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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제 2막을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로 열어 나가자!
임천용
민노당을 통해 10년 넘게 진행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파산이 눈앞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민주노총의 결의로 정치세력화가 시작되었지만, 민주노총이 만든 정당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제1막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개량주의, 의회주의 정당의 불가피한 경로다.
지난해 민노당이 국참당, 노심조와 합당하고 총선 비례후보 선출과정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더해져서 몰락 사태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통진당의 부르주아 정당화가 이번 사태에 의해 가속화되지 않았다면, 대선에서 야권연대가 이어지고 그래서 ‘만약’ 민주당과 공동정부를 구성한다면 거기에서 더 큰 파산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통진당 사태의 마무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만약’의 영역은 가까운 미래의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량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국가권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동자계급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의회주의 정당들이 나아가는 기본 발전경로의 종착점이다.
의회주의에 결박된 통진당, 진보신당은 자본주의 체제의 개선을 목표로 자본가계급 내 한 분파와의 연대를 추구해왔다. 이들 정당들이 노동자 투쟁에서 권고안이라는 형태로 자본가계급과 타협을 권유하는 것은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한 이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민주당과 함께하는 야권연대를 옹호하고 실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을 자본가 정당의 2중대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는 것이야말로 사활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요즘 통진당 사태로부터 “진보정당”의 몰락을 설명할 때, 패권주의니 비민주주적의니 하는 형식들을 가지고 자본주의 체제의 보수, 수선에 집착하는 의회주의 정당의 본질을 숨겨버린다면 이번 사태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단지 또 다른 의회주의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공염불을 외치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래되기는 했지만 민주노총을 매개로 시작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운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정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개량주의 정치세력화의 시작 속에서 이미 노동자계급 배신의 씨앗이 발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선거를 통한 집권이라는 개량주의의 꽃이 피기도 전에 몰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선언과 국민승리 21 시기
김영삼 정권 당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근로자파견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등의 노동악법에 맞선 민주노총의 96-97년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노동자 국회의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동자 정치의 진면목이었던 무기한 총파업과 거리에서의 투쟁은 96-97년 총파업 당시 수요파업으로 사그라졌고, 노동악법들은 98년에 다시 살아나기에 이르렀다. 총파업을 통한 노동자 정치가 왜곡되고 파괴되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정치투쟁은 정당이 담당한다는 의회주의 양날개론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될 수가 없다.
97년 2월 민주노총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98년 지방선거, 98-99년 당건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참여 등의 일정들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이 주축이 되어 민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민승리 21을 결성하여 권영길을 97년 대선후보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전국연합은 대선 한 달을 남겨놓고 정권교체, 민주정부 수립을 구실로 사실상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연합에는 이미 혁명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노회찬 등이 있었는데, 이는 진보정당운동의 주요한 이론적 대변자들이었고 선구자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진보정당” 운동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나아가버렸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론을 주창하던 세력들과 심상정 등의 중앙파에 의해 노동운동을 계급협조주의로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98년 2월에는 정리해고 도입을 노사정 합의로 진행했다. 당시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물리적 투쟁이 아닌 대타협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다고 고백했다. 노사협조주의로 점철된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세력화 운동에 반대해서 전투파들은 97년 전국현장조직 대표자회의를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투파들은 노동조합 장악에도 불구하고 국민파, 중앙파와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더해져 세력이 위축되면서 2004년에 해소했다. 노동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전투적 노동운동 진영은 스스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규모 써클로 머물러 있었고 전투적 노동자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끌 수 없었다.
이처럼 국민승리 21이라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첫 단추는 개량주의자들,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자들, 노사협조주의를 주창한 노동조합 관료들이 끼웠다. 이렇게 시작된 정치세력화의 15년 결과가 지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치세력화의 주도자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이 올곧게 표출될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당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보다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정부” 10년의 시기에 노동운동의 전투적 부위는 거의 전멸하였고, 노사협조주의적인 노조관료들에 의해 현장은 장악되어 가고 있었다. 현장이 망가지는 것과 동시에 “진보정당”의 노동자 당원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격은 더욱더 우향우되어 갔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심지어 민노당을 통한 정치운동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정당에 가입하는 편을 택하기도 했다. 2012년 3월 5일에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노총 조합원 1000명의 입당원서와 함께 1만5천명의 지지서명을 가지고 민주당에 입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 분당
98년 6·4 지방선거에서 국민승리 21은 기초단체장 3명, 광역의원 2명, 기초의원 17명을 당선시킴으로써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을 창당하는 바탕이 되었다. 선거에서 비판적 지지만 하면 되었던 민족주의 세력들, 1국 1당을 원칙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들은 2002년을 경과하면서 “전술적으로” 민노당에 대거 입당하였다. 이로써 언론에 오르내리는 방식으로 지구당 장악과 당권 장악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내내 정리해고제, 비정규직법, 공기업 구조조정, 노동탄압 공격을 당했다. 이에 맞서 투쟁을 전개한 한국통신 비정규직, 발전, 두산중공업,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등 수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하거나 분신으로 항거해야만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이야기는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민주정부”때 시작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의 심화, 노동조건의 악화는 노동조합 조직률을 떨어뜨렸고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총선에서 민노당은 10석을 차지하였다. 노무현 정권에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열망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민노당은 열우당의 2중대 역할로 한정함으로써 2007년 대선에서 창조한국당보다 못한 5위를 차지함으로써 패배하고 이듬해 총선에서 분당이라는 변수가 작용하지만 의석수가 5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2004년에 비해 2012년 총선에서의 13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의 연합으로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민노당이 열우당이나 민주당의 2중대가 된 것이 선거 패배의 원인이다. 특히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70만 표(3%)는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 예측 속에 나왔기 때문에 2002년 노무현과 이회창의 박빙 때 나왔던 95만 표에 비해 훨씬 적은 득표율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 내에서는 당 대표인 심상정과 당을 실제 장악하고 있는 민족주의 세력 사이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민노당 사무부총장이 핵심당직자와 당원명부를 북한에 넘겨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심상정 대표를 위시한 세력들은 종북 노선 청산을 주장하면서 2008년 2월 민노당 당대회에서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을 상정했으나 투표에 의해 상정 자체가 무산되었다. 이로써 민노당 일부는 분당해서 진보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종북 노선 청산 요구는 사실상 민노당을 탈당하기 위한 노회찬, 심상정 등 핵심 인사들의 선동 구호였다. 이 요구 때문에 노심조가 지난해 말 진보신당 탈당할 때, 당 유지를 원하는 진보신당 당원들로부터 민노당이 종북 문제 해결되지 않았는데 다시 투항한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진보정당”들
민노당을 통한 정치세력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자 투쟁에 대해 상급노조는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중재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2000년대 내내 그랬다. 특히 투쟁사업장들은 노사정위원회 입성을 위한 방해꾼으로 여겨졌다. 2005년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에는 “과격한 투쟁은 비판만 받고 쟁취한 것이 없다”며 노사정위원회 복귀 시도를 지속적으로 진행했고 이에 맞선 전투적 노동자들이 단상점거투쟁을 전개하면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이러한 노동조합 운동의 노골적인 노사, 노정 타협주의 흐름 속에서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4월에 금속노조 관료들이 3년째 진행되고 있던 하이닉스 비정규직 투쟁을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대신 노동조합 깃발을 내리면서 보상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합의에 대해 반대한 동지들이 대중적인 반대 흐름을 조직해 나가기도 했었다.
지금의 장기투쟁사업장들이 노동조합으로부터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이유는 자본의 힘이 노동계급을 완전히 압도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중재 같은 것조차도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 자신의 힘을 동원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내내 진행되었던 운동의 우경화 흐름은 이명박 정권 들어와서 더욱 더 악화되었다. 상급노조뿐만 아니라 “진보정당”들은 노동과 자본의 투쟁에 있어서 독보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KEC 공장점거 파업과 현대차 비정규직 공장점거 파업 해제를 위한 중재를 진행함으로써 파업을 최종적으로 파괴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장점거를 푸는 순간 자본측의 성실교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징계와 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희망버스 때 한진 중공업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국회 환노위 권고안은 대중적 투쟁을 파괴하는 데 교과서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더 이상 끌기 싫어하는 투쟁을 정치권에서 권고의 형태로 정리시켜 줌으로써 투쟁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진보정당” 정치인들은 정치적 해결 운운하며 성과로 챙긴다. 이명박 정권 내내 노동조합과 정당의 분업체계가 노동자 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작동했다.
반한나라당, 반이명박을 위한 야권연대는 야당들의 이러한 공동의 행동들로부터 무르익었다. 노동자 집회에 공공연히 참여해서 발언하는 민주당이 이제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민주당이 노동계급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 더 나쁜 자본가 정당에 비해서는 친구라는 인식이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에 의해 심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사실상 민주당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권에서 진행된 “진보정당”들의 야권여대의 최종적 결말이다. 그래서 지난해 내내 전개된 민노당, 국참당, 진보신당 사이에서 진행된 통합의 방식과 대상에 대한 논쟁은 각 당의 대의원대회 결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진행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야권연대를 둘러싼 각 세력 사이의 이전투구에 불과했다. 정치적 내용과 입장을 가진 투쟁이었다면 명료하게 진행되었을 것이지만, 명망가들 중심의 이합집산에 머물렀기 때문에 매우 소란스럽게 진행된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국참당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본질적이지 않았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조차도 반대하는 흉내만 내면서 마지못해 따라가는 형식을 취했다. 민노당이 노동자들과 적대전선을 형성했던 열우당 후신인 국참당과 함께할 만큼 노동계급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할 따름이었다. 통합진보당은 노심조 세력과 민노당, 국참당이 함께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진보신당은 탈당한 노심조 대신에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과 함께 했지만 4.11총선 결과 국회의원 한 석도 얻을 수 없었다.
통진당 사태 - 의회주의 진보정당 운동의 파산
통진당 사태의 핵심은 의회주의 “진보정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처참한 몰골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통진당은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하위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유지시켜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100년 역사 동안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한국에서는 민노당 이후 10여년의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구에서처럼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거나 자본가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면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의 폭과 깊이는 훨씬 넓고 깊어질 것이다. 통진당 결성 과정과 민주노총의 통진당 배타적 지지로부터 발생한 분쟁들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회주의, 개량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인류에 대한 학살이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 제국주의 시대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이냐 혁명이냐의 문제가 곧바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속에서 개량주의 정당들은 개량의 축적이 사회주의를 앞당긴다면서 노골적으로 자본가들과 협력한 대가로 떡고물을 받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개량주의 정당의 발전 과정은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노골적인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귀결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었다.
통진당 결성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민노당 강령에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조차도 삭제했다. 개량주의적, 의회주의적 수사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운 듯이 빼버린 것이다. 그래서 강령적으로는 부르주아 정당의 충실한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통진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신당의 경우에도 빠르든 늦든 불가피하게 나타날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진보신당은 선거 시기에 이미 야권연대를 진행한 바 있고, 지난해 말 진보신당 당 대표 출마 시 홍세화 후보가 야권연대 지속 의지를 밝혔고, 4.11 총선에서 통진당과 민주당에게 야권연대에 끼워줄 것을 애원하기도 했었다. 진보신당에게 있어서 통진당이 미끄러진 길에서 발을 빼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야권연대로 표현되는 자본가정당과의 단절이다.
통진당과 진보신당의 강령은 본질상 자본주의의 개선과 수리에 있다. 고통이 덜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노선이다. 이러한 노선은 자본가계급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협조와 화해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선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수리, 개선하는 것이다. 억압기구에 대한 해체와 폐지가 아니라 적당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일례로 경찰, 검찰과 같은 억압 기구들의 해체와 자본가 군대의 해체를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요구들은 통진당과 진보신당의 개량주의, 의회주의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도로 민노당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자!
통진당도 진보신당도 아니라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하는가의 문제가 곧바로 제기된다. 국민승리 21부터 진행된 90년대 후반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에 사회주의 진영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운동 세력 자체가 미약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개량주의 세력과 하나의 당에서 함께할 수 없었다. 전투적 노동자 운동진영이 민주노총 내 노사협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당 운동에 함께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취약한 사회주의 세력은 둘째 치더라도 당시에도 사회주의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전과 선동은 비밀리에 주로 소규모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써클적 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물론 국가보안법에 의한 사회주의자 탄압과 기소,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노동계급 운동의 후퇴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운동의 파산에 직면한 사회주의 세력들의 자기반성인 동시에 긴급한 대응이기도 하다.
통진당 사태는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빠르든 늦든 민노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운동의 파산의 실례로 인식하게끔 작용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건강한 세력이 통진당에 함께해서 바꿔나가자고 하고, 어떤 이들은 노동에서 탈피해서 국민정당화로 나가자고 한다. 이러한 훈수에 대해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의 대답은 노동자들이 통진당과 같은 의회주의 정당으로부터 단절하고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정치세력화에 나서도록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통진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배신한 사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열망이 비아냥과 환멸로 돌아서게 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도로 민노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도로 민노당은 노동자들에게 비극 대신에 소극을 선사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문제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새롭게 건설될 노동자 정당은 의회주의, 개량주의에 기반한 “진보정당”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정당 이외에 다른 것 일 수 없다. 한 사업장의 노동자 투쟁조차도 전제 자본가계급에 맞선 노동자계급 투쟁을 조직하고, 의회에서의 잡담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을 선동하고 투쟁을 조직할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이 사활적인 과제로 다가온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영원불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발전법칙을 수용한다면, ‘진보’는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과정에 가정 적합한 용어다. 사회체제의 변동은 언제나 치열한 계급투쟁을 동반했고, 점진적 변화의 합에 의한 변동 사례는 역사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쌍용차와 같은 노동계급의 투쟁들, 장기투쟁 사업장과 비정규직 투쟁들은 자본가계급과의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어내고 있는 폭력적인 계급대립인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각각의 투쟁들에 대해 청와대와 검찰, 국정원 등 자본가 기구들을 동원해서 계급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이에 맞선 노동자들은 자본가 야당과 “진보정당”들에 의해 타협을 설교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다면 노동자 투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입장을 대변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적 투쟁 속에서 건설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서 작지만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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