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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 (1)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에서 퍼온 로쟈님의 글이다. 사실 통독은 여러 번 했지만, 다시 꼼꼼히 따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덧붙인 부분은 색깔을 달리 했다. (이하 존칭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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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서울(=한국)은 이라크에서 반미 테러조직의 인질로 억류돼 있던 김선일씨가 결국은 피살된 사건으로 술렁거린 듯하다. 테러조직의 요구조건은 한국의 이라크 파병 철회였지만, 한국정부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혹 다른 협상카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의심스럽지만), 협상테이블에 미처 앉아보기도 전에 피살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대통령과 정부에 구명(救命)을 호소했던 애꿎은 한 국민의 잔혹한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되거나 애도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인질을 살해한 테러조직의 행위 또한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지적대로, 그들의 행위는 결국 한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하는 한편, 반(反)테러전쟁의 기치를 내세운 부시 정부의 입지만을 더 강화시켜줄 따름이다. 극과 극은 그렇게 서로 공모적이다).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로쟈의 첫 코멘트들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로선 '파병 철회'가 수용하기 힘든 요구 조건이었다. 2) 다른 협상카드도 없었을 듯싶다. 3) 김선일씨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4) 테러조직도 정당화될 수 없다. 5)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부시의 입지를 강화했다. 3과 4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고, 5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다. 나로서도 어떤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사실은 항상 당위와 의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 즉 결과 예측 능력의 부재, 혹은 의도적 회피를 탓하고 싶다. 윤리와 연결되는 것도 이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1과 2다. 나는 여기에 아직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나는 정치판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나의 무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로쟈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근거들이 아래에 제시된다면 여기에 대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그것도 겨우 간접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외상(=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한 인간이고,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지만(외국에 나오면 비로소 그런 걸 체감한다), 이 ‘개인과 국가’란 주제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대신에,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을 기화(奇貨)로 하여 불거지고 있는 일부에서의 ‘정권퇴진운동’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어제 폐막된 모스크바영화제를 며칠 좇아 다니느라고 소홀히 한 ‘밥벌이’에 매진해야 할 참이지만(밥벌이가 전제돼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부득이하게도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혀야 하게끔 됐다. ‘객지’에서 시국과 관련하여 이런 의견을 밝힌다는 게 ‘객쩍은’ 일이긴 한데, 여러 ‘현지사정’으로 인한 제약을 무릅쓰고 몇 자 적도록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인터넷서점 알라딘 사이트에서의) balmas님과의 ‘논쟁’이며(하지만, 이 글의 ‘수신자’를 내가 balmas님으로만 국한하고 있는 건 아니다), 서로의 의견차이가 해소될 걸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나의 입장을 ‘정립’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는 줄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이해하는바 balmas님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이 요약은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한 것이므로, balmas님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1)(AP통신의 폭로에서 드러난바, 김선일씨 피랍사건을 고의로 은폐하거나 적어도 방관함으로써) 노무현 정권은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안게 됐다(“노무현 정권의 생명은 끝났다!”). (2)이로 인해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수구세력들의 노정권에 대한 공세는 가일층 강화될 것이고, (치명상을 입은) 노정권으로서는 국정운영의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구세력에 영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따라서, 이후 이라크 파병을 강행함과 동시에 반동수구 세력화할 수밖에 없는 노정권에는 더 이상 어떠한 개혁성/진보성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진보세력은 이제라도 당장 노정권퇴진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 정세는 87년 4월, 전두환정권의 호헌선언 때만큼이나 ‘비상시국’이다. 민주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기본권(=생존권)마저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 결사항전에 나서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시 5공의 전두환정권 역시 박종철 학형의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했다가 그것이 폭로되는 바람에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고서 수세국면에 처하게 됐는바, (대통령 직접선거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결연하게 무시한) 4월의 ‘호헌선언’은 수세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적반하장’격의 카드였다. 그것이 결국은 (가장 보수적이라는) 중년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나선 6월항쟁을 가져왔고, 이 항쟁은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정권의 6.29(항복)선언으로 봉합되었다. 하지만, 새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 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노태우’였다(알다시피, 이후 92년, 97년, 2002년 차례로 대선이 있었고, 우리 정치사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6월항쟁의 결과로 가능해진 이러한 정권/정부교체의 사슬을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거기에는 정권차원의 ‘이벤트’도 한몫 한바, 선거 바로 전날에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왔다(참고로, 노태우가 구호로 내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호응하려는 듯이 TV에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 <보통사람들>이 방송되었다. 지금 생각으론 우스워 보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다 ‘먹혔다’). 아마도 그 건은 안기부(현 국정원) 역사에 남을 만한 극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거사’가 아마도 같은 세대로서 나와 balmas님이 겪어온 바이다. 이러한 과거사의 한 대목을 미리 꺼내든 것은 그것이 서로의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경험론적’ 지반으로서 한 준거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balmas님은 ‘2004년 6월’을 ‘1987년 4월’과 마찬가지의 상황이라고 간주하는 것인지?(어느새 17년 전이군!) [이건 발마스님의 논조가 어땠는지를 참조해야 로쟈의 질문이 얼마나 적절한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단지 '수사적' 차원에서 노정권 퇴진운동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발마스님도 정말로 그런 운동을 조직하거나, 조직하는 단체를 후원하거나 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지 의문스럽고, 대신에 아마도 노정권 퇴진이라는 다소 선정적인(따라서 내겐 오히려 수사적으로밖엔 들리지 않는) 구호로써 노무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시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로쟈의 대응은 ('노정권 퇴진운동'의 시의성에 대한 판단이라기 보다) 자신의 정치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떤 판단 자체에 시비를 걸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취미판단이야 각자의 몫이 아닌가? 어떤 정권이 맘에 든다, 안든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지난번 국회의원선거에서 ‘반전’에 성공함으로써 노정권이 ‘탄핵정국’을 정면 돌파하게 됐지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자체는 급등한 것 같지 않다. ‘노사모’가 있긴 하지만 노무현은 현재로선 ‘인기 없는’ 대통령이다(그의 참여정부는 초기 ‘문민정부’의 상징적 아우라도 초기 ‘국민의 정부’의 카리스마도 갖고 있지 않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세력은 그를 대통령으로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듯하며(대통령은 한 ‘개인’이기 이전에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태도는 정치의 룰을 무시하는 反민주주의적 태도이다), 민주노동당이나 개혁세력은 그의 미지근한 개혁속도와 ‘반동적인’ 파병방침에 불만이 고조돼 있는 듯하다(나는 그러한 불만에 일부 공감한다). 그는 한쪽에서 보기엔 ‘모험주의적 좌파’이며(그래서 위험하다), 다른 쪽에서 보기엔 ‘개량적 보수주의자’이다(그래서 믿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가 그렇게 끼인 형국 속에서 용케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하며, 그가 속한 열린우리당이 의회의 과반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나는 지난번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그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서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본체는 5공의 ‘민주정의당’인바, 나는 5공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다)의 집권만은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나는 이회창에 대해서도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왜일까? 돌려 물으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왜 모두 이회창을 싫어하나? 아마도 한나라당의 당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 그가 내뱉었던 '지배층다운' 말들 몇몇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는 사람이 그 당수에 대해서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나?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이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그대로 옮겨지는 것이 경솔하고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꼭 이회창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물론 한나라당 '따위'에 들어간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 당원/정치인 역시 다종다기할 것이며, 이 차이를 간과하고 '한나라당인'으로 뭉뚱그려 판단하는 사람들이 나 역시 곱게 보이진 않는다. ("ㅁㅁㅁ 왜 싫어?" "한나라당이잖아!" "ㅇㅇㅇ 왜 좋아?" "민노당이잖아!") 문제는 그 차이들이 이른바 당론으로 봉합되는 현상일 것인데, 이 현상을 당원/정치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당론이 문제면 당이 문제다. 개인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이나 노무현의 ‘민주당’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니냐라고 반문한다면, 나로선 할말이 없다. 하지만, 이미 다른 글들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거의 똑같다’ 하더라도 정치적 판단에서는 ‘작은 차이’란 게 중요하며, 그러한 ‘상식’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요컨대,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더 나쁜 놈’이 있고, ‘덜 나쁜 놈’이 있는 것이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이기면 이회창 개인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쟈의 전제인 듯하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전제일 것이다).]

나의 ‘정치적 판단’의 핵심적인 기준은 ‘좋은 사람’(=혁명)에 대한 이상주의적 기대가 아니라 ‘덜 나쁜 놈’(=개혁)에 대한 현실적인 지지이다(흔히 하는 말로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정치적 구도는 ‘좋은 사람’(=진보개혁세력) 대 ‘나쁜 놈들’(=수구보수세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좋은 사람’-‘덜 나쁜 놈’-‘더 나쁜 놈’이라는 3분법적 구도이다. 선과 악,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판별하는 ‘윤리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궤변이거나 넌센스이다. 하지만, ‘정치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도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지지하는 것은 ‘덜 나쁜 놈들’의 공간을 넓히는 일이다. [이건 일종의 허무주의인데, 모든 현실적 인식은 얼마간 허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위나 이상의 선언은 허무하고 말고 할 게 없다. 당위와 현실의 괴리에서 허무가 발생하는 바, 이 괴리는 필연적이다(괴리가 없다면 이미 유토피아다). 따라서 허무가 없다면 다음 세 입장 중 하나다. 1) 당위가 없다. 대충 살면 된다. 2) 현실이 없다. 선언만 한다. 3) 당위에 따라 살지 못하는 현실적 인간들을 모두 숙청하면/비웃으면 된다. 1과 2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3을 선택한다면 분명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의 당위를 갖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의해 분류된 '현실적 인간'들을 비웃으며 산다(이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비웃음이 숙청으로 쉽게 이어질지도). 그러나 이도 저도 싫다면, 이 필연적 허무주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실, 3분법적 구도라는 건 나의 창안이 아니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유구한 것이다. 10세기부터인가 중세 기독교적 상상력 속에서 연옥이 차지했던 자리를 떠올려보라(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참조). 천국에 가야 할 ‘착한 분’도 아니고, 지옥에나 떨어져 마땅한 ‘나쁜 놈’도 아닌 대부분의 ‘사악하지는 않지만 좀 모자란’ 인간들을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하에서는 마땅히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탄생’한 것이 중간계로서의 ‘연옥’이었고, 그래서 형성된 것이 천국-연옥-지옥의 3분법적 구도였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약간 발휘하면, 나는 중세의 이 ‘연옥’이야말로 세속의 공간이며, 귀족과 농민 사이에 시민(=부르주아) 계급이 들어서면서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의 ‘세 위계’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 중세의 연옥과 부르주아계급의 성장,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 거라 짐작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자세히 따져보지 않겠다(참고로, 서구와는 달리 러시아의 사회적 위계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었으며, 종교적 상상력 또한 ‘지옥’을 강조하는 종말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에는 ‘중간’이 없었다. 그 결과는 러시아에는 ‘혁명’(=단절)만 있어왔지 그 ‘개혁’(=계승)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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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여기를 오래 버려두었는데, 혹시나 가끔씩 찾아주었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사실 다른 곳에 블로그를 열었고,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운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더 이상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쌓인 글들과의 단절이 너무 뚜렷해서일 수도 있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단지 음악 게시물을 올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여기서는 음원 파일을 내 계정에 올릴 수 없다). 다시 전부 여기로 옮겨오거나 아니면 그리로 이사가야 할텐데, 조만간 결정해야 할 듯 싶다. 여기로 옮겨오자니 음악 게시물들이 아깝고, 이사가자니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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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지각>에서, 2

[…] 저는 이제 두 번째 요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변화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 변화 아래에서 변화하는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지지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운동은 존재하지만, 비활성의 또는 불변적인 움직이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은 어떤 운동체를 함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물들을 그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감각은 눈의 감각이며, 눈은 시각장 안에서 형태는 바꾸지 않고 장소만을 바꾼다고 가정되는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형상들을 분리해 내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운동은 운동체에 대해 우유성으로써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안정적인 대상들, 그리고 사람에 관해서 말하자면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신뢰할 만한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유용합니다. 시각은 이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다루기를 시도합니다. 촉각의 전위(前衛)로서, 시각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청각에 호소한다면, 운동과 변화를 독립적인 실재들로서 지각하는 데 이미 어려움을 덜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으면서, 그 멜로디에 우리의 몸을 맡겨 봅시다. 어떤 운동체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이나, 변화하는 어떤 것이 없는 변화에 대한 분명한 지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이 변화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분할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 멜로디가 곧 멈춰 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일한 전체로서의 음향이 아닐 것이며, 동일하게 분할 불가능한 어떤 다른 음향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그것을 분할하고, 멜로디의 끊임없는 연속성 대신에 구별되는 음표들의 병치를 상상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왜냐면 우리는 만약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우리가 들은 그 소리를 비슷하게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가 들여야만 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노력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청각이 시각적 이미지들을 흡수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보를 보면서 갖게 되는 시각을 통해서 멜로디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상상 속의 종이 위에다 음표들이 차례차례 놓여 있는 것을 그려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건반을 연주하는 것을, 그리고 활이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을, 연주자들이 서로 맞추어서 자신의 부분을 연주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은 공간적 이미지들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하며, 어떤 식으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변화하는 어떤 “사물”에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변화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각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시각에 좀 더 주의를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여기서도 운동이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단어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실체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지각하게 됩니다.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영상은 물리학에 의해서 이미 암시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더욱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물질을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행동들로, 계속되는 진동 속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운동들로 용해시키며, 따라서 운동은 실재 그 자체가 되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 운동성에 어떤 지지물을 할당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하면서, 지지물은 희미해집니다. 덩어리는 분자들로, 분자는 원자들로, 원자는 전자나 미립자들로 분해되며, 마침내 운동에 할당되었던 지지물은 그저 편리한 도식이었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학자들로서는 우리의 시각적 상상의 습관을 단순히 허용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수송 차량에 그러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운동을 거기에 맞붙여 버리는 바로 그 “운동체”란 무엇입니까? 단지 채색된 한 지점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그 자체로서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동하는 어떤 것들의 연속이 합쳐진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 운동한다고 근거 없이 단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운동들이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적 삶의 영역보다 더 변화의 실체성이 가시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명백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습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론이 도달하게 된 모든 종류의 어려움과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그 각각이 불변적이며 그것들의 연속을 통해 자아의 변화를 낳는 구분되는 심리적 상태들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불변적이며 위의 상태들에 대한 지지대로서 기능하는 자아를 상상하는 데에서 옵니다. 어떻게 이 통일성과 이 다양성이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둘이 모두 지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첫째로는 변화가 덧붙여진 어떤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는 그것이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지속하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굳고 움직이지 않는 기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기체를 통과해 가는 구별되는 상태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우리 의식의 실존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분할 불가능한 멜로디—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성질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분할 불가능한 변화의 연속이 바로 진정한 지속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내가 다른 곳에서 다루었던 질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시작할 수는 없겠습니다. 저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국한하겠습니다. 즉, 이러한 “실재적 지속”이 표현 불가능하고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실재적 지속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고 불러왔던 것, 그러나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지각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계기를 함축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계기가 처음에 우리 의식에 나란히 놓인 “이전”과 “이후”의 구별처럼 제시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을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계기의 가장 순수한 인상—동시성의 인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진 인상—을 가지며, 이제 우리에게 그 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멜로디의 연속성과 분해 불가능성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구별되는 음표들로, 수많은 “이전들”과 “이후들”로 나눈다면, 우리는 그것에 공간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고 계기에 동시성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에서, 그리고 오직 공간에서만, 서로에 대해 외재적인 부분들을 그 윤곽이 뚜렷하도록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이 공간화된 시간 속이라는 것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의 부단한 노랫소리를 듣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실재적 지속이 있습니다. 그것 덕분에, 우리가 우리의 안과 외부 세계에서 목격하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갖는 변화들이 단일하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즉, 그것이 내부의 문제든 외부의 문제든, 우리의 문제든 사물들의 문제든, 실재는 운동성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제가 변화는 있지만 변화하는 사물들은 없다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운동성의 광경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옆질과 뒷질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유와 실존을 붙일 수 있는 “고정된” 점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약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만약 실재가 운동성이라면 누군가 그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이미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라고—그것은 사유를 피한다고—생각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세계는 허물어질 것이며, 정신은 급류와도 같은 사물들의 흐름에 익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금 안심하기를! 만약 그들이 사이에 삽입된 베일을 걷어 내고 직접적으로 변화를 보는 데 동의한다면, 그 변화는 그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견고하며 가장 잘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단단함은, 단지 운동들 사이의 덧없는 배치에 불과한 고정성보다는 무한히 우월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여러분에게 주의를 기울여주기를 요청하는 세 번째 요점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변화가 실재적이며 심지어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거라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과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던 익숙한 방식과는 사뭇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자들은 우리 안의 이러한 자연적 경향성을 장려합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스스로 존재합니다. 만약 과거의 어떤 것이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현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쪽으로부터 어떤 자선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요컨대—비유 없이 말하자면— 기억이라 불리는 어떤 특정한 기능의 개입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의 역할은 과거의 어떤 부분들을 보존하고, 예외가 좀 있긴 하지만, 일종의 상자에다가 과거의 부분들을 저장해 놓는 것이라고 가정됩니다. 이것은 심각한 실수입니다! 유용하긴 하다고 인정할 수는 있으며, 아마도 행동에는 필수적일 것이지만, 사변에는 치명적입니다. 여러분 말마따나 “간단히 하면/하찮은 것 속에서in a nutshell”, 우리는 그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손상시킬 수 있는 대부분의 착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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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중 누구나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어요."

 

언젠가 몸 밖으로 밀어내야 할텐데. 안에서 곪을지도 모르겠다.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사실의 선을 따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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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지각>에서, 1

두 번째 강의

 

어제 여러분은 제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신 만큼, 오늘 제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재와 우리 사이에 놓아 버린 인공적인 도식을 제쳐 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어떤 생각이나 지각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와 운동성에 대한 직접적 지각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선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즉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을 절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운동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나는 내 손을 A 지점에 두고 있습니다. B 지점으로 손을 옮기면, 나는 AB라는 간격을 가로지르게 됩니다. 저는 A로부터 B에 이르는 이 운동을 본성적으로 단순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A에서 B로 우리의 손을 움직인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문제의 운동과] 같은 운동이 아닙니다. A부터 B까지의 단일한 운동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가정에 의해서, 하나의 간격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운동이 있게 됩니다. 안으로부터 근육 감각을 통해서도, 밖으로부터 시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지각을 갖게 됩니다. 만약 내가 A부터 B까지의 운동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나는 그 운동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분할 불가능하다고 단언해야 합니다.

 

내가 A로부터 B로 움직이는 내 손을 보면서, 그 간격 AB에 대해서 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간격 AB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A에서 B까지의 운동도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왜냐면 이 운동은 그 간격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다.” 또는: “이동하는 매 순간마다, 그 운동자는 어떤 지점을 지나며, 따라서 그 운동 안에서 원하는 만큼 많은 단계들을 구분해낼 수 있고, 따라서 그 운동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 봅시다. 어떻게 운동이 그것이 가로지르는 공간과 들어맞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대상이 그것의 통과 궤도 위의 한 지점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상은 그곳을 통과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것은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거기 멈추었다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멈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운동이 아닙니다. 그 이행에 아무런 중단이 없다면, 하나의 이동은 항상 단 한 번의 도약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이 도약은 몇 초, 혹은 몇 날이나 몇 달,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도약인 순간, 그것은 분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일단 이행이 완료되면, 그것의 궤도는 공간이고 공간은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하므로, 우리는 운동 자체도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냐면 어떤 운동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남기고간 위치, 그것이 차지할 위치, 만약 중간에 멈추었을 경우 그 운동이 차지했을 위치. 우리는 부동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과 운동이 통과한 공간의 지점들의 부동성을 더 잘 일치시킬수록, 우리는 그 운동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실재적 부동성이란, 우리가 그것을 운동의 부재로 이해하는 한에서,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이 실재 그 자체이며, 우리가 부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들의 어떤 상태인데, 이는 두 기차가 평행하는 선로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발생하는 어떤 상태와 유비적으로 비슷합니다. 두 기차들 각각은 다른 기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외적인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 사물들도 우리에게 작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오로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경우에만, 문을 통해서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부동성”이 우리 행동의 필요조건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서 놓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우리는 운동 안에 무엇인가가 겹쳐져 놓여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실행보다 더 정당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마음의 습관을 사변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면, 우리는 진정한 실재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일부러 만들어낼 것이며, 실재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엘레아의 제논의 증명들을 상기해 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증명들은 모두 운동과 그 운동이 주파한 공간에 대한 혼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최소한 공간을 다루듯이 운동을 다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 운동의 마디를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절대로 그가 쫓고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아킬레스가 도달하면, 거북이는 그 시간만큼 그보다 멀리 가 있을 것이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이 증명을 반박해 왔는데, 이 방식들은 너무 까다로워서 그 각각의 반박들은 다른 어떤 반박이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를 그로부터 빼앗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작업을 쉽게 만드는 아주 간단한 수단이 있었습니다. 아킬레스에게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결국 거북을 따라잡고 심지어 거북을 앞지른 만큼, 바로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움직임으로써 운동의 가능성을 시연해 보였던 고대의 철학자는 옳았습니다. 단, 그 철학자의 유일한 실수는 동작으로만 표현했을 뿐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킬레스에게 그 경주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제논은, 내가 있는 지점에서 거북이가 있었던 지점으로 내가 움직이고, 다시 그 지점에서 거북이가 그 때 있었던 다음 지점으로 움직이며, 이와 같이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내가 뛰도록 하는 그의 절차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침내 몇 발자국을 디딘 후에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음으로써 그 걸음으로 거북이를 앞지릅니다. 따라서 나는 연속적인 분할 불가능한 행위들을 수행합니다. 나의 진행은 이런 행위들의 연속입니다. 당신은 그 진행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걸음의 수만큼 나눠서 부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진행을 다른 법칙에 따라서 재분절하거나,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고 가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논이 한 대로 나아가는 것은, 이 달리기가 마치 그것이 주파한 공간처럼 자의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행이 실제로 궤도에 들어맞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과 부동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운동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부동성으로 구성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 운동을 살펴볼 때 마치 그 부동성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운동이란 어떤 한 점, 그리고 다른 한 점, 이렇게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며,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가는 간격에는 그 간격을 뛰어넘는 이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가 아직 두 개의 연속적인 점들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이행을 가정해야 한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이행에 우리의 주의를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 이행을 지점들의 연속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이행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하는 순간까지 그것을 연기합니다. 우리는 이행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이 만족스럽게 자리잡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점들로 관심을 돌리며 그 점들만을 다루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는 운동으로서의 운동의 광경이 우리의 사유 속에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시 운동을 부동성들로 채우게 됩니다. 만약 운동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부동성이 실재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운동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운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든 이와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실재적 변화는 분할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를 구별되는 상태들의 연속과 같은 것처럼, 그리고 이 상태들이 마치 시간의 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변화가 우리 안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사물들 안에서도 그러하다면, 우리들 각각이 “나”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두 변화는 서로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두 대의 기차와 같은 상황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색깔을 바꾼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 변화는 변화의 구성 요소가 되는 색조들의 연속이며, 그 색조들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첫째로, 만약 각각의 색조가 어떤 객관적 실존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한히 빠른 진동이며, 곧 변화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각은, 그 지각이 주관적인 만큼, 우리의 신체의 일반적 상태의 어떤 고립되고 추상적인 측면에 불과하고, 이 상태는 전체로서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이러한 소위 불변적인 지각이 자신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야기합니다. 사실, 계속해서 변경되지 않는 지각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색깔, 우리 밖에 있는 그 색깔은 운동성 그 자체이며, 우리의 신체 또한 운동성입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 지각의 전체 체계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외부와 내부의 운동성 사이에 아까 말한 두 대의 기차와 비슷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절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좀 더 복잡하지만, 같은 종류의 상황입니다. 두 변화가, 대상과 주체의 변화가, 특정 조건 하에서 일어날 때, 그 변화들은 “상태”라고 불리는 특정한 외관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들”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그것들을 가지고 변화를 재조립합니다. 반복하건대,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변화를 상태들로 분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게 해 주며, 변화 그 자체보다 상태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행동에 유리한 것이 사변에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변화를 정말로 상태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상한다면, 당신은 즉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오로지 외관만을 다룹니다. 당신은 진정한 실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저는 이 요점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각자 실제로 한 번 실행에 옮겨 봅시다. 어떤 변화, 어떤 운동의 직접적인 시각을 한 번 갖도록 해 봅시다. 우리는 절대적 분할 불가능성의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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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화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을 둘러싸고 전교조 교사들과 이 나라 교장 선생님들이 벌이고 있는 죽기 살기의 싸움은 저 아이들의 찬란한 생명력 앞에서 수치스럽다. 교장이 젊은 여교사들에게 차 시중을 시킨 일이 발단이라고 한다. 듣기에도 민망하고 꼴 같지도 않다."

 

김훈은 앞 문단들에서 '고3 선배님들'을 응원하러 수능시험 고사장 앞에 진을 치고 서서 '지옥의 문턱 앞에서의 축제'를 벌이는 아이들을 눈물겹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저 자살 사건으로 화제를 옮기는데, 꼴 같지도 않단다. 어떤 의미에서? 다음 문단을 계속 읽어본다.

 

1) "나는 젊은 여교사가 늙은 교장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은 예(禮)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저런! 이렇게 나이브하고 고루한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다니!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든다. 편안하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우파 김훈이 또 한 건 했나 싶다. 마음을 추스리고 계속 읽어본다.

 

2) "또한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키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것 또한 예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화들짝 놀란다. 무엇인가? 이 문장은 사실, 당연한 문장이고, 이런 말을 한다고 대단히 진보적인 것도 아닌, 뭐 그렇고 그런 문장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금 놀랐으며, 방금 전 내가 우파 김훈에게 겨누었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쥐꼬리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1)을 말한 사람이 2)를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내 분류 체계에는 1)의 화자와 2)의 화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중간 어딘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위태롭게 경계선 위에 서 있을 뿐 자기만의 이름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1) + 2)가 오히려 당연한 생각, 그러니까 더 '객관적인' 생각, 더 '보편적인' 생각이 아닐까? (객관성, 보편성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1)을 읽어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맞는 말이다.

 

이 사건의 문제는 1)과 2)의 생각 중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도 없었고(그게 누구 탓이든), 차 시중을 스스로 삼가는 예도 없었다.

 

그 다음 절차가 사회적 분석, 혹은 권력 분석인데, 김훈은 이걸 전혀 못한다. (아래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데 여기부터는 오차 범위가 너무 크다. 이른바 인간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고유한 문제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단 두고 단락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본다.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양쪽이 인의예지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양쪽이 이른바 '참교육'을 한다는 교사와 교장이 아닌가. 개인적 자율의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싸우다가 한쪽이 자살을 하고 나니까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세력화, 집단화, 이념화, 정치화함으로써 권력투쟁의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싸움의 형국은 한마디로 개수작이다."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세력화, 이념화, 정치화...등이 '기존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보수적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의 명제는, 뒤집힌 형태로, 어떤 개혁의 요구가 된다. 개인의 개혁, 혹은 윤리적 개혁인 것인데, 그러므로 당연히 집단화, 사회화될 수 없고, 따라서 운동도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이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훈,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

 

제목은 거짓말이다. 김훈의 줄타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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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밤에 집에 혼자 있을 때 가끔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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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예술 - 학문 - 정치

 

관계항이 세 개가 넘어가면 공식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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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 다리의 움직임에서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 한 마리가 나에게 주는 행복만으로도 나는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개 다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 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와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이 굳은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그 굳은살은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 굳은살은 개나 사람이 이 세상을 딛고 다닌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덜 딛고 다닌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개 발바닥의 굳은살은 한 편의 역사를 이루는데, 이 역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 역사는 해독하기 어려운 역사인데, 그것이 해독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역사가 세상과 개 사이에만 이루어진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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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01. slowdive - souvlaki space station

02. sigur rós - (untitled 4)

03. azure ray - sleep

04. radiohead - planet telex

05. sunset rubdown - us ones in between

06. smashing pumpkins - mayonaise

07. velvet underground & nico - venus in furs

08. yo la tengo - autumn sweater

09. my bloody valentine - sometimes

10. porcupine tree - shesmovedon

11. antony and the johnsons - hope there's someone

12. jeff buckley - hallelujah

13. coldplay - everything's not lost

14. mono - the remains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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