하기란 아무나 할 수 없죠... 그래서 Fowler는 패턴을 '반쯤 익은 빵'으로 비유합니다. 나머지 반은 내가 지지고 볶아야한다는 거져...

여기에 패턴의 위력과 허수가 존재합니다. customizing해야만 쓸 수 있는거져... 왜냐하면 패턴은 일반적인 내용을 말하지만 나의 컨텍스트는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참고로 패턴적용시에 도움이 되는 항목은 - GoF 분류법 기준으로 - Applicability, Consequences, Implementation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 Structure와 Sample Code는 더욱 혼선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본인도 그러하거니와 패턴을 적용해서 패턴을 욕하는 대부분의 사례가 이 허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적용할 경우와 적용법을 모르고 Structure로 대들었을 때죠..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

근래들어 패턴의 이런 모습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사실 패턴 뿐만 아니라 Software Engineering에 대한 회의인데요.. '적용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공학적'이라 할 수 없다. 적어도 공학이라 한다면 A가 해도 B가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하지 않은가?'란 내용입니다. Software Engineering적 접근은 모든 경우의 수를 predictable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을 해치울 수 있는 준비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분히 공학적이고 기계론적이죠..
하지만 대부분 '모든 것'에 대한 범위나 정도 설정은 겪고나서 정의/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Software Engineering은 Software Engineering Oriented의 성격이 강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뉴튼과 칸트의 출현은 모든 기계론적 세계관을 일단락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성격을 오성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떨어지는 사과 하나도 역학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런 가정과 전제에서 인간의 인생까지도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계론을 결정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사실 Software Engineering의 패러다임들은 인문학과 다른 학문의 그것을 많이 차용한 듯 합니다. 50년을 조금 넘는 역사의 문제가 크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는 무엇이 아쉽습니다. 더구나 Software Engineering 노력이 칸트나 뉴튼이 완결한 세계관에 이르지도 못 한다는게 거듭 아쉽습니다.

다시 패턴의 문제로 돌아가서 패턴은 이런 Software Engineering의 성격을 그대로, 정확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근래들어 전술한 생각과 함께 들었던 회의는 패턴이란 현상의 원리를 정의하는건데 본질에 미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패턴이란 반복적이고 유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지 않는가? - 사실 이 논의를 위해선 현상과 본질, 그리고 원리에 대한 심도있는 개념정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유보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본질, 즉 원리안에 원리가 밝혀진다면 구력 30과 500이 같이 맛세이를 쳐도 같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


[1] Pattern-Oriented Software Architecture, Volume 1: A System of Patterns by Frank Buschmann (Author), Regine Meunier (Author), Hans Rohnert (Author), Peter Sommerlad (Author), Michael Stal (Author)

[2] Process Patterns, : http://www.bell-labs.com/user/cope/Patterns/Process/index.html

[3] Analysis Pattern, Reusable Object Models (Object-Oriented Software Engineering Series) -- by Martin Fowler;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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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젊은 활동가의 성장 체험기) 82∼102 P
                                  - 교육출판기획실 엮음 / 도서출판 푸른나무

==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

유 시 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꺽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어나운서와 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 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 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 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 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 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나가는 나라. 이런 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 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 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 스케치북과 포스타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 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 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 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 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는 나는 의문을 품었다. "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 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 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 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 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 나는 일간신문에 기둥만한 활자로 박혀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 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 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성루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 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 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 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 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 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 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 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어머니가 장사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준 아버지,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받고 소외당한다는 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 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 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 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 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 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서 남짓하고 그거 교사와 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 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 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 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 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 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 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 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 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 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 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 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 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 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 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 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 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 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 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 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 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 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 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 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 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 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 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 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 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 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 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 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 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 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 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 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 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 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 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 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 "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 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 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 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 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 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 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 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 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 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 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 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 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 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 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 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 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 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 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 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 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 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 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으레껏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 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덩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음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 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 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 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 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 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 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 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취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해산되고 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 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 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 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 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 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 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 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 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달 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 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지역 민주노조 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 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 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 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 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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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씨의 <항소이유서>

내가 이 나이때 뭐 했던가?
지금 내가 (그래도) 이나마 민주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멋있는 386세대들이 있었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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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時敏의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로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슬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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