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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 (1)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에서 퍼온 로쟈님의 글이다. 사실 통독은 여러 번 했지만, 다시 꼼꼼히 따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덧붙인 부분은 색깔을 달리 했다. (이하 존칭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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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서울(=한국)은 이라크에서 반미 테러조직의 인질로 억류돼 있던 김선일씨가 결국은 피살된 사건으로 술렁거린 듯하다. 테러조직의 요구조건은 한국의 이라크 파병 철회였지만, 한국정부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혹 다른 협상카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의심스럽지만), 협상테이블에 미처 앉아보기도 전에 피살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대통령과 정부에 구명(救命)을 호소했던 애꿎은 한 국민의 잔혹한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되거나 애도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인질을 살해한 테러조직의 행위 또한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지적대로, 그들의 행위는 결국 한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하는 한편, 반(反)테러전쟁의 기치를 내세운 부시 정부의 입지만을 더 강화시켜줄 따름이다. 극과 극은 그렇게 서로 공모적이다).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로쟈의 첫 코멘트들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로선 '파병 철회'가 수용하기 힘든 요구 조건이었다. 2) 다른 협상카드도 없었을 듯싶다. 3) 김선일씨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4) 테러조직도 정당화될 수 없다. 5)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부시의 입지를 강화했다. 3과 4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고, 5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다. 나로서도 어떤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사실은 항상 당위와 의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 즉 결과 예측 능력의 부재, 혹은 의도적 회피를 탓하고 싶다. 윤리와 연결되는 것도 이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1과 2다. 나는 여기에 아직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나는 정치판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나의 무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로쟈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근거들이 아래에 제시된다면 여기에 대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그것도 겨우 간접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외상(=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한 인간이고,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지만(외국에 나오면 비로소 그런 걸 체감한다), 이 ‘개인과 국가’란 주제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대신에,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을 기화(奇貨)로 하여 불거지고 있는 일부에서의 ‘정권퇴진운동’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어제 폐막된 모스크바영화제를 며칠 좇아 다니느라고 소홀히 한 ‘밥벌이’에 매진해야 할 참이지만(밥벌이가 전제돼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부득이하게도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혀야 하게끔 됐다. ‘객지’에서 시국과 관련하여 이런 의견을 밝힌다는 게 ‘객쩍은’ 일이긴 한데, 여러 ‘현지사정’으로 인한 제약을 무릅쓰고 몇 자 적도록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인터넷서점 알라딘 사이트에서의) balmas님과의 ‘논쟁’이며(하지만, 이 글의 ‘수신자’를 내가 balmas님으로만 국한하고 있는 건 아니다), 서로의 의견차이가 해소될 걸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나의 입장을 ‘정립’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는 줄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이해하는바 balmas님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이 요약은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한 것이므로, balmas님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1)(AP통신의 폭로에서 드러난바, 김선일씨 피랍사건을 고의로 은폐하거나 적어도 방관함으로써) 노무현 정권은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안게 됐다(“노무현 정권의 생명은 끝났다!”). (2)이로 인해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수구세력들의 노정권에 대한 공세는 가일층 강화될 것이고, (치명상을 입은) 노정권으로서는 국정운영의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구세력에 영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따라서, 이후 이라크 파병을 강행함과 동시에 반동수구 세력화할 수밖에 없는 노정권에는 더 이상 어떠한 개혁성/진보성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진보세력은 이제라도 당장 노정권퇴진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 정세는 87년 4월, 전두환정권의 호헌선언 때만큼이나 ‘비상시국’이다. 민주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기본권(=생존권)마저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 결사항전에 나서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시 5공의 전두환정권 역시 박종철 학형의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했다가 그것이 폭로되는 바람에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고서 수세국면에 처하게 됐는바, (대통령 직접선거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결연하게 무시한) 4월의 ‘호헌선언’은 수세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적반하장’격의 카드였다. 그것이 결국은 (가장 보수적이라는) 중년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나선 6월항쟁을 가져왔고, 이 항쟁은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정권의 6.29(항복)선언으로 봉합되었다. 하지만, 새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 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노태우’였다(알다시피, 이후 92년, 97년, 2002년 차례로 대선이 있었고, 우리 정치사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6월항쟁의 결과로 가능해진 이러한 정권/정부교체의 사슬을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거기에는 정권차원의 ‘이벤트’도 한몫 한바, 선거 바로 전날에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왔다(참고로, 노태우가 구호로 내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호응하려는 듯이 TV에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 <보통사람들>이 방송되었다. 지금 생각으론 우스워 보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다 ‘먹혔다’). 아마도 그 건은 안기부(현 국정원) 역사에 남을 만한 극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거사’가 아마도 같은 세대로서 나와 balmas님이 겪어온 바이다. 이러한 과거사의 한 대목을 미리 꺼내든 것은 그것이 서로의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경험론적’ 지반으로서 한 준거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balmas님은 ‘2004년 6월’을 ‘1987년 4월’과 마찬가지의 상황이라고 간주하는 것인지?(어느새 17년 전이군!) [이건 발마스님의 논조가 어땠는지를 참조해야 로쟈의 질문이 얼마나 적절한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단지 '수사적' 차원에서 노정권 퇴진운동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발마스님도 정말로 그런 운동을 조직하거나, 조직하는 단체를 후원하거나 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지 의문스럽고, 대신에 아마도 노정권 퇴진이라는 다소 선정적인(따라서 내겐 오히려 수사적으로밖엔 들리지 않는) 구호로써 노무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시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로쟈의 대응은 ('노정권 퇴진운동'의 시의성에 대한 판단이라기 보다) 자신의 정치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떤 판단 자체에 시비를 걸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취미판단이야 각자의 몫이 아닌가? 어떤 정권이 맘에 든다, 안든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지난번 국회의원선거에서 ‘반전’에 성공함으로써 노정권이 ‘탄핵정국’을 정면 돌파하게 됐지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자체는 급등한 것 같지 않다. ‘노사모’가 있긴 하지만 노무현은 현재로선 ‘인기 없는’ 대통령이다(그의 참여정부는 초기 ‘문민정부’의 상징적 아우라도 초기 ‘국민의 정부’의 카리스마도 갖고 있지 않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세력은 그를 대통령으로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듯하며(대통령은 한 ‘개인’이기 이전에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태도는 정치의 룰을 무시하는 反민주주의적 태도이다), 민주노동당이나 개혁세력은 그의 미지근한 개혁속도와 ‘반동적인’ 파병방침에 불만이 고조돼 있는 듯하다(나는 그러한 불만에 일부 공감한다). 그는 한쪽에서 보기엔 ‘모험주의적 좌파’이며(그래서 위험하다), 다른 쪽에서 보기엔 ‘개량적 보수주의자’이다(그래서 믿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가 그렇게 끼인 형국 속에서 용케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하며, 그가 속한 열린우리당이 의회의 과반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나는 지난번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그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서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본체는 5공의 ‘민주정의당’인바, 나는 5공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다)의 집권만은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나는 이회창에 대해서도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왜일까? 돌려 물으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왜 모두 이회창을 싫어하나? 아마도 한나라당의 당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 그가 내뱉었던 '지배층다운' 말들 몇몇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는 사람이 그 당수에 대해서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나?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이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그대로 옮겨지는 것이 경솔하고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꼭 이회창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물론 한나라당 '따위'에 들어간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 당원/정치인 역시 다종다기할 것이며, 이 차이를 간과하고 '한나라당인'으로 뭉뚱그려 판단하는 사람들이 나 역시 곱게 보이진 않는다. ("ㅁㅁㅁ 왜 싫어?" "한나라당이잖아!" "ㅇㅇㅇ 왜 좋아?" "민노당이잖아!") 문제는 그 차이들이 이른바 당론으로 봉합되는 현상일 것인데, 이 현상을 당원/정치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당론이 문제면 당이 문제다. 개인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이나 노무현의 ‘민주당’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니냐라고 반문한다면, 나로선 할말이 없다. 하지만, 이미 다른 글들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거의 똑같다’ 하더라도 정치적 판단에서는 ‘작은 차이’란 게 중요하며, 그러한 ‘상식’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요컨대,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더 나쁜 놈’이 있고, ‘덜 나쁜 놈’이 있는 것이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이기면 이회창 개인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쟈의 전제인 듯하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전제일 것이다).]

나의 ‘정치적 판단’의 핵심적인 기준은 ‘좋은 사람’(=혁명)에 대한 이상주의적 기대가 아니라 ‘덜 나쁜 놈’(=개혁)에 대한 현실적인 지지이다(흔히 하는 말로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정치적 구도는 ‘좋은 사람’(=진보개혁세력) 대 ‘나쁜 놈들’(=수구보수세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좋은 사람’-‘덜 나쁜 놈’-‘더 나쁜 놈’이라는 3분법적 구도이다. 선과 악,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판별하는 ‘윤리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궤변이거나 넌센스이다. 하지만, ‘정치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도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지지하는 것은 ‘덜 나쁜 놈들’의 공간을 넓히는 일이다. [이건 일종의 허무주의인데, 모든 현실적 인식은 얼마간 허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위나 이상의 선언은 허무하고 말고 할 게 없다. 당위와 현실의 괴리에서 허무가 발생하는 바, 이 괴리는 필연적이다(괴리가 없다면 이미 유토피아다). 따라서 허무가 없다면 다음 세 입장 중 하나다. 1) 당위가 없다. 대충 살면 된다. 2) 현실이 없다. 선언만 한다. 3) 당위에 따라 살지 못하는 현실적 인간들을 모두 숙청하면/비웃으면 된다. 1과 2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3을 선택한다면 분명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의 당위를 갖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의해 분류된 '현실적 인간'들을 비웃으며 산다(이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비웃음이 숙청으로 쉽게 이어질지도). 그러나 이도 저도 싫다면, 이 필연적 허무주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실, 3분법적 구도라는 건 나의 창안이 아니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유구한 것이다. 10세기부터인가 중세 기독교적 상상력 속에서 연옥이 차지했던 자리를 떠올려보라(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참조). 천국에 가야 할 ‘착한 분’도 아니고, 지옥에나 떨어져 마땅한 ‘나쁜 놈’도 아닌 대부분의 ‘사악하지는 않지만 좀 모자란’ 인간들을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하에서는 마땅히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탄생’한 것이 중간계로서의 ‘연옥’이었고, 그래서 형성된 것이 천국-연옥-지옥의 3분법적 구도였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약간 발휘하면, 나는 중세의 이 ‘연옥’이야말로 세속의 공간이며, 귀족과 농민 사이에 시민(=부르주아) 계급이 들어서면서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의 ‘세 위계’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 중세의 연옥과 부르주아계급의 성장,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 거라 짐작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자세히 따져보지 않겠다(참고로, 서구와는 달리 러시아의 사회적 위계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었으며, 종교적 상상력 또한 ‘지옥’을 강조하는 종말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에는 ‘중간’이 없었다. 그 결과는 러시아에는 ‘혁명’(=단절)만 있어왔지 그 ‘개혁’(=계승)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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