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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3

안철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가끔 심각하게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아무리 정교한 방법론을 도입하든, OOA/D 기법을 따르든, 좋은 COTS를 사용하든... 엔지니어로서 내 생활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이 업계 시스템의 구조를 뜯어고쳐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IT산업은 장인보다 '어떤 스펙을 만족하는 기술자'만을 원하고 있고 창의적이거나 슬기로움은 그 스펙에 들어가지 않는 듯 보입니다.

여하튼.. 이 기사를 보고 아침부터 입맛이 쓰네요... - 빌어먹을 자본(지상)주의
주로 경제/경영 얘기라서 주 문단만 먼저 뜯었습니다.

"투명사회 협약이 발표된 얼마 후에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안철수씨가 마흔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과거에 “빌 게이츠가 와도 한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란 말을 했다. 그가 떠나면서 다시 뼈아픈 한마디를 남겼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기술자 수와 그 학력·경력까지 요구하고, 심지어는 납품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감사까지 하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려도 중소기업들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종업원에게 충분한 혜택을 나누어 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게 모두 “사회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했다. 투명사회 협약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에는 정치인들이, 왼쪽에는 재벌총수들이 손에 손을 잡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안철수 사장은 대통령 왼쪽에 있지 않았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법 정치자금의 면죄부를 받았거나, 소액주주의 재산을 훔쳤거나 또는 안철수연구소와 같은 중소기업들의 피를 말린 재벌총수들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


============================= 전문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3/001000000200503221833075.html)


안철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 장하성 / 고려대 교수·경영학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새롭게 시장이나 기업을 규제하는 정책이 없었다. 경제개혁을 했다고 내세울 만한 정책도 없었고, 소득분배나 복지증대를 배려하는 특별한 정책도 없었다. 특정 기업에 정치적 특혜를 주거나 반대로 특정 기업을 정치적으로 압박한 사례도 없다. 노동정책에서는 노·사·정이 아직 자리를 함께하지도 못할 만큼 무력했다. 정부 출범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 때 약속했던 경제개혁을 버리고 현상유지를 택했다. 그리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자 조급해진 정부는 다시 안정에서 성장으로 경제정책의 기조를 크게 바꾸었다.

그랬는데도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 보수세력으로부터 반시장적 또는 반기업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마침내 정부는 기업도시나 경제특구와 같은 극단적으로 친재벌·친시장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서슬 퍼렇게 시작되었던 대선 정치자금 수사에서도 재벌총수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주었다. 공정거래법의 개정이나 증권 집단소송제 후퇴에서는 재벌들의 공개적인 압력에 굴복하는 수모까지도 감수했다. 누명을 벗으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정부의 애틋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들의 반기업·반시장 뭇매 때리기는 계속되고, ‘기업 지상주의’라고 불러야 할 만한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목적은 이익추구다. 따라서 기업한테 이익추구 행위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거나 윤리적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시장경제에 반하는 것이며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기업 지상주의다. 심지어는 아무리 좋은 외국 투자자라 할지라도 나쁜 재벌보다는 못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재벌 지상주의까지 판을 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돈 잘 벌고 일자리 많이 만드는 재벌들은 애국자이니 나쁜 짓을 해도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에 수반되는 책임은 일반시민이나 기업이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기업은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더구나 ‘정권은 유한해도 재벌은 영원하다’고 할 정도로 재벌들의 경제권력은 정부나 정당의 정치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 따라서 재벌들이 개인이나 중소기업보다 훨씬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기업 지상주의자들뿐 아니라 법원까지도 재벌이나 대기업에 적용하는 책임의 잣대는 개인이나 중소기업 것보다 크게 작다.

최근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시민단체 인사가 모여서 반부패 투명사회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부패와 불투명의 가장 큰 원천인 기업부분에서는 선언적인 내용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협약서명이 끝나자마자 협약 당사자가 “기업들이 과거에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잘못들은 국민적 합의를 거쳐 용서할 수 있다”며 ‘재벌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서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명사회 협약이 발표된 얼마 후에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안철수씨가 마흔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과거에 “빌 게이츠가 와도 한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란 말을 했다. 그가 떠나면서 다시 뼈아픈 한마디를 남겼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기술자 수와 그 학력·경력까지 요구하고, 심지어는 납품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감사까지 하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려도 중소기업들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종업원에게 충분한 혜택을 나누어 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게 모두 “사회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했다. 투명사회 협약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에는 정치인들이, 왼쪽에는 재벌총수들이 손에 손을 잡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안철수 사장은 대통령 왼쪽에 있지 않았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법 정치자금의 면죄부를 받았거나, 소액주주의 재산을 훔쳤거나 또는 안철수연구소와 같은 중소기업들의 피를 말린 재벌총수들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하성/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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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선생님 글 두편

출처 : oisoo's board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531&vnum=510&&page=1&ftype=0&fval=&backdepth=1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532&vnum=511&&page=1&ftype=0&fval=&backdepth=1

 

이분이 정치에 관련한 글을 쓴걸 간만에 봅니다. 고양된 맘을 약간 진정하시고.. ^^;

 

탐나는 건 다 니들 거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긴다. 마치 대한민국의 주권이 통째로 없어져 버린 느낌이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반성하자. 우리는 병들었다. 고름이 흐르는 자리에는 파리떼가 꼬이기 마련이고 파리떼가 꼬이면 구더기가 득시글거리기 마련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디가 곪아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한 마디로 정신계 전체가 곪아서 고름이 질질 흐르고 있다. 외모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내면의 부실이 외모지상주의로 나타나고 정신의 허함이 물질만능주의로 나타난다. 화농을 치료하고 파리떼를 박멸해야 할 젊은이들이 스스로 화농을 덧내고 구더기를 배양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무분별하게 외국문화를 동경하고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해 왔다. 반성하자. 거리 전체가 국적불명이고 생활 자체가 외래일색이다. 반성하자. 마침내 우리는 주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했다. 언젠가는 미국이 동두천을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고 러시아가 부산을 자기네 행정도시라고 우기는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세 개씩이나 수여하고 일류 명문대학에서 교수노릇까지 해먹었다는 작자가 식민지 역사를 은혜라고 표현하는 작태까지 서슴지 않는다.

군사력과 경제력만 국력이 아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국력이다. 후지산이 대한민국의 영토고 베이징이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이라고 우기거나, 만주를 회수하고 대마도를 집어삼키지는 못할 망정, 독도를 왜놈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다. 정부와 국민의 강경한 대응을 촉구한다.

 

 

꽃이 아니라도 좋으니 곧게 살고 싶구나.. ^^

 

 

할미꽃

 

나도 허리굽은 그 나이까지 꽃이 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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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동영상] 최일구엥커어록

정말 재치있으시네요.. ^^ 표정하나 안 변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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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2 - 소유냐? 존재냐? (2)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생존을 위해 적당한 이기적 본능을 갖고 있다. 윤리나 질서, 규범 등의 사회 형성 체계들도 이 본질 위에서 구성되는 공존계 형식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를 통해 이기적인 소유양식에서 초월적인 존재양식으로의 진화를 제시하고 있다.

생존의 기제인 이기주의가 과연 나쁜 것일까? 소유는 배덕이 되는가?
그렇다고도 할 수 없지만 또 명확하게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유적 존재방식은 뭔가 좀 허무한 감을 준다.
"이기 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가 아닌 점유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 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소유적 실존양식은 어느순간 주어와 목적어를 역전시키는 증상을 보인다. 나의 만족을 위해 소유하지만 결국은 소유를 위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 입증하게 되고만다.
또한, 제화와 용역이 한정된 상황에서 소유를 위한 시스템에 속한다는 것은 경쟁이나 배척, 암수마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프롬은 이 부분에서 소유적 실존양식의 한계와 미숙함을 분석하고 존재적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를 문학에서 나타난 필자의 반응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1. 테니슨의 시

...
작은 꽃이여 -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2. 마쯔오 바쇼의 하이쿠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테니슨의 경우 나의 목적을 위하 뿌리째 소유하려 하지만 바쇼의 경우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나의 목적으로 타자가 희생되는데 반해 후자의 경우 서로 존재하며, 꽃은 보여주고 필자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의 세계에선 각 객체들이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소유는 타인의 희생, 또는 그 희생에 대한 대가(나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 메커니즘의 현재의 구현은 별로 공정하지 않다.

3. 반면, 괴테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발견

....
그런데 그늘 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송이 보았지.
별처럼 반짝이고
눈망울처럼 예쁜 꽃을.

그 꽃을 꺾고 싶었는데,
꽃이 애처롭게 말했네,
내가 꺾여서
시들어버려야 되겠어요?

하요, 꽃을 고스란히
뿌리째로 캐어,
예쁜 집 뜨락으로
옮겨왔지.
..

프롬이 말하고 있는 존재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

프롬은 1장을 통해 이런 소유와 존재적 실존의 일반적인 고찰에서 두 양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언어적 고찰,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사례, 성경에서 나타난 소유와 존재의 차이등을 통해 두 실존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 본격적으로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 모델까지 제시하고 있다.



무슨무슨 주의자들에게도 소유적 양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주의에 대한 집착이 만성화되어 교조적 태도를 보이는 현상을 갖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가 나의 이념이라는 주체의 산물에서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순간 자신이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버리는 현상이다. 또한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자신의 욕구를 가학적 금욕적 태도를 타인에게 강요하므로 배설하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가령, "모든 재산의 절대적 균등분배라는 의미에서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소유지향적 성향이 꺾이지 않았음을, 완전한 평등에 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소유지향성을 부인하고 있음을 노출 시킬 따름.. 진짜 동기의 역설적 표출 (중략) 어느 누구도 나보다 많이 가져서는 않된다...."의 경우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을 접했을 당시 내가 좋아했던 개혁이나 진보가 보수나 수구적 사회에서의 약자인 나의 불만에 대한 욕구표출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내면적 동기는 이거였는데 정의, 평등, 자유같은 정당성의 포장지를 외장하지 않았나 하는... (요즘은 심각하게 이 부분을 다시 복기? 하려고 한다.)


프롬이 존재적 실존양식을 제시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도 있는 것"
따라서 존재란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과 실존을 전제한다. 말 그대로 HAVE or DO  와 BE의 차이이다.
그저 있기만 하면 될 따름... 맘이 가는대로.. 진짜 내 내면적 주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단 사회적 허용범위에서...


또한 존재적 태도가 개인의 한계안에서만 가능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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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 박노자

처음엔 일개 논객으로 박노자 교수를 알았지만 관심을 더 할 수록 박노자는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진정한 한국인'으로 생각되어진다.
그가 연구했던 한국학이란 분야와, 더불어서 그가 갖고자하는 (현재는 단절됐지만) 한국의 내면적 정신을 보노라면 박노자는 '러시아가 준 한국의 선물'로 생각되기까지 하다.



박노자는 책 제목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 귀화 한국인이면서 한국 사람보다 더욱 한국을 잘 아는.. 그리고 북유럽(러시아)의 문화권에서 자란 이 분의 한국에 대한 관찰은 나에게 많은 반성을 하게끔 한다.

몇 번째 독후감 형식의 글을 올리지만 일부러 나는 책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기를 꺼려하고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유는 전체의 내용을 소개하기엔 시간과 노력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귀차니즘... ^^;) 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전체 내용을 소개한다면 독자들이 이 책들을 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책은 한국인으로서 나를 많이도 반성하게 하거니와 한국의 고질적 질병을 많이도 생각케 한 책이었다.

요약하건데 이 책의 내용은 전근대를 아직 벗어나지 못 한 한국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 하다.


국가주의

우리는 유신에 의해 (그로 비롯한 스타 아저씨들의 정권..) 우리의 관념 전부를 쇠뇌당해왔다. 냉전적인 사고방식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인 행복의 가치, 패션의 취사선택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분 (마치 인공유전자 이식처럼) 우리의 모든 부분을  국가적 목적성에 의해 주입되어왔다. 더구나 우리가 존경하고 혹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대상 마저도 국가에 의해 치밀히 통제되어왔다.
미래를 지배하는 사람은 교육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즉, 교육을 통재한다면 지금의 우리들처럼 (나와 같은 연배의 사람이라면 빨갱이는 무조건 나쁜 존재로 생각하듯이..) 왜곡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가 처음에 제시하는 우리에 대한 쇠뇌는 한번 곱씹어볼 만 하다.

"그들에게는 민족과 단군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족과 단군의 이름으로 어린이들에게 국가, 즉 국가의 지배층에 맹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 히틀러의 '오딘신'숭배나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의 단군 숭배조차도 역시 진보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 이순신이나, 단군, 세종대왕 같은 분들의 아낌없는 찬양은 사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목적이 강함을 알아야 한다. 마치 미국에서 워싱턴 대통령은 거짓말도 안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듯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마저 우리가 쇠뇌에 의해 존경하게 됐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금 객관성을 가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 이런 최면을 건 주체의 의도를 읽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뻔하다. 군복 출신의 아저씨들의 자신의 정당성, 목적성을 위해서 남한에 대한 근본적인 집단 최면의 시도였으며 결과는 정말 효과적이었던 듯 하다.


교우이신

제일 가슴 아프고 공감이 갔던 부분이 박노자 선생의 '교우'에 관한 내용이다.
일찌기 유교권에서는 '도반'이나 '교우'의 개념이 상당히 중요시 됐는데 "'도반'은 불가 용어로 깨달음을 향해 같은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 정신적 친구"를 의미하고 "'친교', '교우'의 개념의 내면적 논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에게서 본받을 것을 본받아서 자신의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성립한다." 하지만 (화이트인) 박노자의 경험으로 아주 황당한 사건들을 맞게 된다. 길을 가다가 전철역에서 한국 대학생들에게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켜주면 (화이트는 무조건 영어권 민족이냐??) 자신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주겠다는.. 그래서 우리 서로 친구하자는 '거래'를 받는다는 것이다.
박노자로선 무척 황당할 수 있는 내용이다. 러시아에서 한국을 배운바로는 한국은 교우이신하는 미덕이 있는 나라인데 현재의 모습이란 언어 (인종)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버린 상아탑(?)의 노예들을 겪은 것이다.
1차 집단인 친구관계에서 일종의 거래와 give and take의 거래가 행해지는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가 되어버렸으며 이런 천민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우리의 일상들을 박노자 선생은 "서구의 인권존중이나 준법정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서구 중산층 젊은이 대부분의 현실 순응적인 (출세, 경쟁, give and take..) 생활태도를 그야말로 '모범'으로 생각하고 익혔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교우이신이란 무엇인가?
"옛날에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친구가 무엇일까? 서로의 효용가치 + 알파적인 존재밖에 되지 않는가?
다시금 고찰해봐야 할 문제 같다.


이 밖에도 권위주의, 군대문화, 폭력, 교육.. 등의 다양한 부분에서 한국의 전근대적인 모습들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해 준 것에 감사하며 끝으로 우리나라의 인종주의에 대한 소개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천민 자본주의적 인종주의

사실 (난 외국에 나가보지 않았지만) 선진국민들은 우리나라나 동남아인이나 다 거기서 거기로 생각한다고 한다. 되려 동남아인들의 인도적 철학이나, 불교에 기인한 자비적 태도는 오히려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우리나라보다 더 우월하게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모든 가치를 '부가 있음과 없음'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우리들의 경제적 기준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몽골인이나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내면적인 멸시는 그들의 인격이나 학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국적의 경제수준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한 인격을 갖고 있다. 가령 임금을 떼먹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한국 경영자, 관리자,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국가에게 그들은 (물론 '모든 그들'이 아니겠지만..) 인격적으로 측은한 생각을 한다고 한다. 자신을 학대하는 대상에게 인격적인 측은함을 갖을 정도로 그들은 성숙하고 선한 인격을 갖았다는 것이다. 반면 상술한 skin적 사대주의에서 묘사했던 백인 우월주의 추종자로서의 한국을 대치했을 때 정말.. 우리들의 현주소는 쪽팔리기 그지 없는 모습이다.
또한 북한이나 조선족, 후진국 이주 한국인에 대한 우리나라의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  "한국의 '민족' 개념이 몽골과 달리 '국가'와 '국적', '경제력'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돈이란 기준으로 세상을 아주 편하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듯 하다. 민족이나 인권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끝으로 놀라운 사실은 유럽이나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대학은 그들의 장래와 상관이 크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이다. 즉, 그들이 컴퓨터를 공부하는 이유는 취업이 잘 되고 얼마 정도의 수입을 보장해서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란 학문에 흥미가 있어서..라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박노자 같은 수재가 허접한 한국학 같은 학문에 관심이 갔겠는가?? ^^;;)
생존과 계급, 출세를 위해 공부해야하는 우리나라의 교육구조를 대입해 봤을 때 여간 부러운 부분이 아니다..

여하튼..  이 책을 통해 박노자의 인격과 이성적 기품에 대해서 감복했고 왜 그가 왜 한국에서 못 버티고 오슬로로 향했는지 이해가 가기까지 하다..


이 책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근대 이후의 한국과 전통적 한국과의 차이를 분석하고 우리가 수용해야 할 한국인으로서 우리 모습 찾기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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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러셀

버틀란트 러셀 경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선언은 의미적으로 상징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
우선 나부터도 러셀처럼 영국 귀족으로서 위대한 학자로서 유럽의 '큰 틀'을 이루는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관심이 많이 가가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은 56년에 출판되었고 현대 신학적 맥락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지만 원리적인 측면에서 설득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부터도 이 책을 읽은 동기가 위대한 학자인 러셀이 (말 안해도 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선언을 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그 특유의 탄탄한 근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 만연된 기독교와는 전혀 내용이 다른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정체성을 전제로) 이 글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책은 러셀의 대표적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러셀이 목적성을 갖고 차근차근 기술한 내용이 아니라 여러 논문과 학회발표를 취합한 내용이다.
러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건데 (촘스키에서도 그랬거니와) 도무지 이 사람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는 얼마나 광범위한지 체계적인 사례들로 독자를 압도한다는거다. (부럽다..^^;)


이 책의 서두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여러 시도를 아주 심플한 내용으로 깨고 있다.
첫째, '근본적인 원인론'에 대해선 모든 사물엔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출처를 쫓자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근본적 원인은 신(God)이라는 결론에 대한 반론이다. 이 기제에 의하면 근본적 원인도 역시 원인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명을 하고 있다. 가령 힌두교도에세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는데 그렇다면 '그 거북이는?'이란 질문에 인도인은 화제를 돌리자는 대답을 한다는거다. 추적적으로 존재의 인과적 근원은 밝힐 수 없을 뿐더러 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의 근원도 존재해야하며 이로써 이 명제는 거짓이라는 결론이다.
둘째, 자연법칙론이다. 이것 또한 '근본적인 원인론'과 맥을 같이하는데.. 기계론적 세계관에 편승해서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데 있는데, 그렇다면 '그 법칙을 만든 하나님은 그런 자연법칙을 만들고 다른 자연법칙을 만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자연법칙엔 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 또한 어떤 법칙을 따랐다는 유추가 성립되므로 그 법칙의 법칙에 데한 해명이 없다면 이 이론도 설득력이 없다는 증명이다. (역시 수학자다..!!)
셋째, 목적론.. 모든 존재는 그 존재에게 부여된 목적(용도?)가 있으며 그 목적의 주체이자 결정자는 하나님이다... 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KKK단이나, 파시스트같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러셀은 추궁하고 있다. 즉, 사회 반작용의 목적 또한 선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공의적이지 않다는 증명이다.
넷째, 신성을 위한 도덕론..
위에 열거한 세가지 이론은 칸트의 등장으로 모두 처분되었다. [순수이성 비판]... 하지만 칸트는 이를 초월한 또 하나의 논리를 만들었는데 도덕적 기준으로서의 신의 존재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신이 곧 도덕적 기준이 된다는 가설이지만, 이 또한 역시 어떤 주체가 선, 악을 구분짖는다면 그 주체는 초선적 존재가 되고,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 악의 의미가 아무 뜻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 악 (옳고 그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이전에 존재해야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다섯째, 불의 치유론... 이 세상은 정의가 존재해야 동작하는 시스템인데 이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가 필연적이란 견해인데.. '신성을 위한 도덕론'의 공격으로 상쇄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실.. 이 내용은 내가 기독교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해 신학서적을 통해 공격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임을 시인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기독교다'라고 말하는 내용과 거리를 멀리 한다. 내가 깨달은 기독교는 목적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헌금 의식이 내 존재적 행위일뿐이지 천국을 위한 보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강요된 헌금은 절대 하지 않는다.. 여하튼..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총체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책 전체를 일일히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몇 가지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아래 정리하겠다.
우선, 나와 러셀이 함께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게 대등하게 묶어버리다니... ^^;;) 성서 해석의 독점권이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 법전이 한문으로 쓰여있던 것 같이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육법전서나 신문을 읽는데 심한 장애를 겪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루터 이전..) 성서는 헬라어(그리스:신약)와 히브리어(유태인:구약)으로 기재되었다. 따라서 이 두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을뿐 아니라. 카톨릭 권력에 승인을 받은자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여기서 푸코의 담론적인 폭력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의지,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주체는 성서 해석권을 갖는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며, 이 전문가들은 종교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즉, 성서의 근본적 가르침과 무관하게 전문가 집단의 해석에 의해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미 본질적 신과 왜곡된 신과의 차이가 발생할 소지가 크며, 더욱이 심각했던 것은 이 전문가 집단(카톨릭 권력)이 이 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생활과 정치적 결정을 조종했다는 것이다.
즉, 신은 곧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되버린 기형적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러셀이 지적한 많은 부분 중에 하나를 더 설명하자면 기독교의 이성과 신심에 대한 것이다. 까뮈의 [페스트]에서 묘사된바와 같이 큰 전염병을 만났을 때 신부는 기독교인들을 회당에 모아 질병이 소거되길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이 기도는 고립된 상황에서 장시간(몇일, 혹은 몇달)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그 회당에 병원에 숙주가 있을 때 그 집회에 동참한 모든 성도는 감염되어 집단 학살?되게 된다. 하나님께 그 질병을 제거해달라고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앙이 있지만 지식이 없을 때 나타나는 사례이다. 이성이 급성장했던 데카르트 시대에 있어서 이성과 신앙을 균등화한 시도가 있었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이성의 공격에서 무방비한 상태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성의 공격의 허점을 신심으로 막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심의 영역을 초월한 이성적 증명은 기독교의 적이 된다.




사실 이 주제는 내가 의지를 갖고 (나도 기독교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러 측면으로 접근하고 싶은 화두 중에 하나이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여러 자료와 나의 결론을 이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구할 생각이며..
여러 러셀의 다른 생각들을 소개하고 싶지만 책 전체를 설명하는 것 같아 이쯤으로 접으려고 한다.

끝으로 이 책의 말미에 코플스턴 신부와 러셀이 나눈 논쟁 중에 (정말 감명 깊은 논쟁방식이었다..) 추천할 내용을 소개함으로 이 텍스트를 마치고 싶다. "우리는 필연적 존재인가? 우연적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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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앞으로 이 내용을 가지고 몇번의 제 작위적인 해석을 하겠습니다..

한 분야의 일인자가 그 분야에 대해 오랜 시간을 거쳐 깨달은 내용을 기술한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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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輪  書

序文

나의 병법을 '니덴 이찌류(二天一流)'라 이름한 뒤 수 년에 걸쳐 단련하여 내가 체득한 바를 비로소 문자로서 서술해 보려고 한다. 때는 강에이 20(1642)년 10월 상순, 규 히고의 땅 이와도 (岩戶)산[현. 구마모도시의 서쪽 아리아께 해에 면한 긴부(金峰)산 에 올라, 하늘을 요배한 다음에 관음을 요배하고, 부처앞에 나아갔다. 효고현 태생 무사, 신멩 무사시노가미(新免武歲守). 후지와라 겐싱, 60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병법, 무예의 길에 전념하여 13세때에 처음으로 결투했다. 그 상대인 신도 류(新當流) 아리마 기헤이라는 병법자에게 이기고, 드디어 16세때, 다지마국(효고현의 북부) 아귀야마라는 강 력한 병법자와 대적하여 이겼다. 21세때, 교또에 상경하여 천하의 무예장들과 만나서 몇 차례의 승부를 겨루었지만,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다. 이것은 13세에서 28,29세까지의 일이다.

그러나, 30세를 넘어서 스스로가 걸어온 행적을 뒤돌아보니, 본인이 이제까지 이긴 것은 결코 병법을 깊이 연구한 때문이 아니며,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닌 재능이 있어서 그것이 천리에 합당했거나 아니면 상대의 병법이 불충분했음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미숙한 점을 통감했다. 그 후에도 더욱 깊은 도리를 터득하려고 조석으로 단련을 거듭한 결 과, 스스로 병법의 진수를 터득하게 되었다. 5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 이래로 특별히 탐구할 길도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병법의 도리에 따라 모든 무예와 기능의 길로 임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에 대해 나로서는 스승이 없었다. 모두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도 불법이나 유교의 오랜 말을 빌리지 않고, 군기나 군법의 옛 것을 쓰지 않고 있으며, 이 '니덴 이찌 류'의 견해와 진실한 의미를 써 내려고 하늘의 도리와 관세음을 거울 삼아서, 10월 10일 밤, 새벽 4시에 붓을 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地의 장

대저 병법이란 무사가 지켜야 할 법칙이다. 무장인 자는 특히 이 법을 실행해야 하지만, 병졸 된 자도 또한 이 길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는 병법의 도를 착실히 터득한 무사가 별로 없는 것은 어쩐 일인가.

도(道)라고 하면 불법으로써 사람을 구제하는 길이 있다. 또한 글의 도를 바르게 하는데 유교의 도가 있기도 하다. 의사로서 많은 병자를 치료하는 길도 있으며, 혹은 가인으로서 가무의 길을 가르치기도 하고, 풍류인, 궁술가 기타 여러가지 예술과 기능의 길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각기 나름대로 연마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그 도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병법에서는 이것을 즐기는 자가 흔하지 않다.

무사의 도는 문무 2도라 해서, 이 두 개의 도를 진지하게 배우는 일일 것이다. 비록 이 길에 재능이 없어도 무사인 자는 각기 자신의 분수에 따라 병법의 도를 향해 분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 무사들은 무사의 신념을 그저 오직 죽음을 각오한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허나, 죽음을 각오한다는 점에서는 무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출가한 승려나 여인, 또한 모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의리를 알고, 수치를 생각하며 각자의 도를 완성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 한다는 것에는 그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사가 병법의 도를 행하는 것은 무슨 일에 있어서도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혹은 1대 1의 대결에서 이기거나, 많은 인원과의 싸움에서 이겨 주군을 위해,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름을 높여 입신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병법의 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서 병법을 배웠어도 실제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런 점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도움이 되도록 훈련을 쌓고, 어떠한 사태에도 소용이 되도록 가르칠 것, 이것이 바로 병법의 도인 것이다.

병법의 도란 무엇인가.

옛부터 도에 이른자를 병법의 달인이라고 했다. 무사로서 이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근자에 병법자라고 선전해대며 처세하는 자가 있지만, 그것은 그저 검술만을 애기한 것이다.

도기와 지방의 가시마 갓도리의 신관들이 묘싱(明神)을 전하는것으로서 검술의 각 유파를 세워, 여러 영지를 돌며 사람들에게 전수한 것은 근년의 일이다. 옛부터 10능 7예라 하는 것중에, 병법은 '리까다(利方: 이익을 가져오는 병법)이었다. 그러나 리까다는 무예임에는 틀림없지만, 검술만에 한한 것은 아니다. 검의 기술에만 의지하고 있을 동안은, 검술 그 자체의 진가를 알기도 어렵다. 물론 병법의 원칙에 합당할 리도 없다.

세상을 살펴 보건데, 모든 병법이나 기예를 앞세워, 마치 파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자기 자신을 상품화 시키는 인간이 많다. 여러가지 도구에 있어서도 그 기능을 보완하기보다는 팔기만하면 된다는 식으로 만드는 경향도 있다.

그러한 마음은 꽃과 열매의 이치로 따져 볼 때 꽃보다 열매가 적다고 할 수 있다. 열매보다도 꽃 즉, 보기에만 좋고 내용은 허실한 것과 다름 없다. 특히 이 병법의 길에 색을 칠하고 꽃을 피우게 하는 즉, 겉을 장식해서 화려하게 꾸며 기술을 자랑하며, 무슨 무슨 류의 도장이라 하면서 그 기예를 가르치거나, 혹은 배워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미숙한 병법은 큰 부상의 근원'이 되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처세하는데에는 '사,농,공,상'의 네가지 길이 있다.

첫 째는 농의 길로 농민은 여러가지 농기구를 갖추고 끊임없이 사계절의 바뀜에 마음을 쓰면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이 농사의 길이다.

둘 째로는 상의 길로써, 예컨데 술을 만드는 자는 각기 필요한 도구를 구해서 그에 상응하는 이윤을 얻어 생활한다. 어느 것이나 그 자신에 따라 이익을 얻고 그 이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상업의 길이다.

세 째로는 사의 길이다. 무사에 있어서는 목적에 따라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고, 그 무기의 특색이나 용법을 잘 분별해야 한다. 이것 이야말로 무사의 길일 것이다. 무사이면서 여러 가지 무기도 다루지 못하여, 무기 하나하나의 효용도 이해할 수 없다면 무사로서의소양이 없는 것이다.

네 째로는 공의 길이다. 목수에게 있어서 이 일은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며, 그 도구에 특성에 따라 잘 다루며, 도면대로 바르게 만들고 열심히 일을 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이 사,농,공,상의 네가지 길이다.

병법을 목수의 길로 비교해서 말해 보기로 하겠다. 병법을 목수에 비유한것은 어느 것이나 가문이란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정의 고관, 무관, 사가등이나, 혹은 무슨 유파, 무슨 형식 등은 반드시 가(家)를 형성한다. 한편, 가는 건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병법을 가문에 견주어 목수의 길에 비유한 것이다.

목수란 '크게 기교를 부린다'(일본어로 목수는 木工이라 하는데, 글 자풀이와 같음)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병법의 도는 '큰 것의 기교'이므로 목수에 비유해도 합당하다. 싸우는 병법을 배우려고 한다면 이 책을 읽어가며 잘 생각하고, 스승은 바늘이 되고, 제자는 실이 되어 부단히 연습을 쌓아야 한다.

병법의 도.

목수의 기술을 손수 잘 배우고, 설계를 잘 분별할 수 있으면 언젠가는 도편수가 될 수 있다. 목수의 소양이란 잘 잘라지는 도구를 가지고 짬을 보아 갈고 손질하는 것이 긴요하다. 그 도구를 써서 문갑(생활 용품이나 서화를 놓아 두는 것), 책상, 또는 호롱, 도미나 남비뚜껑까지도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목수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병정도 이렇게 않으면 안된다. 목수의 수칙은 일이 잘못되지 않는 것, 모서리나 각을 잘 맞추어 비틀리지 않게 하는것, 대패로 잘 깎는 것, 함부로 갈아대어 얼버무리지 않는것, 나중에 뒤틀리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병법의 길을 배우려고 하면 여기에 써 있는 것 하나하나를 유념해서 잘 검토해야 한다.

이 병법서가 5권으로 되어 있는 이유. 이 병법서가 5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병법을 다섯가지 말, 즉 地, 水, 火, 風, 空으로 써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땅의 권에서는 병법의 도의 개요를 나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검술만을 하고 있어서는 참다운 검의 도를 알 수 없 다. 큰 곳에서부터 작은 곳을 알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에 이른다. 곧은 길의 지형을 굳혀 나간다는 뜻에서 최초의 1권을 땅의 권으로 명명 한 것이다.

제 2의 물의 권

물을 본보기로 하여 마음을 물같이 하는 것이다. 물은 고정되지 않고, 사각의 그릇에도, 동그란 그릇에도, 그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한 방울도 되고 대해도 된다. 물에는 청록의 색깔이 있다. 그 맑음을 빌려 나의 한 유파의 병법을 이 권에 써보려는 것이다. 검술의 도리를 몸으로 터득해서, 한 적에 이길 수 있게 되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이길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적에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천만인에게 이길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무장인 자는 작은 것에 의해 대국을 판단하는 것이며, 이것은 1척의 원형을 크게 하여 대불을 건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것은 자세하게 나누어 쓰기가 힘들다. 하나를 알고 만가지를 해아릴 수 있는 것이 병법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한 유파의 것을 이 물의 권에 써 넣게 되었다.

제 3의 불의 권

이 권에서는 싸움이란 것을 썼다. 불은 크게도 작게도 될수 있고, 변화가 심하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불의 권에 전투에 관한 것을 쓴다. 전투의 길은 한 사람 대 한 사람의 싸움도, 만 명과 만 명의 싸움도 같은 것이다. 대국을 통찰하고 또한 세심히 잘 음미해 봐야 할 것이다. 큰 장소는 잘 보이기 쉽다. 작은 장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인원이 싸우는 경우에는 뜻하는 바 대로 급속히 움직이기 힘들다. 또 개인의 일은 그 사람의 마음 하나로 곧 변화하기 때문에 알기가 힘들다. 이런 것도 잘 생각해두어야 한다. 조그만한 일은 변화가 심하고, 일순간을 다투는 경우의 일이기 때문에, 평소 매일 잘 익혀서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싸우는 것이 병법의 급소이다. 그러기 위해서 전투, 승부에 대한 것을 불의 권에서 써 놓은 것이다.

제 4의 바람의 권

이 권에서는 나의 한 유파의 병법이 아니라, 세상의 병법에 대해 적은 것이다. 바람이라는 것은 구풍이라든지 신풍이라는 각각의 가풍등에 쓰이는 양식 같은 것으로, 세상의 병법에 관해 각 유파의 내용을 명확히 적어 놓았다는 의미에서 이 권을 바람이라고 한 것이다. 남을 잘 모르면 자기를 인식할수 없다. 그 인식이 부족하면 갖가지 일을 행하는 데 외도(바르지 못한 마음)라는 정신이 생겨난다. 평소에도 그 길에 전념해도 내용이 빗나갔다면 자신으로서는 바르다고 생각해도 객관적으로는 진실된 길이 아니다. 진실의 도를 깨닫지 못하면 처음의 사소한 빗나감이 나중에 크게 빗나가게 된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다른 유파에서는 병법을 검술만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 이치에는 맞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나의 병법은 협의의 병법(검술)과 광의의 병법(道), 두가지가 있다. 따라서 세상의 숱한 병법을 알기 위해서, 풍의 권에서는 타 류의 것을 적게 된 것이다.

제 5의 하늘(空)의 권

병법에는 깊은 뜻도 시작도 없다. 도리를 터득해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병법의 도에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맡기고 새로운 역량을 얻는다. 또 일에 임해서는 그 박자(리듬)를 알고 자연히 적을 치며 자연히 상대한다. 이것은 모두 공의 도이다. 이 자연과 진실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공의 권에 써 놓았다.

나의 병법을 니덴 류라고 명명한 이유

니덴 류라고 칭하는 것은, 무사라면 장수도 병졸도 2도를 허리에 차는 것이 의무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옛날에는 대도와 소도라고 했고, 지금은 검(가따나)와 곁꽃이(와끼자시)라고 한다. 이처럼 무사가 양도를 옆에 차는 것을 자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일본에서는 그 이유를 알든 모르든 2도를 허리에 차는 것은 무사의 도이다. 이 2도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 2도 1류라고 했다.  

창과 장검에 비하면, 대도와 소도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는 도구이다. 2도 1류의 진정한 도는 초심자일 때부터 대도와 소도를 양손에 가지고 수업을 하는 데 있다. 싸워서 한 목숨을 버릴 바에는, 가질 수 있는 한의 무기를 남김없이 이용해 보아야 한다. 무기를 도움이 되게 써 보지도 못하고 허리에 찬 채 죽는다는 것은 본의가 아니다. 그러나 양손에 물건을 갖게 될 경우, 좌우 모두 자유로이 움직이기는 어렵다. 내가 2도라고 한 것은 한 손으로도 대도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창, 장검 등 큰 것은 할 수 없지만, 대도나 소도는 어느 것이나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무기이다.

대도를 두손으로 쥐는 것은 말 위에서나 달릴 때, 수렁, 진흙구덩이, 돌밭, 가파는 길,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거북하다. 또 왼손에 활, 표창 등의 도구를 가지고 있어도, 대도는 한손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두손으로 한 자루의 대도를 겨누는 것은 실전적인 방식이 아니다. 만약 한 손으로 베어 죽이기 힘든 때는 양손으로 베어 버리면 된다.

한 손으로 칼을 쥐는것에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 한 손으로 자유롭게 대도를 잘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2도를 가지게 하고, 대도를 한 손으로 후려치는 것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 한 손으로 대도를 쥐게 되면 무거워서 휘둘러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활도 처음 시작할 때는 당기기가 힘들고, 창검도 휘두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도구에 익숙해지게 되면, 활을 당기는 힘도 강해진다.

대도도 휘두르기에 익숙해 지면 쓰는 법도 터득할 뿐만 아니라 힘이 붙어 휘두르기 쉽게 되는 것이다. 대도의 사용법은 빨리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 2의 물의 권에서 쓰기로하겠다. 대도는 넓은 곳에서 휘두르며, 소도는 좁은 장소에서 휘두르는 것이다. 우선 그 기능을 아는 것이 이 도의 기본이다.

니덴 이찌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니덴 이찌류의 도인 것이다. 대도를 하나 가지는 것보다 둘을 가지는 쪽의 이점은 많은 상대와 혼자 싸울 때, 또한 틀어박혀 있는 자(옥내 같은 좁은 장소에 틀어 박혀 있는 자)를 덮칠 때에 있다. 이러한 것은 여기에서 자세하게 적지 않겠다. 오직 한 가지 것을 가지고 만사를 잘 헤아려야 한다. 병법의 도를 터득하게 되면 무엇이나 다 보이게 된다. 잘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병법이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것

이 도(道)에 있어서는 보통 대도를 잘 다루어 쓸 수 있는 자를 '병법자' 라고 말하고 있다. 무예의 도에서는 활을 잘 쓰는 사람을 궁수라 하고, 총을 잘 쏘는 자를 포수라 하며, 창을 잘 쓰는 자를 창잡이라고 하고, 장검에 능한 자를 장검잡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도의 도를 익힌 다를 대도잡이라든가, 소도잡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활, 총, 창, 장검 등은 모두 무사의 도구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병법의 도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특히 대도에 한해서 병법이라 함은 그 나름대로 이치가 있다. 대도의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도는 병법의 기반이다.

대도의 덕을 터득하게 되면 혼자서 열 명에게 이길 수 있다. 혼자서 열 명에게 이기면 백 명이 천명에게 이기고, 천 명이 만명에게 이길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니덴 이찌류에서는 한 명의 상대도 만 명의 상대도 같은 것이라 여기며 검도에서 뿐만 아니라 무사가 깨달아 간직해야 할 방법을 모두 병법이라고 한다. 유자(儒者), 불자, 풍류인, 예법자, 연예자등의 도는 무사의 도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범주에서만 세상의 이치를 깨치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도를 넓게 알아서 어떤 일에도 대처할수 있는 것이 무사의 도이다. 인간으로서 각기의 도를 충분히 닦는 것은 중요하다.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

무기의 효용을 판단해 보자. 어떠한 무기라도 그 때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소도는 장소가 협소한 곳에서 적의 몸에 접근했을때 유리하다. 대도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보편적으로 사용 할 수 있다. 장검은 전장에서는 창에 뒤질 때가 있다. 창은 선수를 잡을 수 있지만 장검은 후수로 몰리게 왼다. 같은 정도의 기량에서는 창쪽이 약간 강하다. 창, 장검도 상황에 따라 좁은 장소에서는 이점이 적다. 틀어박혀 있는 자를 덮칠 때도 적당하지가 않다. 물론 적을 덮칠 때도 적당치 않다. 요컨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장의 도구인 것이다.

즉 전투시에 필요한 무기이다. 어쨋든 좁은 곳에서의 기예를 익혀야 하며, 자질구레한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무예로서의 본래의 길을 잊어버려서는 승부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활은 전투에서 밀고 당기는 진퇴에도 도움이 되고, 창, 칼 등보다 빨리 쏘아댈 수 있어서 야전에서는 특히 좋은 무기이다. 그런데 성의 공략이나 적과의 사이가 20간(약 36미터) 이상인 곳에서는 적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활을 비롯하여 여러 무예는 형식에 흐를뿐, 내용이 적다. 그러한 무예 기능은 요긴한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곽안에서는 총포보다 나은 것은 없다. 야전에서도 백병전이 이루어지기 전의 총포는 이점이 많다. 그러나 백병전이 시작되고서는 부적당하다. 활의 장점은 쏘아 댄 화살이 제대로 박히는지 눈에 오차를 보는데 좋다. 총포의 총알은 보이지 않는 것이 결점이다.

이것은 충분히 검토 할 필요가 있다. 말은 힘이 세고, 인내력이 있고, 나쁜 버릇이 없는 것이 요긴하다. 무기도 그렇지만, 총체적으로 싸움용으로는 튼튼한 것이 좋아서 말도 힘차게 달리는 것이 유용하며 대도와 소도, 창과 장검도 섬세한 것 보다 잘 드는 것이 좋으며, 활과 총도 강하고 쉽게 망가지지 않고 정확해야 한다. 무기는 어떤 것만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남아도는) 것도 부족함과 같다. 남의 흉내만 내지 말 것이며, 자기 몸에 따라 무기는 자기 손에 맞는 것을 가져야 한다. 장수도 졸병도, 특정한 것만을 좋고 나쁘다고 너무 가려서는 좋지 않다. 이 점을 잘 연구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병법의 박자에 대하여

무엇이나 박자라는 것이 있는데, 특히 병법에서는 리듬이 중요하며, 이것은 단련이 없는 이는 몸에 지닐수 없다. 세상에서 박자라는 것이 분명한 것은 무용이나 음악의 길인 악사와 관현의 박자 등이다. 이것은 모두 박자가 잘 맞음으로써 순조롭게 행해진다. 무예의 도에서도 활을 쏘고, 총을 쏘며, 말을 탄 때의 박자와 상태라는 것이 있다. 여러가지 무예나 기능에 관해서도 박자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모습이 없는 것에도 박자는 있다. 무사의 몸으로 벼슬을 하여 영달하는 박자, 실각하는 박자, 생각대로 되는 박자, 생각대로 안되는 박자가 있다.

또한 장사의 길에서도 동일하다. 재산가가 되는 박자, 재산가라도 파산하게 되는 박자가 있다. 각기 길에 따라 박자의 상이점이 있다. 사물에 발전하는 박자와 쇠퇴하는 박자를 잘 가려보고 분별할 줄 알 아야 할 것이다. 병법의 박자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맞는 박자를 알고, 맞지 않는 박자(상대의 흐름을 빗나가게 하는 박자)를 분간하고, 대소, 빠르고 느린 박자 가운데서도 알맞은 박자를 알고, 시간의 박자를 알며, 상대를 빗나가게 하는 역의 박자를 아는 것이 병법에서는 중요하다. 특히 이 역의 박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확고한 병법이 되지 않는다.

싸움터에서는 그 적의 박자를 알고서 이쪽은 적이 예상하지 못한 박자로써 당면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박자를 지략으로 발휘하여 승리를 얻는 것이다. 이 책은 어느 권에서나 한결같이 박자에 대한 것을 적고 있다. 쓰여 있는 것을 잘 음미하면서 충분히 단련해야 한다. 위에 서술한 니덴 이찌류의 병법의 도는 조석으로 끊임없이 행함으로써 다연히 넓은 마음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사람 혹은 한 개인적인 병법으로써 세상에 전해지는 병법이다. 내가 이것을 비로소 문자로 써 보인 것이 지, 수, 화, 풍, 공의 5권이다. 나의 병법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이 도를 행함에 있어서 유념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사심을 갖지 말것,
둘째, 도는 관념이 아닌 실천으로써 단련할 것,
셋째, 널리 여러 예능을 알 것,
넷째, 자기 직능만이 아니고, 넓고 많은 갖가지 직능의 도를 알것,
다섯째, 합리적으로 사물의 이해와 득실을 분별할 줄 알 것,
여섯째, 모든 일에 관해 직관적 판단력을 기를 것,
일곱째,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본질을 감지할 것,
여덟째, 사소한 현상도 그것에 의해 오는 원인이 있으며, 또는 생각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것,
아홉째, 힘이나 시간에도 한정이 있으므로, 도움이 되지 않는 필요 없는 일은 하지 말 것.

이상과 같은 유착을 마음에 깊이 새겨 두고 병법의 도를 향해 심신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이 도에 국한되지 않고, 넓은 시야로 진실을 규명하지 않으면 병법의 달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원칙을 배울 수 있게 되면 혼자서도 20명, 30명의 적에게 지는 일이 없다. 우선 항상 병법에 마음을 두고, 진실의 길에 힘쓰면 먼저 정신면에서 사람에게 이기고, 눈에 보이는 점에서도 남에게 이길 수 있다. 또한 단련에 의해 온몸이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신체적으로도 남에게 이긴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어찌하여 남에게 질 수가 있겠는가? 광의(廣義)의 병법으로써는, 부하를 훌륭히 부리며, 나의 몸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을 보호하여 천하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도에 있어서나 남에게 지지 않을 자신을 가지고, 자기 몸을 구하며, 명예를 올리는 것이야 말로 곧 병법의 도인 것이다.

水의 장

나의 병법 니덴 이찌류의 근본은 물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승리의 병법을 행하는 것이므로 물의 권이라고 칭하고, 나의 한 유파의 대도의 줄거리를 여기에 밝혀두고자 한다. 이 도를 세분하여 쓰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비록 말은 부족해도 그 도리는 자명하게 될것이다. 이 책에 써 놓은 것 모두는 한글자 한글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대충 파악만 해가지고는 잘못된 해석을 하기 쉽다.

싸움에 이기는 길에 대해서는 1대 1의 승부 겨루기처럼 써 놓았어도 만명대 만명의 큰 전투처럼 확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도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원칙을 잘못 보거나, 어찌할 바를 몰라서 헤매는 일이 있어서는 악도에 빠져들고 만다. 이 책을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병법의 진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책에 써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저 단지 써놓은 문서로 보기만 한다든지 흉내를 내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참으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한 것처럼 항상 심신 일체가 되어 잘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

병법에 있어서의 마음가짐.

'병법의 도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은 평소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 즉, 평상시에나 전투때에나 조금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넓은 시야에서 진실을 식별하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며, 마음이 치우치지 않도록 한가운데에 두고, 마음을 조용히 움직여 그 흔들림이 한순간도 멎지 않도록, 자유자제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것에 뜻을 두어야 한다.

몸이 정지해 있을 때에도 마음은 정지하지 않아야 하며, 민첩히 행동할 때에도 마음은 평정하게 하여 몸의 움직임에 끌리지 않도록 몸은 마음에 이끌리는 일 없이, 마음에 정신을 쓰면서도 기분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표면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밑바탕의 저인은 굳세게, 마음 속은 타인에게 간파 당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몸이 작은자는 몸이 큰자의 상태를 잘 알고, 몸이 큰자는 몸이 작은자의 상태를 잘 알아서 큰사람도 작은 사람도 마음을 곧게 가지고 자기자신의 조건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흐리지 않은 넓은 마음으로 대국적으로 사물을 생각해야 한다. 지식도 정신도 오로지 닦는것이 중요하다. 기예의 도를 체험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조그만 속임을 당하지 않게 된 연 후에야 비로소 전투때에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특히 전투할 때의 판단력을 기르려면 특별한 수련이 필요하다. 전쟁터의 바쁜 상황 가운데서도 부단히 병법의 도리를 규명하고,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잘 수련해야 할것이다.

전투할 때의 자세에 관한 요령

몸의 자세는 얼굴을 숙이지 않고, 쳐들지도 않으며 찡그리지도 않고 눈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눈은 얼굴에 주름을 지게 하지 않고 눈썹 사이에 주름을 지게 하여 눈알을 움직이지 말고 눈을 깜빡이지 않는 기분으로 평상시의 눈보다도 약간 가느다랗게 한다. 온화한 얼굴로 콧마루를 곧게 하고, 목은 약간 턱을 내미는 듯하는 기분을 가진다. 목은 뒷덜미를 곧게 하고 목 뒤에 힘을 넣어 어깨에서 전신에 평균적으로 힘이 걸리게 한다. 양 어깨를 내려 등줄기를 곧게 하여 엉덩이를 내밀지 말고, 무릎에서 발끝까지 힘을 넣어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배를 편다. 이것은 꺾쇠를 체우는 것이며 소도의 칼집에 배를 기대어서 띠가 느슨해지지 않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병법에서는 평상시의 몸가짐 상태를 싸울때의 상태라고 하며, 싸울 경우에도 평상시와 같은 상태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잘 연구해 보아야 할것이다.

싸울 때의 눈 동작에 관한 요령

싸울 때는 크고 넓게 보아야 한다. 관(觀)과 견(見)의 두가지에 관해서는 '관'은 눈을 세게, '견'은 눈을 약하게 하여 먼곳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몸 가까운 곳의 움직임에서 싸움의 기세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적의 대도의 방향을 잘 알고 조금이라도 적의 표면적 움직임에 현혹됨이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병법의 안목인 것이다.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눈동작의 터득은 협의의 병법(1대 1의 싸움)이나 광의의 병법(다수와 전투)에도 똑같다. 눈알을 움직이지 않고 양쪽 옆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갑자기 몸에 익히려고 함은 무리이다. 이 책에 적힌 것을 잘 익혀서 평소에도 이러한 눈동작이 되도록 하여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눈동작이 변하지 않도록 잘 훈련해야 할 것이다.

대도를 쥐는 법

대도를 쥐는 법은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들뜨게 하는 기분으로 한다. 가운데 손가락은 조이지도 느슨하게도 하지 말며, 약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죄는 기분으로 쥔다. 손안에 삐뚤어짐이 있는것은 좋지 않다. 항상 적을 벤다는 생각으로 대도를 쥐어야 한다. 적을 벨떼도 손의 상태를 바꾸지 말고, 손이 오므라들지 않도록 쥐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적의 대도를 치거나, 받거나, 누르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조절하는 정도로 대도를 쥐어야 한다. 베임새의 시험을 할 경우에도, 또한 실전의 경우에도 사람을 벤다는 점에 있어서 손안의 변함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고정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고정'이란 죽은 손이고 '고정시키지 않은 것'이 살아있는 손이다. 잘 터득해 두어야 할 일이다.

발의 동작에 관하여

발의 움직임은, 발끝을 약간 뜨게 하여 발 뒤꿈치를 세게 딛도록 한다. 발 동작은 경우에 따라서 크고 작고, 느리고 빠름의 차이는 있어도 자연스럽게 걷는 것처럼 한다. 뛰어오르는 발, 들뜬 발, 강하게 디딘 발의 세가지는 피해야 할 발 동작이다. 발 동작은 음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해진다. 음양이란 한 쪽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벨떼도, 물러설때도, 받을때도 음양이라 하여 우-좌,우-좌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굳이 한쪽발만을 움직여서는 안된다. 충분히 주의해야 할것이다.

다섯방향의 차림 자세에 관하여

다섯 차림 자세란 상단, 중단, 하단, 오른편 옆차림, 왼편 옆차림 자세의 다섯 방향의 것을말한다. 차림 자세는 다섯으로 나뉘어 있어도 모두 남을 베려는 것이기 때문에 차림자세에는 이 다섯가지 외에는 없다. 어느 차림자세이건 준비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벤다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라. 차림 자세의 대소는 경우에 따라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함이 좋다. 상, 중, 하의 차림자세는 굳히는 차림자세이고, 양 옆의 차림자세는 응용의 차림자세이다. 좌, 우의 차림자세는 위가 막히거나 옆의 한쪽이 막혔을 때의 차림 자세이다. 좌우의 어느 쪽을 택하는지는 그 장소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도의 비법으로써 말하는 최선의 차림자세는 '중단(中段)'이다. 중단이야 말로 차림자세의 진수이다. 큰 전투에서 이 중단의 차림 자세는 대장(大將)의 좌(座)인 것이다. 대장에 따라 나중의 네가지 차림자세가 따르게 된다. 잘 검토해야 할 일이다.

'대도의 길'이란 무엇인가?

'대도의 길'을 안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차고 있는 칼을 비록 두 손가락으로 휘두른다 하더라도, 대도의 길의 줄기(움직임의 법칙)만 잘 알고 있으면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대도를 재빨리 휘두르려고 하니까 오히려 대도의 법칙이 흐트러져 휘두를 수 없게 된다. 대도는 조용히 휘두르는 기분이 중요하다. 부채나 소도를 쓰는 것 처럼 빨리 휘두르려고 생각하니까 대도의 움직임의 법칙을 그르쳐 휘두르기 어렵다. 이것은 잔칼질(실전에는 소용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도의 움직임으로는 사람을 벨 수 없다. 대도를 내려 후려치면서도 올리기를 생각하고, 옆으로 휘둘렀으면 옆으로 다시 가져오고, 또 팔꿈치를 힘껏 펴서 세게 휘두르는 것, 이것이 대도의 길이다. 나의 병법의 다섯가지 기본형을 잘 사용할수 있도록 익히게 되면 대도의 길이 정해져 휘두르기 쉽다. 잘 단련해야 할 일이다.

대도의 다섯가지 형(型)의 용법

첫 번째의 차림 자세는 중단이다. 대도의 칼끝을 적의 얼굴에 대고 적과 상대하고, 적이 대도를 쳐 올 때 우측으로 대도를 빗나가게 억제한다. 또한 적이 쳐 올 때는 쳐 오는것을 되받아치고, 그 쳐내린 대도는 그대로 적이 쳐 올때 아래에서 때린다. 이것이 제 1의 얼굴이다. 이 다섯 얼굴을 쓰는 것만으로는 납득이 되는것이 아니다. 다섯가지 차림 자세에 관해서는 직접 손에 들고 대도의 사용법을 연습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의 대도의 쓰임새에 의해, 나의 대도의 길도 알게 되고, 어떠한 적이 내려치는 대도도 알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나의 2도류의 대도의 차림 자세는 다섯 가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단련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 대도의 용법
두 번째의 대도는 상단에 겨누고, 적이 쳐 오는것을 단숨에 치는 것이다. 적을 쳐낸 대도는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적이 쳐 올때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리듯이 휘둘러 올려친다. 다시 한 번 칠 경우도 같다. 이 쓰임새에는 갖가지 마음가짐과 박자의 변화가 있다. 이 쓰임새를 2도 1류에 의해 단련하게 되면 다섯가지 대도의 사용법을 자세히 익힐수 있어, 어떻게든 승리를 거둘수 있다. 잘 연습해 두어야 한다.

세 번째 대도의 용법
세번째 차림의 자세는 대도를 하단으로 취하고, 늘어뜨리는 기분으로 적이 쳐 올 때 아래에서 손을 치는 것이다. 만약 그때 적이 대도를 쳐서 떨구려고 한다면 아래에서 일으키는 것처럼 적을 친 다음, 둘째팔(상박부) 를 옆으로 베는 호흡이다. 적이 쳐 오는 것을 하단에서 단숨에 쳐서 죽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단의 차림 자세는 대도의 칼의 쓰임새를 수련하는데 있어서, 초보때도, 숙달된 다음에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실제로 대도를 가지고 단련해야 한다.

네 번째 대도의 용법
네 번째의 차림 자세는 좌측 옆으로 대도를 차리고, 적이 쳐 오려는 손을 밑에서 친다. 이것은 적이 쳐 내리려고 하는 것을, 적의 손을 치는 기분으로 그대로 호흡에 따라 자기 어깨 윗쪽을 향해 비스듬히 엇갈리게 베는 것이다. 이것이 대도의 길이다. 또한 적이 쳐 올 경우에도, 그것을 받아 이길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잘 연구해야 한다.

다섯 번째 대도의 용법
다섯 번째 대도의 차림은 자기의 오른쪽 옆에 차려, 적이 쳐 오는 것에 따라 자기의 대도를 옆 아래에서 비스듬히 엇가려 상단으로 휘돌려 올려 위에서 곧바로 베는것이다. 이것도 대도 길을 잘 알기 위한 것이다. 이 차림자세에서 휘두름이 익숙해지면 무거운 대도라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이상 다섯가지 차림자세에 관해서는, 더 자세히 써두려고 하지는 않겠다. 나의 유파의 양식인 대도의 도를 대충 알게 하고, 또한 대개의 박자로 익혀서 적의 대도를 분별할수 있도록, 우선 이 다섯가지의 대도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적과 싸우는 가운데도 이 대도의 쓰임새를 잘 쓸수 있고, 적의 마음을 간파하여 갖가지 박자를 파악하게 되면, 어떻게 하든 이길수 있다. 잘 분별해야 할 일이다.

火의 장

나의 2도 1류의 병법에서는 싸움이란 것을 불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고, 승부에 관한 것을 불의 권으로써 이 권에 써서 밝혀두는 바이다. 먼저 세상 사람들은 어쨋든 병법의 길을 작게 말초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손가락 끝으로 5촌, 3촌의 움직임을 몸에 붙이고, 혹은 부채를 써서 팔꿈치에서 그 앞의 늦고 빠름으로 승리가 결정되는 것으로 알며, 또는 죽도 등으로 조금이라도 애보다 재빠르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약간의 손놀림 방법과 발의 움직임 방법을 배우고는 조금이라도 더 재빠르게 되려고 전력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병법은 몇 차례씩이나 승부에 목숨을 걸고 싸워 생사의 분기점을 알고 칼의 원리를 익혀서, 적이 내리치는 대도의 강약을 판단하고, 칼의 사용법을 분별할 줄 알며, 적을 베어 죽이기 위한 단련을 터득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끝으로 이루어지는 연약 한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여섯가지의 무구(武具)에 몸을 굳힌 실전의 장에서는 말초적인 기술에 의한 이익 등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또한 목숨을 건 싸움에서도 혼자서 다섯 명, 열 명과도 싸워서 확실히 이기는 길을 아는 것이 나의 2도 1류의 병법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열명에게 이기고, 천 명이 만 명에게 이기는 도리에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연습 때에 천 명이나 만 명씩 모아 놓고 병법의 도를 습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자서 칼을 들고 연습해도 갖가지 적의 지략을 간파해서 적의 강약이나 수단을 알고, 병법의 지덕에 의해 만인이 적에 이기는 길을 규명하는 것에 의해서 이 길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병법의 진수를 터득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 외에 누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을 규명해 보려고 깊이 결심하고 조석으로 단련을 거듭해 기예를 연마한다. 그 후에는 자연히 생각하는 대로 되어 스스로 기적을 나타내 신통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무사로써 병법을 수행하는 정신의 본질인 것이다.

장소에 따르는 일

싸움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장소를 차지하는 요량이 중요하다. 먼저 위치를 차지하는 데에는 태양을 등지라는 원칙이 있다. 태양을 등지고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만약 장소에 따라 태양을 등에 질 수 없게 될 때는,오른쪽 옆으로 태양이 위치하도록 한다. 방 안에서 등불을 뒤로, 또는 오른쪽 옆으로 오도록 하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자기의 뒤를 쓸 수 없도록 좌측을 넓고 여유있게 자리잡고, 오른쪽 옆을 조여서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적을 내려다 볼 때'는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자세를 취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방에서는 상좌를 높은 곳으로 알면 된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어 적을 추적할 경우에는 자신의 좌측으로 적을 쫓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난처한 곳을 적의 뒤에 두게 한다.

어떻게 해서든 곤란한 곳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난처한 곳에서는 '적에게 장소를 보이지 않게 한다'는 생각으로 적이 주위를 둘러볼 수 없도록 방심치 않고 공격해 가는 것이다. 방안에서도 문지방, 문틀, 미닫이문, 툇마루, 기둥 등과 같은 쪽에 몰아붙이는데, 적에게 장소의 위치를 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치이다. 어느 때라도 적을 추격하는 때는 발판이 나쁜 곳, 또는 옆에 장애물이 있는 곳 등 어느 것이나 그 장소의 유리한 것을 살려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잘 검토하여 단련해야 할 것이다.

세가지 선수(先手)란 무엇인가?

'세가지 선수'란 첫 째는 자기 쪽에서 적에게 달려들 때의 선수로 '거는 선수(싸움을 거는 선수)'라고 한다. 둘 째는 적으로부터 자기 쪽으로 걸려왔을 때의 선수로 '기다리는 선수'이다. 세째는 자기 쪽에서도 걸고 적 쪽으로부터도 걸려올 때의 선수로 '맞서는 선수'이다. 어떤 싸움의 시작에도 이 세가지 선수 이외에는 없다. 선수를 잡는 법 여하에 따라서, 조속한 승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므로 '선수'라는 것이 병법의 첫 째가는 길이다. 이 '선수'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선수'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그 때마다의 이치에 합당한 것을 첫 째로 한다. 그런데 적의 의도를 간파해서 나의 병법의 지혜에 따라 이기는 것이므로, 세밀하게 써서 구분할 수는 없다.

첫 째 '거는 선수'란 먼저 이쪽에서 싸움을 걸려고 생각할 때,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가 불시에 재빨리 달려드는 선수를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강하고 재빨리 걸면서도 마음에 여유를 남기는 선수이다. 또한 마음을 허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적을 쓰러트릴 기세로, 어디까지나 강압적으로 나간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싸움을 거는 선수'이다.

둘째로 '기다리는 선수'란 먼저 적이 이쪽으로 달려들 때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약한 것처럼 보이고, 적이 가까이 오면 훌쩍 멀리 물러나서 피하는 척 보이며, 방심한 곳으로 강하게 달려들어 단숨에 승리를 결정 짓는다. 이것이 '기다리는 선수'이다. 또한 적이 달려들 때 이쪽이 더욱 강하게 나오면 적이 달려드는 박자가 변하게 된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그대로 승리를 얻는다. 이것이 '기다리는 선수'의 도리이다.

세 째로 '맞서는 선수'란 적이 재빨리 달려들 때에 이쪽에서는 조용히 그리고 강하게 달겨들어 적이 다가왔을 때 단호한 태세가 되어 적이 방심한 순간을 틈타 단숨에 공격해 이긴다. 또한 적이 조용히 달려들 때는 자기 몸을 들뜬 듯이 하여, 약간 빨리 싸움을 걸어 적이 다가왔을 때 한 번 겨루고, 적의 반응을 보아 세게 달려들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맞서는 선수'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퇴를 세밀하게 나누어 쓰는 것이 어렵다. 이 책에 적힌 것을 기본으로 하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들 '세 가지 선수'는 반드시 그 때의 사정과 이치에 따라 항상 자기 편에서 싸움을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이쪽에서 먼저 달려들어 적을 후수(後手)로 돌렸으면 하는 것이다. 어쨋든 선수란 병법의 으뜸으로써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원칙이다. 잘 단련할 필요가 있다.

베개맡을 억누르는 법

'베개맡을 억누르는 법'이란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승부의 길에 있어서 상대에게 끌려다니고 후수에 이르게 되는 것은 좋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적을 자유롭게 끌고 다녀야 한다. 따라서 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상대의 태도를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병법에서 말하는 '베개맡을 억누르는 법'이란 적이 치려는 것을 멈추게 하여 그것을 억제시키고, 덤벼드는 것을 물리치는 것 따위이다. 이것은 나의 병법의 도를 이해하고서 적과 겨루게 될 때, 적이 어떻게 나오려고 하는가에 대한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여, 적이 치려고 하면 그 치려고 하는 찰나에 막아내어 그 다음을 계속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적이 달려들려고 하면 그 시초에 억누르고, 뛰려고 하면 그것이 행해지기 직전에 억제하고, 베려고 하면 역시 바로 그 직전에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적이 기술을 걸어 왔을 경우, 아무 쓸모없는 무모한 공격일 것 같으면 적이 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렇지 않으면 미리 억눌러 적이 덤벼들 수 없게 하는 게 병법에서는 중요하다. 적이 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후수이다. 먼저 이쪽에서는 병법의 도에 맡기고, 기예를 펼치면서, 적이 덤벼오는 것을 그 시초에 억눌러, 적이 하고자 하는 것을 쓸모없게 하여 적을 자유로이 끌고다니는 자가 달인의 병법자다. 이것도 단련의 결과이다. '베개맡을 억누르는 법'을 잘 음미해야 할 것이다.
해로(海路)를 넘는 법

'해로를 넘는다'는 것은, 예컨대 좁은 해협이라는 곳도 있고, 400리(160Km), 500리(200Km)나 되는 긴 바다를 건너는 일도 있다. 이것을 '도항'이라고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또 1대 1의 싸움에서도, 이러한 '도항'과 같은 험난한 점이 많이 있는 것이다. '도항'에 있어서는, 그 '항로'의 위치를 알고 배의 성능을 알며, 날씨가 좋고 나쁨도 잘 알아서 동반하는 배가 나서지 않아도 그 시시각각의 상황에 맞춰 어떤 때는 옆바람에 의지하고, 또 어떤 때는 뒷바람을 받기도 하며, 만약 풍향이 바뀐다 하더라도 20리나 30리는 노를 저어서라도 항구에 닿을 작정으로 배를 몰아 해로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세상을 건너려면 전력을 다해서 험난한 곳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결심이 필요하다. 싸움을 할 때도 똑같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적의 실력 정도를 알고, 또 자기가 장기로 갖고 있는 바를 분간하여 병법의 도리에 의해 어려움을 뛰어넘는 것은 뛰어난 뱃사공이 해로를 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험난한 곳을 넘어가면 그 후에는 평정이다. 해로를 넘는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적에게 약점이 생기고, 이쪽은 우위에 서서 대개의 경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병법에 있어서 해로를 넘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세(氣勢)를 아는 법

'기세를 아는 법'이란 많은 인원의 전투에서 적의 의기가 왕성한가 쇠진해 가고 있는가를 알고, 상대의 심리를 알고, 그 상황을 파악하여 적의 상태를 잘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군의 군대를 어떻게 움직이면 이 작전에서 확실히 이길 수 있는가의 판단을 세워서, 그것을 예측하며 싸우는 것을 말한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서도 적의 마음을 분간하고, 상대의 성질을 관찰하여 그 사람의 강점이나 약점을 발견해서, 적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공격을 해, 적의 기능의 고저를 알고, 그 사이의 박자를 잘 포착해서 선수를 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의 기세란 것은 이쪽의 지력이 뛰어나면 반드시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병법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면 적의 생각을 잘 파악하여 이기는 방법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충분히 연구해야 할 일이다.

검을 밟는 법

'검을 밟는다'라는 것은 병법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할 경우, 적이 활이나 총포로 공격해 올 때에는 우선 활이나 총을 쏘아댄 다음 그 뒤에 덤벼드는 것이므로, 이쪽도 화살을 메기고 화약이나 재고 있어서는 적을 공격해 갈 수 없다. 이같은 경우에는 적이 활이나 총포 등을 쏘아대고 있는 동안에 재빨리 공격해 가는 것이다. 재빠르게 공격해 가면 적은 활도 총포도 쓸 도리가 없게 된다. 즉,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그대로 맞받아가면서 적의 공격을 짓밟아 버리고 승리한다는 이치이다.

1대 1의 싸움에서도 적이 쳐오는 대도의 동작이 있은 후에 쳐들어가면 '탁탁'이란 박자가 되어 성과가 그다지 없게 된다. 적이 공격해 오는 대도는 발로 밟아 버리는 기분으로 받아치면서 적이 두 번째 동작으로 공격해 올 수 없게 해야 한다. 밟는다는 것은 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몸으로도 밟고, 마음으로도 밟으며, 물론 대도로도 밟아버려서 적이 두 번째 공격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이것은, 즉 무슨일에든 선수를 취하는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적이 대듬과 동시에라고는 하지만, 부딪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이 하는 대로 대드는 호흡인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을 아는 법

'허물어진다'는 것은 사물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집이 무너지고, 몸이 허물어지고, 적이 무너지기도 하는 것은 모두 그 시기가 되어 박자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의 전투에서도 적이 허물어지는 박자를 포착해서, 그 동안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허물어지는 박자의 호흡을 놓치면 다시 되살아날 때도 있는 것이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 있어서도 싸우고 있는 동안에 적의 박자가 무너져 붕괴하기 시작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된다. 그 때를 놓쳐 버리면 적은 다시 되살아나서 새로이 대항해 오게 되어 성과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 허물어질 때를 찌르며, 적이 세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추격하는 것이 중요하다. 추격을 가한다는 것은 단숨에 강하게 치는 것이며, 적이 세력을 회복할 수 없도록 쳐 버리는 것이다. 이 쳐버린다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쳐 버리지 않으면 실수를 남기게 된다.

적이 되어 보는 법

'적이 된다'는 것은 내가 적이 되어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세상을 살펴보면 도둑이 집안에 틀어 박혀 대항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을 상당히 강한 것으로 곧잘 생각한다. 그러나 적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쫓겨 들어왔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기분에 있는 것이다. 틀어박혀 있는 것은 꿩이고, 잡으려고 쳐들어가는 자는 매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많은 인원과의 전투에서도 적이라고 하면 강한 것으로 생각해 너무 조심을 기하다 보니 소극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좋은 부대를 가지고 있고, 병법을 잘 이해하여 적에게 이기는 이치를 잘 알고 있으면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1대 1의 싸움이라도 적의 몸이 되어 생각해 봐야 한다. 병법을 잘 이해하여 병법의 이치에도 밝고, 또 무예에도 뛰어난 자와 대적하게 된다면 누구나 다 반드시 패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호각지세가 되는 법

'호각지세가 된다'라는 것은 적과 자기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 팽팽히 맞서는 상태가 되어서는 싸움은 진척이 없게 되므로, 팽팽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이제까지 노렸던 것을 버리고 다른 수단으로 이기는 방법이다. 많은 인원의 전투에서도 호각지세로 팽팽히 대처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결말을 낼 수가 없고, 인원의 손해도 많게 된다. 팽팽히 맞서겠다는 생각을 재빨리 버리고 적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단으로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서도 호각지세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그대로 노리고 있던 것을 바꾸고 적의 상태를 잘 분별하여, 그에 따른 여러가지 수단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 잘 판단해야 할 일이다.

이면 탐색하는 법

'이면 탐색'이란 것은 적의 심중을 판단할 수 없을 때의 병법이다. 많은 인원의 전투에서 아무리해도 적의 상황을 판단할 수 없을 때에는, 이쪽에서 강하게 대드는 것처럼 보이면서 적의 수단을 판별해야 한다. 적의 수단을 알게 되면 그것에 따른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 있어서도 적이 뒤나 옆에 자세를 겨누고 있어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경우에, 불시에 이쪽에서 치려고 하면 적은 노리고 있던 바를 칼에 나타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노리는 점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에 따른 유리한 수단으로 확실히 이길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방심하면 쳐들어갈 박자를 놓치고 만다. 잘 검토해야 한다.

이면을 제압하는 법

'이면 제압'이란 것은 저쪽으로부터 공격해 오려는 생각이 보였을 때 취하는 방법이다. 많은 인원과의 전투에서는 적이 어떤 전법을 걸어오려는 것에 대해 이쪽에서 그것을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강하게 보이면, 그 강압적인 기세에 압도되어 적은 방식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쪽에서도 노리는 수를 바꾸어 마음을 허하게 갖고, 선수를 취하여 승리를 얻는 것이다. 1대 1의 싸움에서도 적이 공격해오는 강한 기세를 자신의 공격의 박자로 억눌러서, 순간의 적의 헛점을 이용해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선수를 취해 가는 것이다.

옮겨지게 하는 법

'옮겨지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도 있는 것이다. 에를 들면 졸음 같은 것도 옮겨지는 것이며, 하품도 남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또 시간이 옮겨진다는 말도 있다. 많은 인원과의 전투에서 적이 당황한 상태로 일을 서두르는 기색이 보일 때 이쪽은 조금도 모르는 체하면서 느긋한 태세를 보이면, 적도 그런 영향을 받아 기분을 늦추게 된다. 그 기분이 적에게 옮겨졌다고 생각되면 이쪽에서 재빨리 강하게 공격해서 이기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1대 1의 싸움에 있어서는 나의 몸도 마음도 느긋하게 보여주어 적이 방심하는 틈을 포착해 강하고 빠르게 선수를 취하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취하게 만든다'고 해서 이것과 비슷한 것이 있다. 따듯한 기분, 경박해지는 기분, 나약해지는 기분 등으로 상대를 끌어 넣는 것이다.

화나게 만드는 법

상대를 화나게 만들고 노엽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일에도 있다. 그 첫 째는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것, 둘 째는 무리라고 생각케 하는 것, 셋 째는 예상밖의 상태라는 것이다. 많은 인원의 전투에서도 상대를 화가 치밀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적이 예기치 않은 곳에 격렬한 기세로 대들어, 적의 마음이 결정되지 않은 동안에 이쪽이 유리하도록 선수를 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서도 처음에는 느긋한 자세로 임하다가 갑자기 강하게 공격해 들어, 적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승리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위협하는 법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일상사에 흔히 있는 일이다. 생각치도 않았던 것에 공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인원과의 전투에서 적을 위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떤 때는 물건의 소리로 위협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병력을 크게 보이게 하여 위협할 수도 있으며, 또한 옆에서 기습을 가해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상대에게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한 적의 놀란 박자를 파악하여 그것에 곁들여 승리하는 것이다. 1대 1의 싸움에서도 몸으로도 위협하고, 칼로도 위협하고, 소리로써도 위협하여 적이 예기치 않았던 곳에 돌발적으로 충격을 주고, 그 때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그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

얽히는 법

'얽힌다'는것은 적과 자기가 접근하여 서로 강하게 겨룰 때 결말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그대로 적과 하나로 얽히고,얽혀 있는 동안 유리한 전법을 써서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법이다. 여러 사람의 전투에서나 적은 인원과의 전투에서도 적과 아군이 맞겨루어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적과 얽혀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만들고, 그런 상태에 유리한 전법으로 승리를 획득하는 길을 찾아내 단숨에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잘 검토해야 할 일이다.

모서리에 지장을 주는 법

'모서리(예봉)에 지장을 준다'는 것은, 무슨 일에서 강한 것을 누를 때 그대로는 곧장 누를 수가 없는 것이므로 그 때 그 강한 곳을 누르는 방법이다. 전투에서도 적의 인원수를 잘 관찰해서 그 특출나게 강한 곳의 예봉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 우위에 설 수 있다. 모서리의 세력이 꺾이게 되면 전체의 세력도 없어지게 된다. 그 새력이 없어진 동안에도 요소요소를 찔러 승리를 거두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1대 1의 싸움에 있어서도 적의 몸의 일각에 상처를 입혀 몸이 조금씩 약해지고 허물어지게 될 때 이기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이런 것을 잘 연구하여 이기기 위한 묘수를 분별할 수 잇어야 한다.

허둥대게 만드는 법

'허둥대게 만든다'는 것은 적에게 확고한 마음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전투에서도 적이 노리는 바를 잘 간파해 이쪽의 마음이 여기에 있는지 저기에 있는지 느린지 빠른지 모르게 혼돈시키고, 그 때 적이 허둥대는 기색을 보이는 그런 박자를 포착하여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길을 알아낸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서는 기회를 포착해 여러가지 수작을 걸거나 혹은 치는 것처럼 보이고, 또는 뛰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적이 허둥대는 기색을 보이는 곳으로 공격해 들어가 자기 생각대로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세 가지 목소리

'세 가지 목소리'란것은 처음, 중간, 끝의 목소리라고 해서,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 목소리를 낸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목소리는 기운을 내게 하는 것이므로 전투를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전투에서 싸움의 시초에 거는 목소리는 상대를 위압하는 큰소리로 한다. 또한 싸움이 한창인 때 내는 소리는 약간 나지막하게 배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소리로 지르며, 또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의 내는 함성은, 크고 강하게 내지른다. 이것이세 가지 목소리이다. 또한 1대 1의 싸움에서도, 적이 움직이려고 하면 치는 척하며 그 순간에 '얏'하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가 끝나면서 칼을 내리치는 것이다. 또 적을 쓰러뜨린 후에 내는 소리는 승리를 알리는 목소리이다. 이 둘을 '선후(先後)의 목소리'라고 한다. 대도를 치는 동시에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일은 없다. 또 싸움이 한창인 때 지르는 것은 박자를 타기 위해 지르는 것이므로 나지막하게 지른다. 잘 연구해 둘 일이다.

혼동하게 만드는 법

'혼동시킨다'는 것은 전투인 경우에 부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힘이 강하다고 느꼈을 때는 적의 부대의 일각으로 공격해 들어가 그것이 무너졌다고 보면 즉시 이동하여 또 다른 강한 곳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지그재그로 덤벼드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서 많은 인원을 상대로 싸울 때에도, 이러한 것은 중요하다. 한 쪽에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이 도망치면 또 다른 강한 쪽에 덤벼들어 적이 싸우고 있는 박자를 파악하고, 좌우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그 박자를 타고 공격하는 것이다. 적의 상태를 판별하고 공격해 들어갈 경우에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강하게 공격해 들어가 승리를 거둔다. 1대 1의 승부에서도 적에게 달려들어 갈 때, 적이 강하면 역시 이러한 방법이 필요하다. 혼동시킨다는 것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마음가짐으로 행해 나가는 호흡이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눌러 버리는 법

'눌러 버린다'는 것은 적을 약하게 보고, 자기는 강하게 생각하여 단숨에 눌러 버리는 호흡이다. 전투에서도 적이 적은 인원수라는 것을 간파했을 때, 혹은 많은 인원이라 하더라도 허둥대며 약해졌다고 생각되면 눌러 버린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압도해 눌러 버리는 것이다. 눌러 버리는 것이 약하게 되면 도리어 공격당하는 일도 있게 된다. 손안에 쥐고 쳐 버린다는 호흡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1대 1의 싸움인 경우에도 자기보다 미숙한 경우, 또는 적의 박자가 흐트러져 도망쳐 버릴 만큼 되었을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단숨에 눌러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로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제압하는 것이 제일이다.

산해(山海)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산해의 마음'이란 적과 자기가 싸우고 있는 동안에 같은 기술을 자꾸만 되풀이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같은 것을 두 번 되풀이 하는 것은 부득이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 번씩이나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적에게 기술을 거는 데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더 공격해 봐도 처음에 했을 때의 효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 번 공격할 때마다 다른 기술을 걸어 공격해 가도 결말이 나지 않으면 다시 다른 기술로 공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적이 산이라고 생각하면 바다로 대들고, 바다라고 생각하면 산으로 대든다는 식으로 의표를 찌르는 것이 병법의 도인 것이다.

밑바닥을 도려내는 법

적과 싸울 때, 겉으로는 이긴 것처럼 보여도, 적이 아직 싸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이기고 있지 않은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이쪽에서 재빨리 마음가짐을 바꾸어 적의 투지를 꺾어 적이 마음 속으로 졌다는 것을 알게 하여 그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밑바닥을 도려낸다'는 것은 칼로도 도려내고 몸으로도 도려내며, 또한 마음에 의해서도 도려내는 것이다. 대충 그저 분별해 내는 것이 아니다. 경계심을 남겨 놓아야 한다. 적도 마음을 남겨 놓고 있으면 잘 무너지지 않게 된다. 많은 인원의 전투에 있어서도 1대 1의 싸움에서도 '밑바닥을 도려낸다'는 것을 잘 단련해 두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 법

'새롭게 된다'는 것은 적과 자신이 싸울 때 얽혀는 상태에서 결말이 나지 않을 경우에, 이제까지 자기가 노리고 있던 수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박자를 타고서 이기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적과 자신이 서로 다투고 있는 상태에 있을 때에 곧바로 이쪽의 의도를 바꾸어 다른 유리한 수단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에서도 '새롭게 된다'는 법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병법에 숙달된 자의 지력(智力)으로라면 이 판단은 쉽게 할 수 있다.

쥐의 머리, 소의 목

'쥐의 머리, 소의 목'이라는 것은 적과 싸우는 동안 서로 세세한 곳을 공격하고 있다가 서로 꼬이게 됐을 때, 쥐의 머리로부터 소의 목으로 생각을 옮기듯이 마음을 싹 바꿔 크게 먹고, 대국을 판단하여 국면의 전환을 도모하는 병법의 소양이다. 무사인 자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평상시에도 몸에 익히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의 전투, 개개의 전투 어느쪽이나 이 소양을 몸에 익혀두지 않으면 안된다.

장수와 졸병을 아는 법

'장수와 졸병을 안다'는 것은 전투 때에 병법의 지력에 의해 자기의 적을 모두 자기의 부하로 생각하여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고 적을 자유 자재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자신은 장수이고 적은 부하 병사가 되는 것이다.

칼자루를 놓는 법

'칼자루를 놓는다'는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칼을 들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또 칼을 들고 있으면서도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을 써서 나타내기는 힘들지만, 잘 단련해야 할 일이다.

반석 같은 몸이란 무엇인가?

'반석같은 몸'이란 병법의 도를 터득하는 것에 의해 금세 반석(큰 바위)과 같이 강하고 단단하게 되어 어떠한 타격에도 견디어 내며 거기에 흔들리지 않도록 되는 것이다.

위에 적은 것은 니덴 이찌류(二天一流)의 검술을 행할 때 자주 생각되는 것을 적었을 뿐이다. 여기에 적은 싸움에 이기는 도(道)는 처음으로 쓴 것이므로 앞뒤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아서 자세히 나누어 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도(道)'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병법의 도에 뜻을 품고, 오로지 검술 하나에 기예를 연마하고 몸을 단련해 여러 가지 경지를 터득하며 다른 유파의 사람들을 봐왔는데, 어떤 자는 이론에 그치고, 어떤 자는 단순히 손에 익힌 잔기교만 부릴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하나도 진실한 내용이 있는 자는 없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도 그 정도까지 되기에는 끊임없는 신체의 단련과 마음의 수련을 거듭했겠지만, 그런 정도로 그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도(道)의 껍데기 같은 것이라서 뒷날까지 그 나쁜 영향이 없어지지 않아 병법의 진정한 도(道)가 썩고 쇠퇴해지는 원인이 된다. 검술의 진정한 도(道)라고 하는 것은 오직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며, 이것을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병법의 지력(智力)을 습득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실천해 나간다면, 반드시 승리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風의 장

병법에서는 다른 유파의 도(道)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유파의 여러 가지 실상을 여기에 써서 '바람의 권'으로 하였다. 다른 유파의 도를 알지 못하고는 나의 니덴 이찌 류(二天一流)를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른 유파의 병법을 살펴보면 어떤 유파는 큰 칼을 사용하여 힘이 강한 것만을 장점으로 해서 자기 유파를 내세우기도 한다. 또 더러는 짧은 칼을 쓰는 것만에 전념하고 있는 유파도 있다. 혹은 대도를 쓰는 기교의 가짓 수에만 몰입하고, 대도의 겨루는 자세를 정면이다, 안쪽이다, 칭하며 자기 유파를 내세우고 있는 유파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진실한 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 권에서 명확히 적어 도의 선악과 시비를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나의 니덴 이찌 류의 도리는 그들 유파들의 도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유파의 사람들은 무예의 도를 생활의 수단으로 하고, 화려한 기교에만 열중하여, 그것을 하나의 간판으로 삼고 있어서 완전히 병법의 도로부터는 이탈되어 있다. 또 세상의 무예에 있어서, 병법을 그저 검술이라는 것으로만 작게 한계지어 오로지 칼을 휘두르는 훈련만 쌓고, 또 몸놀림만 익혀 기교를 숙달시킴으로서 이기는 길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이러한 것은 모두 도의 참된 길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유파의 결함을 자세하게 적어 놓으니, 이것을 충분히 검토하면서 나의 니덴 이찌 류의 진수를 공부해 주었으면 한다.

다른 유파에서 큰 칼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다른 유파에서는 큰 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병법에서는 이것은 약한 유파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이겨야 한다는 도리를 터득하려고 하지 않고, 대도의 길이에 의지하여 적과의 거리가 먼 곳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한 치라도 이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병법을 모르는 자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병법의 도리를 모르면서 그저 대도의 길이에 의해 멀리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나약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서로 몸이 맞붙어 싸워야 할 정도의 거리에서는 칼이 길수록 휘두르기 어렵게 되어, 긴 칼이 오히려 짐이 되므로 짧은 칼을 쓰는 사람보다 뒤지게 된다. 기다란 대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그것은 자기만의 이유에 불과하다. 세상의 현실적인 도리에서 보면 이치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긴 칼을 갖지 않고 짧은 칼을 쓰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장소에 따라 상하, 좌우 등이 막혀 있을 경우, 혹은 작은 칼밖에 쓸 수 없는 경우에도 긴 칼을 쓰려고 한다면 그것은 병법의 도를 깨우치지 못한 것이며 또 합당하지도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힘이 약해서 긴 칼이 부적당한 경우도 있다. 옛부터 '대(大)는 소(小)를 겸한다'라는 말도 있는 것 같이, 나도 무턱대고 긴 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긴 칼에만 집착하려는 마음이 싫다는 것이다. 전투에 적용시켜 생각한다면, 긴 칼은 많은 병력에 해당하며, 짧은 칼은 적은 병력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과 싸우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이긴 예는 수없이 많이 있다. 나의 니덴 이찌 류에서는 그러한 한쪽으로 치우치는 좁은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다.

다른 유파에 있어서 강한 대도라는 것

대도의 사용법에 강한 대도니 약한 대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강하게 치려고 생각하고 휘두르는 대도는 엉성하고 거친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결코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또한 대도를 세게 휘둘러 사람을 베려고 할 때, 무리하게 세게 칼을 휘두른다면 결과는 좋지 않다. 누구든지 적과 대적할 때 약하게만 베려고 한다든가, 또는 강하게만 베려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단지 적을 베어 죽이려고 할 때는, 세게 베야겠다든가 약하게 베야겠다든가 하는 마음은 생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적을 베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강력하기만한 대도로 상대의 칼을 세게 치면, 긴장이 지나쳐서 자세가 흐트러지며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상대의 대도에 강하게 부딪치면, 그 반동으로 자기 칼의 움직임도 그만큼 늦어지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에서 강한 칼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큰 전투에서 강력한 군세를 가지고 싸움에서 강하게 이기려면, 적측도 강력한 군세를 갖추고 싸움에 강하게 임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느쪽이나 마찬가지다.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이길수 있는 올바른 도리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나의 니덴 이찌류의 도에서는 조금이라도 무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병법의 지혜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승리를 얻는 데 역점을 둔다.

다른 유파에서 짧은 칼을 사용하는 이유

짧은 칼로만 이기려고 하는 것도 참된 길이 아니다. 예로부터 칼은 대도와 소도로 구분하여 길고 짧음을 나타내었다. 일반적으로 힘이 뛰어난 자는 커다란 대도를 가볍게 휘두를 수가 있기 때문에 창이나 긴 장검까지도 그 유리한 조건을 활용해 사용한다. 굳이 짧은 칼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짧은 칼로 상대가 휘두르는 대도의 틈을 노리고 뛰어들어 맞붙어 싸우려고 생각하는 마음은,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써 좋은 것이 아니다. 또한 적의 틈을 노리려고 하면, 모든 것이 후수(後手)가 되어 적과 얽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좋지 않다.

더우기 짧은 칼로 적중에 뛰어들려고 하거나 적을 이기려고 하는 방법은 많은 적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짧은 칼에만 익숙한 자는 많은 적에 대해 칼을 휘두르며 자유 자재로 설치고 다니려고 해도 적의 칼을 받아치는 결과가 되어 적과 얽혀 버리고 만다. 이것은 병법의 진정한 도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값이면 자기 몸은 강하고 바르게 유지하면서 적을 쫓아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허둥대게 하여 확실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전투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이다. 이왕이면 많은 군세로 적을 불시에 덮쳐 즉석에서 공략해 버리는 것이 병법의 진수인 것이다. 병법을 배움에 있어서 평소부터 받아치기, 빗나가게 하기, 몸을 빼기, 빠져 나가기 등의 것만을 한다면, 그런 습관만 몸에 붙어 남에게 끌려다니는 결과가 되기 쉽다. 병법의 도란 곧고 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고리로써 적을 몰아대고 상대를 정복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 나가야 한다.

다른 유파에서 대도의 사용법이 너무 많은 이유

다른 유파에서 수많은 대도의 사용법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병법을 간판으로 내세워서 대도의 사용법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며, 초심자에게 위세를 떨쳐 탄복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병법에서 가장 배척해야 할 정신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베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벤다는 것은 무예를 아는 자건 모르는 자건, 여자이건 애들이건 다를 바가 없다. 굳이 다른 방법이 있다면 찌른다거나 후려쳐 베는 정도가 있을 뿐이다.

어쨋든간에 적을 벤다는 것이 병법의 도이고, 이 방법에는 많은 방법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소와 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예를 들면 위나 옆이 막혀있는 곳에서는 칼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기 때문에, 대도를 잡는 방법으로 5방(五方)이라 하여 다섯가지 종류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밖에 손을 뒤튼다든가 몸을 굽힌다든가 뛴다든가 하여 적을 베려는 따위는 진실한 병법의 도가 아니다. 사람을 베는 데 비틀거리거나 구부리거나 해서 벨 수는 없다. 아무 쓸모도 없는 일들이다. 나의 병법에 있어서는 마음도 자세도 똑바로 가지고, 적측을 비틀리고 일그러뜨려 상대의 마음이 흐트러진 때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다른 유파에서 차림 자세를 사용하는 이유

대도의 차림 자세를 제일로 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차림 자세'란 것은 어떤 일에도 동요되지 않는 확고한 자세를 취하기 위한 자세이다. 성(誠)을 꾸민다든가 진(陳)을 친다는 것은 남이 대들어서 까딱도 않는 상태를 말한다. 병법 승부에 있어서는 무슨 일이나 선수를 잡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것에 반해 차림 자세란 상대의 선수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점의 차이를 충분히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병법 승부의 도에 있어서는 상대의 차림 자세를 동요시켜 적이 예상도 못한 수단을 내밀거나 혹은 적을 낭패하게 만들어 화나게 하거나, 위험해서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이기는 것이므로, 차림 자세는 후수(後手)의 심리를 싫어한다.

따라서 나의 니덴 이찌 류의 도는 차림 자세로 있으면서 차림 자세가 없다. 전투의 경우에도 적수의 많고 적음을 생각하고, 전쟁터의 상태를 규명하며, 아군의 병력정도를 분별해서 그 장점을 살리도록 편성하여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알맞게 칼을 준비하고 적의 대도를 잘 받아 겨루려고 생각하는 것은, 창과 장점 같은 긴 것을 울타리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적을 칠 때는 반대로 목책을 빠져 나가 창이나 장검 대신으로 쓰는 기세가 중요하다.

다른 유파의 주목이란

'주목'이란 것은 그 유파에 따라 적의 대도에 눈을 두는 자, 또는 손에 눈을 두는 자, 혹은 얼굴에, 혹은 발에 눈을 두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이 특별히 어딘가에 눈을 두려고 하면 마음에 흔들림이 생겨서 오히려 병법에 방해가 된다. 예컨데 공을 차는 사람은 공에 눈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갖가지 어려운 공차기를 교묘히 해 낼 수가 있다. 무엇이든 익숙해짐에 따라 공 그 자체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곡예를 하는 자들도 그 기예를 숙달하여 문짝을 코 위에 세우기도 하고, 몇 개씩이나 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데, 이것 역시도 착실히 눈여겨보는 것이 아닌데도 평소 익숙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잘 해 낸다. 병법의 길에 있어서도 그 때 그 때의 적과의 싸움에 익숙해서 남의 마음의 경중을 알고, 무예의 도를 터득하게 되면 대도의 원근, 지속까지도 자연히 잘 보인다.

병법에서의 주목은 총체적으로 상대의 심리 상태를 읽어내기 위해 심안에 작용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에 있어서도 상대의 형세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관(觀)과 견(見)의 두 관찰법에서 관(마음을 봄)의 눈을 강하게 하여 적의 심중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의 상황을 꿰뚫어 보며 대국에 눈을 붙여 그 싸움에서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판단하여, 그 때 그 때의 적과 아군의 강약을 보아 확실한 승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의 전투에서도 1대 1의 싸움에서도 작게 보아서는 안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질구레하게 보기 때문에 큰 것을 못보고 갈피를 못잡는 그런 마음이 되어 확실한 승리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 도리를 잘 검토하여 단련할 필요가 있다.
다른 유파의 발동작

발의 동작에는 들뜬 발, 뛰어오르는 발, 내디뎌 좁혀지는 발, 까치걸음 등 여러 가지 발을 빨리 움직이는 방법이 있다. 나의 병법에서 보면 이것은 모두 부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뜬 발을 꺼리는 이유는, 싸움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발이 들뜨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 발은 단단히 딛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뛰어오르는 발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뛰어오르려고 할 때 정지 상태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고, 또 뛰어오른 직 후에도 다음 동작의 자유를 잃기 때문이다. 몇 번씩이나 뛸 필요는 없기 때문에 뛰어오르는 발은 좋지 않다.

또한 뛰어오르는 발은 뛰어오른다는 기분이 있으면 좋은 성과도 거둘 수 없다. 뛰어오르는 발은 기다리는 발이라 해서 적에게 선수를 잡히는 발동작이기에 특히 싫어하는 발동작이 된다. 기타 까치발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빠른 발놀림이 있지만, 계곡의 개천, 돌밭, 오솔길 등에서 적과 대적하게 될 때도 있어서, 곳에 따라서는 뛰어오를 수도 없고, 재빠른 발동작을 할 수 없는 곳도 있다.

나의 병법에서는 발놀림이 싸울 때나 병상시나 다르지 않다. 평소에 길을 걷듯이 적의 박자에 따라, 몸의 상태에 맞추어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발동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투에서도 발의 동작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의 작전도 모르고 함부로 서둘러 달려들면, 박자가 허물어져 이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늦은 발놀림은 적이 허둥대며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없고, 이길 기회를 놓쳐 재빨리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게 된다. 적이 허둥대며 허물어지는 상황을 잘 판단하여 적에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도록 해서 이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유파에서 빠름을 강조하는데

병법에서 빠르다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 빠르다는 것은 사물의 박자의 이음세가 맞지 않기 때문에 빠르다거나 늦다고 하게 된다. 그 길의 고수(高手)라고 할 수 있는 자의 동작은 빠르게는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히갸꾸(飛脚)'라고 하여 하루에 400리나 500리씩 가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 역시 아침부터 밤까지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다. 미숙한 사람에게는 하루종일 달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들은 걸음의 박자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연예의 길에서 능숙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서투른 사람이 따라 부르면, 늦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생긴다. 또한 도용한 곡인 '노송'도 서투른 자가 북채를 잡으면, 늦는 것 같아서 서두르게 된다. '다까스나꼬'는 급한 박자의 곡이지만, 빠르게 치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서두르면 구른다'라고 하여 박자의 이음이 잘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늦는 것도 좋지 않다. 모든 능숙한 사람이 하는 일은 느긋이 보여도 빈틈이 없다. 무슨 일이나 능숙한 사람이 하는 일이 바쁜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그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병법의 도에 있어서는 빠른 것은 좋지가 않다.

그 이유는 장소에 따라 습지, 늪지 등에서는 몸도 발도 빨리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칼은 더 더욱 빨리 벨수는 없다. 빨리 베려고 하지만 부채나 소도를 쓰는 것 같이 할 수는 없으므로, 손목을 베려고 해도 전혀 베어지지 않는 것이다. 잘 분별해야 한다. 전투에서도 역시 무턱대고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베개를 억누른다'는 기분으로 한다 해도 조금도 늦어질 것이 없다. 또한 상대가 무턱대고 서두를 때는 반대로 취하는 것처럼 이쪽은 조용히 서두르지 말고 상대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마음의 연구와 단련이 필요하다.

다른 유파에서 말하는 안과 밖이라는 것

병법에서는 무엇을 밖이라고 하고, 무엇을 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능의 길에서는 극의비전(極意秘傳) 등이라 해서 오의라든가 초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적과 대적할 때는 겉으로 싸우고, 안에서 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나의 병법의 교수법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기량에 따라서 하기 쉬운 것부터 익히게 하고,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도리부터 먼저 가르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사람의 이해력이 진보되는 정도를 분별하여, 차츰 깊은 도리를 가르치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개는 적과 대적할 때에 체험한 것을 익히게 하는 것이므로 안이라든가 입구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산의 깊숙한 안쪽을 찾아갈 때 , 좀 더 안으로 가려고 하면 오히려 다시 입구로 나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도에 있어서도 안으로 들어가 오히려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 초보의 소양을 꺼내 보이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특히 싸움의 도에 있어서는 무엇을 비전으로 하며, 무엇을 공개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의 니덴 이찌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서약, 조문 같은 것을 나는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길을 배우는 자의 역량에 의하여 도의 진수를 가르치고, 병법을 가르치는 가운데 몸에 익히게 되는 여러 가지 결점을 버려, 자연히 무사의 도의, 진실의 소재를 배우게 하여 의혹이 없게 하는 것이 나의 병법의 가르침이다.

이상 다른 병법의 9개조에 걸쳐 바람의 권으로써 적어 보았다. 본래는 그 하나하나의 유파에 대해 입문에서 오의까지를 상세히 써 놓아야 할 것이지만, 일부러 어떤 류의 큰 대목 등의 이름을 적는 것을 피했다. 그 이유는 각자의 유파에 의한 판단이나 이론은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달리 말할 여지가 있는 것이며, 같은 유파에서도 다소는 견해차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후대를 위해서도 어느 류의 어느 길이란 것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유파의 대요를 아홉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보았지만, 세상의 참된 도리에서 보면 긴 칼에 치우치고, 혹은 짧은 칼을 고집하여 강약에 사로잡히거나, 거칠다거나 자질구레하다고 하는 것이 모두 치우친 도란 것은, 어느 유파의 어느 단계라고 밝히지 않더라도 모른 사람에게 이해되리라고 본다. 나의 니덴 이찌 류에는 대도의 쓰임새에 오의나 초심도 없다. 또, 극의의 차림 자세 가튼 것도 없다. 단지, 바른 정신에 의해 병법의 덕을 몸에 붙인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다.

空의 장

니덴 이찌류의 도를 공(空)이라고 써서 밝혀둔다. '공'이란 의미는 사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즉 인간이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공'은 없다는 것이다.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이 즉 '공'이다. 세상의 속된 견해로서는,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을 '공'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참된 '공'이 아니다. 모두 허황된 마음인 것이다. 병법의 도에 있어서도, 무사로써 도를 행하는 데 무사로써 도를 행하는 데 무사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공이 아니며, 여러 가지로 혼란이 있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공이라고 말하고 있는게, 이것은 참된 의미의 공이 아니다. 니덴 이찌 류의 병법의 도를 확실히 습득하여 그밖의 무예도 몸에 붙여 무사가 행할 도를 밝혀 잘 터득하고, 마음의 혼란을 피하고, 항상 게으르지 않으며, 심의(心意)의 두 마음(정, 중)을 닦고 관견(觀見)의 두 눈(마음과 눈)을 밝게 연마하여, 조금도 흐림이 없는, 혼란과 구름이 개인 상태야 말로 참된 공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참된 도를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불법(佛法)이건 세상사의 법이건,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의 아전인수격의 견해나 왜곡에 의해 올바른 도(道)에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잘 분석해서 곧은 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진실된 마음을 도로하여, 병법을 널리 행하고 바르고 밝게 대국을 판단할 수 있도록 공(空)을 도(道)로 하며, 도를 공으로 보아 행해야 할 것이다. 공의 마음에는 '선'은 있지만, '악'은 없다. 지혜가 있고, 도리가 있으며, 도가 있어야 비로소 마음은 '공'이다.



[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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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술 마시려면 건강부담금부터 내라고?

난 가끔 '내 목숨이 내 목숨인가? 국가 목숨인가?' 의문이 들때가 있다.

 

가령, 교통 사고로 인해 내가 장애자가 되거나 생명이 위태한 상황을 막기 위해 오토바이 핼멧 착용이나 안전밸트 착용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위반했을 경우 벌금을 문다거나, 지금과 같이 황송하게도 내 건강을 생각해서 중독성? 기호 식품에 건강 부담금을 매길 정도로... 과연 국가가 내 목숨을 생각해주고 있는건가?

 

좀 비뚤어진 생각인지 몰라도 난 국가가 내 건강과 안녕에 신경써주는 것이, 내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마치 무정한 농부가 자신의 농사를 위해서 소의 건강을 챙기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국가는 내 건강을 생각해주는 것이 아니라 잘 써먹기 위한 기구를 다듬는 속내로 보인다. - 국가가 내 건강을 생각해준다는 명분의 반론

 

하지만 이 상황은 명분의 문제만이 아니다. 왜 내가 허락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건강을 걱정해주고, 보호 장치를 만들어주겠다는 국가에게 내가 돈을 줘야 하는가?

하다못해 보험에 가입할 때도 쌍방간의 계약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체) 자기네들이 걱정해줄테니 돈 내라는 논리는 무엇인가?

 

결론은 뻔한 것 같다. 간접세를 높히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오로지 내게 돈 더 받겠다는 의도 밖에 읽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동의하는 자에게만 부담을 지우고 혜택을 주시라...)

 

이젠... 국가가 내 건강을 걱정해준다는게 무서워진다...

 

어버이 같은 국가가 날 부르니 목숨바쳐 국가에 충성하자던 국가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충성할 때 충성할테니.. 착취당하듯이 충성하지 않게 좀 해줬으면 좋겠다.. ^^

 

 

국가의 기원은 무엇인가? 구성원의 안녕과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장치이다. 하지만, 국민이 국가의 안녕과 보호를 짊어져야 하는 주객이 전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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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61438001.html

 

 

 

술 마시려면 건강부담금부터 내라고?


△ <네이버>의 자유게시판.



[이슈] 김춘진의원 “술 건강부담금 법안통과 주력” 발언 일파만파

술 한잔 마시려면 국민건강증진부담금부터 내라고? 세상 일이 마음같지 않을 때, 반가운 친구와의 정겨운 대화를 더 빛나게 하는 데 술 한잔은 빠질 수 없다. 술에 대한 예찬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그대는 황하수가 천상(天上)으로부터 흐르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 미친 듯이 바다로 흘러내려 돌아오지 못한 것을 / 또다시 거울 앞에서 백발을 보고 탄식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 아침에는 파란 머리가 저녁에 벌써 눈같이 흰 것을…”(이백의 ‘장진주 將進酒’)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의 겨울옷일랑 벗어던져라”(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야트’)

담배에 이어 술에도 국민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김춘진 의원(열린우리당) 등은 부담금 부과를 뼈대로 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상반기에 국회에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에서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다. 파란닷컴, 엠파스, 네이트닷컴 등의 포털사이트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0% 이상(파란 75.8%, 엠파스 82%, 네이트 73.4%)이 건강부담금 부과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춘진 의원 “음주피해 15조원…술에 건강부담금 부과 효과적”

김춘진 의원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보건협회 주최로 열린 ‘술에 대한 국민건강증진부담금 부과를 위한 입법공청회’에서 “술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인 15조원에 달하고 술(3.5%)이 담배(2.7%)보다 사망과 불능에 더 큰 원인이 되는 등 개인과 국가적 손실이 엄청나다”며 “엄청난 음주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며 술에 건강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의원은 이 자리에서 알코올 도수 30 이상의 주류에 과세 표준액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과하는 방안(제1안)과 모든 주류에 과세표준액 의 0.6%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과하는(제2안) 두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건강부담금을 부과할 때 연간 부과액수는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 따르면 2003년 기준으로 제1안은 219억원, 제2 안은 234억원으로 추정했다. 또 술 건강부담금은 알코올 의존(중독)자 치료 및 재활사업, 절주 홍보 및 예방사업 등에만 사용토록 한정했다.

김 의원은 “공청회에서의 토론과정과 여론추이를 살펴 합리적인 안을 마련하여 조속히 의원입법 발의할 예정”이라며 “지난 담배값 인상·경제불황 등을 감안할 때 가까운 시일에 개정안이 통과되지는 않겠지만 임기내 법안 통과에 주력할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설명했다.


△ (연합)



네티즌 '발끈'…김춘진 의원 홈페이지 ‘다운’

그러나 김 의원의 ‘인화성 발언’에 대한 여론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누리꾼들의 반발은 말할 것도 없다. 김 의원의 홈페이지(www.cjkorea.org)를 비롯해 각종 포털사이트 자유게시판에는 “국회의원이 정치 잘 하면 술 먹을 일 있겠냐”, “쉽게 걷어가는 간접세에 목숨건다”는 등의 성토가 이어졌다. 16일 김 의원의 홈페이지는 항의하는 네티즌들의 접속이 폭주하면서 다운됐다.

김 의원 홈페이지에 글을 남긴 최한성씨는 “국민의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발상은 좋지만 그 기금을 국민의 혈세에서 충당한다는 말은 웃기는 이야기”라며 “경기가 불황일수록 술 소비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술을 조금만 먹어도 되는 세상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네이버>에 글을 남긴 ‘ble2005’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국민들은 피땀 흘려가면서 혈세를 내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국민들의 피를 뽑아야 당신들은 만족하겠냐”며 “더이상 국민들 피뽑지 말고! 당신들이 수혈 좀 하시오!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은 베풀라고 있는 것이요!”라고 비꼬았다.

‘khojh’는 “먹고 살기 힘이 드니 술로 그 스트레스를 푸는데, 불쌍한 서민들 고충은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술값, 담배값만 올리냐”며 “국회의원들에게는 양주 한 병값이 껌값이니 몇 푼 올리는 것이 우습겠지”라고 꼬집었다.

<파란닷컴>의 ‘ksh’는 “물론 술, 담배로 인해 가정파탄이나 건강의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런 기호식품에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좋은 정치와 경제를 기대하며 산다”며 “국민을 상대로 장난이 너무 심하다”고 불평했다.

건강부담금 부과에 앞서 ‘술 안먹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김 의원 홈페이지에서 장진호씨는 “담배값 인상 뒤 금연효과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국민건강이 향상되고 있다고 보냐”고 반문한 뒤 “의원님 때문에 혈압 올라 건강이 나빠진 국민이 많을테니 의원님께서 건강증진금을 내실 의향이 없냐”고 꼬집었다.

<네이버>의 ‘kms6567’는 “외롭고 고달프고 힘들고 속상하고 도저히 앞이 안보여 우울해 ‘술이나 한잔하자’는 사람들에게 돈을 올려 받자고 하냐”며 “건강부담금 부과한다고 어려운 서민들이 술을 안먹겠냐? 올리려면 비싼 술이나 올리던지. 돈있는 것들한테 올려 받든지 하라”고 요구했다.


△ <네이트닷컴> 라이브폴.



담배이어 술에도 건강부담금? …“건강엔 국회의원이 제일 해롭다” 비아냥

지난 연말 국민건강을 들어 건강부담금을 부과한 담배의 실효성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choeks123’는 “흡연인구 줄인다고 담배값 인상했지만 결국 세수만 더 늘린 셈이 되버렸다. 술에 건강부담금 부과한다고 소비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것 또한 국민의 세금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다. 차라리 세수를 늘리기 위해 세금을 부과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담배나 술보다 더 국민에게 해로운 국회의원들에게 건강부담금을 부과하자는 이색적인 제안도 나왔다.

‘미텨’는 “서민들 말려 죽이려고 하는 거지?”라고 물은 뒤 “술에 세금을 부과할 생각 말고, 국회의원들의 세비나 팍팍 좀 깍아보자”고 제안했다. 이진철씨도 “담배는 인체에 해롭다고 하지만, 술은 어려운 경제사정에서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려 마시는 건데 거기다 부담금을 부과한다고? 차라리 국민들 정신건강을 해치는 국회의원 세비에다 건강부담금을 떼는게 어떨지…”라고 제안했다.


△ <엠파스> 라이브폴.



실효 여부 '글쎄'…한나라당도 “반대”

김 의원의 의욕적인 법 개정 움직임에도 불구 이 법안의 입법이 순조로울지는 현재로선 예측하기 힘들다. 우선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파란닷컴, 엠파스, 네이트닷컴 등의 포털사이트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0% 이상(파란 75.8%, 엠파스 82%, 네이트 73.4%)이 건강부담금 부과에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법안의 통과 여부를 떠나 술 소비를 줄이기 위한 취지는 공감하더라도 우선 간접세 부과로 서민 부담이 늘어나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언제부터 정부가 개인건강 문제를 책임졌느냐”는 등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 부과가 술로 인한 폐해를 막는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일례로 이미 담배에 대해 건강부담금이 부과되고 있으나 그 성과가 확실치 않다. 지난 연말 건강부담금 추가 부과로 담뱃값이 대략 20∼30% 올랐지만 이 때문에 금연자가 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건강부담금의 용도가 그동안 건강보험의 적자 보전에 투입돼 왔음을 감안할 때 목적세가 본래 목적과 상관없이 운용되고 있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때문에 한나라당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안명옥 한나라당 의원은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 부과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정부가 세원확대를 위해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담배 부담금이 본래 목적 이외에 건강보험 재정적자를 메우는데 사용됐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술 부담금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파란닷컴>의 뉴스POLL.



또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 부과는 세부담 증가는 물론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 음주폐해 예방을 위해서는 음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노력이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청소년들에 대한 음주의 역기능 교육을 제도화하고 음주운전, 음주허용연령 기준도 더 강화해야 하며 음주 관련 광고에 대한 적절한 규제방안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교수는 “음주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조세수입확보 중심의 제도보다는 음주허용연령 책정, 음주운전 에 대한 형사처벌, 광고제한 등 사회정책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고 지적했다.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 부과 추진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6년 정의화 의원과 2001년 김홍신, 정몽준 의원 등도 법안을 발의했으나, 무산된 바 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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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가 말하는... 네가지 담화 유형의 타당성 요구

송두율교수의 사부로도 알려진 하버마스의'네가지 유형의 타당성 요구'를 정리합니다.

우리가 대화하는데, 특히 인터넷 상에서 서로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이상적인 의사소통 모델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진중권 아저씨가 즐겨쓰는 '화용론'이란 단어도 하버마스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보편 화용론 : 어떤 담화는 화자가 전반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맥락을 (화자가 표현하려는 화자 머릿속의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네가지 유형의 타당성 요구'

첫째, 이해 가능성 : 나머지 타당성요구의 기본전제가 되며 화자가 표현하는 내용은 청자에게 이해 가능해야 한다.
둘째, 진리성 : 화자가 진술하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참'이어야 한다.
셋째, 정당성 : 화자가 진술하는 규범, 윤리적 발언은 사회 규범, 윤리적 맥락안에 정당해야 한다.
넷째, 진실성 : 진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가에 대한 진정성..

입니다.

이런 화법을 구사하기란 무지 어렵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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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관용)에 대해서...

똘레랑스(tolerance)는 불어로서 일반적으로 '관용'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근원을 유럽의 역사에서 구하고 있는데요...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전쟁, 1/2차 세계 대전으로 이르는 살육의 퍼레이드가 있었습니다.
종교전쟁의 경우 로마에 카톨릭이 국교로 채택될 쯤해서부터 종교적인 이유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었죠? 현재 유럽인구만큼의 사상자를 양산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보스니아/발칸문제, 사라예보 사건 등의 민족 분쟁도 있었지만, 주 요인은 산업사회 이후로 성장한 유럽 국가들의 국력을 세계라는 밥그릇을 놓고 쌈질했던 다툼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판세의 재정립 역할을 했죠..)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의해 발단이 됐고 (ex.독일의 성장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 미국까지 가세해서 세계대전이 되었죠.. 여기서도 몇년전 우리나라 인구에 버금가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이념이었죠...

물론 근본적으로 밥그릇 다툼이지만 여기엔 사상, 이념, 입장, 견해, 이익관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었고, 이 갈등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치고받고, 천문학적인 수치의 사상자들... 이 중심에 있던 유럽인들... 그 중에 프랑스인들이 자각한 것이 '똘레랑스'란 개념입니다.
이런 갈등의 원인은 서로 '다름'을 인정/존중하지 않고 충돌했다는데 있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다." - 버나드 쇼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를 의미한다." - 로자 룩센브루크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핍박 받는다면 난 당신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 볼테르.  

같은 주장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똘레랑스는 서로 존중하고 '다름' 속에서 조화하려는 의지/태도로 생각합니다.

가령.. 혐연권을 인정하기 위해 흡연자는 담배냄새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담배피려는 노력, 반대로 혐연자는 흡연자의 기호와 그 인프라를 이해하는 태도... 같은거죠..

하지만 모두가 착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자일찌라도) 똘레랑스해야겠지만..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에 대해서는 똘레랑스 할 수 없다.'라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시한 흡연자와 혐연자 간의 사이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면, 혹은 상대의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조화가 아니라 또 하나의 파쇼가 될 것이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란 성자와 같은 인격이 필요할테니까요...

'다름'은 정당하게 설득, 이해, 양해... 할 대상이지 강요의 대상이 아닙니다. 힘의 논리로 자신의 견해를 주입하려한다면 자신도 언젠가는 피해 당사자가 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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