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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내가 남성이라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쉽게 바꿀 수 없기에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죽을 정도로 부끄럽다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마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타협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들뢰즈 덕분에 '-되기'라는 말이 유행해서, '여성-되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들뢰즈는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들뢰즈주의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 때문에 들뢰즈로부터 멀어진 것 같다. 그(혹은, 들뢰즈주의자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게 좀 불편했다.

 

남성이라도 여성-되기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여성-되기라는 게 그저 그런 수사나 은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꼭 되어야만 할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딱히 답을 못찾겠고, 그저 조금 슬프고 안타깝다. 무엇 때문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비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을까. 나는 왜 내가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타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태주의나 장애인 담론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여성주의를 접하고 내가 그랬던 것만큼 엄격한 잣대를 여기에는 들이밀지 않았다. 타협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는 타협하고 무엇에는 타협하지 않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여성-되기보다 장애인-되기는 물리적으로 더 쉽다. 그래서 타협했을까. 지구의 암세포인 인간으로써, 내가 살아있는 게 지금 곧바로 죽는 것보다 환경에 더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런데도 살고 있다. 타협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생태주의자들은 타협했을까? 그들도 타협했을 것이다.

 

내 생도 수많은 타협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의 생도 그렇다. 열심히 열심히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다. 앞뒤에 친구들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슈퍼집 아주머니도 주인집 할머니도 전공수업 선생님도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같이 기어간다. 이마에는 다들 '타협'이라고 쓰여있다. 눈물은 나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덧) '타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런데 이건 단지 뉘앙스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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