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거주춤 정귀섭군
막걸리나 먹다가, 괜히 도와준다고 버스 정류소 지붕을 오르는 정귀섭군.
그 엉거주춤이란...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찍느라, 평소의 모습을 상실한 종로크와 6호.
막걸리나 먹다가, 괜히 도와준다고 버스 정류소 지붕을 오르는 정귀섭군.
그 엉거주춤이란...
- 아래 글은 내가 많이 사랑하는 후배 변기석이 자신의 후배들을 위해 쓴 글 중 나에 대한 부분을 옮겨온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이 글을 발견하여 신고해준 이 선배들의 영원한 귀염둥이 _ 장기영에게 감사함
문학과 운동-터앝문학동인회 86학번 고광연 선배- (춘을)
|
후배들은 모두 시험이 끝났는가? 이젠 방학에 들어가는 셈인가? 축하드려야겠군. 모두들 알찬 한 학기였길 바라네. 먼저 고광연 선배를 말하기 전에 정리해둬야 할 것이 있다. 이이현 선배나 송상준선배 이수철 선배는 모두 터앝문학동인회 회원들이다. 그런데 고 선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준거집단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동과 사고와 있어 문학을 늘 그 시작점으로 삼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중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기꺼이 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 고광연선배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고광연 선배는 국문과와 터앝문학회, 조선대학교의 학생운동사에서 기억할 만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남 영암의 도갑사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마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에서 활동했다고 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꽤 비싼 돈을 들여 그가 트럼펫을 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트럼펫을 그가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아마도 그 악기는 그의 마음속에 세겨진 어떤 이상과 닮은 악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에게 그것은 악기라기 보다는 보물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노래를 퍽 좋아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배운 그의 기타솜씨는 서툴렀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수많은 운동가요를 그는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폼나게 탈 줄도 아는 그는 낭만적이며 전투적인 사람이었지만80년대의 운동가들 속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듯 했다. 그는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었지만 같은 단대내에서조차 운동가들에게 자유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이었다. 우리같은 새내기들은 그 사실을 알리 없었다. 우리가 들어온 대학은 그리 녹녹한 곳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대학은 사상과 이념 논쟁의 장이었으며 수많은 조직이나 사상이 그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또다른 싸움터이기도 했으며 조선대학은 박철웅씨의 전제에 맞서기 위해 아주 비밀스런 형태의 활동이 남아있던 시기였던 듯 하다. 당시 고광연 선배는 전투적 학생회의 학생회장이 되기는 했지만 간부로서의 지위를 제대로 보장받지는 못한 듯 하다. 내가 그와 친해진 것은 그의 외모와 나의 외모가 조금은 닮은 까닭이 컸던 듯 싶다. 나는 일학년 시절 3학년이자 학생회장이었던 그를 따라다니며 여러 학생회장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를 그의 이종사촌동생이라고 소개하면 다른 사람들이 깜빡 속곤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와 내가 문학에 대한 무언가의 토의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가 88년 여름에 조선대학교 공동올림픽 및 평화통일쟁취 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공특위-의 위원장이 되고 나서인 것 같다. 이 공특위 활동기간 동안 나는 그의 주보였는데-주보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주시)을 보호하는 사람을 일컫는 은어-이 때부터 그와 많은 토론을 했던 것 같다. 주로 한국사회에 대한 성격을 토론하곤 했는데 나는 당시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10월달이었을까? 나는 우연히 부산대학교 국문과 86학번이었던 양영진 열사의 운구행렬을 광주에서 보게되었다. 많은 차량이 줄을 이어 망월동묘지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누가 또 죽었나보다 하고 울분을 토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고선배에게 양영진 열사가 쓴 팜플렛을 받아보고서 크게 놀랐다. 놀랍게도 그 팜에는 한명의 문학도이자 운동가인 청년의 시작품으로 빽빽했으며 문예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가득한 했다. 그것은 80년대 후반을 살던 용기있는 한 청년학생의 유서이자 비망록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문예운동의 필요성을 피력한 부분은 고선배와 나를 충동질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로부터 나는 6년이 흐른 어느 여름에 부산에서 극적으로 양영진 열사와 함께 문학을 했던 그의 단짝 친구를 만나 그날의 감회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니 이 사람의 운구행렬을 본 것은 나의 학생시절에 어떤 운명적인 계시였나보다. 나는 며칠 후 고선배, 이수철(그는 당시 국문과 학술부장이었다.),허오범과 함께 조선대학교의 최초 문학운동체 [전선]을 구성하고 백민서점에 우리의 출정선언문과 작품을 걸고는 문예운동을 선언했다. 우리의 1차 목표는 함께 할 수있는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보아 국문학과의 터앝문학동인회를 문학운동체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와 오범이가 터앝문학동인회에 가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가 터앝문학회에서 짤리게 된 다음해 여름까지의 [전선]기가 된다. 시실 전선은 선언적인 것에 불과 했으며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단체이며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지만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본다.전선이란 싸움의 전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싸움의 최 전선, 앞을 으미하기도 한다. 즉 아방가르드의 의미였다. 이 이름은 당연히 고선배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은 문학운동체[전선]에 대한 평가를 써볼까 합니다.그럼 이만. |
문학과 운동-[전선] (춘을) |
간밤에 망월동에 다녀왔다. 양영진 형의 묘지에 개망초꽃 한 가지 두고 왔다. 미친 짓이다. 누가 내글을 상당히 불쾌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보다. 나도 이글을 쓰는데 아주 곤혹스럽고 여전히 어렵다. 다만 이제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기 바란다. 나는 예전에도 듣기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다만 소문으로, 혹은 옆구리로. 그럼 전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선은 실패했지만 고선배는 터앝문학동인회를 개조하는데 성공했고 오범이나 나는 지금의 개밥바라기의 탄생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 우리는 가는 길이 달랐으나 처음 마음먹은 일을 결국 한 셈이니 절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터앝문학회와 나락문학회가 그 활동을 멈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 전선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첫째 이유는 당연히 구성원들의 무지와 부족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전선에 대한 과도한 의미와 지위부여이다. 먼저 무지와 부족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만 할 것 같다. 우리는 문학운동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해본다. 양열사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는 몰랐다. 모임을 구성하고 적극적인 문예선전활동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점은 일찌기 저 카프운동기의 지식인들이 무지한 대중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선동적인 문학을 생각했던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하물며 그 창작역량이 부족하며 이제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수준높은 역량을 요구하는 선전대를 만들었으니 우습지 않겠는가!! 두번째의 한계에는 문예운동의 비밀이 들어 있다. 과도한 지위부여라는 것은 단순한 문학패가 문예운동을 지도하고 전체 운동의 선동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있다. 사실은 앞선 여러 글들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문예운동이란 단순한 하나의 문학회나 문학패, 창작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 것은 전체 운동 안에 하나의 부문운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각 계급계층의 감각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조직에는 소속집단의 모조직이 있는 것이다. 사실 학생으로서 문예운동은 학생회와 같은 좀더 본질적인 조직이 있는 것이고 그 안에 문학회가 있는 것이다. 다소 무식하게 표현된 듯한 이 말에는 문예운동이 그 것만으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만들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는 문예가 가지고 있는 즉,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된다라는 고전적인 명제에서 비롯되는 개념이며 조직적인 측면에서 정치나 계급적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선은 완전히 독립적인 조직으로서 그 근본적인 형태에 있어서 전문작가의 동인회나 클럽과 다를 바 없었으며 자기 발전의 단계를 만들 수 없는 측면이 강했다. 전선이 결성된 후 우리는 모두 터앝문학동인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것은 앞선글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터앝문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학생회의 많은 정치일정을 소화해내야 하는 처지로서 언제나 학생회의 일정을 최상위로 놓고 행동하곤 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문학회활동의 결정적인 방해요소가 되었다. 문학회의 모임이나 시화전, 품평회 등은 늘 학생회의 일정과 겹치곤 했는데 우리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학생회의 활동이 늘 이러한 문학회의 일정에 우선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문학이라는 부문운동과 전체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겨둔 셈이다. 결국 전선은 89년 터앝문학회가 자신의 정치노선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오범이와 나, 수철이형은 학생회로 광연이 형은 학생연대의 노선을 선택하면서 외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해소되고 만 것이다. 당시 광연이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전혀 모임이 되지 않는 전선의 좌장 격으로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없지만 노선의 차이는 심각한 불이해와 감정의 골을 만들어 놓는다. 후에 우리와 광연이 형은 인간적인 신뢰가 깨지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학생회와 다른 노선의 길을 가기 시작한 터앝과 학생회간에는 학생회라는 대중조직의 권력을 놓고 격돌하는 상황이 해년마다 반복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 사이에 통문연과 터앝의 미묘한 갈등이 놓이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등은 언제나 문학의 밖에서 발생했다. 후배들에게는 이 정도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줄로 안다. 다만 분위기만 알아주길 바란다.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공부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이 문제를 깊이 다룰만한 능력이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전선은 터앝문학회의 변신과 통일문학연구회의 결성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비록 유치한 수준에서 문학운동을 상정했지만 그 것은 이후 우리 행동에 근원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 다음은 통일문학연구회와 학생회에 대한 글을 쓸까 한다. |
<<2001년 6월>>
콜렉터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알지....
벼르고 벼르다, 앗, 김영동의 먼길을 발견하고 cd몇장을 주문했다.
더불어 슬기둥 모음집에 광주에 산다는 '수니'음반까지.
막 검색해보니, 집시의 시간ost가 있지 않는가.
그러나 율리시즈의 시선은 절판.
그러나 컴퓨터로 음악듣는것이 너무 익숙해졌나보다. 모두 ogg로 바꿔서 노트북에 저장.
그냥 모와놓고, d50으로 촬영. 사진실력이 좀처럼 늘리 않네요. 출사나갈 여유도 없고. d50 가이드를 주문했으니 일취월장하길...
광주의 유명배우 추말숙여사와 정말 오랜만에 막걸리를 마셨다.
공연장에서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막거리를 세 주전자나 비우다니.
이제 우리도 훌쩍 중년이구랴! 근데 추여사는 나에게 자꾸 철들라고 조른다.
이런 사진을 나 몰래 올려 놓다니. 이봐 고감독! 난 이제 배우이기 보다 선생이라구... 다음검색을 하니 이 사진이 떡하니 나오니 이거.... 월가 옮겨 간 곳에서 언제 막걸리나 세주전자 하세나!
독해법, 성명서를 읽다.
몇달전에 모 선배로부터 5.18영화 얘기와 함께, 스탭가능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00억 규모의, 문화운동판에서 유명한 기획자의 영화사에, 목포는 항구다라는 감독의 적품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뭐, 지역에서 스탭으로 뛸 사람도 없고 해서 그러마고 말만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충무로로 간 제자(청소년영화모임 출아시절의)가 잠시 놀러와서 5.18영화 얘기를 꺼냈더니, 자기도 시나리오를 읽어봤다고, 자기도 광주사람이라 참가하고 싶기도 하지만, 제작사에 대한 충무로의 일반적인 (좋지않은)평을 얘기하며, 다른 영화를 곧 하기로했다길래 그러는가 하고 말았다.
사실, 블록버스터 5.18영화에 대한 얘기는 제작년에 이미 충분히 들었다. 2004년 12월에 있었던 5.18기념재단의 이사회 소식을 전하는 지역 일간지의 호들갑을 잠시 들어보자.
--------
5·18기념재단은 14일 이사회에서 `5·18영화제작추진위(가칭·이하 추진위)’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 광주드림
5.18기념재단은 지난 94년 설립된 이후 진상규명 운동과 5.18정신 계승 활동 등을 벌이고 있는 단체로 문화촵예술계 인사와 유관단체 대표 등이 참여하는 `5.18영화제작 추진위'를 구성해 내년 1월부터 영화 제작 방향과 영화 제작사 선정 등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 2004-12-21 05:57]
특히 추진위는 기존 5.18을 소재로 다룬 영화에서 한차원 높은 역사적 의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초대형 영화를 제작하면서 뮤지컬 제작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기념재단 박석무 이사장은 "대중적 파급효과가 큰 영화를 제작, 5.18정신의 승화를 꾀하고 세계적으로 보급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영화 제작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2004-12-14 17:57] (광주=연합뉴스) 남현호 기자
특히 추진위는 기존 5·18을 소재로 다룬 영화에서 한차원 높은 역사적 의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초대형 영화를 제작하면서 뮤지컬 제작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5·18 기념재단 관계자는 기념재단 “추진위가 구성되면 늦어도 내년까지는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화사 선정 등의 일을 끝마칠 계획이며, 영화 규모는 100∼200억원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 ■광주일보
-------
물론 5.18재단의 계획말고도, 아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다른 5.18영화에 대한 소식도 함께 전하고 있다.
"제작사 CS 브라더스와 기획시대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자 항쟁 지도부의 홍보부장이었던 고 윤상원씨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연합뉴스"
사실 나는 5.18기념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블록버스터 5.18영화에 대해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당시 기사들을 스크랩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2004년 여름이후부턴가 5.18재단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발담그기를 멈췄기 때문에, 재단의 이 황당한 계획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그 이유를 굳이 밝히자면 5.18재단 사무처의 주요인사로부터 '재단법'인 5.18기념재단은 '임원'들의 것이기 때문에, 나처럼 '평범한 광주시민'은 5.18재단 일에는 관심을 꺼주라는 부탁을 아주 거칠게, 그것도 재단의 직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_이 얘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2006년 어느날 아침 뉴스에서 5.18재단과 단체들이 기획시대의 5.18영화제작에 대해 무슨 성명인가를 냈다는 뉴스를 들었다. 5.18재단이 5.18'문화'재단이 된 것은 알았지만, 뭔 일이기에 자신들도 영화제작을 한다면서, 남의 영화제작에 대해 성명서를 내나 싶었다. 그러다 광주드림의 성명서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뭔가 이상했다. '자기들이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 등등의 생각이 미쳤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러다, 한참이 지났는데 또 이런 글을 보게되었다.
--------
김영주 /2006.5.1 / 시민의소리
이런 5.18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진단다. 가제 [화려한 휴가]. 100억원이나 거금을 들여 만들 블록버스터라고 했다. TV드라마[모래시계]는 오월광주를 우롱했고, 장선우의 [꽃잎]은 그 폭력의 껍질을 그리는 데 그쳤다. 매스컴의 르뽀나 다큐도 상투적인 자료모음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 얼마 들고 영화스타일이 무엇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5.18영화도 [말콤X] [플래툰] [펠리칸 브리프]쯤 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영화에서 감독은 두뇌이고 심장이다. 그런데 [목포는 항구다]를 만든 김지훈 감독이 [화려한 휴가]를 맡았단다. [목포…]는 싸구려 코믹영화이다. 더구나 주인공 차인표의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서툴고 어색해서 기본 성의마저 없어 보였다. 1년 2년 사이에 그 감독의 수준이 높이 상승하였을까? 과연 그가 오월광주와 같은 진보적인 소재를 올리버 스톤이나 앨런 파커나 스파이크 리처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욕심으로야 오월광주를 예술적으로 잘 승화시켜주면 오죽이나 감사할까마는, 그렇진 못하더라도 제발이지 오도하거나 우롱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
물론, 르뽀나 다큐가 "상투적인 자료모음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내가 한마디해도 쪽팔리진 않겠구나'. 이런 싸가지 없는 생각이 들어 먼저 5.18재단이 발표했다는 그 성명서를 재단 홈페이지에서 찾아 읽어보았다. 읽어보니 이 성명서는 찬찬히 분석해보고 싶었다. 아주 재미있다.
성명서의 전문이다.
---------
[성명서]광주광역시장과 (주)기획시대의 5?18영화제작 발표에 대한 우리의 입장[2006년 04월 25일]
광주광역시장과 (주)기획시대의 5.18영화제작 발표에 대한 우리의 입장
우선 5.18민중항쟁을 영화로 제작한다는 것에 대해 환영하는 바이다. 좋은 역사 영화가 수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5.18영화가 그동안 몇 편의 영화제작을 뛰어넘어 제대로 제작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편으로 강한 의혹과 우려스런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지난 2002년에도 광주광역시는 5.18영화제작 계획을 발표하였고 국제 시나리오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물론, 유관단체의 여론수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광주시 당국의 편협한 추진 방식으로 인해 그 계획이 파탄되기에 이른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뭔가 저의를 가진 누군가의 정략에 이용된다면 그 순수성은 의심받는다. 이미 한번의 과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은 바 있는 영화제작에 대해서 왜 광주광역시 박광태 시장께서는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가.
우선 5월을 시민의 날로 제정할 일이다. 그리고 5.18관련 사적지는 물론, 기념공간에 대한 체계적인 운영과 활성화 계획이 필요하다. 망월동 구묘지의 흉물스런 철조망 벽도 진즉 철거했어야 할 일이다.
이런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를 대동한 광주시의 루미나리에(소위 빛의 축제)는 또 무엇인가. 5.18을 폭동으로 난도질한 언론사가 조선일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아픈 상처를 아직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이 때에 5.18을 기념하여 조선일보가 빛의축제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런 일이다. 그 일을 박광태 시장께서 주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다.
5.18은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특정인의 사리사욕에 휘둘려왔다.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관련 공직자와 지도자들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5.18기념사업은 광주시민의 참여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세계적인 민주인권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발돋움하는 데 제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지 않는가.
한편, (주) 기획시대에게도 한마디 고언을 드린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대중을 상대로 하므로 그 제작비 등을 고려할 때 장삿속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역사인 5.18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좀 더 충실하고 면밀한 판단과 준비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5.18을 영화화하겠다는 진정성이 다른 뜻으로 왜곡된다면 시민의 반응도 좋지 않을 것이며 영화제작에도 그리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5월 31일은 지방자치 선거일이다. 시장을 비롯하여 우리고장의 정치지도자들을 새로 선출하는 날이다. 반면 5.18민중항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는 물론, 자라나는 후세대에게까지 그 정신이 소중하게 계승되어야 할 인류사적인 가치로서 자리매김 될 역사적 사건이다.
함부로, 편의적으로, 그리고 눈앞의 어떤 정략에 따라 졸속으로 기념사업을 진행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개해온 기념사업도 점검해보고 중장기 계획을 입안하여 당면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지고 접근하기를 바란다. 민감한 시기에 무슨 의도로 일을 벌이는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울러 5.18을 어떤 상품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는 충실한 사전 조사와 협의를 통해 흠집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주관 단체나 기업체가 면밀한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 한다.
2006. 4. 25
5?18민주유공자 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민주유공자 구속부상자회
(재) 5.18기념재단
-----------
뭐, 재단에서 검토와 숙고를 거쳐 나왔을 성명서치고는 어째, 논리가 '거시기'하기는 하다. 이 대목이 내가 궁금한 대목이다. 왜 재단이하 5.18단체들은 이렇게 무리한 성명서를 굳이 내야만 했나? 내가 성명서 읽기라고 제목을 단 이유다.
먼저 성명서 제목을 보자. 이 제목은 '광주광역시'가 아닌 광주광역'시장'이다. 이 성명서가 광주시와 기획시대의 '영화제작 사업'에 대한 성명인가, 아니면 '제작발표'에 대한 성명인가? 이 둘은 같은가, 다른가? 왜 '광주광역시장'과 '(주)기획시대대표'가 아닐까? 혹시, '박광태'와 '유인택'이 아닐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까?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영화제작의 주체는 (주)기획시대라는 것이다. 광주시는 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행하는 로케이션제공, 영화촬영장 유치 등등의 말하자면 지극히 일상적인 지원조치에 불과하다(물론 박광태가 선거를 의식하지 않았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다).
계속 읽자. 앗, 이 부분.
"지난 2002년에도 광주광역시는 5.18영화제작 계획을 발표하였고 국제 시나리오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물론, 유관단체의 여론수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광주시 당국의 편협한 추진 방식으로 인해 그 계획이 파탄되기에 이른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나또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0억을 들여 5.18영화 국제시나리오 공모를 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당시 5.18재단에서 영상쪽 일을 도와주던 나는 영화제작계획이 전제되지 않는 시나리오 공모는 돈낭비라며 5.18재단의 반대논리에 의견을 보탰다(시나리오 수업시간의 기본이다. 시나리오와 희곡은 어떻게 다른가?) . 지당한 얘기다. '편협한 추진 방식으로'는 되는 일이 없지. 문화중심도시 사업만 봐도 그래!
계속 읽는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뭔가 저의를 가진 누군가의 정략에 이용된다면 그 순수성은 의심받는다. 이미 한번의 과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은 바 있는 영화제작에 대해서 왜 광주광역시 박광태 시장께서는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가." 나는 타고난 빠딱이다. 나는, 왜 이 성명서에서 '순수한 저의'를 읽지 못할까! 다시 반복하지만 영화제작의 주체는 (주)기획시대다! 광주시와 박광태가 아니고!!
계속, 읽는다.
"5.18은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특정인의 사리사욕에 휘둘려왔다.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관련 공직자와 지도자들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5.18기념사업은 광주시민의 참여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세계적인 민주인권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발돋움하는 데 제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지 않는가." 공직자와 지도자들만 제자리를 찾을 일은 아니다. 소위 5.18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다 갑자기 '광주시민의 참여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등장한다. 앗, 5.18은 5.18재단, 부상자, 유족회, 구속자 등등 당사자들만의 것 아니었나, 재단법인 5.18재단은 임원들 것이 아니었나? 이런 경우에도 '순수한 저의를 의심받는다'. 슬픈 현실이다.
광주시장을 씹겠다는 '순수한 저의'를 위한 논리가 무척 빈약함을 성명서 작성자도 느꼈나 보다.
다음을 읽는다.
"한편, (주) 기획시대에게도 한마디 고언을 드린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대중을 상대로 하므로 그 제작비 등을 고려할 때 장삿속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역사인 5.18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좀 더 충실하고 면밀한 판단과 준비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5.18을 영화화하겠다는 진정성이 다른 뜻으로 왜곡된다면 시민의 반응도 좋지 않을 것이며 영화제작에도 그리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심하다. "장삿솟"이라는 전문용어 등장! 업계의 예의가 있지, 심했다. 블록버스터와 산업을 싫어하는 우리들조차 통상 '상업성'이라는 고운 단어를 즐겨쓰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단어가 아니다. "좀 더 충실하고 면밀한 판단과 준비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라는 대목이다. 이 성명서 작성자는 분명 영화제작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과연 '장삿속'으로, 돈 100억원이나 들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충실하고 면밀하지 못했을 거라 판단하는 이 무지, 놀랍고, 안하무인이라 '판단한다'.
100억짜리 프로젝트 영화에 가해지는 기초적이고 뻔한 판단, 이것이 5.18단체들의 수준인가? 그냥 박광태 미워! 이게 솔직한 것 아닌가?
성명서의 대미, 우리의 주장.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5월 31일은 지방자치 선거일이다. 시장을 비롯하여 우리고장의 정치지도자들을 새로 선출하는 날이다. 반면 5.18민중항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는 물론, 자라나는 후세대에게까지 그 정신이 소중하게 계승되어야 할 인류사적인 가치로서 자리매김 될 역사적 사건이다.
함부로, 편의적으로, 그리고 눈앞의 어떤 정략에 따라 졸속으로 기념사업을 진행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개해온 기념사업도 점검해보고 중장기 계획을 입안하여 당면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지고 접근하기를 바란다. 민감한 시기에 무슨 의도로 일을 벌이는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울러 5.18을 어떤 상품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는 충실한 사전 조사와 협의를 통해 흠집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주관 단체나 기업체가 면밀한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 한다. "
5월 31일 투표하자는 선거캠페인인가? 왜 5.31 시장 뽑는 날하고 5.18이 같은 범주에서 비교되는 걸까. 고도의 상상력 필요. 왜?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제작의 주체는 (주)기획시대다. 5.18영화제작과 관련하여 광주시를 이렇게까지 비난해야할 근거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남의 돈 끌여들여 영화만드는 사람들은 대충대충 일하지 않기에, 충실한 사전조사 운운할 필요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협의'는 필요하겠지만(그리고 이 협의의 대상은 5.18블록버스터 영화만드는 경쟁자 5.18재단?!), 협의를 통해 흠집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억지스러워보인다.
도대체 이 성명서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5.18영화를 추진하고 있는 5.18재단에서 5.18영화제작의 선수를 뺏긴 것에 대한 화풀이인가? 아니면 광주시장후보인 박광태시장을 향한 흠집내기란 말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이 "민감한 시기에 무슨 의도로" 이런 말도 안되는 성명서를 발표한단 말인가?
사실, 나는 5.18재단이 만들던 기획시대가 만들던 블록버스터 5.18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나라 영화제작 단가가 많이 상승했지만 통상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기획시대의 100억원짜리나 5.18재단의 '맥심 200억 짜리 영화'는 엄청난 블록버스터임에 틀림없다. 100억원 짜리 영화가 수익을 내기 위해서 엄청난 관객이 들어야 한다. 나는 5.18영화가 이런 관객을 불러모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편이다. 혹,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 관객들의 수준을 고려한 스펙터틀(구경거리)한 영화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5.18이라는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즉, 5.18과 관련된 많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영화시작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시비와 구설수를 겪는 것 처럼말이다. (옛날 꽃잎처럼 광주가 모두 도와줘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영화다.) 여기에 나는 영남지역 관객들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기획시대의 5.18영화제작은 엄청난 모험이거나, 무모한 일이거나, 5.18에 대한 순수한 의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비판과 조언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의도가 불량해 보이지만 성명서를 통해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네 이 대목에서 '금자씨'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니나 잘하세요."
글의 처음에 등장한 신문기사처럼, 5.18재단도 5.18영화를 제작한다. 어디서들은 얘기로는 올해말까지 1억원의 현상금을 걸고 시나리오를 공모하고 있다고 했다. 모방송국의 PD, 소설가, 화가 등등이 자문위원으론가 참석해서 추진하고 있다고도 한다. 거두절미하고 이 성명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만 사업하기를 바랄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덧붙인다.
비디오플러스라는 기술잡지를 보는데, HD로 찍었다는 5.18다큐멘터리 제작후기가 실렸다. 아마 '기억을 기억하라'라는 제목일 꺼다. 8천만원 들였다는 말도 있고, 7천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적은 돈은 아니다. 친한 업계의 동료가 스탭으로 참여한다는 얘기도 들어서 작품이 몹시 궁금했다. 잡지에 제작후기도 실렸으니, 곧 제작발표회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작품의 제작발표회를 했다는 소식도, 계획도 듣지 못했다.
(물론 이 작품말고도 재단의 10년역사를 다룬다는 3천만원짜리 다큐 소식도 들었다. 이 작품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내가 재단의 사무처의 모인사에게 충고를 듣던 때에 이 작품을 70만원에 제작하고 있던 중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싸운 직후 나는 받았던 계약금 40만원을 돌려줬다. 나는 70만원짜리 '독립영화 따라지'다.)
어찌어찌해서 WMV로 되어있는 다큐를 건성건성 건너뛰며 보았다. 솔직히 훌륭하신 자문위원들의 포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한가지만 지적하자. 왜 이 작품을 HD로 만들었을까? 인터뷰 중심의 다큐라면 6mm로도 가능할텐데 말이다 (이런 경우를 우린 돈지랄이라고 하지. 우리같은 바닥에서 기는 독립영화패거리에겐 8천만원짜리 5.18다큐멘터리는 너무 황홀한 시추에이션이다. 슬퍼지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래서 나는 기획시대든, 5.18재단이든 누가 만들던 5.18영화는 실패할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윤상원열사의 경우처럼, 그러나 자신의 실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역사에 남는다.
5월이 왔다. 나는 2년전부터, 매월 5월이되면 5월기념행사를 6mm로 기록하는 일을 한다. 5.18은 영상으로 남겨진! 첫 항쟁이었음에도, 5.18영상에 대한 인문학적, 운동적인 관심은 저저하다. 안타깝다. 너무 안타까워, 문화연대의 5월행사평가사업에 빌붙어 200만원으로 거의 모든 5월기념행사를 담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이건 나의 변명이다. 나도 뭔가를 하긴한다네, 광고다.
아마,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혀지더라도 별다른 반응은 없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광주는 원래 논쟁이 없는 곳이닌까. 대신, 술자리에서 무수히 씹힐 것이다. 그래도 반응을 기다린다.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생물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니까!
2006. 5. 4 / 바람처럼_고광연
※ 2006. 5. 6 / 첫글을 읽어준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오타를 잡았음, 그러나 과연….
앗, 엉겁결에 그냥 눌러버렸다. 첫경험...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사무실 책상모습, c&c시리즈 팬이라 점심먹고 한판 돌리는 중,,,
들어가며
‘한국의 미디어운동, 환경이 매우 빨리(긍정적인 의미로) 변한다’는 미국의 미디어활동가 도로시 키드의 (네트워커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래, 참 많은 것이 변했지’라며 무릎을 쳤다. 그리고 ‘영상미디어센터’를 화두로 대전에서 첫 모임을 가진 ‘지역 미디어센터 네트워크’의 5년동안의 활동을 생각해보았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미디어센터, 그래서 미디어센터만 만들어진다면 부족함 없이 영상운동을 해보겠다던 시절로부터 120억원 짜리 미디어센터 들어서는 시대가 되었다.
글쓴이가 활동하고 있는 광주 또한 많은 변화를 겪은 후, 방송위원회의 시청자미디어센터 설립이라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를 위해 지역의 시민사회권은 ‘미디어주권네트워크’라는 연대조직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이 연대조직은 통합방송법 개정으로 확보된 퍼블릭 액세스권을 위한 연대조직 이었던 ‘시청협’의 경험 이후 미디어운동을 위한 지역의 시민사회권을 포괄하는 조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눈으로 확인되는 변화만큼, 우리 운동이 그동안의 변화된 정세를 반영하고 있을까? 이것은 분명 어려운 질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한 활동가 생각이다.
광주지역 언론․영상운동진영의 현황 개괄
그동안 지역 언론운동은 기존의 미디어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통해 건강한 미디어환경을 마련하는데 초첨이 맞추어져 있었다. 지역 시민사회권에서 자생적인 대안미디어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었지만(시민의 소리, 다른신문, 오마이뉴스 등) 그 결합수준이 ‘단순 지지’의 수준에 불과했었다. 물론 미디어감시 운동이 다른 운동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여성민우회 등)은 고무적인 흐름이다. 또하나 퍼블릭엑세스 등 대안미디어를 창출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 운동이 단절적이었거나(시청협의 경우) 장기적인 전망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VJ교육 등) 이마저도 운동진영의 역량약화(언개련의 해산, 민언련의 침묵)로 인해 계속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광주지역의 영화운동 진영은 관객운동(시네마떼끄)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디어리터러시교육운동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발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광주지역의 영상운동(독립영화, 단편영화 제작자들 포함)진영은 분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전망의 공유부재와 리더십있는 작품의 부재, 영상운동에 대한 인식의 부재 등이 주원인이다. 특히 광주국제영화제, 광주영상예술센터 등의 대규모 이벤트성 영상정책에 의해 역량의 분산이 심각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안정적인 기반하에서 작품제작을 통한 운동의 경험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퍼블릭액세스 등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지역시민사회권과의 공동 대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운동을 위한 활동가들의 움직임
2002년 광주에서 퍼블릭액세스와 미디어교육을 위한 공공시설로서의 미디어센터에 대한 확신을 갖은 ‘광주영상미디어센터’가 조직되었다. 주로 영화운동진영에 의해 주도된 ‘광주영상미디어센터’는 2002년 최초의 공공 영상미디어센터인 ‘미디액트’의 개소로부터 자극받아 지역에 영상미디어센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영상운동을 미디어운동의 차원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독립미디어센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광주(독립)미디어센터'는 이후 '전국지역미디어센터 네트워크'와 함께 미디어센터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환기, 정책생산 및 개입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지역차원에서는 미디어교육, 영상활동가들의 조직화를 벌이게 된다. 초기 영화운동 지향적이었던 이들의 입장은 특히, 퍼블릭액세스 사업을 통해 영화운동을 미디어운동속에서 사고하는 방향으로 변홰왔다.
광주지역 퍼블릭액세스 활성화를 위한 조직이었던 '시청협'이 해산하고 난 후 '시청협'을 주도했던 광주민언련의 ‘VJ분과’ 회원들의 활동도 주요한 움직임이었다. 광주민언련의 VJ교실 출신인 이들은 ‘저널리스트적 시각’에 입각한 영상미디어운동을 지향했다. 광주민언련의 영상관련 사업을 전담(VJ 교실, 청소년미디어학교 등) 하였던 이들은 민언련내부의 사정으로 2004년초 ‘열린미디어연대’를 조직하고 민언련 VJ분과와 공동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장과 밀착된 미디어운동의 모범을 보인 광주․전남지역의 영상활동가조직으로 ‘호남노동미디어활동단 - 필’이라는 현장조직이 있다.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영상미디어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는데 ‘필’은 지역의 대기업을 중심 조직되어 있으며 노동현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필’외에 노동영상 활동가들로는 민주노총 등 아직 조직화되지 않는 현장의 영상활동가들이 존재한다.
활동가들의 새로운 조직 - 광주미디어행동연대
2004년 방송위원회의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사업이 가시화되고 다음 미디어센터의 건립지역으로 광주가 거론되면서 활동가를 주측으로 방송위원회 시청자미디어센터에 대한 공론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미디어운동의 활동력을 한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대책이 모색되었다.
■ 2004년 12월 15일 미디어행동연대 발기인모임
광주지역에서 영상활동가로 분류될 수 있는 세력들은 그 활동배경의 다름과 공동활동 경험의 부재로 조직적인 연대를 이뤄내지 못했었다. 광주만의 특징은 아니겠으나 특유의 패거리주의가 지역 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 조직될 활동가 조직은 이러한 부정적 요소를 해소할 조직운영의 원칙을 합의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는 사안에 시급함에 쫓겨 조직운영의 원칙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결코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조직은 활동가 조직의 연대조직이 아닌 ‘새로운 조직으로의 재조직화’를 택하게 되었다. 기왕에 활동가조직에 소속되어있는 활동가외에 개인활동가를 배려하는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또한 새조직은 장기적인 전망을 갖을 것을 목표로 했다. 당면한 방송위원회의 시청자미디어센터 사업에 공공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미디어센터 설립 이후에도 견제와 개입을 통해 미디어센터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창작을 통한 미디어활동으로 궁극적으로는 ‘퍼블릭액세스 방송국(커뮤니티 TV방송국)’을 목표로 상정했다.
이는 지역의 시민사회권의 미디어운동에 대한 이해와 개입에 대한 평가를 통해 활동가들이 의제를 제안하고 추동해나가자는 의미였다.
광주지역 영상활동가들을 망라한 새로운 조직의 명칭은 '광주․전남미디어행동연대(미디어행동)'이고 2005년 4월중 출범예정이다.
지역미디어운동의 새로운 전개 - 광주전남미디어주권네트워크
미디어활동가들이 시청자미디어센터로 촉발된 지역 미디어운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지역 시민사회권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시청협을 주도했던 광주민언련이 조직 재정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논의를 주도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광주영상미디어센터를 비롯한 미디어활동가들은 지역 시민사회권에서 아직은 ‘시민권’을 얻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무작정 민언련을 기다리고 힜던 형국이었다. 상황의 변화는 조금 엉뚱한 곳에서부터 왔다.
부산 시청자미디어센터 건립을 위해 방송위원회가 구성했던 추진위원회의 위원 한분으로부터 간담회 제안이 왔었다. 민언련, 광주영상미디어센터, 여성민우회, 문화연대 등이 참여했던 이 간담회에서 방송위원회의 시청자미디어센터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었다.
그후 시청자단체, 문화운동단체, 영상활동가단체 등이 참여한 연대조직 준비모임이 진행되었다. 가칭 ‘시청자주권네트워크’라는 연대조직이 담아야 할 내용과 동의단체의 확대 등을 위하여 내부워크샵, 초청강연 등을 거치며 2005년 4월 ‘광주․전남미디어주권네트워크(이하, 미디어주권네트워크)’라는 명칭으로 출범을 앞두고 있다.
‘시청자주권’에서 ‘미디어주권’으로의 명칭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연대조직은 방송위원회의 시청자미디어센터만을 사업대상으로 하는 조직이 아니다. 지리한 내부 논의를 통해 비록 방송위원회의 시청자미디어센터 건립이 연대조직의 필요성을 촉발시키기는 했지만, 미디어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고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연대조직 운영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시청자미디어센터 대응사업에 전념하자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전적으로 시민사회권의 역량에 대한 판단의 문제지 입장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미디어운동의 양날개, 미디어행동과 미디어주권네트워크
기나긴 모색의 시간을 보낸 후 광주지역의 영상미디어운동은 활동가들의 실천조직과 시민사회권의 연대조직을 무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미디어운동은 과거처럼 수용자중심의 운동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생산하고 소통시키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전환해야 한다. 퍼블릭액세스로 표현되는 이러한 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떠 안아 지역 미디어민주주의 뿐 아니라 지역을 민주적으로 재편하겠다는 보다 큰 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5년여의 시간이 흘렀건만 미디어센터라는 꿈은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꿈속에 안주하지 말고 이를 인간해방의 무기로 삼아야 한다.
목표는 분명하다, 조직이라는 무기도 준비되었다. 영원한 청춘의 도시, 혁명광주에서 꿈에 동참하시라!
2005년
참, 강은일의 오래된 미래라는 음반은 개인적으로 해금을 좋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