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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러셀

버틀란트 러셀 경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선언은 의미적으로 상징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
우선 나부터도 러셀처럼 영국 귀족으로서 위대한 학자로서 유럽의 '큰 틀'을 이루는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관심이 많이 가가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은 56년에 출판되었고 현대 신학적 맥락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지만 원리적인 측면에서 설득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부터도 이 책을 읽은 동기가 위대한 학자인 러셀이 (말 안해도 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선언을 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그 특유의 탄탄한 근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 만연된 기독교와는 전혀 내용이 다른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정체성을 전제로) 이 글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책은 러셀의 대표적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러셀이 목적성을 갖고 차근차근 기술한 내용이 아니라 여러 논문과 학회발표를 취합한 내용이다.
러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건데 (촘스키에서도 그랬거니와) 도무지 이 사람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는 얼마나 광범위한지 체계적인 사례들로 독자를 압도한다는거다. (부럽다..^^;)


이 책의 서두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여러 시도를 아주 심플한 내용으로 깨고 있다.
첫째, '근본적인 원인론'에 대해선 모든 사물엔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출처를 쫓자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근본적 원인은 신(God)이라는 결론에 대한 반론이다. 이 기제에 의하면 근본적 원인도 역시 원인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명을 하고 있다. 가령 힌두교도에세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는데 그렇다면 '그 거북이는?'이란 질문에 인도인은 화제를 돌리자는 대답을 한다는거다. 추적적으로 존재의 인과적 근원은 밝힐 수 없을 뿐더러 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의 근원도 존재해야하며 이로써 이 명제는 거짓이라는 결론이다.
둘째, 자연법칙론이다. 이것 또한 '근본적인 원인론'과 맥을 같이하는데.. 기계론적 세계관에 편승해서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데 있는데, 그렇다면 '그 법칙을 만든 하나님은 그런 자연법칙을 만들고 다른 자연법칙을 만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자연법칙엔 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 또한 어떤 법칙을 따랐다는 유추가 성립되므로 그 법칙의 법칙에 데한 해명이 없다면 이 이론도 설득력이 없다는 증명이다. (역시 수학자다..!!)
셋째, 목적론.. 모든 존재는 그 존재에게 부여된 목적(용도?)가 있으며 그 목적의 주체이자 결정자는 하나님이다... 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KKK단이나, 파시스트같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러셀은 추궁하고 있다. 즉, 사회 반작용의 목적 또한 선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공의적이지 않다는 증명이다.
넷째, 신성을 위한 도덕론..
위에 열거한 세가지 이론은 칸트의 등장으로 모두 처분되었다. [순수이성 비판]... 하지만 칸트는 이를 초월한 또 하나의 논리를 만들었는데 도덕적 기준으로서의 신의 존재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신이 곧 도덕적 기준이 된다는 가설이지만, 이 또한 역시 어떤 주체가 선, 악을 구분짖는다면 그 주체는 초선적 존재가 되고,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 악의 의미가 아무 뜻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 악 (옳고 그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이전에 존재해야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다섯째, 불의 치유론... 이 세상은 정의가 존재해야 동작하는 시스템인데 이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가 필연적이란 견해인데.. '신성을 위한 도덕론'의 공격으로 상쇄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실.. 이 내용은 내가 기독교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해 신학서적을 통해 공격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임을 시인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기독교다'라고 말하는 내용과 거리를 멀리 한다. 내가 깨달은 기독교는 목적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헌금 의식이 내 존재적 행위일뿐이지 천국을 위한 보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강요된 헌금은 절대 하지 않는다.. 여하튼..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총체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책 전체를 일일히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몇 가지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아래 정리하겠다.
우선, 나와 러셀이 함께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게 대등하게 묶어버리다니... ^^;;) 성서 해석의 독점권이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 법전이 한문으로 쓰여있던 것 같이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육법전서나 신문을 읽는데 심한 장애를 겪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루터 이전..) 성서는 헬라어(그리스:신약)와 히브리어(유태인:구약)으로 기재되었다. 따라서 이 두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을뿐 아니라. 카톨릭 권력에 승인을 받은자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여기서 푸코의 담론적인 폭력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의지,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주체는 성서 해석권을 갖는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며, 이 전문가들은 종교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즉, 성서의 근본적 가르침과 무관하게 전문가 집단의 해석에 의해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미 본질적 신과 왜곡된 신과의 차이가 발생할 소지가 크며, 더욱이 심각했던 것은 이 전문가 집단(카톨릭 권력)이 이 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생활과 정치적 결정을 조종했다는 것이다.
즉, 신은 곧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되버린 기형적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러셀이 지적한 많은 부분 중에 하나를 더 설명하자면 기독교의 이성과 신심에 대한 것이다. 까뮈의 [페스트]에서 묘사된바와 같이 큰 전염병을 만났을 때 신부는 기독교인들을 회당에 모아 질병이 소거되길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이 기도는 고립된 상황에서 장시간(몇일, 혹은 몇달)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그 회당에 병원에 숙주가 있을 때 그 집회에 동참한 모든 성도는 감염되어 집단 학살?되게 된다. 하나님께 그 질병을 제거해달라고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앙이 있지만 지식이 없을 때 나타나는 사례이다. 이성이 급성장했던 데카르트 시대에 있어서 이성과 신앙을 균등화한 시도가 있었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이성의 공격에서 무방비한 상태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성의 공격의 허점을 신심으로 막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심의 영역을 초월한 이성적 증명은 기독교의 적이 된다.




사실 이 주제는 내가 의지를 갖고 (나도 기독교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러 측면으로 접근하고 싶은 화두 중에 하나이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여러 자료와 나의 결론을 이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구할 생각이며..
여러 러셀의 다른 생각들을 소개하고 싶지만 책 전체를 설명하는 것 같아 이쯤으로 접으려고 한다.

끝으로 이 책의 말미에 코플스턴 신부와 러셀이 나눈 논쟁 중에 (정말 감명 깊은 논쟁방식이었다..) 추천할 내용을 소개함으로 이 텍스트를 마치고 싶다. "우리는 필연적 존재인가? 우연적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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