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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사물들을 그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감각은 눈의 감각이며, 눈은 시각장 안에서 형태는 바꾸지 않고 장소만을 바꾼다고 가정되는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형상들을 분리해 내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운동은 운동체에 대해 우유성으로써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안정적인 대상들, 그리고 사람에 관해서 말하자면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신뢰할 만한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유용합니다. 시각은 이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다루기를 시도합니다. 촉각의 전위(前衛)로서, 시각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청각에 호소한다면, 운동과 변화를 독립적인 실재들로서 지각하는 데 이미 어려움을 덜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으면서, 그 멜로디에 우리의 몸을 맡겨 봅시다. 어떤 운동체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이나, 변화하는 어떤 것이 없는 변화에 대한 분명한 지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이 변화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분할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 멜로디가 곧 멈춰 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일한 전체로서의 음향이 아닐 것이며, 동일하게 분할 불가능한 어떤 다른 음향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그것을 분할하고, 멜로디의 끊임없는 연속성 대신에 구별되는 음표들의 병치를 상상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왜냐면 우리는 만약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우리가 들은 그 소리를 비슷하게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가 들여야만 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노력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청각이 시각적 이미지들을 흡수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보를 보면서 갖게 되는 시각을 통해서 멜로디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상상 속의 종이 위에다 음표들이 차례차례 놓여 있는 것을 그려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건반을 연주하는 것을, 그리고 활이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을, 연주자들이 서로 맞추어서 자신의 부분을 연주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은 공간적 이미지들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하며, 어떤 식으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변화하는 어떤 “사물”에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변화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각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시각에 좀 더 주의를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여기서도 운동이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단어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실체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지각하게 됩니다.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영상은 물리학에 의해서 이미 암시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더욱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물질을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행동들로, 계속되는 진동 속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운동들로 용해시키며, 따라서 운동은 실재 그 자체가 되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 운동성에 어떤 지지물을 할당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하면서, 지지물은 희미해집니다. 덩어리는 분자들로, 분자는 원자들로, 원자는 전자나 미립자들로 분해되며, 마침내 운동에 할당되었던 지지물은 그저 편리한 도식이었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학자들로서는 우리의 시각적 상상의 습관을 단순히 허용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수송 차량에 그러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운동을 거기에 맞붙여 버리는 바로 그 “운동체”란 무엇입니까? 단지 채색된 한 지점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그 자체로서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동하는 어떤 것들의 연속이 합쳐진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 운동한다고 근거 없이 단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운동들이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적 삶의 영역보다 더 변화의 실체성이 가시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명백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습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론이 도달하게 된 모든 종류의 어려움과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그 각각이 불변적이며 그것들의 연속을 통해 자아의 변화를 낳는 구분되는 심리적 상태들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불변적이며 위의 상태들에 대한 지지대로서 기능하는 자아를 상상하는 데에서 옵니다. 어떻게 이 통일성과 이 다양성이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둘이 모두 지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첫째로는 변화가 덧붙여진 어떤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는 그것이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지속하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굳고 움직이지 않는 기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기체를 통과해 가는 구별되는 상태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우리 의식의 실존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분할 불가능한 멜로디—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성질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분할 불가능한 변화의 연속이 바로 진정한 지속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내가 다른 곳에서 다루었던 질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시작할 수는 없겠습니다. 저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국한하겠습니다. 즉, 이러한 “실재적 지속”이 표현 불가능하고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실재적 지속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고 불러왔던 것, 그러나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지각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계기를 함축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계기가 처음에 우리 의식에 나란히 놓인 “이전”과 “이후”의 구별처럼 제시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을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계기의 가장 순수한 인상—동시성의 인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진 인상—을 가지며, 이제 우리에게 그 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멜로디의 연속성과 분해 불가능성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구별되는 음표들로, 수많은 “이전들”과 “이후들”로 나눈다면, 우리는 그것에 공간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고 계기에 동시성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에서, 그리고 오직 공간에서만, 서로에 대해 외재적인 부분들을 그 윤곽이 뚜렷하도록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이 공간화된 시간 속이라는 것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의 부단한 노랫소리를 듣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실재적 지속이 있습니다. 그것 덕분에, 우리가 우리의 안과 외부 세계에서 목격하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갖는 변화들이 단일하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즉, 그것이 내부의 문제든 외부의 문제든, 우리의 문제든 사물들의 문제든, 실재는 운동성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제가 변화는 있지만 변화하는 사물들은 없다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운동성의 광경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옆질과 뒷질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유와 실존을 붙일 수 있는 “고정된” 점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약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만약 실재가 운동성이라면 누군가 그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이미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라고—그것은 사유를 피한다고—생각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세계는 허물어질 것이며, 정신은 급류와도 같은 사물들의 흐름에 익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금 안심하기를! 만약 그들이 사이에 삽입된 베일을 걷어 내고 직접적으로 변화를 보는 데 동의한다면, 그 변화는 그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견고하며 가장 잘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단단함은, 단지 운동들 사이의 덧없는 배치에 불과한 고정성보다는 무한히 우월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여러분에게 주의를 기울여주기를 요청하는 세 번째 요점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변화가 실재적이며 심지어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거라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과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던 익숙한 방식과는 사뭇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자들은 우리 안의 이러한 자연적 경향성을 장려합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스스로 존재합니다. 만약 과거의 어떤 것이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현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쪽으로부터 어떤 자선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요컨대—비유 없이 말하자면— 기억이라 불리는 어떤 특정한 기능의 개입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의 역할은 과거의 어떤 부분들을 보존하고, 예외가 좀 있긴 하지만, 일종의 상자에다가 과거의 부분들을 저장해 놓는 것이라고 가정됩니다. 이것은 심각한 실수입니다! 유용하긴 하다고 인정할 수는 있으며, 아마도 행동에는 필수적일 것이지만, 사변에는 치명적입니다. 여러분 말마따나 “간단히 하면/하찮은 것 속에서in a nutshell”, 우리는 그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손상시킬 수 있는 대부분의 착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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