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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Columbine: Whose Fault Is It?)
이 지상에서 초창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냉혈적인 살인을 고무시키기 위한 책이나 영화, 게임, 음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카인이 아벨의 머리를 박살내던 날 그가 필요했던 유일한 동기는 자신이 가진 인간의 폭력성향이었으나 성경을 문학으로 해석하든 신-그것이 뭐든지 간에-의 마지막 말로 해석하든 상관없이 기독교는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죽음과 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반라의 죽은 사내가 대부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목에 걸려있고 우리는 그것을 평생 당연시해왔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인가, 아니면 절망의 표상인가? 이것이 나타내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자살 사건은 또한 죽음의 아이콘의 탄생, 명성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모든 숭고한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가스펠의 어디에도 지성이 미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의 밴드를 이러한 절망과 위선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었거나 결코 깨닫지 못했다. 나 마릴린 맨슨은 미국이 살인자들을 타임지의 커버면에 실어 인기 영화배우 못지않은 평판을 부여한다는 슬픈 사실에 기뻐해 본 적이 없다. 제시 제임스에서 찰리 맨슨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는 초창기부터 범죄자들을 대중적으로 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딜런 클레블랜드와 에릭 해리스, 이 망할 것들의 사진을 모든 신문의 1면에 실어 그들을 마치 영웅인양 미화하였다. 아직 지각이 없는 아이들이 이 둘을 새로운 우상으로 섬기게 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99년 5월 28일, 마릴린 맨슨
"당신의 세상에서 당신이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뭔가를 쓰면 20만명 또는 그 이상을 죽일 수도 있고 그러고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요. 당신이 그 장면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in your world you can take a pen and write on a piece of paper and destroy 200,000 people or more and it's ok because you don't have to see it."
─ charles manson
system of a down의 기타리스트/보컬인 daron malakian이 mezmerize 앨범의 "thanks to" 자리에 이런 말을 적어놓았다.
덧) 후에 알아보니 찰스 맨슨은 마릴린 맨슨이 자기 이름을 만들 때 선택했던 두 명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마릴린 먼로다) 추종자들과 함께 수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위와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는 희대의 살인마. 비틀즈 광이며 나름대로의 철학─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백인을 모두 죽일 거라는 혁명적(?) 철학─을 가졌고 많을 때는 100명 이상의 추종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아무런 바탕 없이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학술서일수록 더 그렇다. 서평을 이미 찾아 읽어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저자의 학문적 성향이라든가, 최소한으로는 그/녀가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학파나 무슨무슨주의, 그리고 그것들의 주요한 주장과 개념 등에 대해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라도 들어보았을 확률이 크다. 나름의 평가도 아마 내려 보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이렇게 얻은 선입견으로 우리는 그 책의 주장을 미리 재단한다. 책을 직접 읽어 내려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오거나 심지어 반대로도 읽히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거나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개념들을 얻었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들과 새로 얻은 이 개념들을 사용해 뭔가 있어 보이는 '명언'을 가공해낼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학문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학문도 독서도 아니며, 자신의 신변잡기의 어줍잖은 일반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탈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탈주, 저 책을 읽어도 탈주,라고 진지하게 해석해내며, 그 책은 탈주를 못했네, 그래서 좋은 책이 아니네,라며 거리낌없이 평가한다.
개념과 범주들은 편의를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가, 더욱 철저하게 공부할 힘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대한 내용을 개념과 범주로 축약하여 표현하고 소통하라는 말이지,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편하게 막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없음을 가리라는 뜻이 아니다.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는 후자의 편의가 난무하고 있으므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들이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남는 건 자존심과 배짱 뿐이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왜 한동안 쓰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기어코 다시 쓰기 시작하려는지. 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하다. 잠깐이라도 붙들 수 있는 어떤 확신이 없다면 나는 다시금 곧 주저앉을 것이다.
공유욕 때문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고픈 욕망이 내게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 욕망으로부터 또 다른 욕망, 즉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분리해낼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읽고 감명받은 책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반응, 이를테면 존경이나 부러움 따위를 유도하려는 책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둘은 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보여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순수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그 고민의 와중에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저 서둘러서 무언가라도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려는 욕심이 내게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며, 그게 꼭 그렇게 나쁜 마음은 아니라는 것 등을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명백하게 해 두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준다는 것은, 강요하는 것도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항상 급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런게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그저 고함만 질렀을 것이었으며, 지금에서야 이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러워질 때도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 결국은 소통을 갈망하는 것이지만, 내 모습을 온전히 보여줌으로써, 그 이외의 다른 불필요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서로 침묵함으로써 맺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통을 나는 갈망한다.
아니어도 좋다. 기록해두지 못하는 아쉬움이 그간 나를 괴롭혀왔다. 이제 내 손끝은 내가 보고 느낀 것만을 기록하도록, 그 이상의 더 많은 것들을 주조해내지 않도록, 더욱 예민해져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이제 그만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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