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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05
    까뮈와 나 1
    free-vahn

까뮈와 나 1

까뮈와 나


사실 아직도 사춘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나의 사춘기의 종결을 긋는 시점은 까뮈를 알았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권태와 무력함으로 일관했던 지진한 시간에 끝없이 함몰했던, 그리고 나에 대한 어떤 정의의 시도에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 했던 답답함의 연속에서 까뮈는 내게 다가와 '너는 이방인이야'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랬던 것 같다. 「이방인」을 읽을 때, 뫼르소는 나였으며 「페스트」를 읽을 때, 타루는 '나'로 이입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까뮈를 통해 내가 누구고, 나는 어떤 세상에 던져져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친절하게 알아갔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까뮈가 말했듯이 "(뫼르소는)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그리스도"... 당시 까뮈는 일개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이상으로, 내게 하나의 종교적 의미였다.


까뮈와 실존주의

까뮈를 말 할 때 실존주의를 말해야 하고, 더불어 사르트르를 말해야 하는 건 하나의 공식처럼 느껴진다. 약간 식상하기까지한 이 공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뮈를 설명하는 좋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까뮈를 이해하는 좋은 주제이기 때문에 나또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두 개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심리적, 이성적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혁명으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의지했던 유럽은 세계대전을 통해 이성의 무기가 얼마나 더 잔혹하며 이념의 싸움이 얼마나 더 괴로웠던가를 절감했다. 믿었던 유일신의 배신?

당시 지식인이 찾은 새로운 신은 실존주의였다. 실존..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은 우연히, 이유없이 세상이란 곤간에 던져진 thing이었던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역학에 그저 흘러갈 뿐이고 (퇴락), 어떤 사람은 마치 로빈슨 쿠르소처럼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세상을 재정의해 나간다. (실존)

사르트르는 실존에 대해 명확한 명제를 제시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가령, 사물에 경우 의자란 존재는 목수의 머리(이데아)에 이미 그 본질이 구상되고 목수란 도구를 통해 실존으로 실현된다. 반면 인간의 경우 실존한 인간 이외에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어떠한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까뮈에게 있어서의 실존은 무엇일까?
일단 까뮈는 스스로 실존주의자를 부정하고 있지만 실존주의 담론에서 항상 그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은 지극히 실존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 시대 패러다임의 영향일까? 따라서 까뮈의 철학적 문제를 '실존'이란 코드에 의해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까뮈의 실존은 '부조리'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하지만 인간은 합리적이고 정의를 갈망한다. (그리고 우습게도 인간이 세상을 만든다.) 이 두 개의 모순된 상황에서 인간은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본다. 부조리는 바로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thing 이다. 가령 전쟁, 페스트, 죽음.. 같은 생로병사 모든 것이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으며 이런 관점에서 세상은 부조리 투성이다.
모든 인간은 부조리를 인식한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부조리를 인정하기도 하고, 어떤 인간은 부조리를 회피한다. 반면 어떤 인간은 부조리에 대해서 저항하는데 이 '저항'이란 부조리한 세계(환경)와 부조리하지 않은 자신(의 이성) 사이에서 자신을 찾고 확인하는 행위를 말한다. 까뮈의 실존을 논할 때 실존은 곧, 저항이라는 이음 동의어로 설명된다.


이런 명제들 사이에서, 무엇 보다도 당시 이념의 카오스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까뮈와 사르트르와의 논쟁은 주목된다. 사실 둘은 절친한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념 차이로 서로를 등져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다.

이 담론은 깊히있게 생각해볼 부분인데 일단 지금의 주제는 까뮈므로.. 이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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