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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DJ시대 대학생의 고백/ 스프링

DJ시대 대학생의 고백

 

스프링

 

※ 이 글은 DJ의 공과를 따지는 글은 아니다. DJ의 서거 후 DJ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싶었다. 따라서 엄밀한 평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나는 대학시절을 DJ와 함께 시작했다. 투표권이 없었던 나는 경상도의 지역적인 특색 때문이었을까,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마음속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회창 후보가 국무총리 시절 대통령인 YS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런 행위가 ‘2인자의 홀로서기’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내가 그것을 분석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내게 대학생 시절은 ‘IMF 구제금융 시대’와 동의어로 기억된다. DJ가 ‘대중경제학’의 주창자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수용하는 변신이 이뤄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DJ는 최소한 케인즈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DJ가 집권 이후 케인즈주의에도 미달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라는 한 친구는 ‘IMF 재협상’을 이야기하는 대학생(한총련 학생)에게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정치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 못해 거부감이 일 정도였다. 그런 내가 DJ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시절, 5월 광주에서였다. 나는 광주로 향하는 순례단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경상도 출신인 내 눈에 DJ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과의 대화와 같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당시 대학생의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도 있었는데, 여러 대학생의 의견을 듣기 어려우니 사전에 카메라로 녹화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에도 카메라가 와서 녹화를 했는데, 당시 내가 패널로 나서게 되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데, 어찌나 긴장되었던지 이야기를 제대로 못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판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DJ가 빨갱이라고 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YS를 지지했고, YS 이후에는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그래서일까, DJ를 매우 못마땅해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라도 사람은~’이라는 낙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강원도에서도 많이 접한다. 얼마 전 20대의 젊은 교사로부터 ‘전라도 사람이었으면 나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가 보수적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걸까.

DJ는 지역감정의 희생자이자 수혜자라고 한다. 지역감정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고, 1997년에는 ‘호남지역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DJ는 호남맹주, YS는 영남맹주, JP(김종필)는 충남 혹은 충청맹주라는 지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두 맹주와는 확연히 다른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독재정권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래서인지 그는 집권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드는 등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DJ의 행보 중 쟁점이 되는 것은 이른 바 ‘햇볕정책’이라 불린 남북한 간의 교류이다. 그는 남한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아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금강산이 열렸고, 개성에 공단이 설치되었다. DJ의 정책은 남북한의 평화적인 관계 정립인지, 혹은 자본주의적인 틀 내에서 상호공존을 위한 것인지 논란을 일으켰다. 남한 내 진보진영에서도 ‘지지이행’에서부터 ‘반김일성 반조선노동당’(사회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났다.

DJ는 퇴임 이후에도 정치에 훈수를 두었다. 노무현 정권 최대정파가 친노파였던 것은 맞지만, 동교동계니 민주화 세력이니 하는 사람들이 기반이 되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DJ를 ‘가슴은 이상주의자, 머리는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했다. 굉장한 칭찬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가 왜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었는지 보여주는 힌트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계의 큰 별이 졌다. DJ와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서거는 느낌이 다르다. 연이어 두 명의 대통령이 세상과 작별했다. 이제야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DJ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에 맡겨졌다. 험난한 삶을 살다간 인간 DJ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그러나 대통령 DJ에게는 할 말이 많다. 이제 그가 뿌린 비운의 씨앗도 냉정하게 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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