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편린

분류없음 2016/10/12 00:31

 

캐나다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Day 연휴가 끝났다. 긴 주말은 나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곤혹이자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법정공휴일이 사이에 끼면 돈을 배로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힘들다. 나는 이제 얼마만큼 적응이 되어 괜찮다. 아니 괜찮아야 한다. 무엇보다 파트너와 시간을 보낼 수 없어 미안하고 섭섭하다.

 

 

주말 정규시프트 하는 날. 어슴프레 해거름 무렵, 한 명의 젊은 남성 클라이언트가 백야드에 쪼그리고 앉아 무얼 하고 있다. 번쩍번쩍 라이터 불빛이 간혹가다 보인다. 주말에 일하는 일터 한 곳엔 실내를 제외하고 빌딩 주변 전체에 9대의 감시카메라가 있다. 주중에 일하는 또다른 일터 한 곳은 건물 외곽은 물론 실내 복도와 계단에까지 총 25대의 감시카메라가 있다. 어쨌든 감시카메라 한 대를 통해 그 남자의 행동을 한참동안 관찰했다. 아무래도 그냥 둘 수가 없다. 터벅터벅 담배를 피러 간 것처럼 접근했다.

 

 

- 안녕, 날씨 좋지? 근데 약간 쌀쌀하다.

= 응.

- 뭐해? 재미난 일 있어?

= ...

 

 

말없이 계속 라이터를 켰다껐다 반복.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라이터로 개미 같은 곤충, 벌레를 태우고 있다.

 

 

- 쟤네들 불쌍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뜨거울 것 같고 아플 것 같아.

= ...

- ...

= 그러네. 뜨겁겠다. 그만 할께. 

- 잘 생각했어. 야구 보는 게 어때? 지금 와일드카드 결정전 중계하고 있어. 다들 그거보고 있는데.

= 그래? 그럼 나도 야구 볼래. 

- 근데 너 그거 알어? 백야드에 농구할 때 말곤 여기에 와서 이러고 있으면 별로 안 좋아. 이웃들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어. 나는 너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걸 바라지 않아.

= 어. 나는 몰랐어. 

- 그래. 이제 알았으니까 괜찮아.

 

 

다행히 공감능력이 있는 친구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너무 심심했던 거다. 하필이면 왜 그런 방법을 택했는지 모르겠는데 불현듯 내 인생을 거쳐간 남자중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떠올랐다.

 

 

때는 꽃개가 대학교 일학년이던 어느 해. 엄마의 성화로 남자중학생 두 명의 과외를 시작했다. 엄마는 아예 지하실 내 방을 공부방으로 차려놓으셨다. 엄마가 알아서 학생을 물어 (?) 오셨다. 덕분에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저녁엔 꼼짝없이 집에 일찍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쳐야했고 대학생다운 (?) 대학생활에도 제동이 걸렸다.

 

 

정말 지지리 공부못하는 아이들이었는데 몇 번 만나보니 공부에 재미를 전혀 들이지 못한 그런 아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 오늘의 주인공께서는 두어 번 영어에 관련된 일상 이야기를 해줬더니 제법 관심을 보였다. 가령 당시에 유행하던 편의점 중에 "Buy The Way" 라는 게 있었다. 영어 숙어 "by the way" 와 발음이 같은데 뜻은 같을까 다를까 숙제를 내줬더니 열심히 조사해서 알아왔다. 이 놈 봐라, 공부를 재미있게 하면 좀 할 것도 같은데? 어느날 이 녀석이 라이터를 분해해서 머리 부분만 들고 왔는데 큼지막한 개미 대여섯 마리도 같이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개미를 올려놓고 라이터로 그 개미를 괴롭히는 거다. 당연히 나는 질색팔색을 하고 당장 개미들 마당에 풀어주고 오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 녀석에게 나는 그저 공부가르치는 여자. "재밌잖아요. 킁킁." 계속 지진다. 개미들이 다 죽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첫 월급을 탄 날. 이 두 녀석들을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우선 당시에 유행하던 패밀리레스토랑 코코스에 들러 밥을 먹었다. 이 녀석들은 스테이크를 먹겠다고 했는데 비후까스가 젤로 맛있는 스테이크라고 꼬셔서 간신히 그걸 먹였다. 응, 아닌데. 이상하다. 아니야 니들 입맛이 이상한거야.

 

 

밥을 먹고 이 두 놈을 탁구장에 데리고 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두 놈은 의기양양했다. 그래봐야 여자인테 탁구는 좀 칠 줄 아나. 선생님 우리 내기해요. 그게 무슨 내기할까. 저희들이 이기면 수요일 수업은 한시간 짧게 끝내주시고 엄마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래 그러자, 근데 선생님이 이기면 너희들 내가 하라는대로 다 해야돼. 알겠어? 흐흐하하, 좋아요. 자, 너네 둘이 복식해. 선생님은 혼자 단식할께. 에이, 그러면 선생님 질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저희들은 좋아요.

 

 

결과는?

 

이 두 놈을 아예 싹 발라버렸다. 스매싱으로 얼굴에 몇 번 맞추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공을 날려 정신없이 공만 주으러 다니게 만들었다. 개미를 불태운 그 녀석이 복식이라서 안되는 것 같다고 일대일로 붙자고 하길래 그래, 그러자. 역시 싹 발라버렸다. 두어 시간 탁구장에 땀을 빼고 나오면서 이놈들아 선생님 옛날에 탁구선수였어. 몰랐지? 잔뜩 풀이 죽은 두 놈이 왜 말을 미리 안했냐고 사기라고 벙벙 뛰었다. 니네가 안 물어봤잖아. 그럼 다른 운동으로 해요. 뭘로 할까?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철봉에 매달리기? 야구연습장가서 볼치기? 한참 생각하던 그 놈이 볼링으로 하자고 했다. 그래 좋아. 근데 그건 다음달에 하자. 물론 다음 달 볼링경기에서도 당연히 내가 이겼다.  

 

 

그 날 뒤로 그 두 놈들, 특히 개미를 불태운 그 녀석의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무슨 사부님 따르듯이 얌전해졌고 벌레를 가져와 면전에서 태우는 그런 일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숙제를 안해와서 밤 열두 시까지 붙들어잡고 있었더니 울면서 엄마한테 이를거예요... 너네 엄마들한테 우리 엄마가 이미 전화하셨어. 걱정하지 말고 숙제 마치고 가. 아니면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선생님은 이층에 가서 잘 거니까. 그리고 다음부터 숙제안해 올거면 도시락 싸가지고 와. 나는 올라가서 먹으면 되지만 니네들은 배고프잖아.

 

 

이 때까지만 해도 애들을 못살게 굴면 이 녀석들의 엄마들이 당장 과외를 때려치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애들을 데리고 시내에 나가 밥도 사주고 운동도 하고 숙제도 내주고 숙제안하면 붙들어잡고 공부를 시키니 엄마들 입장에선 꽃개가 자못 환상적인 (?) 과외 선생님이었던 것. 동네에 평판이 좋게 (?) 돌았다. 엄마는 한 명의 남자아이를 더 물어오셨고 (?) 세 명의 수업을 하다가 그해 말에 그 과외 아르바이트를 때려쳤다. 집에 진득히 눌러앉아 그런 일을 하기엔 꽃개의 혈기가 너무 왕성했고 예의 역마살도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기억은 이 정도인것 같은데 장면들이 모두 흐릿흐릿하다. 개미를 불태운 그 녀석은 이년 뒤 과학고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나머지 두 녀석은 어찌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력이 감퇴했나 보다. 그러나 개미를 붙태우던 그 아이의 천진난만한 (그러나 잔인한) 얼굴만큼은 선연하다. (꽃개도 나중에 그런 장난을 쳤던 것 같기도 하다.)

 

 

클라이언트의 그 모습과 중학생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생각이 쓸데없이 번져 아렌트 (Arendt) 의 악의 평범함 (the Banality of Evil) 까지 되짚었다. 아무 생각없이 하는 행동들, 아무런 연민없이 하는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동반할는지 인간들은 알긴 아는 걸까? 정신질환이 있으면 익스큐즈라도 되는데 "지극히도 정상적인" 노말한 사람들은 어떻게 변명해야 하는 걸까?

 

 

 

 

2016/10/12 00:31 2016/10/1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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