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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radiohead - kid A(2000)

한 곡만 듣고 놀래 자빠졌는데, 다 들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yo la tengo -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1997)

꿈같은 'autumn sweater'.

 

boris - pink(2005)

'electric'으로 집약되는 포스트록의 한 극단, 그리고 중독성.

 

audioslave - out of exile(2005)

보컬과 연주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만으로는 무난함과 평범함을 극복할 수 없음.

 

porcupine tree - lightbulb sun(2000)

shesmove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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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늦었어, 이제 가봐야겠다. 난 지금 자수하러 가는 거야. 하지만 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스스로를 내주려는지 모르겠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울고 있구나. 내게 손을 줄 수 있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고난을 당하러 가는 것 자체가 벌써 범죄의 반을 씻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그를 꼭 안고서 그에게 입 맞추고 외쳤다.

   "범죄라고? 어떤 범죄 말이냐?" 그는 갑작스럽게 격분해서 외쳤다. "내가 더럽고 해로운 <이> 같은 존재,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 고리 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범죄 말이냐?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즙을 빨아먹은 그 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40가지의 죄도 용서해 줄 거야. 과연 그런 게 범죄일까? 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아.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모두들 사방에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하지, <범죄다, 범죄다!>라고. 하지만 그 불필요한 수치를 향해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소심함과 어리석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 난 단지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가려고 결심한 거야. 그리고 또 그…… 뽀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오빠, 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지만 오빠는 피를 흘리게 했잖아!" 두냐는 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사람들이 흘리고 있는 피야." 그는 거의 미친 듯이 그 말을 잡아챘다. "지금도 흐르고 있고, 언제나 세상에서 폭포수처럼 흘렀던 피, 샴페인처럼 흐르고 있는 피, 덕분에 카피톨리움 신전에서 월계관을 쓰고, 훗날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받게 한 그 피야. 그래, 똑바로 쳐다봐, 잘 들여다보란 말이야! 난 사람들을 위해서 선을 원했던 거야. 나 자신은 이 어리석은 일, 아니 어리석다기보다는 그냥 적절치 못했던 이 일 대신에 수백, 수천 가지의 착한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내 사상은 실패한 지금에 와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리석은 것만은 전혀 아니니까……. (실패했을 경우에는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 그 어리석은 행위를 통해 난 다만 나 자신을 독립적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금을 얻기 위한 첫걸음을 떼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되었더라면 모든 일은 그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이로움을 안겨 주어서 모든 것을 상쇄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난 그 첫걸음을 견뎌 낼 수가 없었던 거야. 왜냐하면 난 비열한 녀석이니까! 바로 이게 문제의 전부야! 어쨌든 너희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보지는 않을 거야. 만일 내가 성공했더라면, 내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지금 함정에 빠져 있으니!"

   "하지만 그건 아냐. 전혀 그런 게 아냐! 오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 형식이 이래서는 안 되었어. 내가 행한 일이 그렇게 미학적으로 훌륭한 형식은 아니었어! 하지만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왜 폭탄으로, 포위 공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존경할 만한 형식이라고 하는 거지? 미학적인 두려움은 무력함의 첫번째 징후야……! 난 이것을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의식해 본 적은 한번도 없어.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를 잘 이해한 적은 없어!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에 대해 강한 확신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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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자문하다 입을 다물고 귀를 곧추세웠다. 여기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맞아, 저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죽는 게 저들에게도 나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가만 있자. 말이 무슨 소용이야. 행동하면 되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눈으로 아내에게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안쓰러워…… 당신도……."

   이어서 그는 '미안해'라고 말하려다 그만 "가게 둬"라고 하고 말았다. 그는 그 말을 정정할 힘이 없었지만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이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게 분명히 보였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간단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통증은?'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 거야? 어이, 통증, 너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귀를 곧추세웠다.

   "아, 저기 있구만. 뭐, 어때. 통증은 그대로 있으라고 하지, 뭐."

   "근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한 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임종의 고통은 두 시간 더 지속되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 부글거렸다. 쇠약해진 육신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 부글거리는 소리, 쌕쌕거리는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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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데이즈

'재밌게 봤다'고는 말 못하겠다. (ㅋㅋ) 그러나 보기 전부터 어차피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짐작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는 정말 좋았다. 마이클 피트가 직접 작곡한 것이라고.

 

 











 

 

아래는 보너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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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트는 생명

싹트는 생명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 원제 Germinal Life : The Difference and Repetition of Deleuze (1999)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은이), 이정우 (옮긴이) | 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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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 대한 해설서/연구서들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것 중 하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인 베르그손-생명철학-들뢰즈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차이와 반복>>에 대해 해설한 [국내에 번역된] 거의 유일한 연구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물학 공부의 압박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에는 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학문이 이렇게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생물학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는 물리학이 철학보다는 더 그럴 듯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면서도 꽤나 허무하군.

 

아래는 책 소개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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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사유를 다윈과 바이스만으로부터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에 이르는 근대 생명철학의 한 갈래에 놓고서 그 특성을 밝히는 책이다. 아울러 레이몽 뤼예, 질베르 시몽동, 야콥 폰 웩스퀼과 같은 다양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상가들의 사상까지 포함, 풍성한 바탕에서 들뢰즈의 사유를 사유한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의 세 가지 계기인 <베르그송주의>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 그리고 <천의 고원>을 분석함으로써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일관되게 구성한다. 들뢰즈가 체계적인 생명철학을 전개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 책은 단지 들뢰즈가 구성해놓은 이론의 주석을 넘어 들뢰즈를 주제로 저자 자신이 일관되게 구성한 생명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생명철학 일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현대 생명철학의 장 전체에 들뢰즈를 위치시키고 있다. 그것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명론이 현대 생명 이론들 일반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 현대 생명론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벽을 넘어 포괄적인 생명론의 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서론| 들뢰즈의 차이를 반복하기

 

제1장 베르그송의 차이 개념:지속과 창조적 진화
서론
직관의 방법
직관과 지속
지속이란 무엇인가? - 잠재적인 것의 시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들뢰즈와 '생명의 약동'
결론:베르그송을 넘어가는 들뢰즈 - 창조적 진화의 윤리학으로

 

제2장 차이와 반복:사건의 싹트는 생명
서론
선험적 조우들
개체화:시몽동과 다윈의 차이
개체화[의 이론]에 따른 윤리학
반복의 현상과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죽음충동:바이스만과 프로이트
금의 유전과 니체의 우월한 회귀 사건에 무대를 마련하기
결론:바이스만을 넘어선 들뢰즈 - 사건의 문제

 

제3장 한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창조적 진화에서 창조적 행동학으로
서론
복잡성과 유기체
탈기관체와 유기체
다양체란 무엇인가? - 베르그송주의와 네오다위니즘
혼효면으로서의 自然
창조적 절화
자기조직화의 기계적 다질생성
'behavio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인간의 동물-되기
들뢰즈의 웩스퀼 독해:장점과 단점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 바이스만과 하디
결론: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결론
주름과 초주름
주름으로서의 회귀
인간을 넘어서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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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기호 사상

퍼스의 기호 사상 - 현대사상의 모험 15 | 원제 A System of Logic, Considered as Semiotic

찰스 샌더스 퍼스 (지은이), 김성도 (옮긴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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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호학의 두 원천 중 한 명. 다른 하나는 물론 소쉬르다. 들뢰즈의 언어학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소쉬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이 퍼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제목이 저래서 우리나라 학자가 풀어 쓴 입문서나 개론서인 줄 알았건만, 지은이가 퍼스 자신인 걸 보니 그저 그의 여러 글들(1차문헌)을 한데 묶어 번역해서 출판한 모양이다. 읽을수는 있을 정도로만 어려웠으면 좋겠는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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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해제] 퍼스 사상의 지평 및 기호학의 위상

1. 들어가기
2. 퍼스의 기호학 관련 저술
3. 퍼스 기호학의 철학적 토대
4. 퍼스의 현상학과 범주론
5. 현상학적 범주론
6. 퍼스의 전기 및 지성사
7. 논리학에서 기호학으로
8. 여러 과학들에서 기호학의 위상
9 기호학의 분할
10. 표상 이론으로서의 기호학
11. 기호의 삼원적 분석
12. 기호 유형론
13. 기호의 분류
14. 퍼스의 의미 이론
15. 퍼스의 인지 이론과 진화론적 우주론

 

퍼스의 기호론과 현상론 선집
들어가기

 

[1] 현상학
1. 현상 또는 파네론
2. 범주들: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
3. 일차성은 감정과 성질의 범주
4. 이차성은 경험, 대결, 그리고 사실의 범주
5. 삼차성은 사고와 법칙의 범주
6. 이차성과 삼차성이 변질된 경우들

 

[2] 기호이론
1. 기호
2. 세미오시스 또는 기호의 작용: 해석제
3. 기호의 삼분법
4. 도상 기호
5. 지표 기호
6. 상징 기호
7. 발화 기호 또는 준명제
8. 기호들의 분화

 

[3] 현상학적 기호학
1. 마음의 기본 요소
2. 지각과 지각 판단

 

[4] 기호 이론 관련 서간문
1.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4년 10월 12일)
2.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14일)
3.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23일)

 

[부록- 퍼스의 초기 논문 두 편]
1. 새로운 범주 목록에 관하여(1867년)
2. 인간이 가질 수 있다고 주장되는 몇 가지 능력과 관련된 물음들(1868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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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2

일단 구호부터. 평택은 광주 이래 처음으로 주민들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것은 살이 떨리고 눈이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소위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별로 분개하지도 않고, 되려 보상금 운운하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지껄여대는 것일까. 왜 지금 이 나라는 노무현 탄핵 때보다도 더 조용한 것일까. 일단 여기에 첫 번째 방점이 찍힌다.

 

분석은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자. 다수의 대중들은 평택의 투쟁을 '반미꾼'들의 선동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인정하기 싫지만,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낮추기 때문이다. 하긴 그 때 광주의 시민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조작이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 반미가 왜 등장하는가? 물론, 평택의 투쟁이 미국과 매우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미국에 의한 한국의 종속도 엄연한 '사실'이라 주장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평택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의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선언할 지 모른다. 이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압도적인 사실은 지금 평택 주민들의 땅을 뺏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대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반미나 신자유주의 논쟁은, 지금 바로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미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 그렇다. 그들은 물론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평택이 다수 대중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반미주의자들은 분명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다. 실존적 설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평택의 현 위기는, 거기에 나중에 미군 기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곳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방점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찍힌다. 평택은 폭력에 의해 침탈당했다. 자기가 평생 농사지어 온 땅을 군화발로 짓밟는 이들에게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대추분교를 지키기 위해, 거기서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이것은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의 발산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이 분노를 또다시 폭력에 사용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대추분교를 사수하다가 끌려나는 것과, 미대사관으로의 '행진'을 막는 전경을 폭행하는 것은 같은가. 아니다, 이것은 같지 않다. 후자는 분명 폭력이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분노에 의한 폭력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에 의해서 폭력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폭력은 행사되자마자 거꾸로 소급되어 분노 자체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만든다. 논밭에 들어오는 굴착기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과, 미대사관으로 그저 조금 더 가보겠다고 전경을 밀치고 때리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같은가? 시위 지도부는 시위대가 위험한 상황에 더 크게 노출되고, 사람들이 더 많이 잡혀가고 끌려가는 것으로써 평택에 대한 부채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노에 찬 대규모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이다. 그러나 그 시민들이 전경을 때리고 군인을 죽이고 청와대로 진격해서 관리들을 폭행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는가?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물론 이 폭력은 정부의 폭력이 없었다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시위대의 폭력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픈 사람들, 평택과 함께하고픈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폭력이 시위를 축소시키고,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분이 참담하다.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막막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큰 힘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폭력은 싫다고. 반미는 싫다고. 우리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고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고 이 투쟁을 철저하게 대중의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거나. 여기 남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떳떳해야지만, 평택 주민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폭력'이라고 오해받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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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1

어제 날맹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는데, 평택에서 벌어진 일들 뿐만 아니라, 날맹이 지금껏 해 왔던 일들, 또 평택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내 기억으로만도 1년은 넘게 자보를 붙이고 퍼포먼스를 했던 적극적 평화행동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했던 그러한 활동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자극으로 다가왔나보다.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그간 나는 집회에 가지도 않았고, 운동판에서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그런 척을 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었다. 집회는 가기가 싫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강연회, 토론회, 퍼포먼스, 액션 등등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지 않고 버티려면, 사실은 꽤나 정교하고 탄탄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더 확신이 없었다. 집회하는 방식이 싫다고 집회에 가지 않는 게 과연 맞나. 가지도 않으면서 괜히 잔소리만 늘어놓고, 오히려 운동을 갉아먹는 꼴이 아닌가. 내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옹호하면서도 항상 찝찝했는데, 이 일로 그간 나를 정당화해 왔던 많은 말들이 중심을 못 잡고 한꺼번에 허물어져 버렸다. 나는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꼭 몸으로 활동이나 집회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기획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투쟁과 너무나 관계없는 것으로 보일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정치적 예속'이 아닌, 좀 더 넓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예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투쟁이다!"라고 외치기는 싫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부채감을 느끼며, 그 부채감이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근본적인 추동력은 바로 이것이기를 바랬다.

 

또 다른 것은, 집회 방식에 대한 나의 느낌인데, 이것은 거의 혐오에 가깝다. 이 느낌을 꺼내어서 풀어놓아야 할 것이고 추상적이나마 대안도 제시해야겠지만, 생산적인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어 놓자. 그저, 나는 이러한 자기 정당화의 기제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직후에,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바로 어제 당일 저녁 7시에 있었던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기제들이 허물어졌다는 말에 내가 방점을 찍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단한 조각들은 엉성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허물어졌을 뿐이며, 어제 집회를 다녀오는 와중에 또다시 어느 정도 재구성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재구성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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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mobilit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goût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progrés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
   직접적 의식의 그러한 말살이 감정의 현상들에서만큼 충격적인 곳은 없다. 격렬한 사랑이나 깊은 우울증이 우리의 영혼을 침입한다. 그것은 수천의 다양한 요소들이 명확한 윤곽도 없이, 서로에 대해 외화하려는 경향은 조금도 없이, 상호 융합하고 상호 침투한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그 감정들의 독창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의 덩어리 속에서 수적 다수성을 분간해 낼 때, 그것들은 이미 왜곡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고립된 것으로서 동질적 장소—그것을 이제 시간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원하는 대로이다—에 펼쳐 놓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방금 그들이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부터 그들 각각은 정의할 수 없는 색채를 빌려왔다. 그들은 이제 탈색되어 이름을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감정 자체는 살아 있고 발전하며,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우리를 점차적으로 어떤 결정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살아 있는 것은 감정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속이, 그 지속의 순간들 서로가 스며드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즉 시간을 공간에 펼쳐 놓으면서 그 감정들의 생기와 색채를 잃게 한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분석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들의 병치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상태들은 말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각각이 주어진 어떤 경우에 사회 전체가 느끼는 인상들의 공통적 요소, 따라서 비인격적 잔여물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들에 대해 추리하고 그것에 우리의 단순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고립시켰다는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을 유genres로 세우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미래의 연역에 봉사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

 

─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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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 비판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오류들의 기원을 인간 정신으로부터 보여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 즉 모든 인간은 사물의 원인에 대해 무지한 채로 태어나고 모두 다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해 의식하고 있다는 것들을 논의의 기초로 삼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다음 사실들이 따라나온다. 첫째, 인간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들의 의지(volition)와 욕망에 대해서는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욕망하고 의지하도록(will) 결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으므로, 그 원인들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심지어 꿈꿔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들은 항상 어떤 목적을, 즉 그들이 얻고자 하는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일들의 목적인만을 찾게 되며 그것을 찾으면 만족해하고, 물론 그 이상의 의심은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목적인을 어떤 외부적인 근거로부터 찾아내지 못할 경우 그들은 의지할 데 없이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며, 자신들로 하여금 어떤 목적이 보통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하는가를 고찰하기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판단하게 된다. 게다가, 인간들은 자신들의 안팎에서 그들의 이득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편리한 수단들─예를 들면, 보기 위한 눈, 씹기 위한 이, 먹기 위한 곡물과 짐승, 빛을 쬐어주기 위한 태양, 물고기를 번식시키기 위한 바다─을 대단히 많이 발견하므로, 그 결과 그들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인간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러한 수단들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만들어 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은 사물들을 수단으로 보고 있기에 그 사물들이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믿을 수가 없으며, 그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왔던 익숙한 수단들로부터의 유추를 통해서 그들은, 인간들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념하며 모든 것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만들어놓은 인간적 자유를 가진 어떤 자연의 주재자 혹은 주재자들이 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주제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그들은 또한 스스로 이 통치자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들은 신들이 인간을 속박하여 그들에 의해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인간이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인들은 신에게 경배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내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신이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욱 사랑하기를, 그래서 자연 전체를 인간이 사용하도록 명령하여 그것들이 자신의 맹목적인 소유욕과 그치지 않는 탐욕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오류가 미신으로 발전했으며 인간의 정신에 깊숙히 뿌리박힌 것이었고,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가장 진지하게 모든 것들의 목적인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헛되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즉, 인간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수록,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자연과 신들이 인류처럼 미쳤다는 것을."

 

─ 스피노자,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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